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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좋은 날
- 인터넷을 배회하다, 우리 공부하는 초심자 화두가 보이기에 올려 봅니다!
徐行踏斷流水聲. 서행답단유수성
縱觀寫出飛禽跡. 종관사출비금적
벽암록 제 6 칙 운문(雲門) 일일호일(日日好日) 언제나 좋은 날
본칙(本則)
운문이 말했다.
'15일 전의 일은 그대들에게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에 대해 한마디 말해 보라.'
대중이 대답이 없자 운문 스스로 대신 답하여 말했다.
'날마다, 날마다 참 좋은 날이다.'
擧. 雲門垂語云, 十五日以前不問汝, 十五日以後道將一句來. 自代云, 日日是好日.
(거. 운문수어운, 십오일이전불문여, 일오일이후도장일구래. 자대운, 일일시호일.)
운문이 말했다.
지난 과거의 일들은 이미 지난 것이고, 또 오늘에 녹아 있으므로
그 잘잘못을 그대들에게 묻지는 않겠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은 오늘 그대들의 마음에 달렸다.
미래의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여야 참 진리대로 살 수 있는지
얻은 소식이 있다면 한마디 일러 점검을 받아보라.'
대중이 대답이 없자 운문 스스로 대신 답하여 말했다.
날마다, 날마다 참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
참 진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라면 언제나,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즐거운 좋을 날 일 수밖에 없다.
- 운문문언은 설봉의존의 제자이다.
광동 성 소주 운문산 광봉 원에서 선풍을 날렸다.
5가 7종의 하나인 운문종의 개조로 949년에 입적. 생년은 모른다.
운문의 일일시호일이 깨달은 이의 이상적인 일상생활을 직설적으로 나타냈다면,
설두의 송은 일일시호일의 체험자의 경지를 자연에 빗대어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15일.
중국 선원의 풍습으로는, 어떤 선원에 주지가 취임하면 입원상당식(入院上堂式)
또는 진산상당식(晋山上堂式)으로 부르는 선방의 책임자로서의 취임식이 벌어진다.
이 때 새로 취임한 주지는 법상인 수미단 위에서 몽둥이 같은 경책을 들고 희색을 얼굴에
가득 띄우고 오만하고도 자랑스러운 태도로 선객들을 향하고 일어서 있고,
사방에서 모여든 선객들은 광기어린 목소리로 묻는다.
주지인 화상은 큰 소리로 할을 하기도하고 뭉둥이 휘두르며 방도 내리며,
선승들도 떠들썩하게 묻고 맞장구치기도 한다.
사회자도 없고 의사진행 발언도 없다.
그 모습이 마치 호떡집에 불이 난 것처럼 시끌벅적하고,
남이 볼 때에는 꼭 미친 사람들 도깨비 잔치 같지만,
선가에서는 가장 진지하고도 격식을 벗어난 구도의 문답이다.
이를 대참(大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매달 1일 5일 10일 15일 20일 25일 등의 5일 간격으로
주지가 법상에 올라 설법을 하는데 이를 오참(오참)이라고 한다.
특히 초하루와 15일의 오참을 삭망상당(朔望上堂)이라고 하여 특히 중요시 한다.
이 외에도 수시로 이루어지는 소참(小參)이 있고,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독참(獨參)도 있다.
오참이나 소참 그리고 독참에 이루어지는 문답의 성격은 대참과 마찬가지이다.
일체의 격식을 벗어버리고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자재하게 학인의 경지를 점검한다.
이런 관례로 보아 운문이 15일 이라함은 15일 아침에 이루어진 망상당(望上堂)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 부처님의 금구옥설에 가까운 초기경전인 수타니파타에 이런 말이 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로 도피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과거에 집착하거나, 꿈같은 미래의 환상 속으로 도피하여 현재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모두 잘못된 것이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 속에서 그대로 작용한다.
영원한 시간은 처음도 끝도 없이 영원히 현재로 흐른다. 오직 현재 속에 다 들어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현재를 소홀히 한다.
땅으로 인하여 넘어진 자는 땅을 딛어야만 일어설 수 있듯이,
삶의 현장도 수행의 순간도 언제나 여기 이 자리 현재 뿐이다.
15일 이전의 일을 묻지 않겠다는 말은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에 충실 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현재에 대해서도 현재의 부딪치는 일에 충실 하라는 뜻과
아울러 부딪치는 일의 진여적인 측면 마음의 본성을 놓치지 말라는 보다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깨달음의 분상에서 한 점 흐트러진 마음 없이 부처님과 똑 같이 살라는 말이다.
이는 진리의 용(用) 적인 측면을 그대로 발휘하라는 말로서,
그러려면 그 자신이 항상 진리의 체(體)에 입각하고 있어야 한다.
운문이 날마다,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했음은 그 자신이
언제나 진리의 체(體)에 입각하고 있음을 뜻한다.
결국 운문이 학인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 진리의 당체에 계합하라는, 깨달음을 얻으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자
아울러 더욱 간절하고도 절실한 수행에 대한 당부라 할 수 있겠다.
날마다, 날마다 좋은 날일 수 있으려면 중생심을 매일 비우고
보리심을 더욱 채워야 할 것이다. 비우면 비운 만큼 본래 공덕은 자리를 넓힐 수 있다.
송(頌)
하나를 버리고 일곱을 가졌다.
온 천지 어디에도 그만한 사람 없다.
깊은 산 물소리 따라 서서히 걸으며,
날아가는 새의 자취 보는 대로 그려낸다.
무성한 풀, 낮게 드리운 구름이여.
수보리 앉은 바위에는 꽃들이 흩어져 있구나!
가련하고 가련하다 허공신 순야타여!
꼼짝도 하지 말아라.
꿈틀만 해도 30방 내리리라.
去却一拈得七, 거각일념득칠
上下四維無等匹. 상하사유무등필
徐行踏斷流水聲. 서행답단유수성
縱觀寫出飛禽跡. 종관사출비금적
草茸茸, 煙冪冪. 초용용, 연멱멱
空生巖畔花狼藉. 공생암반화낭자
彈指堪悲舜若多. 탄지감비순야다
莫動著. 막동착 動著三十棒. 동착삼십방
- 하나를 버리고 일곱을 가졌다 去却一拈得七
하나는 절대를 가리키는 말이고, 일곱이란 칠음 칠불 칠성 등등의 일곱과 같이
상대적인 현상계의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를 버리고 일곱을 얻었다 함은 절대의 세계에 입각하여 전적으로
절대적 진리의 상대적인 운용측면을 표현했다는 말이 된다.
운문의 말씀은 진리의 본체가 아닌 드러남(用)의 측면이란 말씀이다.
- 온 천지 어디에도 그만한 사람 없다.(上下四維無等匹)
사유는 동서남북 상하는 위아래 그러므로 사유상하는 온 우주를 가리킨다.
무등 필 같이 필적할 만한 존재가 없다는 말.
세상천지 어디를 찾아보아도
모두들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이끌리는 중생심으로 사는 이들 뿐,
운문과 같이 진리 그대로의 삶을 사는 이가 없다는 말이다.
운문과 똑 같은 경지의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도 참 진리와
하나가 되어버린 만큼 우열을 가리지 못한다.
참 진리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깊은 산 물소리 따라 서서히 걸으며,(徐行踏斷流水聲)
다가오는 시절인연에 정확히 그대로 순응한다.
맺힌 인연이 오면 풀어주고, 막힌 사연이 오면 뚫어준다.
급할 일도 서두를 것도 없다. 급하고 서두르는 일이 생기는 것은
무언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모든 인연에 진리적인 측면을 밝히는 것보다 더 급하고 서두들
다른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참 진리를 깨달으려는 이와 깨달은 이가 머무는 집,
절을 지을 때는 원래 못을 박지 않도록 되어있다.
홈을 파고 그것들을 인연 따라 끼어 맞추면 건물을 저절로 완성되게 되어 있다.
못을 박는다는 것은 강제적으로 서로에 상처를 내어 억지로 묶는 것과도 같다.
기둥과 서까래는 서로의 역할을 할 인연 즉 결합의 홈이 맞으면 결합된다.
무리하게 억지로 서둘러 결합시켜서는 안 된다.
바늘 등에 실을 묶어서 옷을 꿰 멜 수 없는 것처럼 서두르거나 급한 일은 탈이 나게
마련이며, 또 잘 살펴보는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매순간 다가오는 매순간 일어나는 인연과 생각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음으로 바꾸는 일보다도
급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시절인연을 놓치지 않고 대응한다는 운문의 경지를 설두가 표현한 구절이 될 것이다.
- 날아가는 새의 자취 보는 대로 그려낸다.(縱觀寫出飛禽跡)
새가 공중에 날아가면 자취가 보이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경지이다.
그러나 운문으로 대표되는 깨달음의 분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소리가 들려올 때 그 소리에 숨어 담겨져 있는 모든 사연들 아울러 다 보고 안다.
소리를 듣지 않고(聞世音) 소리를 보는(觀世音) 도리이다.
한순간의 행동을 보아도 참스승은 그 행동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행동을 일으킨 마음을 살펴보고 있으므로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그대로 알아버린다.
숨은 동기까지 다 알아차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날아가는 새의 자취도 볼 수 있다.
아울러 그 새의 자취를 그대로 그려낼 수도 있다.
고수가 바둑을 둘 때에는 필연적으로 둔다고 한다.
하나의 대국 방향이 정해지면 거기에 맞는 최선의 선택들만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그 길은 거의 외길수순이라고 한다.
하나의 바둑돌이 놓여 질 때 그 속에 이미 전체적인 대국의 방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참 진리의 입장에서 앞에 다가오는 인연을 맞이하여 바라보면
그 인연의 당자보다도 더욱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본인보다도 더욱 정확하게 그 인연을 그려내고 재현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스승 앞에서는 내 모든 것이 다 투영될 뿐,
어설픈 거짓이나 장난이 통하지 않는다.
- 무성한 풀, 낮게 드리운 구름이여.(草茸茸, 煙冪冪.)
온 대지는 제각각의 생명의 꽃을 인연 따라 피우는 풀들로 가득 차 있고,
온 하늘에는 낮은 구름이 제각각의 사연대로 흘러 다니고 있다.
천지가 하나가 되어 상대계의 모든 현상들이 절대계의 신비로움 속에서 제각각 빛을 발하고 있다.
모든 현상들이 진리의 다른 표현임을,
모든 일들이 참진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 수보리 앉은 바위에는 꽃들이 흩어져 있구나.(空生巖畔花狼藉)
공생(空生)이란 인도설화에서 허공신(공을 주하는 신 Sunyata)의 번역어이지만,
서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공사상에서 제일 으뜸이라고 중국 사람들이 생각한
수보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다.
수보리가 공사상의 대표적인 인물로 생각되었으므로 수보리를 사람들은
순야타 라고도 불렀다.
수보리가 바위에 앉아 삼매에 들어있을 때 그에 감화를 받은 하늘의 신 제석천이
사방에 하늘 꽃을 뿌려 공경과 찬탄의 경의를 표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이 구절은 그런 인연을 빗대어 나온 것으로, 공을 체득하였으면
절대 공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고
운문과 같이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천신의 공양을 받아 존경을 받으면 세상의 부러운 일은 될 수 있겠지만,
세상의 부러움이란 차별적인 마음을 더욱 유발할 뿐 정작 중요하고도 급한 것은
절대적인 공에서 그 정신 그대로 모든 생명의 꽃을 피워나가는
절대적인 공을 적극적으로 현상 화 사실화하는 쓰임(用)이 있어야만 한다.
아래구절과 함께 공에 빠진 이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이다.
- 가련하고 가련하다 허공신 순야타여,(彈指堪悲舜若多)
탄지란 엄지 손가락으로 검지손가락을 퉁겨 탁하고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남에게 주의를 주거나 남의 주의를 불러일으킬 때 또는 남을 멸시하는 표현을 할 때 쓰는 행위이다.
여기서는 남을 비꼬는 뜻으로 쓰였다. 탄지비감이란 저 불쌍한 녀석이란 뜻이 된다.
순야타가 앞에서는 수보리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다면
여기서는 공을 주하는 신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공에 빠진 일체의 존재를 다 지칭하는 말이 된다.
절대정신세계를 현실에서 자유자재로 쓰는 운문에 비하여 볼 때
공에 빠진 무리들의 행위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한심한 것들이란 뜻이 된다고나 하겠다.
- 꼼짝도 하지 말아라.(莫動著) 꿈틀만 해도 30방 내리리라.(動著三十棒)
그대들이 정녕 공을 알고 있다면 절대공의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은 체,
그 절대공의 세계를 다 표현하라는 말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진부한 말로서 장황하게 표현하여야만 그대들의 사상을 나타낼 수 있다면
그것은 참 진리에서 십만 팔천리나 멀리 떨어진 것이 되리니
무수히 쏟아지는 방 맞기를 피할 수 없다.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이나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은 개념화된 껍질 뿐의 언어인 교리용어로밖에
참 진리를 표현할 수 없겠지만,
진실로 아는 사람은 일상어로 나아가서는 말을 떠난 행동에도 그대로 담아 전달할 수가 있다.
현실에서 보더라도 어떤 학문의 대가가 그 학문에 대해 가장 마지막으로 쓰는 책이
바로 어려운 학술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상어로 쓰여 진 개론서이다.
정말로 아는 사람은 문자나 개념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 공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것을 형상화하여 실천하라는 이 말씀은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씀이나 '형상이나 소리로 부처를 구하지 말라'는 금강경의 말씀과도 궤를 같이한다.
언제나 좋은 날을 사는 사람, 초기경전 쌍윳따 니까야 에서는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 않음으로서 거센 흐름을 건넌'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험난 길을 평안히 걷는' 사람이다.
마음은 언제나 삼매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로 이 세상인연을 다 꿰뚫고 맞이하는 깨달은 이의 삶, 언제나 좋은 날을 사는 사람이다.
평상시에는 삼매인 듯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다가도 일에 닥쳐서는 흔들린다면
그는 삼십방을 피할 수 없으리라.
남의 일에 대해서는 부처이다가도 자신의 일에서는 중생인 사람들이 많다.
남의 일에서도 자신의 일에서도 언제나 떳떳한 부처이어야 한다.
언제나 좋은 날이다. 아울러 언제나 좋지 않은 날일 수도 있다. 업을 다스리고 풀어가며 사는 사람에게는 나날이 좋은 날이다.
업에 이끌려고 맺어가며 사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좋지 않은 날일 수밖에 없다.
첫댓글
'남의 일에 대해서는 부처이다가도 자신의 일에서는 중생인 사람들이 많다.' 바로 제가 돌아보아야 할 제 모습 같습니다. 더욱 노력하여 남의 일에서도 자신의 일에서도 언제나 떳떳한 부처가 되도록 정진하겠습니다. 근데 정일거사님! 그 대참이라는 것 참관하신 적이 있는가요? 저는 몇년 전 지리산 실상사에서 [야단법석]엔 참여한 바 가 있는데요,
대참이라는 것은 처음 듣습니다.
언제 대참 기회가 있으면 우리 한 번 참석하면 어떨까요?
애고~ 대참! 저도 처음 듣는 얘기 입니다~!ㅋㅋ
그럼 한 번 수소문 해보시지요!
어디서 한다면 우리 파수공행 합시다!
日日新 又日新 하고 있습니다.
일취월장도 하시지요! 곧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실 것 같네요!
부디 이 중생도 좀 구원해 주사이다!
과거와 미래도 오늘 지금 이 시간 이 순간 속에 다 들어 있다는 말씀 재삼 음미해 봅니다.
예! 흑곰님! 처음 뵙습니다!
문득, 다니시기가 편안 하신가 여쭤 보고 싶습니다~!ㅋㅋㅋ
다 들어 있다 기 보다는 다 쓰잘데기 없고, 현제만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