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얄야숩
2006년 2월 1일 본문 말씀: 이사야 7:3-8
7:2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7: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찌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7:5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7: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곤하게 하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파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을 삼자 하였으나
7:7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7: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찌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기를’ 요구하십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행위가 다 악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막무가내로 믿으라고 윽박지를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해야 믿지 않느냐”라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있어 ‘믿을 만 한 것’을 하나님은 믿으라고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믿을 수 있는 일이라면 이미 믿음이란 범주에서 이탈될 내용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본문의 내용은 예언에 관한 겁니다. 아직 두 나라가 유다 나라를 쳐들어오기 전의 장래 일어날 사항을 미리 알려주는 겁니다.
과거에 한 번 이 땅에서 실습이 되어야 사람들은 믿을 만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한 번도 과거에 일어나 본 적도 없는 것을 믿으라고 할 때에 과연 그 예언을 믿을 능력자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의 내용 자체를 거부하기 십상입니다. 예를 들면 4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두 대국이 작은 나라인 유다 나라를 강하게 밀어붙일 때, 하나님은 그 두 나라를 ‘연기나는 부지갱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곧 불이 꺼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별 볼일 없는 ‘부지갱이’와 ‘군사 강대국’과 과연 이 세상 어느 누가 자연스럽게 매치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아마 이럴 경우는 가능할 것입니다. 두 나라가 구석기 시대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현 유다 나라가 핵미사일을 비롯해서 최신 전자 무기를 보유했다면, 그 두 침략국과 ‘부지갱이’를 쉽게 연결시키면 누구나 “믿습니다. 확실히 믿습니다”라고 반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지 않습니다. 도저히 그 침략국은 결코 하잘 것 없는 ‘부지갱이’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믿으라는 겁니다. ‘부지갱이’라고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서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당황스러운 상황은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를 네가 믿느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을 사전에 예비 실습한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실습해 보지도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었다가 실제로 죽고 보니 예수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고,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으로 드러나면 그 때 어떻게 하시렵니까? 지난 날 성경에서 대해서 완벽하게 속아버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디에다 분풀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이란 이처럼 실습해서 다지고 또 다져서 믿을 입장이 못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 목숨을 요구하십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돌아가신 자기 목숨에다 걸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어떤 취지에서 우리보고 믿기를 요구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한 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만약 참으로 아람과 북쪽 이스라엘 나라가 유다 나라를 쳐들어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꼭 유다 나라에 알려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 세상에 많은 민족과 국가들이 일어났다가 소실되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일일이 관여하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디모데후서 3:13에 보면,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이 장래나 운명이 어떻게 되든지 하나님께서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 나라 만큼은 이사야를 통해서 두 나라의 침공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유대 나라를 결코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친 것입니다. 유다 나라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아니라면 그냥 방치하고 마십니다. 선지자까지 파견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생각까지 해볼 수 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면 아예 강대국이 침략하지 않도록 조치할 수는 없었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 당시 유다 나라 성직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유다 나라를 택한 나라로 간주하시기에 그 어떤 어려움도 들이닥치거나 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안일함이 퍼져 있었습니다. 과연 이들 성직자들의 말이 맞는 겁니까?
아닙니다. 본문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하여금 유다 나라 왕으로 만날 때 그냥 만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데리고 만나라고 합니다. 아들 이름이 뭐냐 하면, ‘스얄야숩’입니다. 이 말의 뜻은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러하십니다. 유다 나라 전체가 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라 그들 중에 ‘남은 자’만이 하나님의 친 백성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 중에 남은 자들만 따로 뽑아 100% 진짜 유다 나라를 따로 만들어 유지 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장차 오실 진짜 남은 자이신 예수님이 비록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아무도 그 분을 하나님 아들로 믿지 않는 현 인간 세상의 죄악된 사태도 아울러 드러내시기 위한 조치로서 ‘남은 자’만 구원하시는 방식을 채택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 세계는 한 번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간주되면 그것을 우상시하여 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우상이 성전일 수도 있고, 교회일 수도 있고, 온갖 종교적인 체험일 수도 있습니다. 지난 과거의 화려하고 놀라운 은총을 현재와 미래까지 끌고 가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극히 이단적입니다.
왜냐하면 어제의 예수님만이 예수님이 아니라 오늘의 예수님이 여전히 새로운 사건 속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구원받기로 남게 된 ‘남은 자’들은 계속해서 사람들로부터 못알아보는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좁은 길로 말입니다. 남들은 다 넓은 길로 가는데 ….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이 가신 그 십자가를 길로 따라 오라고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 나온 능력으로 믿어지기에 하나님은 예언 말씀을 가지고 숨어있는 ‘남은 자 찾기’에 나서는 식으로 구원하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이 전부 다 믿어진다는 것으로 신자됨을 확신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이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