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선수가 선수를 알아본다고 발바닥이 닳도록 싸돌아다니다보면 그 형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궁벽한 오지와 산골만 골라서 다니노라면 때로는 대처가 그립고 사람이 그리울 법도 하건만...
그래도 그 형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 어디를 가나 그를 아끼는 이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주었고 밥에 술에 노잣돈까지 두둑이 챙겨주었을테니 말이다. 늘 굶주린 배를 맹물로 채우고 양반들 잔치상을 기웃거리며-시 한 수로 낚으려고- 끼어들었던 김삿갓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단군 이래 그만한 천재도 없는데 왜 세상을 그리도 삐딱하게 보고 평생을 떠돌다가 여기서 돌아가셨는지 참 모를 일이다.
누구는 이렇게도 말한다.
"세조의 쿠데타에 맞서 출사의 길을 포기한 김시습의 인생행로는 고심에 찬 윤리적 결단의 산물이 아니라 한때의 우발적이고 조건반사적인 행동이 낳은 파문을 자신의 운명으로 감내해야 했던 사내가 택한 니체의 ‘아모르파티(운명에 대한 사랑)’적 변주다. 그래서 김시습은 “인생을 건 한판 도박에 심취했던 얄궂은 운명의 천재였으며 그 서툴게 시작한 도박이 일파만파로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삶 자체까지 분쇄해 버린 고독한 시간의 산책자”이자 “시간과 싸운 승부사”로 포착된다."
하여튼 아모르파티적 변주이건 아니건 간에 그 형이 살았던 1435년부터 1493년까지는 세종에서 세조와 성종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꼽힌다. 어쩌면 금오산 기슭 용장사에 7년 동안 숨어 살면서 '금오신화'라는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시대적인 분위기가 한 몫 했던 거다. 그래도 쭈구리고 앉아서 소설 쓰느라 방랑 생활은 접었지만 불과 스무살 때 읽던 책 홀라당 태워 버리고 머리 깎고 중 된 '반골 기질' 뒷감당이 그리도 버겁고 어려우며 험난한 가시밭길이 될 줄이야...39년 동안...
설잠이라는 법명을 쓰고 조선 팔도 떠돌기를 5년, 관서, 관동, 삼남 지방을 두루 돌아본 후 형이 남긴 글이 《탕유관서록후지(宕遊關西錄後志)》-1458년(세조 4), < 탕유관동록후지(宕遊關東錄後志)》-1460년(세조 6),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1463년(세조 9) 세 권이다. 시기 상으로는 모두 세조가 즉위해서 10년 안쪽의 일이다. 나이 삼십줄을 바라보는 시기가 되자 이 형도 마음이 좀 누그러졌는지 효령대군(孝寧大君;世祖의 叔父)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내불당에서 교정 일을 1년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465년(세조 11) 다시 서울을 떠나 경주로 내려가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금오신화》를 썼다. 그러면서 세상 보는 눈은 많이 부드러워졌음을 입증하는 대목은 효령대군이 청하자 원각사 낙성식에도 참석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금오신화를 쓴 후 10여년 동안은 수락산에 숨어 살다가 세조가 죽고 성종 12년, 1481년에 환속한 형은 47세의 나이로 새로운 삶을 살고자 결심했던 것 같다. 재혼까지 하고 조상 제사도 모셨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불과 2년, 아내가 죽자 형은 다시 불문에 귀의하여 부여 만수산 무량사에서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말년에 형의 외로움은 시비에 "半輪新月上林梢(새로 돋은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로 시작하는 시로써 절절이 새겨져 있다.
만수산 무량사에서 별도의 '진영각'에 전시하고 있는 이 영정의 진본은 최근 국보 1497호로 지정되었다. 말년에 자신이 직접 그렸다는 '자화상'인데 '오세신동'으로 세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기도 했던 모습은 찾아볼 길 없고 많이 늙고 지쳐 보이는데다 '비승비속'의 경지가 아슬아슬하다. 그러나 안으로 똘똘 뭉친 고집이랄까, 일말의 독기 같은 것도 엿보인다.
무량사는 극락전과 더불어 매월당의 이 자화상 덕분에 사철 답사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는 게 도통 시답지 않고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을 때 한 번씩 찾아가 만나보시기를...
1980년대만 해도 극락전 2층 처마를 받치는 기둥이 없었다.
무량사 명부전 창호지 바른 문에 햇살이 눈부시다. 길손에 대고 눈 부라리며 주먹질 하는 이 친구는...
무량사 일주문을 지나 다리 건너 왼쪽에 일중 김충현이 쓰고 정한모 시인이 번역한 매월당 시비가 있다. 작고한 정한모 시인은 부여 사람이기도 하다.
매월당부도.
앞에 세운 비석에는 '오세 김시습 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여기서 나는 아주 어리석은 질문을 형게게 던지고 말았다.
"시습이형,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데 아무래도 그 형 대답은 이럴 것 같다.
"너도 알다시피 좀 외롭고 배고프기는 해도 자유롭게 사는 게 얼마나 좋으냐...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래서일까, 형이 당당하게 자신의 얼굴 그림을 남긴 것은...
...자신의 삶, 운명을 책임지겠다는...
첫댓글 옆에서 남편이 그러네요. 다시 태어나도 배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살겠다고... 그런데 바깥 분들이 자유롭게 사는 동안 아내들은 악처로 변해가니 내.원.참^^
ㅎ ㅎ~시습이형을 무척 사모하시는 듯!!! 불편한점도 쪼깨 있지만 , 안빈낙도...자유,얼마나 매력이 많습니까.사실... 아모르파티적 변주형의 인간들이 적지 않은데,저는 어떤 계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태어 날 때부터 그러한 유전자를 받아 나오는것 아닌가 하고도 생각해 봅니다~^^
이나저나 부여를 여러번 갔었지만,묘하게도 무량사를 못가봤습니다.한번 가봐야 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