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학 교수님의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뒷부분에 관련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무래도 고려 사회에서 구 후백제 지역에 대한 차별 정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현종이 거란 침공시 피난하더라도 전주는 가지 말라는 신하의 말을 받아들이거나, 이 지역 출신 천민으로 양수척 집단 등이 있었던 것 등등의 정황이 있죠. 다만 그렇다고 이 지역 출신 인사가 단 한 명도 등용되지 않았던 것은 아닌듯 합니다.
훈요 십조 가 말도 안되는 부분이 최지몽 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사람의 출신이 차령이남 사람입니다(태조왕건의 유지라 볼수 있는 훈요 십조...... 그 자신 마저도 차령 이남사람인 최지몽을 등용 했습니다. 조금 아이러니 하죠. 차령 이남사람을 등용하지 마라 한 본인이 차령이남 사람을 등용 하다니......). 그 외에도 다수의 차령 이남 사람이 등용되었습니다. 그냥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이용했다고 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좀, 지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만,...왕건의 훈요10조는 왜곡된 것이 아니라 그 내용 그대로라고 봅니다. 다만 8조에서 언급한 '차현이남인을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은 현,전라도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중국동부지역(대략 산동성으로 추정됨)의 이남인들을 기용치 말라는 내용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전라도인들에대한 차별문제는 근대(특히 해방이후)에 들어와서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낸 망국적거짓입니다. 자신들의 정치목적은 달성하였는지 모르지만,...국가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아주 큰 해악을 끼친것이지요...[참고 : 이성계의 본향이 전라도 전주입니다.]
'차현'을 중국산동성 이남에서 찾는 이유(결론만 말해서)....1.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중국동부지역(서신라지역)에서 발흥...2. 후고구려의 왕건은 대략 산동성 부근에서 고려를 개국후 한반도신라(동신라지역)를 통합[환황해권 국가]...3. 당시는 중국이 5대10국으로 분열상태에서 점차 송나라가 패권을 차지하게 됨...4. 이 과정에서 고려의 산동이남 영토였던 차현의 이남 사람들이 고려를 배반하고 송나라에 붙어버림(고려의 산동이남 영토상실)...5. 결국 고려는 송나라에게 차츰차츰 밀려서 하북성 이북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됨...6. 이시기에 북방에서는 요나라가 강성해져서 고려와 송나라의 중간지역(산동북부지역)을 잘라버리게 됨..
7. 결국 요하유역으로 천도한 고려는 당분간 안정을 찾았으나 이내 영토를 확장하려는 요나라의 침략을 받아 고려는 하북영토 대부분을 상실[거란의 1차침입]...8. 또 이어서 '고구려의 계승권'을 둘러싸고 요나라와 고려가 정면충돌하여 결국 고려가 요하유역을 버리고 현,황해도로 천도(도망)[거란의 2차침입]...9.남하한 고려가 북방영토 회복을 계획하자 거란이 고려를 또다시 침입. 고려는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거란과 화해[거란의 3차 침입]...10. 이후 고려는 역사를 개조하여 후삼국 자체가 처음부터 한반도에서 있었던 것처럼 역사서를 왜곡하여 현재에 이름 ===>11. 따라서 왕건이 말한 '차현이남인'은 현,전라도인이 아님...
이 문제에 대해서 역사스페셜이 한번 다루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역사스페셜에서는 훈요십조 발견이 사가에서 되었던 점과, 내용이 왕건은 물론 현종 대 까지의 왕까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점 등을 미루어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결론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말씀하신 8조 또한 다루었는데 왕건의 지지기반 중의 하나였던 나주세력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앞뒤가 안맞는 점이 있긴한듯 합니다. 더구나 나주 오씨 태생의 왕자가 다음 왕도 됐다는 점까지 미루어 보면..요
첫댓글 훈요십조 8조의 해석은 지금도 여러가지로 나뉩니다만 후백제계가 고려 시대 차별받은 전력을 생각하면, 후백제에 시달렸던 왕건의 분노가 들어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도학 교수님의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뒷부분에 관련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무래도 고려 사회에서 구 후백제 지역에 대한 차별 정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현종이 거란 침공시 피난하더라도 전주는 가지 말라는 신하의 말을 받아들이거나, 이 지역 출신 천민으로 양수척 집단 등이 있었던 것 등등의 정황이 있죠. 다만 그렇다고 이 지역 출신 인사가 단 한 명도 등용되지 않았던 것은 아닌듯 합니다.
훈요십조자체가 허구라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만,,, 화랑세기도 그렇고.... 배우면 배울수록 역사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이득권 유지에만 힘을쓰는 이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ㅠ
훈요 십조 가 말도 안되는 부분이 최지몽 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사람의 출신이 차령이남 사람입니다(태조왕건의 유지라 볼수 있는 훈요 십조...... 그 자신 마저도 차령 이남사람인 최지몽을 등용 했습니다. 조금 아이러니 하죠. 차령 이남사람을 등용하지 마라 한 본인이 차령이남 사람을 등용 하다니......). 그 외에도 다수의 차령 이남 사람이 등용되었습니다. 그냥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이용했다고 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좀, 지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만,...왕건의 훈요10조는 왜곡된 것이 아니라 그 내용 그대로라고 봅니다. 다만 8조에서 언급한 '차현이남인을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은 현,전라도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중국동부지역(대략 산동성으로 추정됨)의 이남인들을 기용치 말라는 내용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전라도인들에대한 차별문제는 근대(특히 해방이후)에 들어와서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낸 망국적거짓입니다. 자신들의 정치목적은 달성하였는지 모르지만,...국가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아주 큰 해악을 끼친것이지요...[참고 : 이성계의 본향이 전라도 전주입니다.]
'차현'을 중국산동성 이남에서 찾는 이유(결론만 말해서)....1.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중국동부지역(서신라지역)에서 발흥...2. 후고구려의 왕건은 대략 산동성 부근에서 고려를 개국후 한반도신라(동신라지역)를 통합[환황해권 국가]...3. 당시는 중국이 5대10국으로 분열상태에서 점차 송나라가 패권을 차지하게 됨...4. 이 과정에서 고려의 산동이남 영토였던 차현의 이남 사람들이 고려를 배반하고 송나라에 붙어버림(고려의 산동이남 영토상실)...5. 결국 고려는 송나라에게 차츰차츰 밀려서 하북성 이북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됨...6. 이시기에 북방에서는 요나라가 강성해져서 고려와 송나라의 중간지역(산동북부지역)을 잘라버리게 됨..
7. 결국 요하유역으로 천도한 고려는 당분간 안정을 찾았으나 이내 영토를 확장하려는 요나라의 침략을 받아 고려는 하북영토 대부분을 상실[거란의 1차침입]...8. 또 이어서 '고구려의 계승권'을 둘러싸고 요나라와 고려가 정면충돌하여 결국 고려가 요하유역을 버리고 현,황해도로 천도(도망)[거란의 2차침입]...9.남하한 고려가 북방영토 회복을 계획하자 거란이 고려를 또다시 침입. 고려는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거란과 화해[거란의 3차 침입]...10. 이후 고려는 역사를 개조하여 후삼국 자체가 처음부터 한반도에서 있었던 것처럼 역사서를 왜곡하여 현재에 이름 ===>11. 따라서 왕건이 말한 '차현이남인'은 현,전라도인이 아님...
이 문제에 대해서 역사스페셜이 한번 다루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역사스페셜에서는 훈요십조 발견이 사가에서 되었던 점과, 내용이 왕건은 물론 현종 대 까지의 왕까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점 등을 미루어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결론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말씀하신 8조 또한 다루었는데 왕건의 지지기반 중의 하나였던 나주세력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앞뒤가 안맞는 점이 있긴한듯 합니다. 더구나 나주 오씨 태생의 왕자가 다음 왕도 됐다는 점까지 미루어 보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