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530리를 걷다(네 번째, 完)
(구례→망덕포구, 2016. 4. 9∼4. 10)
瓦也 정유순
풀잎에 맺힌 이슬이 채 구르기 전에 어젯밤 늦게 도착한 구례청소년수련원에서 이른 조반을 하고 국사암(國師庵)으로 가기 위해 나선다. 우리나라에서 벚꽃 길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 난 쌍계사 가는 길이 혹시 길이 막힐까 염려가 되어 서둘러 가는 길에 ‘전망 좋은 곳’에서 섬진강과 아침 눈인사를 나눈다. 국사암은 쌍계사의 말사로 신라 성덕왕 21년(722년)에 의상(義湘)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쌍계사 위쪽에 위치한다.
<섬진강의 아침>
그러나 문성왕 2년(840년)에 진감국사(眞鑑國師) 혜소(慧昭)가 화계면에 왔을 때는 폐사로 있었으며, 쌍계사를 세운 혜소가 머물렀다 하여 국사암이라 불렀다는 말만 전할 뿐이고, 1983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이 암자의 문 앞에는 혜소국사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 자랐다는 1,200년 이상 된 느티나무가 이 암자의 역사를 말하는 것 같다. 이 나무의 특징은 밑 둥에서 가지가 기둥처럼 네 갈래로 뻗은 일목사주(一木四柱)의 거목형태로 사천왕수(四天王樹)라고도 한다.
<국사암의 사천왕수>
국사암에서 쌍계사로 가는 아침 오솔길은 나를 깨우쳐 주는 ‘진리의 길’같다. 한참을 나를 생각하며 가다보면 불일폭포로 가는 삼거리 길에서 우측으로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쌍계사 옆 계곡이 나오는데, 맑고 청아하게 흐르는 물소리와 하얀 꽃송이 3개가 한 묶음 되어 활짝 웃는 삼지닥나무의 은은한 향이 어우러져 천상의 세계에 온 것처럼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쌍계사 삼지닥나무>
쌍계사는 9층 석탑이 대웅전을 호위하고 마애불과 부도는 아름다운 조각으로 다듬어져 예술의 경지이다. 쌍계사(雙磎寺)도 국사암과 비슷한 시기에 삼법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지금의 쌍계사를 중창한 진감국사 부도비는 진성여왕 때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었다고 하는데, 비문은 우리나라 4대 금석문(金石文)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고 한다. 측면으로 서 있는 것이 이채롭고, 비신의 손상이 너무 커서 보조 철 틀로 겨우 모양이 유지되고 있어 안쓰럽다.
<쌍계사 부도>
<쌍계사 진감국사 부도비>
찾아오는 사람들과 반대로 쌍계사에서 나와 화계천을 따라 벚꽃 십리 길을 내려온다. 터널을 만들었던 벚꽃은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이미 떨어져 카펫을 깔아 놓은 양 푹신하고, 빈자리에는 복사꽃이 화려하게 메꾼다. 꽃망울 자리에는 열매가 자리 잡고 있으며, 벚꽃에 치어 안 알아주던 다른 꽃들이 더 화려하게 사랑의 미소를 날린다. 그리고 휴일을 맞아 몰려든 상춘객들로 화개장터는 아침 일찍부터 만원이다.
<쌍계사 벚꽃 십리길>
<야생복사꽃(桃花)>
교통량이 늘어난 구례∼하동 간 19호 국도를 건너 섬진강 안길로 접어든다. 강변길로 접어드니 대나무 밭 사이로 길을 내어 잎 새에 부딪치는 바람소리는 잊혀 진 옛사랑을 다시 깨운다. 특히 엄지손가락 두께의 신우대는 생김새가 매우 날렵하여 옛날에는 화살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간간이 작설(雀舌) 같은 새잎을 내미는 녹차 밭이 나란히 도열 한다.
<섬진강 대나무길>
섬진강은 어느 강에서도 볼 수 없는 희고 넓은 모래톱과 아름다운 경치를 빚어 절로 감탄을 나오게 한다. “촉촉이 젖은 모래는 여인네 살갗처럼 부드러운”(박경리의 <토지>중에서) 섬진강 은모래 백사장에서 몸을 길게 누워 내 모습을 모래 위에 새겨본다. 그리고 “앞으로 섬진강에서는 영구히 모래 채취 허가를 불허 한다”라고 결의한 일원으로서 2005년의 봄을 기억한다. 더욱이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섬진강뿐이기 때문에 더 감개무량하다.
<섬진강의 은모래쉼터 안내>
역시 섬진강의 자연은 살아있다. 우리 고유종인 하얀민들레가 무리를 이루고, 감나무도 새순을 틔워 봄을 노래한다. 소나무도 수꽃을 맺어 짝을 향하고 물가의 버들은 푸른색이 한층 짙어지며, 나이가 많아 보호수가 된 300살 팽나무도 우산 그늘을 만든다. 콧노래 흥얼대며 꿈길을 걸어 도착한 곳이 슬로시티 하동 악양 땅으로 벌써 오전 한나절이 쏜살 같이 지나간다.
<섬진강의 팽나무(수령300년)>
오후에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최참판댁’의 모델이 되었던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에 있는 조씨고가(趙氏古家)로 간다. 교통이 정체된 악양면소재지를 거쳐 정동마을을 지나면 맑은 물이 우물처럼 흐르는 빨래터가 옛날 어머니들의 소곤거림이 들리는 듯하고, 농로 같은 마을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조씨고가가 나온다.
<마을 빨래터>
조씨고가는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趙浚, 1346∼1405)의 직계손인 조재희(趙載禧)가 낙향하여 16년에 걸쳐 지었다고 하며, 일명 조부자집으로도 불린다.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랑채와 행랑채, 후원의 초당과 사당이 불타 없어지고 안채와 방지(方池)만 남아 옛 아쉬움을 더하게 한다. 규모로 보아 큰 대문은 사라진 듯하고, 옛 중문이 대문을 대신하는 것 같은데 문안으로 들어서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형의 못이 자리한다. 네모난 못 안의 둥근 섬 위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조씨고가>
‘자주 찾아오라’는 후손 조씨할아버지의 청을 뒤로하고 조씨고가에서 나와 약 십여 리 떨어진 소설 <토지> 속의 마을을 조성한 평사리 최참판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매화가 피었던 자리에는 매실(梅實)이 콩 알 만하게 자리 잡아 영글어 가는 대신 노란 황매가 조팝꽃과 어울려 향을 더하고, 복사꽃은 봄을 한층 더 무르익게 한다. 모과나무도 꽃을 피웠고, 자목련도 가는 길목을 밝히고, 배나무 밭의 배꽃도 화사하다.
<조팝나무와 황매>
여러 개의 논밭두렁과 고샅길을 비집고 다다른 곳에는 평사리 주막이 나오고, 마루에는 여러 개의 주안상에 사람들이 둘러 앉아 정담을 나누고 있으며, 최참판댁 사랑채로 가는 주막집 뒤란에는 튤립 한포기가 외롭게 피어있다. 사랑채에 들어서면 평사리 넓은 들판이 훤히 보이고, 사랑채를 지키는 최참판(?)과 반갑게 인사하며 인증 샷을 한다.
<평사리 들과 섬진강-황사로 희미함>
<사랑채에서 최참판(?)과 함께>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북적거리고, 상업화되어 가게가 즐비한 마을길을 빠져나와 바쁘게 평사리공원으로 가서 섬진강의 환상적인 노을을 맞이한 후, 숙소가 있는 구례청소년수련원으로 돌아오는데 산수유가 더 유명한 구례군 산동면에는 초사흘 초승달과 ‘산수유 가로등’이 짝을 이뤄 환하게 맞이한다.
<섬진강의 노을>
<산수유 형상의 가로등>
곤한 잠을 자고 섬진강변으로 가기 전에 구례군 광의면에 있는 조선말기 시인이자 문장가이며 순국지사였던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의 위패가 모셔진 ‘매천사(梅泉祠)’로 발길을 옮긴다. 황현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연이어 터지자 위기감을 느끼고 그간 보고 느낀 견문을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을 지었고, 1910년 8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나라도 책임지자”하며 아편을 먹고 순국하였다고 한다.
<매천사)>
매천사를 나오기 바쁘게 평사리공원 부근 섬진강변으로 달려간다. 신우대가 늘어선 대나무 밭 사이로 바람을 스치는 댓잎소리가 섬진강을 노래한다. 두꺼비나루쉼터에서 버드나무쉼터로 가는 길목엔 손질이 잘된 배나무 밭에 배꽃이 화사하게 피었고, 토종 선인장인 백년초는 돌담에 뿌리를 깊게 박았다.
<섬진강의 배나무 밭>
<섬진강의 백년초>
강 건너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일명 매화마을)에 있는 섬진나루터에서는 섬진강 명칭의 유래가 된 두꺼비 전설이 실바람 타고 전해온다. 임금님 수랏상에 오른다는 하동 밤나무쉼터 옆에는 야생 배나무도 꽃이 환하게 피었고, 언덕 아래 강변에는 어선들이 한가롭게 정박해 있다.
<복두꺼비길 안내>
<섬진강의 어선>
지리산과 백운산 깊은 계곡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은 바다와 소통하는 유일한 강으로 자연산 송월 재첩이 나오는 곳이다. 섬진강 재첩은 맛이 시원하고 담백함은 물론 필수 아미노산이 골고루 함유되어 있어 체내 흡수율이 좋고 단백질 등 영양이 풍부하다. 얼마나 많은 재첩을 잡아먹었는지 껍질로 길바닥을 두껍게 다 깔아 놓았다.
<섬진강의 재첩길>
하동 송림공원 쪽으로 가까이 다가서니 ‘해박한 역사의식’으로 늦게 등단하여 짧은 기간에 작가적 지위를 인정받은 소설가 나림 이병주(那林 李炳注, 1921∼1992) 문학비가 섬진강을 배경으로 서있고, “하동포구 팔십리에 물새가 울고(중략)/쌍계사 종소리를 들어보면 알께요/개나리도 정답게 피어 줍니다” 하동포구 노래(남대우 작사)비가 복사꽃 그늘 아래 섬진강을 지킨다.
<나림 이병주문학비>
<복사꽃 그늘 아래 섬진강>
하동송림공원에 도착하니 오전이 후딱지나간다. 소나무 아래에서 준비한 쑥떡으로 요기를 달래고 숨을 고른다. 하동송림(천연기념물 445호, 2005년 2월 18일)은 1745년(영조 21) 당시 도호부사(都護府使) 전천상(田天詳)이 강바람과 모래바람의 피해를 막을 목적으로 섬진강변에 식재하여 조성되었다고 한다. 노송의 수피(樹皮)는 거북의 등처럼 갈라져서 소나무의 건강을 알려준다.
<하동송림>
섬진교를 건너 섬진강 최종 목적지인 망덕포구를 향해 광양시 다압면으로 이동하여 다시 힘차게 걷는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하동송림은 소나무로 만든 성곽 같으나 좌측의 고층아파트가 “개발에 편자”같다. 자전거 길을 따라 내려가니 전라남도 송정리역과 경상남도 삼량진역을 잇는 경전선(慶全線) 섬진강철교가 보이고, 바로 옆으로 보이는 다리는 공사가 한창이다.
<하동송림 원경>
<경전선 섬진강 철교>
‘국토종주 섬진강 자전거길(맹고불고불길)’ 옆 하천에는 갈대밭이 잘 조성되어 있다. 하천에 수초가 무성하면 ‘하천의 자정능력(自淨能力)’이 우수하다는 증거다. 그 속에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둥지를 틀고 그들만의 아주 절실한 존재의 이유가 있음을 알려준다.
<섬진강의 갈대밭>
남해고속도로 섬진강교 밑으로 하여 하류로 내려간다. 고속도로와 나란히 있는 섬진강매화로도 꽃이 진 벚나무가 터널을 이룬다. 망덕포구 2km 표지판이 왜 이리 반가운지 ‘섬진강 530리 길’의 최종목적지가 눈에 보인다. 망덕포구는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위치한 섬진강 하구(河口)다. 망덕포구의 지명은 망덕산(望德山)에서 유래 되었는데, 왜적의 침입을 망(望)보았다는 데서 생겼다는 설과, 전북의 덕유산(德裕山)을 바라본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망덕포구 이정표>
<망덕포구 하류 쪽 광양만>
망덕포구는 전북 진안군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의 강물이 그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광양만을 거쳐 남해바다로 흘러간다. 그리고 섬진강은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큰 강중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기수역(汽水域)이 잘 발달된 지역이다. 기수역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역으로 바다와 내륙이 소통하는 유일한 수역이며, 생태계의 숙려(熟廬)공간이다.
연어와 숭어 등 민물에 산란하는 어종과 뱀장어와 참게 등 바다에 산란하는 어종들이 이곳에서 적응훈련을 한 다음 이동을 하고, 실뱀장어 등 치어들이 바다에서 민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다. 그리고 전어와 섬진강에서만 잡히는 벚굴과 재첩 등 맛있는 어패류들이 많이 서식하는 곳이 또한 기수역이다. 경제적 생태적 가치는 경작지 환경의 250배에 달하며,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하여 가장 보호 받아야할 자연환경이다. 또한 해수와 담수의 여과장치로서의 역할이 매우 크다.
<섬진강의 기수역>
그리고 이곳 망덕리는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친필 원고가 보존되어 있다가 세상에 빛을 보게 한 정병욱(1922∼1982)의 가옥이 있는 곳이다. 윤동주는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하숙집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이 원고를 맡겼다.
<윤동주의 원고가 숨겨진 곳>
또한 정병욱도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어머니에게 소중하게 보관해줄 것을 당부하여 보존해오다가 8∙15광복 후 1948년에 시집으로 발간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정병욱은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로 한국의 국문학 발전에 공헌한 인물이며, 1925년에 지은 정병욱 가옥은 양조장과 주택을 겸한 건물로 문화재청에서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341호)’으로 지정하였으나, 관리는 제대로 되지 않는 듯하다.
<정병욱의 가옥>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고, 바다는 강물을 가리지 않는다. 물은 거만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아래로 흐른다. 섬진강을 걸으면서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자꾸 생각나는 이유는 왜일까? ‘지극히 착한 것은 마치 물과 같다’는 뜻으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하는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선의 표본으로 여기어 이르던 말이다.
물은 스스로 성내지 아니하고
물은 스스로 다투지 아니하고
물은 스스로 형체를 만들지 아니하고
물은 스스로 낮은 곳으로 찾아 간다.
아침에 마사는 한 잔의 물은
우리의 심신을 시원하게 하고
새벽 풍경소리와 어울려 흐르는 물소리는
온갖 풍상을 잊게 한다.
나를 나타내려 애쓰지 말고
굳이 남을 가르치려 덤비지 말고
작은 일에 다투어 승부를 걸지 말고
구름 가 듯 물 흐르듯
그저 물처럼 유유자적하며
흘러가는 물이 되거나,
많은 물을 흐르게 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당신이었으면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