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춘영 여사 회고담】
일시 : 2014년 6월 1일
장소 : 경기도 남양주 자택
맹문재 :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오늘 이곳에 오니 김규동 선생님이 새삼 그립네요.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데, 먼저 사모님께서는 김규동 선생님과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강춘영 : 김 시인의 동생이 김일성종합대학 의과대학에 다녔고 나는 간호대학에 다녔는데, 나의 한 친구가 김 시인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김 시인과 그의 동생 규천히 함께 하숙하는 방에 놀러 가자고 해서 몇 번 따라간 적이 있어요. 그 방에 가면 김 시인이 시험 때는 공부를 가르쳐주고, 소설 얘기도 해주고 하니 재미있었지요. 내 친구는 김송이라는 소설가가 고모부여서 문학에 대한 관심도 많았는가봐요. 김 시인이 그 무렵 ‘문학동맹’에 가입하려고 했어요. 김 시인의 동생 규천은 성격도 걸걸하고 학교에서 아주 유명했어요. 유채룡이라는 분이 많이 도와주기도 했어요. 나는 그때 나이도 어리고 세상 물정도 몰라 남자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어요.
맹문재 : 사모님께서는 김규동 선생님을 ‘영감’이라고 호칭하시는데, 책에 낼 때는 ‘시인’으로 옮길게요. 사모님께서는 어떤 연유로 간호대학에 진학하셨는지요?
강춘영 : 내가 살던 황해도에서는 재령 명신고녀가 아주 유명했어요. 그런데 그 학교에 못 가게 되어 평양으로 간 것이에요. 친구가 평양으로 함께 가자고 해서 갔어요. 그래서 간호대학에 들어간 것이에요.
맹문재 : 네. 그러면 어떻게 김규동 선생님을 연인으로 만나게 되셨는지요?
강춘영 : 나는 1947년에 친구 둘과 함께 월남했어요. 아버지한테 3만 원을 얻어 가지고 왔어요. 우리 언니한테만 내가 이남으로 간 뒤 어머니한테 전해달라고 말했어요. 우리 집은 황해도인데 아버지가 과수원을 크게 해서 잘살았어요. 아버지가 노량진에 가서 사과를 팔고 그곳에 집도 사놓았어요. 그래서 서울로 이사를 가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버리고 못 간다고 해서 이북에 남은 것이에요. 초등학교 다닐 때 세라복(세일러복-sailor服)을 입은 것은 나 혼자일 정도로 집안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친구들과 이남으로 내려와 서울대학병원에 취직했어요. 이북에서 받은 졸업장이 인정되어 면허를 받은 것이지요. 내가 월남한 지 1년 뒤에 김 시인이 내려왔어요. 김 시인을 좋아하던 친구도 내려왔어요. 그 친구는 김 시인이 사는 거처도 알고 왔어요. 그때 김 시인은 상공중학교(현재 중대부고)에 교사로 취직하고 있었어요. 그 친구는 나 보고 김 시인의 집에 놀러 가자고 했어요. 친구가 한 번 갔는데, 김 시인이 외출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했어요. 그래서 같이 갔어요. 흑석동이었는데 상공중학교의 서기네 집에 김 시인이 살고 있었어요. 포도를 사가지고 산에 올라가 놀다가 돌아왔어요. 그런데 돌아올 적에 주소를 적어놓고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적어놓고 왔는데, 맨날 편지를 하는 것이에요. (웃음) 편지가 재미있고, 나를 자주 찾아오기도 했어요. 친구는 취직이 안 되어 인천으로 갔어요. 그 친구가 내려온 뒤부터는 대학병원에서 면허를 인정해주지 않아 취직이 안 되었어요. 나도 인천으로 같이 갔다가 돌아와 명륜동에 있는 여자의과대학에 다시 취직했어요. 그 친구는 6·25전쟁 때 휴전되어 환도한 뒤 세상을 떴어요.
6․25전쟁 때 북한군들이 갑자기 서울에 들어왔어요. 그날 김 시인이 나를 만나 점심을 먹고 흑석동으로 갔는데, 가고 난 뒤 얼마 안 있어 북한군이 들어왔어요. 병원에서는 북한군이 들어오기 직전에 직원들에게 개인 해산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가족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김 시인이 하숙하고 있는 흑석동으로 갔어요. 그날 비가 왔는데 막 뛰어서 갔어요. 서울역과 남대문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전쟁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어요. 내가 초저녁에 흑석동에 도착했는데, 얼마 안 되어 한강 다리(인도교)가 폭파되었어요.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니 김규동 선생님과의 만남이 참으로 운명적이네요. 만난 뒤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강춘영 : 다음날 피란을 갔어요. 학교의 서기네 가족 4명과 함께 갔어요. 산 쪽으로 가서 서기네가 가져온 쌀과 감자로 밥을 지어 얻어먹었어요. 한 열흘 정도 있다가 나는 다시 명륜동에 있는 여자의과대학으로 복귀했어요. 병원의 간호사였기 때문에 큰 고생은 하지 않고 지냈어요. 내가 여자의과대학에 4월에 취직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몰라 다행이었어요. 서울대학병원에 있었으면 이북에서 내려온 것이 발각되어 잡혀가 고생을 했을 것이에요. 매일 독보회를 하고 난리였어요. 이북에서 같이 내려온 한 친구는 서울대학병원에 있었는데 쫓겨나 배를 굶다가 어느 날 나를 찾아왔어요. 밥을 몰래 주니 다 먹고 가더라구요. 머리가 아주 좋은 친구였는데 비참했어요. 그러다가 1․4후퇴를 맞이하게 되었어요. 아는 친구가 부산까지 태워준다고 했는데, 김 시인 때문에 피란도 못 가고 있었어요. 김 시인이 피해 다니고 있었으니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국군이 함경도까지 가면 결혼하자고 3만 원을 주고 양복감까지 마련해 놓았거든요. 내가 흑석동으로 다시 찾아가 서기네 집에서 김 시인을 만났어요.
맹문재 : 천만다행이네요. 만난 뒤 어떻게 하셨는지요?
강춘영 : 인천으로 가서 전차상륙함(LST)을 타고 군산으로 갔어요. 군산에 내려 다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탔어요. 인천에서 군산으로 갈 때는 큰 배여서 멀미를 하지 않았는데, 군산에서 부산으로 갈 때는 작은 배여 멀미를 많이 했어요. 부산에 도착했는데 갈 데가 없어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영도에서 큰 솥 공장을 하는 예춘호라는 분의 집에서 살게 되었어요. 김 시인이 예춘호와 아는 사이였어요. 예춘호의 형 부부와 함께 살았어요. 그때 예춘호는 동아대학교 학생이었는데 그 공장의 아들이었어요. 동네에 물이 나오지 않아 사람들이 그 집의 샘물을 길어갔어요. 그 집 2층 방에서 살았는데, 신세를 많이 졌어요. 훗날 예춘호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김대중 사건으로 감옥에도 갔지요.
맹문재 : 말씀을 듣고 예춘호 의원을 검색해보니 파란만장한 정치 생활을 하셨네요. 민주공화당 발기인으로 정계에 입문해 6대 및 7대 국회의원을 지냈는데, 박정희 대통령 3선 개헌에 반기를 든 1969년 4․8항명으로 제명되어 8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했네요. 10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신민당에 입당하면서 야당 정치인이 되었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렀네요. 이후 재야를 대표해 민주화 투쟁을 펼쳤는데, 1988년 13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불출마 약속을 뒤엎고 독자적으로 출마하자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해 부산 영도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네요. 2020년 7월 22일(향년 93세) 노환으로 타계했네요.
부산에서 피란 생활하면서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가족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강춘영 : 어느 날 영도다리를 건너는데 “춘옥이 언니 아니에요?” 하고 누가 물어요. 내 동생 춘옥이의 동창이었어요. 그래서 그 동생 친구가 알려줘서 우리 가족을 만날 수 있었어요. 군산에서 살고 있었어요. 가족이 1·4후퇴 때 이북에서 다 나와 굶고 살더라구요. 어머니가 장질부사 전염병에 걸려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할머니 등 친정 식구들 모두 무사했어요. 섬의 민둥산에 어머니를 묻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무 슬퍼 울다 보니 날이 어두워졌대요. 그래서 마을로 내려왔는데 물이 들어왔을 때 군인들이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몰살했대요. 그래서 밤에 물이 들어왔을 때 배를 타고 넘어왔대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식구들을 살렸다고 했어요.
우리 가족이 있는 곳을 알려준 동생 친구는 봉투를 붙이며 어렵게 살고 있었어요. 피란 생활을 하고 있으니 모두 어려웠지요. 김 시인은 김송 소설가가 주간을 맡고 있는 『신조』라는 잡지사에서 일했어요. 그러다가 『연합신문』으로 옮겼어요. 정국은 국장이라는 사람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정치적으로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이 그 신문을 뺏으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모략질을 했어요. 결국 신문사를 빼앗겼고, 정국은 국장은 사형당했어요. 우리는 정부가 환도하자 서울로 올라왔어요.
맹문재 : 정국은 사건으로 김규동 선생님께서 충격을 많이 받으셨지요. 서울에 올라오신 뒤의 생활이 궁금하네요.
강춘영 : 한 친구를 찾아갔더니 용산에 있는 빈 공장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낼 곳을 부탁했더니 배려해줬어요. 친구는 가난해서 피난도 못 가고 있었어요. 거기에서 10월에 큰아들을 얻었어요. 이대부속병원에 가서 낳았어요. 그런데 돈 있는 사람이 그 공장을 사는 바람에 이사를 가야 했어요. 우리 보고 나가 살라고 하면서 돈 2만 원을 주었어요. 그 돈을 받아 크리스마스 날 을지로 중구청 근처에 방을 얻었어요. 1년 동안 사는 계약이었어요. 김 시인이 그 무렵 『연합신문』을 그만두고 얼마 안 있다가(1957년) 『한국일보』로 갔어요. 문화부장이었는데, 월급이 25만 원이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몇 년 일하다가 ‘삼중당’ 출판사로 옮겼어요. 서재수가 운영했는데, 대단한 출판사였어요. 김 시인이 월급 80만 원을 받기로 하고 편집주간을 맡았어요.
맹문재 : 삼중당 출판사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정말 대단하네요. 1931년 서재수(徐載壽)가 삼중당서점(三中堂書店)으로 창설한 뒤 1946년 ‘주식회사 삼중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취직시험지 『수험연구』(1953, 월간), 대중잡지 『아리랑』(1955, 월간), 아동잡지 『만세』(1956, 월간), 대중잡지 『소설계』(1958, 월간), 종합 뉴스 잡지 『화제』(1958, 월간), 종합 주간잡지의 효시 『주간춘추』(1959, 주간), 교양지 『지성』(1962, 월간), 순문예지 『문학춘추』(1963년, 월간) 등을 발행했네요. 1970년 이후 ‘한국 대표 문학전집’ ‘삼중당 문고’를 필두로 ‘삼중당 영어문고’ ‘삼중당 신서’ 등 전집류도 간행했네요. 1972년 300종을 돌파한 ‘삼중당 문고’는 250만 부나 팔릴 정도로 독자들의 큰사랑을 받았네요. 김규동 선생님의 삼중당 출판사 생활을 좀 더 들을 수 있을까요?
강춘영 : 삼중당에서 나온 『아리랑』이 굉장히 잘 팔렸어요. 김 시인이 열심히 일했고, 잘 다녔어요. 집안이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어요. 그러다가 1960년에 김 시인이 ‘한일출판사’를 차렸어요. 『사랑』 잡지도 내었어요. 창간호는 다 팔렸는데, 2호는 팔리지 않아 집안에 잔뜩 쌓였어요. 그래서 김 시인이 계속하다가는 망할 것 같으니 잡지를 다른 사람한테 팔아넘겼어요. 김영삼 씨와 관계된 사람이었어요. 책상까지 다 줬어요. 그러니까 같이 일하던 임진수, 임수정 씨가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간신히 찾아왔어요. 그래서 3호를 내었는데 아주 잘 되었어요. 매월 100만 원을 저축하고 단행본을 2권 만들 정도였어요. 회현동에 있는 120평이나 되는 큰 집에서 살기도 했어요. 건평 60평이나 되는 건물이어서 거기서 출판사를 운영했어요. 일본 사람이 살던 집이었는데 소나무가 있고 연못이 있고 물도 나와 동네 사람들이 물을 길어갔어요. 그 뒤 몇 번 이사를 갔는데, 모두 큰 집이었어요. 김 시인이 젊어서 경제 활동을 잘 했어요.
맹문재 : 그때는 자제분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 돈도 많이 들었을 텐데 참으로 다행이네요. 출판사를 몇 년이나 운영하셨는지요?
강춘영 : 큰아들이 서울고를 나와서 서울대학에 입학했고, 둘째 아들이 경복고를 나와서 서울대학교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둘째는 행정고시를 합격해도 면접에서 떨어지고,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면접을 해서 떨어졌어요. 정치적인 이유가 영향을 끼친 것이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미국으로 유학갔어요. 나중에 은사인 송상현 교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아 변호사가 되었어요. 송 교수님은 독립운동가인 송진우의 손자였어요.
출판사는 한 10년 정도 했어요. 김 시인이 나이도 들고,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나가서 『명랑』 같은 잡지를 내고 해서 편집장을 하던 최정인 씨에게 넘겼어요. 그런데 그분도 나중에는 목사 공부를 한다고 그만두었어요. 그분이 수석을 좋아해 김 시인이 따라다니기도 했어요. 그분은 친구에게 빌린 돈을 못 갚아 수석으로 갚을 정도로 수석을 모았는데, 그때는 수석이 굉장히 인기가 있었어요.
맹문재 : 김규동 선생님께서는 아주 성실하시고 인정이 많은 분이시지요.
강춘영 : 김 시인은 부지런하고 재주가 많았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아주 잘했어요. 우리가 역삼동으로 이사를 하던 날 집 안에 있는 쌀을 일하는 사람에게 다 주었어요. 그 바람에 처음 간 동네라서 지리를 잘 몰라 쌀 사는 데 아주 애를 먹었던 일이 떠오르네요. 나도 친구들에게 돈을 많이 떼었어요. 친구들이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다 주었는데, 글쎄 모두 떼먹고 도망갔어요.
맹문재 : 되돌아보니 김규동 선생님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강춘영 : 요즘 앨범을 뒤적이고 보면 그래도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 시인이 그리워지기도 해요.
맹문재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김규동 선생님의 문단 생활 등은 다른 기회에 듣기로 할게요. 내내 건강하세요.
■ 강춘영
1929년 황해도 출생. 평양도립대학 간호학과 졸업. 김규동 시인과 결혼해 세 아들을 두었다.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 출생.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있음.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