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하나케의 <해피 엔드>
하나케 감독의 2017년 작 <해피 엔드>는 2012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아무르>의 다음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아내의 존엄한 삶을 지켜주기 위해 질식사 시킨 한 노인과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위선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외면적으로는 행복하고 서로에 대하여 지극한 애정을 잃지 않는 성실한 중산층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노인의 딸은 아버지의 사업을 인계받은 유능한 CEO이며 아들은 성공한 의사이다. 하지만 이들의 성공적인 삶을 통해 표현되는 행복함과 관대함은 거짓으로 포장되어 있다. 딸은 자신의 아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아들을 믿지 못해 회사에서 일어난 산업재해를 계기로 이사에서 해임하는 냉정한 면을 보인다. 아들 또한 현재의 가정을 이루기 전에 과거의 부인 사이에 태어난 딸을 갖고 있으며 현재도 다른 여인과 불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해피 엔드>는 이렇듯 거짓과 위선을 통해 유지되고 있는 중산층의 불안한 행복을 그린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죽음’의 문제이다. 전작 <아무르>가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진 인간적 삶의 중요성과 존엄한 죽음을 다루었다면 <해피 엔드>는 혼자 남은 노인의 죽음과 관련된 문제이다. 또한 여기에는 노인의 죽음과 대비되는 한 소녀의 죽음의 문제 또한 나타난다. 죽음은 삶의 불안함과 삶이 더 이상 의미 없음의 결과이다.
소녀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이전했지만 우연히 아버지의 불륜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아버지의 행동은 과거의 버림받음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트라우마를 일으켰으며 결국 불안은 죽음을 시도하게 만든다. 다행히 성공하지 못하지만 죽음에 대한 시도는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자격을 부여한다. 다른 가족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철저하게 개인적 욕망을 투영시키는 존재들이란 점에서 소녀와는 분명 거리가 있다. 이들에게 늙은 노인은 보호의 대상이며 자신의 현재적 위신을 위해 부양적 의무를 다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노인은 과거 자신의 병든 아내를 죽일 정도로 무의미한 삶을 거부하는 태도를 지녔다. 그 또한 혼자 걸을 수 없고 방에 갇힌 삶을 살게 되자 현재의 삶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그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 노인은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한다. 차를 몰고 나무에 충돌하거나, 자신의 측근 이발사를 통해 총과 약을 비밀리에 구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하지만 모두가 실패한다. 노인은 우연히 손녀의 죽음 시도 이후 자신의 아내를 죽인 과거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딸의 약혼식 때 손녀에게 바닷가까지 힐체어를 밀어달라고 부탁한다. 소녀는 할어버지의 부탁을 기꺼이 실행하고 바닷가로 향하려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휴대폰으로 촬영한다. 이번에도 성공은 불가능해 보인다. 휴대폰 화면 너머로 뛰어나오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해피 엔드>라는 제목처럼 무엇이 행복한 마무리일까? 노인들의 상투적인 희망인 ‘9988234’는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은 어느 순간 비참한 죽음의 끝에서 진부하면서도 무력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죽음은 항상 갑작스럽게 오지 않는다. 죽음은 때론 인간을 끊임없이 지루하게 파괴하면서 진행된다. 그때 인간은 다가오는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죽음 그 자체와 싸우는 것이 의미있는 일일까? 삶의 특징을 모두 상실한 채 오직 생명의 최소 기준을 지키는 행위가 가치있는 일일까? 노인은 그것이 비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삶의 모습을 보여 줄 때만 가치있다고 그는 믿는다. 집안에 갇힌 채 보호의 대상으로 전락된 현재의 상태를 그는 수용할 수 없다. 그에게 삶의 행복한 마무리는 주체적으로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의지는 수많은 외부적 위선으로 둘러싸인 현대적 삶에서는 불가능하다. 가족들은 노인의 주체적 죽음 선택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들의 도덕성을 공격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속 노인과 같은 태도는 어쩌면 소수에 가까울 수 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은 시간의 쇠퇴 속에서 변화된 육체의 상실을 더 이상 그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현재를 지속시키려 한다. 이러한 개인의 욕망은 기술의 발달과 상업적 광고에 힘입어 더욱 더 확장되고 있다. <해피 엔드> 속 노인처럼 움직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충분하게 먹을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 또한 많이 있다. 움직이지 못하고 ‘식물인간’으로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지 못하는 개인과 가족들의 의식이 그것을 보여준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무력한 모습일지라도 생명 유지는 그 자체로 절대적인 선으로 작동되는 것이다.
<해피 엔드>는 삶의 마무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느 지점까지 당신의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 숨이 넘어갈 때까지 생명을 지키기 위해 투쟁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주체적 삶의 형태가 불가능할 때 기꺼이 삶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어있는지 묻고 있다. 그러면서도 죽음의 자율성에 대한 문제 또한 제기한다.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자신이 더 이상 삶의 주체로 살아갈 수 없을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의지가 주어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죽음의 선택이 악용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을 최소한 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서 ‘존엄사’를 허용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감독은 존엄한 죽음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노인의 모습을 통하여 용기 있는 인간의 ‘해피 엔드’를 확인한다. 삶도 죽음도 자신의 자유와 선택임을 그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어디까지가 인간적인가? 선택은 실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