1. 무와 더불어 사는 우리 2. 무는 어떻게 논의되었나? 1) 서구사상의 무 2) 인도사상의 무 3) 중국사상의 무 3. 무는 어떻게 조성되는가? 4. 무는 어떻게 분류되는가? 1) 세계 내의 무 (1) 시간 속의 무 (2) 사유 속의 무 2) 세계 밖의 무 3) 세계 밑의 무 5. 종교적 무 1) 절대무의 자각과 논리 2) 절대무의 윤리와 종교
1. 무와 더불어 사는 우리
무(無)란 무엇인가?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다. 우리의 언어가 마치 그림이 사물을 모사하듯이 대상과 일대일 대응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할 경우, ‘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포함하여 무에 대한 그 어떠한 논의도 무의미한 작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무’라는 말은 지시할 그 어떤 대상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철학적 문헌에서 우리는 무와 관계된 다양한 표현을 접한다. ‘무에서 유가 발생한다’거나 ‘무가 생산된다’는 표현은 물론이고 심지어 ‘인간은 무를 분비한다’거나 ‘무가 무화한다’는 시적인 표현까지 눈에 띤다. 모사적(模寫的) 언어관에서 벗어날 경우 우리는 논리적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에 대해 자유로운 논의를 벌일 수 있을 것이다.
철학적 논의의 장(場)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우리는 무를 함의(含意)하는 다양한 표현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책상 위에는 컵이 없다’, ‘그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등과 같은 표현에 등장하는 ‘없음(無)’이라는 단어는 물론이고, ‘고래는 어류가 아니다’, ‘찔레꽃은 붉은 색이 아니다’라는 부정표현에서 쓰이는 ‘아님(非)’이라는 단어에도 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고래에는 어류라는 일반자(universal)가 없으며 찔레꽃에는 붉음이라는 일반자가 없다는 식으로 ‘아님(非)’은 ‘없음(無)’으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부정적 계사(copula)가 쓰여진 표현 이외에도 ‘욕심을 버린다’, ‘방안을 깨끗이 치운다’는 문장에 쓰여진 ‘버린다’와 ‘치운다’는 동사는 욕심을 없애고, 쓰레기를 없앤다는 의미이기에 역시 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내가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시계를 바라보는 순간에 ‘벽에 걸린 그림의 모습’과 ‘그림을 바라보는 행위’ 모두 없어져 버린다. 즉, 우리의 주의력이 이동함에 따라 이전에 주시하던 사물은 무화(無化)된다. 또, 팔짱을 낀 손을 풀 때건, 눈을 감을 때건, 읽고 있던 책을 덮을 때건, 손가락을 재빠르게 이동하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때건 우리는 이전의 행동을 무화하고 다음의 행동으로 돌입하게 된다.
나뭇잎이 가을바람에 흔들려 떨어질 때, 가지 끝에 매달렸던 나뭇잎의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지난 봄에 만발했던 붉은 진달래는 계절의 변화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모두 무화된 것이다. 오디오에서는 매 순간의 곡조를 무화하며 새로운 곡조를 토해낸다.
또 무는 철학과 종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와 가까웠던 사람이 이제는 죽어 사라지고 말았다. 즉, 존재의 세계에서 무화된 것이다. 타인의 죽음은 나를 슬프게 하고, 언젠가 닥칠 나의 죽음은 나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여기서 무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우리를 엄습한다. 이러한 무는 우리에게 경이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태어나기 이전에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니면 아예 없었을까? 죽음 이후에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세상이 생기기 이전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째서 이 모든 것은 없지 않고 있는 것일까? 무는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철학적 의문에 몰두하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렇게 무는 우리의 말이나 행동, 철학적 종교적 상념, 이 세상의 풍경 모두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무와 더불어 살아간다.
2. 무는 어떻게 논의되었나?
1) 서구사상의 무
고대 그리스 엘레아 학파의 시조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일체는 오직 존재로 충만되어 있다고 선언하였다.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일체에서 무의 영역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런 조망은 사유와 존재를 동일시한 그의 세계관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사유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사유이다. 그리고 ‘무엇’이란 존재, 즉 유(有)이다. 따라서 일체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사유의 영역에는 무가 개입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선언 이래 서구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무에 대해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무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해 낸 신이란 무를 갖지 않은 절대적 유라고 규정했던 중세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완전성의 결여라는 점에서 무란 원죄의 개념과 관계된다고 보았기에 기독교적 세계관 하에서 살아가던 중세의 서구인들에게 무란 공포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무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기피해 왔던 서구철학사에서 우리는 가끔 무에 대해 적극적 가치를 부여한 사상가, 종교가를 만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이다. 에크하르트의 부정신학에서는 우리가 신과 일치할 수 있는 길로 무심(無心: disinterest)의 길을 제시한다. 무심이란 애착이나 슬픔, 명예나 비방에 흔들리지 않는 절대무(nothingness)의 마음으로, 전통적 기독교에서 지고의 가치로 간주하던 사랑보다 이전의 것이라고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무심의 자리에서 신은 인간에게 그 본질적 모습을 그대로 내어준다. 무심에서 인간은 신성(神性: Godhead)과 만나는 것이다. 신성이란 신의 본성을 의미하며, 신의 창조주로서의 존재방식은 물론 사랑이란 존재방식 등 모든 것을 초월한 절대무(絶對無: nothingness)의 자리이다. 그리고 신이 자신의 모습을 부여하여 인간을 창조한다고 말할 때, 그런 신의 모습에는 이런 절대무의 신성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 자신의 영혼 내부에서 일상적인 자아의 자기중심적 존재방식이 깨질 때 인간은 신의 본질인 신성에 이르게 되고 신과 하나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의 자리, 절대무의 자리에 설 때 인간은 자유로운 참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西谷啓治, 『宗敎とはなにか』) 여기서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무심으로서의 절대무, 신성으로서의 절대무는 감성적 무, 종교적 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헤겔(Hegel)에 이르러 비로소 무에 대한 체계적 논의가 시작된다. 헤겔은 변화를 유(有)와 무(無)의 변증법적 종합에 의해 설명한다.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의 말과 같이 만물은 유전한다. 단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다. 이러한 만물의 변화는 무에서 유로 진행되기도 하고 유에서 무로 진행되기도 한다. 우리는 무에서 유로 진행되는 변화를 발생이라고 부르고, 유에서 무로 진행되는 변화를 소멸이라고 부른다. 유와 무가 두 계기로 작용하여 발생하고 소멸하는 생성(Becoming)의 세계가 전개된다. 헤겔이 생성의 한 계기로 간주하는 무란, 그가 변증법적 구도 하에 분석하고 있는 다른 모든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절대정신을 향한 변증법적 운동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기능할 뿐이었다. 그러나 ‘순수한 무는 순수한 존재와 같다’는 언명에서 우리는 유무의 대립을 떠난 무, 즉 절대무에 대한 헤겔의 직관을 감지할 수 있다.
서구철학사에서 무의 문제가 전면에 부각된 것은 실존주의 철학에 이르러서이다. 하이데거(Heidegger)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과 죽은 이후는 무라는 전제 위에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하이데거의 초기저작에서 무는 인간의 죽음과 관계된 개념으로 우리는 불안을 통해 그런 무와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후기저작에서 하이데거는 무에 대해 새로운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무는 존재를 은폐하는 작용과 함께 존재를 드러내는 작용을 한다. 즉, 존재를 망각케 하고 존재를 자각시키는 상반된 작용을 모두 갖는 것이 무인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 삶 속에서 존재자에 몰두할 때 우리는 존재를 망각하게 된다. 이를 하이데거는 냉소적 의미에서 니힐리즘(Nihilism)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도대체 왜 존재자가 있고 무는 없는가?’라는 경이감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무와의 대비를 통해 존재를 자각하게 된다. 싸르트르가 평하듯이 하이데거에 있어서 무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 그 윤곽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무의 배경 위에서 존재는 비로소 그 경이로운 모습을 확연히 드러낸다. 이와 함께 개별적 존재자(seiendes)에 대한 탐구를 넘어서 무와 대립된 ‘존재(Sein)’에 대한 탐구로서의 진정한 형이상학의 길이 열리게 된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무란 인도사상에서와 같이 철학적 탐구의 궁극에 위치하는 절대적 원리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존재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킴으로써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어지는 구상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보조개념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싸르트르(Sartre)는 현존재로서의 인간, 즉 대자(對自)존재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 무에 대해 치밀하게 분석한다. 먼저 싸르트르는 무의 위상에 대해 검토한다. 싸르트르는 무는 존재에 후속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에 대해 서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존재를 거론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는, 헤겔이 보듯이 존재의 상호보족적(相互補足的) 개념도 아니고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세계를 공중에 매달고 있는 환경과 같은 것이 아니라, 존재의 세계 내부에 위치한다. 그러면 세계의 내부에서 무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싸르트르는 존재를 사물적 존재인 즉자(卽自)존재와 의식적 존재인 대자(對自)존재로 양분하면서 우리가 접하는 무화 작용은 능동성을 결여한 즉자존재나 무 그 자체에 있을 수 없기에, 남은 하나의 대안인 대자존재, 즉 우리의 의식 내부에 무가 위치한다고 논증한다. 이렇게 대자존재, 즉 우리의 의식 내부에 위치하는 무, 보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의식과 동일시되는 무는 우리에게 반성적 사유와 자유의지를 가능케 한다. 만일 우리의 반성적 사유가 무가 아니라 유(有)라면 그런 사유를 인식하는 제2의 사유가 요구되고, 다시 제2의 사유를 인식하는 제3의 사유가 요구되어 논의는 무한소급하고 만다. 이러한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의 사유는 무(無)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대자존재로서의 우리의 의식이다. 또, 대자존재로서의 우리의 의식은 내부의 결핍인 무를 채우기 위해 세계를 향해 자신의 행위를 끊임없이 의도하며 미래를 향해 던져댄다(企投). 싸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싸르트르가 말하는 무는 초월적, 절대적 무가 아니라 일상적 인간의 자유의지를 근거지우기 위해 설정된 무로 우리 모두의 의식 내부에 위치하는 평범한 무이다.
2) 인도사상의 무
철학의 3대 발흥지(發興地)인 유럽과 중국과 인도 중에서 무에 대한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은 단연 인도이다. 주지하듯이 서구 대수학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 숫자 ‘0’을 발명(또는 발견)하여, 무를 수학적 사고의 영역에 도입한 민족은 인도인들이었다. 윤회와 인과응보의 이론을 공유하고 해탈을 지향하는 인도인들의 종교 역시 포괄적인 의미에서 ‘무의 종교’라고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와 달리 인도에서 무에 대한 논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인도인과 서구인들의 내세관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모든 생명체는 전생과 현생과 내생에 걸쳐 무한한 삶을 반복하며 윤회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사관(生死觀)에 입각할 경우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과 죽음 이후의 세계는 무가 아니라, 지금의 이 삶과 동일한 유의 세계인 것이다. 어떻게 살건 누구나 반드시 다시 태어난다는 신념을 갖고 있을 경우 무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그다지 공포스러운 일이 아니다. 인도의 종교인들은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무한히 다시 태어나 고통스러운 삶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사실만이 두려울 뿐이었다. 따라서 인도인들은 그렇게 윤회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궁극적으로는 유(有)가 아니라 무(無)를 지향하는 무의 종교를 탄생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무의 종교에서는 모두 해탈을 지향하지만, 그 때 말하는 해탈의 의미와 그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로 인해 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출현하게 된다.
고대 인도인들의 철학적, 종교적 직관이 집대성되어 있는 『우빠니샤드(Upaniṣadⓢ)』의 주인공들은 우주의 주재자인 브라만(Brahmanⓢ: 梵)과 개별적 자아의 심층부에서 발견되는 진정한 자아인 아뜨만(Ātmanⓢ: 我)의 동일성(梵我一如)에 대한 체험을 지상(至上)의 종교적 목표로 삼으면서, 브라만이나 아뜨만은 우리의 구성적 사유에 의해 설명될 수 없으며, 그 정체는 다만 ‘~이 아니다, ~이 아니다(neti netiⓢ)’라는 부정적 형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듯이 아뜨만은 아뜨만을 보지 못한다’거나 ‘그는 보이는 자가 아니라 보는 자이며, 그는 들리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이며, 생각된 자가 아니라 생각하는 자이다’와 같은 『우빠니샤드』의 경구에서는 브라만이나 아뜨만을, 궁극적 실재로서 존재하긴 하지만 인식의 차원에서는 무(無)인 절대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우빠니샤드적인 해탈관을 비판하며 무에 대한 사유를 보다 철저히 밀고 나간다. 불교에서는 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아뜨만, 나의 모든 행위를 주관하는 영원한 단독자(常․一․主宰)로서의 아뜨만(我)은 우리의 심신(心身) 그 어디에도 없다는 의미에서 무아(無我: Anātmanⓢ)의 교리를 설하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설에서 말하는 ‘무(無)’에는 ‘인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비판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즉 나의 몸(色)이나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마음(識) 중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나이기 위해서는 자기동일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변화하기에 그 어디에도 나는 없으며, 그 어떤 것도 내가 아니다. 여기서 쓰인 ‘없다’거나 ‘아니다’라는 말에는 비판적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다. 책상 위에 꽃병이 있다거나 없다는 의미의 없음이 아니며, ‘나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라는 말에서 쓰이는 아님과 같은 의미의 아님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을 지탱해주고, 우빠니샤드적 종교관에서 궁극적 실재로 간주하던 ‘나(아뜨만)’는 사실은 공허한 개념이란 뜻에서 무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아설의 무에는 없다거나 아니라는 뜻보다 ‘틀렸다’라는 뜻이 강하게 담겨 있다. ‘자아가 있다는 생각은 틀렸다’는 의미에서 무아인 것이다. 무아설의 부정은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을 시정하는 부정이다. 그래서 무아설의 진정한 취지에 비추어 본다면 자아가 ‘있다’는 생각은 물론이고, 일반적 의미의 ‘없다’는 생각도 모두 틀린 것이다. 이렇게 일상적 자아와 종교적 자아의 실재성을 비판하는 불교의 무아설은 ‘모든 것이 얽혀서 발생한다’는 연기설과 엮어져 불교적 윤회관과 우주관, 윤리관과 종교관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적 의미를 갖는 무는,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경)에서 시작하는 중관학파(中觀學派: Mādhyamikaⓢ)와, 후대 중국의 선종(禪宗)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인도의 여러 학파 중 무에 대해 가장 활발한 논의를 벌인 것은 니야야-와이셰시까(Nyāya-Vaiśeṣikaⓢ) 학파이다. 다원적(多元的) 실재론자인 이들은 자신들의 세계관과 종교관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무의 실재성을 주장하게 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무란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관이나 추리를 통해 인식되는 실재이다. 이들은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해탈의 경지와, 잡다한 차별의 현상 세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가 실재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들은 무의 종류를 네 가지로 나눈다. 그리고 감각의 세계건, 관념의 세계건, 초월적 세계건 거기서 논의되는 무는 이 네 가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무는 ‘A는 B가 아니다(A is not B)’와 ‘A에는 B가 없다(A is not in B)’는 두 가지 인식에 의해 발생한다. 전자는 ①‘호환적인 무(互換的 無: anyonyābhāvaⓢ)’라고 불리며 이런 무의 존재로 인해 모든 사물과 사태는 차별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첫째 A에서 B가 사라진 이후의 무로 ②‘소멸 후의 무(dhvaṃsābhāvaⓢ)’, 둘째 A에 B가 등장하기 이전의 무로 ③‘발생 전의 무(prāgabhāvaⓢ)’, 셋째 A에 B가 아예 없는 무로 ④‘궁극적인 무(atyantābhāvaⓢ)’의 세 가지로 세분된다. 이에 대해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호환적인 무’는 소는 말이 아니다, 또는 말은 소가 아니라고 할 경우 소에는 말이 없고, 말에는 소가 없음을 의미하며 이로 인해 말은 소와 다르고 소는 말과 다른 ‘차별’이 가능한 것이다. ‘소멸 후의 무’는 존재하던 항아리가 깨 진 후의 파편만 남은 시간대에 항아리가 없음을 의미하며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해탈 역시 아뜨만에 괴로움이 없는 것이기에 이에 해당한다. ‘발생 전의 무’는 항아리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점토반죽에 항아리가 아직 없음을 의미한다. ‘궁극적인 무’는 책상 위에 항아리가 없는 경우의 항아리의 무를 의미한다. 니야야-와이셰시까 철학에서는 무란 이 네 가지뿐이라고 말하며 이 모두 우리의 감관이나 추리에 의해 인식되는 실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3) 중국사상의 무
중국사상 중 무에 대해 가장 심도 있는 논의를 벌인 사상을 꼽으라면 누구나 서슴없이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들 것이다. 도가사상에서 말하는 무는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무로 이를 상대적 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무에 대해 『도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어지며, 길고 짧음은 서로를 나타내고…’(老子, 『道德經』, 제2장). 여기서 말하는 무는 있음에 대한 단순한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의 일에 처하여 말 없이 교화를 행한다’라고 했을 때의 무위의 무는 그런 유와 무의 대립에서 떠나 있음을 의미하는 무로 초월적, 종교적 의미를 갖는 절대적 무이다. 셋째는 ‘무명(無名)은 천지의 시작이요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머니이다’(제1장)라거나 ‘천하만물은 유에서 생하고 유는 무에서 생한다’(제40장)는 경구에서 말하는 무로 우리에게 인식되는 존재 전체를 산출한 근원으로서의 무이다. 이렇게 『도덕경』에서는 인간과 세계의 근저에 무를 설정한다. 그런데 인간과 세계의 근저로서의 무는 부동의 허무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무한한 작용을 산출하는 무이다. 이 때 무는 도(道)라고 불린다. 그래서 ‘도는 언제나 무위이기에 하지 못할 것이 없다’(제37장)거나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제42장)고 선언하는 것이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위의 경지, 또는 도는 인간과 세계의 토대가 되기도 하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철학적, 종교적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여타의 학문과 같이 지식의 습득에 의해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도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을 배우면 나날이 늘어나고, 도를 닦으면 나날이 줄어들거니와, 줄이고 또 줄이면 무위에 이르게 되고 무위에 이르게 되면 하지 못함이 없다’(제48장). 자신이 견지하던 모든 세속적 관념과 감정이 수도(修道)와 함께 점차 세척됨으로써 우리는 조작을 떠난 있는 그대로(無爲自然)의 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응용이 자유자재한 현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도가의 무는 무한을 산출한다.
유가철학 중에는 북송의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태극도설(大極圖說)』에서 우리는 무를 만날 수 있다. 주돈이는 이 세상 만물의 발생과정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음양정동(陰陽靜動), 오행(五行), 남녀건곤(男女乾坤), 만물화생(萬物化生)의 다섯 단계에 걸쳐 설명하는데 여기서 보듯이 그 시발점인 태극 이전에[道家的 해석] 무극, 즉 ‘궁극으로서의 무’를 위치시킨다. 무극이 음양오행과 묘합하여 남녀건곤으로 분화를 거듭한 후 만물이 화생하게 된다는 『태극도설』의 만물 발생론은 주역의 세계관과 도가사상이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진 ‘무(無)의 창조론’이다.
선문답의 역동성에서도 우리는 무의 사상을 만날 수 있다. 인도에서 수입된 대승불교는 도가적 사유와 결합하여 지극히 중국화 된 불교인 선종을 탄생시키게 된다. 기독교적 언어로 표현하면 선종은 철저한 우상파괴의 종교이다. 단하천연(丹霞天然: 738~824)은 깨달음의 경지를 표출하기 위해 공경과 예배의 대상이었던 목불(木佛)을 불구덩이 속에 던져버린다. 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臨濟錄』, 제13장)고 하는 임제(臨濟: ?~866)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궁극의 경지에서 선사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스승이나 교조인 부처조차 무화(無化)시킨다. 궁극의 경지에서는 눈에 보이는 우상뿐만 아니라 마음 속의 우상까지도 철저히 파괴하며 부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조차 찢어버린다. 선종의 첫 스승인 달마(達摩: ?~528)가 중국에 도래한 의의를 묻는 제자에게 조주(趙州: 778~897)는 뜰 앞의 잣나무를 가리킨다. 부처의 정체를 묻는 제자의 질문에 대해 선사(禪師)들은 마른 똥막대기, 또는 삼베 세 근이라고 대답한다. 동문서답과 같은 이런 대답들은 제자에게 의문을 일으킨 사고 방식을 파괴해 버리는 역할을 한다. 즉, 질문자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무화(無化)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파괴는 변증법적으로 진행된다. 살아 있으면 죽이고 죽어버리면 살리고 살아나면 다시 죽인다. 산 것을 죽이는 것도 파괴이지만 죽은 것을 살리는 것도 파괴이다. 그래서 조주는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느냐는 제자의 물음에 대해 때로는 무(無)라고 대답하고 때로는 유(有)라고 대답한다. 불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무라는 언어로 파괴하고, 제자가 그런 무라는 대답에 고착될 경우 이를 다시 유라는 언어로 파괴한다. 여기서 무나 유는 다만 비판의 도구로 쓰일 뿐 의미를 갖는 말이 아니다. 선종의 스승들은 기상천외한 행동이나 답변을 통해, 제자들을 종교적 번민으로 몰고 간 세계관과 인생관을 무화시켜 줌으로써 제자의 의문을 해소시킨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선종을 ‘무화의 종교’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3. 무는 어떻게 조성되는가?
무란 어떻게 조성(造成)되는 것일까?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우리 주변에는 도처에 무가 널려 있다. ‘지갑에 돈이 없다’, ‘계절이 바뀌었다’, ‘마음을 비운다’와 같은 일상적 표현에도 무의 의미가 내재하고, ‘이 세상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거나 ‘무는 존재를 자각케 한다’는 종교적 철학적 표현에서도 우리는 거침없이 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면 이렇게 다양한 무가 조성되는 과정에 어떤 공통점은 없을까?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이 조성될 경우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한 알의 씨앗이 밭에 뿌려져 싹을 만들어 낼 경우 그 싹에 대해 씨앗은 직접 조건이 되고 그 밖의 토양과 비료와 햇빛과 공기와 수분 등은 간접조건이 된다. 지금 씨앗과 싹의 예에서 보듯이 어떤 사물이 발생하거나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것의 재료가 되는 직접조건과 그 재료를 변화시킨 간접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가 조성되는 경우 직접조건이 결여되어 있다. 즉, 무의 재료가 된 선행하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없기에 무는 단지 간접조건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우리가 ‘책상 위에 꽃병이 없다’고 할 경우, 아니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도 꽃병이 없는 빈 책상을 보았을 경우, 그 ‘비어 있음’, 즉 ‘꽃병의 없음’을 만들어 낸 것은 ‘책상’과 ‘꽃병’이다. 여기서 책상과 꽃병은 무를 만들어낸 두 가지 간접 조건이다.
이렇게 무와 관계된 표현을 사용할 경우 반드시 두 가지 사태가 관여한다. 무란 ‘어디’에 ‘무엇’이 없어야 비로소 성립된다. 인도내의 종교적 철학적 학파 중 무에 대해 가장 방대하고 정밀한 논의를 벌였던 니야야(Nyāyaⓢ) 학파에서는 이 중 ‘어디’를 바탕(anuyoginⓢ: 隨伴者)이라고 부르며 ‘무엇’을 주제(pratiyoginⓢ: 關與者)라고 부른다. 비단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이건 정신적이건 추상적이건 그 어떤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무 개념이 조성될 경우 이런 두 가지 조건의 관여는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욕심이 없다’고 욕심의 무를 표현할 때 ‘그 사람’은 그런 무의 바탕에 해당되고 ‘욕심’은 무가 된다. ‘이념이 없는 사회’라고 말할 경우 이념이 주제가 되고 사회가 바탕이 된다. 일반자로서의 무, 즉 무일반(無一般)을 언급하는 경우에도 ‘우리의 인식의 장(場)’이 바탕이 되고 ‘존재일반’이 주제가 된다. 우리의 인식의 장에서 존재일반이 사라진 것이 바로 무일반이다. 니야야 학파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우도 ‘자아인 아뜨만’(바탕)에 ‘괴로움’(주제)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니야야적 견지에서 볼 때 주제와 바탕이 관여되지 않는 무는 그 자체로서는 공허한 개념이다. 사물의 세계에서건 관념의 세계에서건 무 개념이 조성되기 위해서는 주제와 바탕이라는 두 가지 사태의 관여가 필수적이라는 니야야적 조망은 상식의 차원에서는 일견 타당한 듯하다.
4. 무는 어떻게 분류되는가?
우리는 항상 무를 접하며 생활한다. 많은 철학자와 종교가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채득된 무 개념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철학체계와 종교체계를 구축한다. 이렇게 우리가 접하는 무, 철학자와 종교가들이 말하는 무는 그 조성 양태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1)‘세계 내의 무’로 만물의 변화 및 차별과 함께 하는 무이다. 둘째는 2)‘세계 밖의 무’로 존재하는 세계 전체와 대비된 무이다. 셋째는 3)‘세계 밑의 무’로 세계의 성립근거이기도 하고 우리가 체득해야 할 종교적 지향점이기도 하다. 1)세계 내의 무는 세계의 변화를 야기하는 ⑴‘시간 속의 무’와 세계의 차별을 야기하는 ⑵‘사유 속의 무’로 구분될 수 있으며, 2)세계 밖의 무는 존재론적 무, 3)세계 밑의 무는 형이상학적 무라고 규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각각의 성격에 대해 논의해 보자.
1) 세계 내의 무
(1) 시간 속의 무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유와 무를 모두 체험한다. 또, 우리는 유가 그대로 유로 지속되는 것도 체험하고 무가 그대로 무로 지속되는 것도 체험하며, 유가 무로 변화되거나 무가 유로 변화되는 것도 체험한다. 일상생활에서는 ‘유’와 ‘무’, ‘지속’과 ‘변화’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인다.
그러나 반성적 사유의 돋보기를 현상을 향해 근접시킬 때 우리는 모든 것이 부단히 생멸하며 변화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변화란 헤겔(Hegel)이 말하는 생성(Becoming)이다. 생성은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유에서 무로 그리고 무에서 유로. 즉,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있게 된다. 전자는 소멸이라고 불리고 후자는 발생이라고 불린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개별적인 사물의 경우 그 발생과 소멸은 시간을 달리하여 일어난다. 도공의 손에 의해 만들어짐으로써 발생한(生) 항아리는 일정기간 사용되다가 어느 순간 파괴됨으로써 소멸한다(滅). 생성이 특칭명제(特稱命題)로 발화될 때 이렇게 발생과 소멸은 다르고 유와 무는 다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이 생성 변화한다고 말할 때 발생과 소멸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다. 이전의 모든 것이 소멸하는 순간은 이후의 모든 것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한 순간을 놓고 과거와 미래 중 어디에 비중을 두고 조망했느냐에 따라 우리는 동일한 순간에 대해 소멸의 순간이라고 명명하기도 있고 발생의 순간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생성이 전칭명제(全稱命題)로 발화될 때 발생의 순간은 곧 소멸의 순간인 것이다. 유로 되는 순간이 곧 무로 되는 순간이다. 따라서 유는 곧 무이다. 헤겔이 ‘순수한 존재(有)는 순수한 무(無)’라고 말하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정지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물은 부단히 변화하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 역시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가 변화를 소멸의 측면에서 조망할 때 모든 현상은 매 순간 무화된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시간의 신(神)인 깔라(Kālaⓢ)가 매 순간 존재를 삼키고 있기에, 또 파괴의 신(神)인 쉬바(Śivaⓢ)가 매 순간 존재를 부수고 있기에 우리는 한 번 들어갔던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적실 수가 없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말해 ‘지어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諸行無常: sarve saṃskārā anityāḥⓢ)’.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잡다한 사건들은 어떤 것은 매 순간 무화(無化)되고 어떤 것은 일정기간 지속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분석해 보면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 변화하지 않고 지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능력의 한계로 인한 착각임을 알 수 있다. 변화의 정도가 우리의 인식에 포착되지 않을 만큼 미세하기에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사태가 지속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벽시계의 초침(秒針)은 매 순간 변화하지만 시침(時針)은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중에 시침의 달라진 위치를 보고 우리는 시침 역시 매 순간 이동하며 그 위치를 변화시키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된다. 벽시계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만물이 그렇다. 지금은 웅장해 보이는 건물도 세월이 지나면 다 무너지고 만다. 지금은 활력에 넘치는 나의 몸뚱이도 세월이 지나면 늙고 병들게 된다. 이 세상 만물은 매 순간 낡아가고 있고 우리는 매 순간 늙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관계한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무관한 변화이다. 강물은 나와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고, 계절은 나와 무관하게 그 색조를 달리한다. 하늘의 태양은 나와 무관하게 떠오르고, 창 밖의 눈발은 나와 무관하게 휘날린다. 그러나 한편에서 나는 지금 신속한 손놀림으로 타자판을 두드리고, 가끔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며, 일어나서 걸어가고, 밥 먹고, 숨쉬면서 변화를 만들어낸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이건 나와 무관하게 만들어진 것이건 모든 것은 매 순간 무화되며 변화한다. 니야야(Nyāyaⓢ)적 언어로 표현하면 ‘현재의 순간’이라는 바탕(anuyoginⓢ)에 ‘과거 순간의 사물이나 사태’라는 주제(pratiyoginⓢ)가 언제나 존재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 ‘소멸 후의 무(dhvaṃsābhāvaⓢ)’를 접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내가 관계하며 무화하는 것은 다시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 나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내는 무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만들어지는 무이다. 물론 칸트(Kant)의 생각과 같이 우리의 자유의지는 이성에 의해 논증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런 자유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용할까? 다시 말해 우리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무화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까? 싸르트르(Sartre)가 말하듯이 우리의 의식은 매 순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나의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반사적 행동은 마치 당구공이 궤도를 그리며 굴러가듯이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기계적으로 진행된다. 또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나의 마음 속에서는 여러 가지 잡념과 감정들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내 방의 창문이 예기치 못한 바람에 불현듯 흔들리듯이 나의 마음 속에서는 갖가지 상념들이 불현듯 떠오른다. 모두 내가 어쩌지 못하는 풍경일 뿐이다. 이렇게 내가 반사적으로 행동할 때, 또 내 마음 속에서 갖가지 상념들이 출몰할 때 이전의 행동과 이전의 상념은 무화되며 이 때의 무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조성된다. 따라서 내가 기계적으로 행동하면서 만들어지는 무, 내 마음 속에서 잡념과 감정이 떠오르면서 만들어지는 무는 나와 관계된 무이긴 하지만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조성된 무이다. 이런 무가 만들어지는 것은 예기치 못하게 일어난다는 점에서 외부 세계의 변화와 차이가 없다. 이렇게 외부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흐름과 나의 마음 속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며 솟아나는 잡념과 감정의 흐름에 둘러싸여 있는 내가 그런 흐름에 실려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경우 나의 행동이나 생각은 외부의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기계적으로 진행될 뿐이다. 그 때 나는 다만 그런 변화와 흐름을 주시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자유의지는 그런 기계적 흐름에 개입하여 그 흐름의 방향을 조정할 때에 한해 발현된다. 가끔 일어나는 나의 이런 개입의 순간에 한해 나의 의지에 의한 무화가 일어난다. 이 때만이 자유의 순간이다. 나의 자유의지와 관계된 무화는 이렇게 불연속적으로 발생한다. 자유란 우리의 의식 내에서 간헐천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가정할 경우, 우리는 매 순간 무화되는 세계 속에서 가끔 무화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 사유 속의 무
무는 우리의 사유 속에 갖가지 개념(concept)이 출현하는 과정에서도 관여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eidos, form)이나 이데아(idea), 서구 중세의 보편논쟁의 소재가 된 보편자(universal), 불교를 포함한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일반자(sāmanyaⓢ)와 같은 술어(術語)들은 그것이 쓰이는 맥락만 다를 뿐 모두 개념의 이명(異名)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이런 개념은 어떻게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일까? 우리의 사유가 어떤 사물이나 사태에서 공통성을 추출하여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아니면 상주(常住)하는 개념으로 인해 사물의 정체가 규정되는 것일까? 후자와 같은 견해를 갖는 경우 그 세계관은 실재론으로 귀결되며 전자와 같은 견해를 갖는 경우 그 세계관은 관념론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인도의 경우 다원론적 실재론인 니야야 철학에서는 개념의 실재성을 주장하며 개념은 마치 개별적, 감각적 사물과 같이 실재하며 그 자체가 우리에게 직접 지각된다고 보았던 반면 불교논리학에서는 개념이란 개별적 사물이 갖는 효력의 공통성에 의거하여 우리의 사유에 의해 추상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Dharmakīrti, Pramāṇavārttika, 第1章). 불교논리학에서는 개념이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 추리의 소산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양 학파 모두 우리의 언어는 개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견해를 같이한다. 순수 감각의 세계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화된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개념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무가 작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소’라는 말을 하거나 생각을 떠올릴 경우 ‘소’가 아닌 것들이 제외된다. 어떤 막대를 길다고 규정하는 순간 그와 동시에 길지 않은 것이 배제된다. 달리 표현하면 소에는 소 아닌 것들이 없으며, 긴 것에는 길지 않은 것이 없다. 따라서 소라는 생각을 떠올릴 경우 소 아닌 것들이 무화되며, 길다고 말을 할 경우 길지 않음이 무화된다. 이렇게 다른 개념을 배제함으로써 하나의 개념이 확정되는 원리를 불교논리학에서는 ‘다른 것의 배제(anyāpohaⓢ)’라고 말하며, 이렇게 다른 개념을 무화함으로써 조성되는 무는 니야야적 분류법을 적용할 경우 ‘호환적인 무(互換的 無: anyonyābhāvaⓢ)’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에 대해 단 하나의 개념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하나의 ‘도자기’를 대하고 있을 때, 그 도자기에 대해 도자기라는 개념과 함께, ‘물질’, ‘예술작품’, ‘골동품’, ‘존재자’라는 개념도 부여될 수 있다. ‘도자기’라는 개념을 떠올릴 때 그것과 무관한 ‘새’나 ‘바람’과 같은 개념들도 배제되고 무화되지만 그것과 유적(類的), 종적(種的)으로 그물 망처럼 얽혀 있는 다른 개념들 역시 우리의 사유 속에서 무화된다. 그리고 그런 개념과 결부된 유(類)와 종(種)의 위계(位階), 외연과 내포는 그런 개념을 창출해 낸 문화와 개인에 따라 다종다양하다.
개념의 존재에 대해 실재론적 태도를 보이건 관념론적 태도를 보이건, 또 그 개념의 외연과 내포, 또 그와 결부된 개념들의 위계가 어떠하건, 하나의 개념이 우리의 사유 속에 출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개념에 대한 무화가 발생한다는 점은 모든 개념에 공통적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에는 인간이 아닌 것들이 무화되어 있고, 붉음이라는 개념에는 붉음이 아닌 것이 무화되어 있다. 어떤 사물이나 사태에 개념이 부여되는 과정에서 무화가 일어나기에 이 세계는 이렇게 다양한 차별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2) 세계 밖의 무
앞에서 논의했듯이, 모든 것이 매 순간 변화할 때 소멸과 함께 조성되는 무, 또는 우리의 사유가 어떤 사물에 대한 개념을 확정할 때 다른 개념을 배제함으로써 조성되는 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내의 무이다. 그러나 이 세계 밖에도 거대한 무가 도사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존재의 세계는 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죽은 후에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경우 그가 탄생하기 이전에 그는 나에 대해 무였고, 죽은 이후에도 나에 대해 무이듯이, 나 역시 내가 탄생하기 이전에는 무였고 죽은 이후에도 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발생한다. 죽음은 ‘나’와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라지는 최대의 상실이다. 죽음의 순간에 나의 온 몸은 마비되고 모든 감각은 문을 닫는다. 우주를 파괴한다는 겁화(劫火)가 닥치지 않더라도 나의 죽음의 순간은 온 우주가 파괴되는 순간이며,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죽음을 직시할 때 사형수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가 보았듯이 하잘 것 없던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생생한 신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때 우리에게는 ‘도대체 왜 존재자가 있고 무는 없는가?’라는 라이프니츠(Leibniz)의 의문이 떠오르게 되며, 키에르케고오르(Kierkegaard)와 하이데거의 불안이 시작되며,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나의 정체(父母未生前本來面目)는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선승(禪僧)의 화두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서 공명(共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타인의 죽음은 마치 한 떨기 꽃이 질 때 조성되는 무와 다름없는 세계 내의 무이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세계 밖의 무이다. 이 세계에 사는 한(限) 나는 나의 죽음을 체험한 적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사후 세계의 체험을 말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체험인 이상 그 사람의 세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모든 것이 변화하면서 조성되는 세계 내의 무는 내가 대면할 수 있는 무이다. 그러나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무, 즉 세계 밖의 무는 그 누구도 대면한 적이 없고 대면할 수도 없는 무이다. 그래서 공자는 죽음에 대해 물을 때, ‘삶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죽음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겠냐’(『論語』, 「先進篇」)고 반문했던 것이다. 부조리한 이 세계에서 부조리의 극한에 위치한 것이 바로 죽음이 야기하는 무인 것이다.
이렇게 죽음 후에 우리는 무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할 경우 죽음은 거대한 상실이다. 아니 절대적 상실이다. 무로서의 죽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포를 야기한다. 이와 반대로 죽음은 탈출구가 되기도 한다. 어느 시인이 말하듯이 우리는 세계의 감옥에 갇혀 있는 무기수(無期囚)이다. 오직 죽음만이 우리를 이 세계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죽음은 이렇게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속담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無)로 채색된 죽음은 공포로 다가온다.
죽음과 동일시되는 세계 밖의 무는 우리에게 공포를 야기하며 우리를 철학적, 종교적 사유에 침잠하게 만든다. 하이데거는 이런 죽음과의 대면, 즉 세계 밖의 무와의 대면을 통해 우리는 일상적 삶의 굴레를 벗고 존재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때 현존재(Dasein)로서의 철학자의 눈에 비친 구상적 세계의 모든 것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상의 모든 것이 경이롭다. 하이데거는 이를 고흐(Gogh)나 쎄잔느(Cezanne)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눈에 비친 세계라고 말한다. 이 때의 경이로움은 세계 밖의 무와 대비됨으로써 자각되는 존재의 기미를 회복한 존재자들의 경이로움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철학적, 종교적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세계 밖의 무이다.
3) 세계 밑의 무
그러면 죽음 이후 우리는 무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은 확실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죽음 후에 내세가 있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일종의 믿음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의 죽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죽음도 확실한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가 죽었다’고 말할 때 여기서 말하는 ‘누구’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군가가 죽어 무로 돌아갔다고 보기 위해서는 그 ‘누구’의 자기동일성(self-identity)이 보장되었어야 한다. 즉, 그가 살아 있었어야 죽을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의 의미가 확실하게 규정이 되어야 그에 대비된 ‘죽음’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살아 있음’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대의학에서는 1년 정도가 지나면 나의 몸을 이루고 있던 물질의 거의 대부분은 새롭게 섭취한 물질로 대체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의 자기동일성을 보장해 줄 것인가? 나의 마음인가? 나의 마음 역시 시시각각 변한다. 기억인가? 세친(世親, Vasubandhu: 320~400경)이 말하듯이 기억 역시 불변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반응이 지금 이 순간 새롭게 되풀이되는 것’일 뿐이다(『俱舍論』, 「破執我品」). 그래서 기억에 착오가 생기고 망각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기억도 무상하다. 이렇게 우리의 몸과 마음은 매 순간 무화되고 있다. 우리의 몸을 만든 물질도 완전히 새롭게 생긴 것이 없지만, 죽음 이후에도 나의 몸을 이루고 있던 물질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흩어질 뿐이다.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지속한다는 생각에 토대를 두고 말하는 ‘삶’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자의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다. 나의 죽음의 경우 이전에 내가 만난 적도 없고 앞으로 내가 만날 수도 없다. 우리가 무로서의 죽음을 만난다는 것은, 마치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이, 논리적 모순이다. 그리고 남의 죽음의 경우도 그의 삶의 자기동일성이 보장되지 않기에 실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죽음이 있다는 것은 엄밀한 사실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원래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선언이 가능한 것이다. 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본래 ‘아무 것도 없다’(本來無一物; 慧能, 『六祖壇經』). 여기서 우리는 세계 밑의 무와 만나게 된다.
우리에게 종교적, 철학적 의문과 공포를 야기한 세계 밖의 무, 즉 죽음은 허구의 개념이다. 이렇게 죽음의 허구성을 자각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그대로 절대가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세계 밖의 무와 대비된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세계 밖의 무가 탈각된 절대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 대해 우리는 존재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존재는 무와 대비됨으로써 조성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마치 긴 것과 대비하여 짧다는 개념이 만들어지듯이…. 무가 제거될 때 존재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이 세계는 존재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존재’와 ‘존재에 대비된 무’를 초월한 절대 그 자체이다. 일상적인 유와 무가 모두 무화된 절대이다. 절대적 무이다. 우리는 이런 절대적 무를, 세계 내의 무와 세계 밖의 무가 모두 무화된 ‘세계 밑의 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세계 밑의 무는 (a)세계 내의 특수한 사물의 유와 무, 또 (b)만물이 유에서 무로 소멸하고 무에서 유로 발생하면서 변화한다고 할 때의 보편적 유와 무, 그리고 (c)세계의 존재 전체를 의미하는 유와 죽음으로 인해 조성되는 세계 전체의 무, 이런 세 쌍(a,b,c)의 유와 무 모두가 탈각(脫殼)된 절대적인 무이다. 소위 ‘익명의 불교도(Anonymous Buddhist)’라고 불릴 수 있는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절대무(nothingness)는 이 세계의 창조와 신의 사랑 이전의 무를 의미하기에 이런 ‘세계 밑의 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또 도가철학에서 말하는 ‘이름이 없는 도’(『道德經』, 第32章), ‘천하만물을 산출하는 무’(同, 제40장) 역시 상기한 세 가지 무와 그 성격을 달리하는 ‘세계 밑의 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위에 이르게 되면 하지 못함이 없다’거나 ‘천하만물은 유에서 생하고 유는 무에서 생한다’는 경구에서 보듯이, 『도덕경』에서는 ‘세계 밑의 무’를 우리의 ‘일상적 삶’이나 ‘만물’과 분리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무위가 그대로 유위’라든지, ‘만물이 바로 무이다’와 같은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수입될 때 중국인들은 도가의 현학적(玄學的) 체계와 언어에 의해 불교를 해석했는데 이렇게 이해된 불교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말한다. 후대에 이런 격의성(格義性)을 비판할 때 그 요점은 ‘유 또는 유위’와 대립적으로 이해되는 노장적(老莊的) ‘무 또는 무위’를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과 동일시했다는 점에 있다.
종교적 무는 세계 속에 사는 우리가 그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세계 밑의 무’라고 표현될 수 있긴 하지만, 불교의 공 사상에서는 그렇게 해서 발견된 무가 그대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동일시된다. 불교적 견지에서 볼 때 ‘세계 밑의 무’, 즉 ‘세계 이면의 무’는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상세계와 중첩되어 있다. 세계의 이면은 그대로 세계의 표면이다. 유는 곧 무이다. 현상세계의 이런 절대성에 대해 불교의 『반야심경』에서는 ‘모든 것은 그대로 공이며 공은 그대로 모든 것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 … 受想行識 亦復如是)라고 표현한다. 이와 같은 자각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지금 있는 그대로 절대적 가치를 갖는 고요한(寂滅) 모습으로 재발견된다. 엄밀히 말하면 절대라고 할 것도 없고 고요라고 할 것도 없다. 절대라는 표현은 존재와 무의 이분법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적 언어로 도입된 것일 뿐이다. 절대 역시 상대와 대립된 개념이기에 우리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을 하는 순간, 상대적인 것과의 대비가 요구되며, 결국 절대적인 것 역시 상대적인 것이라는 역설이 발생하고 만다. 모든 언어가 그렇다. 입만 열면 그르치고 만다. 그러면 세계 속에서 세계를 무화하는 역설(逆說: paradox)의 종교, 언어로 모든 언어의 가치를 비판하는 역설의 종교, 즉 무의 종교에 대해 논구해 보자.
5. 종교적 무
많은 종교와 철학에서는 세계의 근원으로 무를 설정한다. 기독교에서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고, 도덕경에서는 무에서 유가 생하고 유에서 만물이 생한다고 말하며,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는 태극 이전의 무극, 또는 무극으로서의 태극을 말한다. 그러면 이렇게 존재의 세계 밑에, 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근저에, 또는 만물의 배후에 설정된 무의 정체에 대해 보다 엄밀히 검토해 보자.
일반적으로 무엇이 새롭게 생겼을 때 우리는 그 이전의 상태를 무로 규정한다. 없던 아이가 새로 태어나 우리와 함께 있게 되듯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무가 유로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듯하다. 이런 우리의 일상적 체험에 빗대어 유비추리할 경우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이 세계 전체는, 과거로 과거로 시간을 소급해 올라갈 때 분명 그 이전에 무였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일상 언어에서 추출된 무라는 개념이 이 세계 전체에 대해 확대 적용되는 것은 타당할까? 이 세계가 무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변증론」에서 칸트에 의해 비판되는 네 쌍의 이율배반적 명제 중, ‘세계는 시간적으로 하나의 시작을 가지고 있다’는 명제에 해당된다. 이 명제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타당하다. 세계의 근저에 있는 무에 대해 발생론적으로 이해할 때 이런 이해는 우리의 이성에 의해 검증될 수 없는 것으로 ‘믿음’의 차원에 속한다. 무의 종교인 불교에서 이 세계에 대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無始無終)’고 말할 때, 이것은 ‘이 세계에 시작도 있고 끝도 있다’는 명제에 대한 반정립적(反定立的) 명제가 아니다. 여기서 쓰인 무의 의미에는 선종(禪宗)이나 중관학파(中觀學派)의 용례와 같이 비판적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시작(始)이라는 생각이나 끝(終)이라는 생각은 모두 이 세계 전체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쓰인 무(無)라는 글자는 ‘틀렸다’는 의미를 갖는다.
불교로 대표되는 무의 종교에서는 세계의 근저로서의 무에 대해 논리적이고 윤리적이며 종교적인 측면에서 모두 조망한다. 집요한 논리적 분석을 통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구사하는 모든 개념들이 무화됨으로써 세계와 인생에 대한 우리의 종교적, 철학적 고민은 해소되고, 윤리적 측면에서 우리의 탐욕과 분노의 원천인 개아(個我)가 무화됨으로써 자비심이 용출하며, 종교적 측면에서 절대적 무는 우리가 의탁하고 지향해야 할 영원한 목표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 무는 인식과 가치와 존재가 모두 탈각된 장소이면서 인식과 가치와 존재가 모두 창출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면 일본 교토학파의 시조(始祖)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의 용어를 빌어 이런 종교적 무를 ‘절대무’라고 명명한 후 그 의미와 작용에 대해 면밀히 고찰해 보자.
1) 절대무의 자각과 논리
자신의 선적(禪的) 체험에 입각해 불교사상을 서구철학의 언어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니시다 기타로는 절대무에 대한 인식과, 그런 인식 이후 전개되는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자신의 철학 거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니시다는 말한다. “자기가 그 극한에서 절대무의 자각에 당착할 때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동시에 만물이 자기 아님이 없다. 보는 자기가 없어지고 동시에 보여야 할 이데아도 없다(『西田幾多郞全集』 5권, p.409). … 자기가 깊이 노에시스적 근저에 몰입하여 절대무의 자각에 이르면서 동시에 객관적으로 생각되는 것, 보이는 것 일체가 절대무의 자각적 한정의 내용 아닌 것이 없다. 이데아적인 것도 비이데아적인 것도 선도 악도 이런 노에시스적 한정의 내용 아닌 것이 없다(同, p.411).” 여기서 니시다는 유식불교(唯識佛敎)에서 말하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조망, 즉 주관과 객관의 경계선이 사라지는 종교적 경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절대무의 인식에서는 이렇게 나와 남, 나와 세계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그런데 이런 조망이 좌선(坐禪)과 같은 종교적 수행의 결과 체득될 수 있을 뿐이라면 철학적 논의의 장에서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이런 체험에 대한 기술은, 철학일반이 아니라 미학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반야경』의 공 사상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중관학파의 문헌에서 이런 조망에 대한 치밀한 논증이 발견되며, 이 논증에서는 나와 남, 나와 세계와 같은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적 구도뿐만 아니라, 주체와 작용, 본체와 현상, 원인과 결과, 언어와 지시대상, 감각기관과 감각대상, 감정과 감정의 담지자(擔持者), 시간, 공간, 삶과 죽음 등과 같이 이 세계를 직조(織造)하고 있는 개념들 및 그런 개념들 간의 관계의 실재성이 모두 비판되며, 여래, 열반, 속박, 해탈 등과 같은 종교적 개념은 물론이고, 무아나 무상과 같은 불교의 핵심 개념조차 비판된다. 또, 그런 비판적 논증 과정에서 사용됐던 공(空)이나 무(無)와 같은 개념들에 대한 실재론적 이해 역시 비판된다.
이러한 비판의 논리는 우리에게 종교적, 철학적 고민을 야기하는 사유체계의 허구성을 지적한다는 의미에서 해탈의 논리라고 부를 수가 있으며, 비판의 대상이 된 주장이나 세계관이 그 스스로 논리적 오류에 빠지게 만든다는 점에서 귀류법적 논리라고 부를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표현하여 반논리적(反論理的) 논리이다. 중관학파에서는 이런 논리를 통해 그 무엇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비판만 할 뿐이다. 중관학파의 이런 비판적 부정은, 명상을 통해 체득되는 황홀경과 같이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도 아니고, 항아리를 깨뜨리는 것과 같이 있던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없는데도 불구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을 시정해 주는 것이다. 마치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꿈속의 누군가가 그것이 다만 꿈임을 자각케 해 주듯이. 중관학파의 문헌에서는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이며, 가치론적인 의미를 갖는 다종다양한 개념들에 대해 이와 같은 비판의 논리를 구사하여 그 실재성을 논파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한 가지 논의에 대해 소개해 본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눈으로 사물을 본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내가 지금 책상 위의 꽃병을 보고 있을 때 나는 나의 눈으로 꽃병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나는 꽃병을 본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나의 눈은 꽃병을 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런 시각과정을 ‘눈은 꽃병을 본다’는 문장으로 단순화시켜 보자. 여기서 말하는 눈은 시각능력으로서의 눈이다. 눈의 본질은 보는 힘, 즉 시각능력이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우리의 눈을 볼 수 없다. 보이는 것은 시각대상들뿐이다. 혹 거울에 비추면 자신의 눈을 볼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때 거울에 비친 눈동자의 모습은 엄밀히 말해 ‘시각능력’으로서의 눈이 아니다. 우리 눈에 비친 시각대상 전체 중 일부일 뿐이다. 시각능력으로서의 눈은 결코 시각능력으로서의 눈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시각의 세계’에서 눈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원래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다(無眼耳鼻…)’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 스스로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눈이기에 눈이 다른 것을 보는 일 역시 있을 수 없다(『中論』, 第3 觀六情品). 자기가 있어야 그와 대립된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각대상은 시각능력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인데 시각능력으로서의 눈의 존재가 확립되지 않기에 시각대상의 존재도 확립되지 않는다. 또, 이렇게 ‘눈’도 실재하지 않고 ‘시각대상’도 실재하지 않기에 그 양자의 관계 개념인 ‘봄’도 실재할 수 없다. 따라서 꽃병을 보고 있는 나의 눈은 엄밀히 말해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되던 시각의 세계는 이런 논의를 통해 그 존재론적 근거를 상실함으로써 절대적으로 무화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무언가를 보고 있을 때, 눈과 그 사물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없다. 그저 하나의 사건만 일어날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와 생각에 의해 이런 하나의 사건을 ‘눈’, ‘사물’, ‘봄’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분할해낸다. 엄밀히 분석해 볼 경우, ‘눈’도 ‘사물’도, 또 그 양자를 관계시키는 ‘봄’도 실재하지 않는다. 절대무를 치밀하게 논증하는 중관학에서는 비단 눈과 시각대상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접하며 사유하는 모든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 이런 분석과정을 동일하게 적용하여 그 실재성을 논파한다.
눈은 시각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개념이며, 더러움은 깨끗함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개념이며, 불은 연료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개념이며, 삶은 죽음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개념이다. 따라서 원래는 눈도 없고 시각대상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며(『中論』, 第23 觀顚倒品), 불도 없고 연료도 없으며(同, 第10 觀燃可燃品),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同, 第11 觀本際品).
‘나는 왜 태어났을까?’, ‘우리는 죽은 후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세계는 도대체 언제 만들어졌는가?’, ‘왜 이 모든 것은 존재할까?’, ‘인식과 존재는 같을까, 다를까?’, ‘우리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절대무의 종교에서는 이런 의문들에 대해 서술적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와 같은 비판적 분석을 통해 의문 자체가 허구의 의문이었음을 우리 스스로 자각케 한다. 이런 의문에 동원된 ‘나’, ‘태어남’, ‘죽음’, ‘감(去)’, ‘세계’, ‘만듦’, ‘인식’, ‘존재’, ‘영혼’ 등은 모두 우리가 생각의 가위질에 의해 이 세계를 자의적으로 오려냄으로써 발생한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선종(禪宗)의 스승들이 기상천외한 말이나 행동으로 제자의 질문을 처리하는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심지어 주먹질(拳)이나 몽둥이질(棒: 방), 고함소리(喝: 할!)와 같은 폭력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제자의 의문을 순식간에 해체시키기 위한 자비의 방편이다.
이렇게 우리가 구사하는 모든 개념들의 실재성이 비판되고, 그런 개념들의 조합에 의해 작성되는 판단의 사실성이 비판될 때, 절대무가 자각된다. 이런 절대무의 자각은 비판적 사고 이후에 일어나는 어떤 신비한 체험이 아니다. 비판 그 자체가 바로 자각이다. 중국적 중관학인 삼론종(三論宗)의 대성자 길장(吉藏: 549~623)은 이런 과정을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명명한다. 여기서 ‘그릇된 것을 논파하여(파사) 바른 것이 드러난다(현정)’는 것은 파사후현정(破邪後顯正)이 아니라 파사즉현정(破邪卽顯正)을 의미한다. 파사현정이란 비판 이후 어떤 다른 세계관을 견지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전까지 자신이 품고 있던 종교적, 철학적 의문들이 모두 허구의 것임을 자각하기만 하면 된다. 이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우리에게 종교적, 철학적 번민을 야기한, 부조리한 듯이 보였던 이 세계는 그 모습 그대로 고요해진다(寂滅). 그리고 이런 절대무를 향한 비판 방식에 숙달될 때 우리는 도저히 종교적, 철학적 고민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 어떤 고민을 해도 모두 엉터리임이 자각되기 때문이다.
종교의 기능 중의 하나로 세계와 인생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 주는 것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특정한 세계관이나 내세관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함으로써, 그런 의문을 해결해 주고자 한다. 그러나 절대무의 종교에서는 우리가 품는 세계와 인생에 대한 의문 그 자체가 잘못 구성된, 아니 필연적으로 잘못 구성될 수밖에 없는 허구의 의문임을 자각케 함으로써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종교적 철학적 의문을 절대적으로 해소시켜 준다. 절대무의 논리는 절대적 해소(解消)의 논리이다.
2) 절대무의 윤리와 종교
지금까지 고찰해 보았듯이 흔히 신비체험의 대상으로 생각되는 절대무에 대한 자각은 이전까지 자신이 바라보던 세계가 존재론적 근거를 갖지 못한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해냄으로써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있는 그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엄밀한 조망(眞)이, 우리의 일상적 사유(俗)와 조합될 경우 ‘함이 없이 한다’ 또는 ‘하되 하지 않는다’, ‘보되 보지 않는다’, ‘가되 가지 않는다’와 같이 ‘즉비’(卽非: ~이면서 ~이 아니다)의 형식으로 조어(造語)된 종교적 명제들이 출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조망이 우리의 사유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아직 세계와 인간의 근저에까지 도달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개념적 사유의 능력과 아울러 희노애락의 감정을 갖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때의 현실적 자아는 종교적 수행과 실천을 거쳐야 비로소 절대무와 합일한다. 찰나적으로 명멸하는 심신(心身)의 흐름에 주시하는 명상 수행을 통해 우리는 자아가 실재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며, 이타행(利他行)과 자기절제의 실천을 통해 자아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순화될 수 있다. 이렇게 실천과 수행을 거치면서 현실적 자아가 무화될 때 진정한 자비심이 용출한다. 자아에 대한 착각과 집착이 제거될 때, 역으로 모든 생명이 한 몸이라는 사실이 체득되기 때문이다.
티가 나지 않게 베풀라(無住相布施)는 부처의 명령이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의 명령에서, 티가 나지 않음(無住相)과 왼손의 모름은 절대무에 대한 지적(知的)인 자각에서 비롯된 표현이며, 베품(布施)과 오른 손의 선행(善行)은 절대무의 감성적 체득에서 도출된 이타적 명령이다. 절대무를 체득한 인격은 베푸는 자와 받는 자의 개념적 구별이 사라졌기에 베푸는 자라는 교만심도 없고 받는 자를 멸시하지도 않으며, 나와 남의 감정적 구별이 사라졌기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마치 자신의 몸과 같이 대한다. 즉,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윤리를 실천한다. 에크하르트(Eckhart)가 말하는 개아성(個我性)에서 벗어난 무심의 경지에서 모든 행위의 동인(動因)은 초월적인 신(God)이었다. 그러나 동체대비의 마음을 터득한 자의 경우,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세계 내에서 고통 받고 살아가는 개개의 중생이다. 그래서 절대무를 터득한 인격은 고통받는 중생의 수준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과 역할로 자비를 실천한다. 이렇게 절대무를 지향하며 실천하는 인격을 불교에서는 보살(Bodhisattvaⓢ)이라고 부른다.
밀교(Tantrism)에서는 지혜의 궁극적 도달점(到達點)이며 자비의 시발점(始發點)인 절대무의 경지를 남녀가 앉아서 성교하는 모습의 합체존(合體尊 = 父母尊: Yab-yumⓣ)으로 구상화하여 종교적 귀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합체존에서 아버지인 남존(男尊: yabⓣ)은 절대적 무아(無我), 즉 이기심이 탈각한 자리에서 샘솟는 지극한 자비와 절대적 무분별에서 창출되는 무한한 방편을 상징하고 어머니인 여존(女尊: yumⓣ)은 우리가 터득해야 할 절대적 해체의 지혜인 반야(般若: prajñāⓢ)를 상징한다. 합체존은 지극한 슬기와 보편적 사랑이 합일하는 절대적 경지를 구상화한 종교적 상징물이다. 절대무란 우리의 일상적 허구를 탈각한 바로 지금 이 자리의 진상(眞相)임과 동시에 우리가 무한히 지향해야 할 지상(至上)의 목표점이기도 하다. 절대무의 종교에서는 ‘논리’와 ‘윤리’와 ‘수행’이 ‘종교’와 함께 한다.(註: ⓢ Sanskrit, ⓣ Tibet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