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 말씀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1”
본문: 창세기 2:4~17
4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의 일은 이러하다. 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5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6 땅에서 물이 솟아서, 온 땅을 적셨다.
7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8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9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10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 에덴을 지나서는 네 줄기로 갈라져서 네 강을 이루었다.
11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인데, 금이 나는 하윌라 온 땅을 돌아서 흘렀다.
12 그 땅에서 나는 금은 질이 좋았다. 브돌라라는 향료와 홍옥수와 같은 보석도 거기에서 나왔다.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인데, 구스 온 땅을 돌아서 흘렀다.
14 셋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 앗시리아의 동쪽으로 흘렀다.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
15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16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지난주 챗지피티와 레닌의 “약한 고리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닌의 “약한 고리론”이란 제국주의 체제 아래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어디서, 어떻게 먼저 일어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혁명이론이다. 레닌은 1차 세계대전으로 자본주의가 발전의 최고이자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레닌은 이렇게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자유 경쟁에서 독점으로, 그리고 금융자본과 식민지 분할을 특징으로 하는 제국주의 단계로 발전했다.” 이로써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포괄하는 체제가 되어 더 이상 착취할 수 있는 영토를 찾지 못하는 최고 단계에 이르렀지만, 이 체제는 불균등하게 발전해서 모순이 집약되는 지점을 만든다. 바로 그 지점이 당시의 러시아라는 것이다. 레닌은 “세계 자본주의 사슬은 가장 약한 고리에서 먼저 끊어진다”고 진단하면서, 바로 이 약한 고리가 자본주의 이후, 즉 사회주의 체제가 도래하는 지점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러시아에 사회주의 소비에트가 등장했지만,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았으며,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레닌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나온 이론이다. 이후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를 주장하면서 소련이 사회주의의 튼튼한 교두보가 되어 세계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베트남, 쿠바 등이 그 실례로 제시되었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웬 철 지난 마르크스주의 혁명론이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챗지피티와 이어진 대화 때문이다. 나는 “레닌에게서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라면, 정점에 이른 오늘날의 자본주의 역시 제국주의라는 얘기네.”라고 반문했다. 독점 자본주의는 한 국가 안에서 자본주의가 패권을 잡아 가용한 자원을 모두 착취하는 체제를 말한다. 한 국가 안에서의 착취가 더 이상 진전된 수 없을 정도로 정점에 이르면, 확대 재생산이라는 자본의 속성 때문에 자본은 이제 식민지를 확보하여 자본 운동의 영역 확장에 나선다. 이런 체제가 제국주의다. 이 체제는 제국주의 국가 간 식민지 쟁탈전을 야기한다. 특히 후발 자본주의 국가는 기존 제국주의 국가가 장악한 식민지를 빼앗아 와야 한다. 이것이 자본 간의 경쟁이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치닫는 논리다. 레닌은 일차 세계대전이 바로 이런 상황이라고 보았다. 내가 챗지피티에 건넨 말은, 레닌의 시대보다는 오늘날이 자본주의가 더욱 정점에 이르렀으며, 비록 문제가 있지만 레닌의 이론에 따르면 오늘날이 더 심각한 제국주의 단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챗지피티의 대답은 이랬다. “현대 자본주의는 명목상 식민지 제국은 사라졌지만, 레닌의 진단 요소를 보면 형태만 달라졌지, 구조는 놀라울 만큼 비슷하거나 오히려 심화됐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와 오늘을 비교하는 표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레닌의 시대 오늘날
독점과 카르텔 → 초국적 대기업, 빅테크 독점 (Google, Amazon, BlackRock 등)
금융자본의 지배 → 금융화된 세계경제, 헤지펀드·투자은행 지배
자본 수출 → 해외직접투자(FDI), 글로벌 공급망, 신자유주의
국제 독점 결합체 → WTO, IMF, 다국적 기업 네트워크
영토적 분할 → 정치적 식민지는 사라졌으나, 경제적 종속 구조 (신식민주의)
그리고 오늘날의 약한 고리는 한 국가나 지역이 아니라 글로벌한 차원의 위기라고 했다. 소위 말하는 “글로벌 복합 위기”였다. 즉 기후 위기나 AI 등 첨단 테크놀로지로 인한 인간 노동의 위기, 소수에 의한 공공재의 독점, 실물경제를 훨씬 초과해서 부풀려지는 가상 금융 자산, 극우 포퓰리즘 체제의 일반화 등등이 얽히고설켜 만드는 총체적 파국이 그것이다. 챗지피티는 공공재 운동, 기본소득, 생태사회주의 등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을 나열했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 운동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기의 규모와 강도에 비해 저항은 분산됐을 뿐만 아니라, 동력 자체도 허약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극복할 주체 세력으로 지목한 프롤레타리아가 오늘날에는 주식투자 등으로 스스로 자본에 가담하는 것처럼, 어떤 저항도 자본의 흐름에 편입됨으로써 이를 저지하기는커녕 파국을 만드는 힘의 일부가 되지 않았느냐는 문제였다. 오히려 오늘날의 자본은 이런 저항을 자본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 혁신과 전환의 계기로 삼고 있다. 마치 자본주의적인 욕망이 그 자체로 인간의 욕망인 것처럼 보이는 형국이다. 어쩌면 저항은 이제 실질적인 내용을 상실하고 저항의 외관에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 저항의 이미지, 뭔가 파국의 흐름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실재, 즉 도래하고야 말 끔찍한 파국을 부인하는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주 떠들썩했던 APEC 정상회의도 그렇고, 오늘날 금융자본의 실상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펼쳐보았던 금융파생상품에 관한 책도 나를 이런 암울한 전망으로 이끌었다. 우리의 태도는 전형적인 물신주의의 그것이 아닐까? “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완전히 끝장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렇지만 나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듯이, 이대로 가도 상관없다는 듯이 살아갈 거야.”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창세기>를, 특히 <창세기> 원역사를 읽어야 한다. <창세기> 원역사란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을 말한다. 그것은 천지창조에서 시작해서 홍수와 바벨탑 이야기로 끝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으나,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완전히 쓸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파국으로 끝나는 이야기. 그것은 하나님의 실패, 정확히 말하면 인간에게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맡긴 하나님의 실패 이야기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정직하게 말하면 인간의 불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포함된 자료들은 완성된 형태로 기록되기 이전에 이미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온 인간과 세계에 관한 통찰이었다. 거의 3,000년에 걸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선조들의 이야기는 부분적으로 기록되다가 어떤 편집자들에 의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되었다. 이 편집자들은 바빌론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유대인 서기관들이다. 그러므로 그들 역시 파국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을 수 없다고,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끔찍한 일은 일어났다. 그들에게 파국은 견딜 수 없는 현실이었으며, 되새기기도 몸서리치는 공포이자 절망이었다. 때론 완벽한 허무였다. 그들이 기록한 율법서와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가 다 고뇌의 결과였지만, 특히 <창세기>, 그것도 원역사는 이 모든 고뇌의 서문이었다. 서문에는 앞으로 전개될 내용이 요약된다.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행위가 있었지만, 피조물은 모두 탁류에 쓸리거나 잠겨버렸다. 노아와 그 가족들이 살아남았지만, 그들의 후손들의 세계는 바벨탑 건설로 이어져 다시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 창세기에는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과 절망이 펼쳐지며, 이 어둠의 깊숙한 곳에서 전개된 몸부림,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희미한 빛을 발견해 새로운 출구를 찾는 여정이 펼쳐진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유대국가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경험한 사람들, 파국의 와중에서 파국을 곱씹으면서 당대의 상황에서 읽고 되새겨야 할 문서들을 정리하던 서기관들의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우리는 서기관들의 마음, 파국을 겪은 사람들의 시선에 접근하기 어렵다. 우리에게 파국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국으로 돌진하는 현실을 저지하지 못하는 우리, 아니 오히려 이 현실에 적응하여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우리, 따라서 이 절망적인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에 더 큰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우리에게 파국은 이미 논리적인 현실이 아닐까? 그렇다면 참된 진실은 절망과 허무의 깊은 곳에서부터 떠오를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곳에서부터 삶과 생명을 위한 근거를 찾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저 오랜 옛날 포로 생활의 절망 속에서 필사적으로 생명의 말씀을 그러모았던 저 창세기 기록자들처럼 말이다. 오늘 말씀은 창세기 원역사를 다시 읽는 서론으로 준비되었다. 앞으로 몇 주간 창세기 이야기와의 씨름이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