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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 ]
98 예수고리 수련회,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성경에는, 행할 것은 없고 믿을 것만 있다 !!
* 성경을 보면 일관되게 흐르는 것 중의 하나가 '행할 것은 없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행함에 대해서 부담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뭐가 있는가? '믿을 것만 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야고보서 1장 9절에서, 낮다고 해서 높음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는 비록 높은 척을 하지만 실제로는 낮은 사람인 것을 믿는다는, 이렇게 믿을 것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0, 11절에서도 부자니까 가난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나는 비록 부자이더라도 그런 것이 헛되다는 것을 믿습니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약 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약 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약 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 그러니 성경에서 인간이 행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제 아무리 나름대로 열심히 행해보아도 사고만 친다는 것이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 목사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참는 자가 복이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아무리 눈을 뜨고 살펴보아도 본문에 그런 내용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성경에도 없고 말이다. 어떤 자가 복이 있는고 하니, 시험을 참는 자가, 즉, 유혹을 견디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시험을 참아야지' 라는 차원이 아니라, 복이란 시험을 참는 것이고, 그것을 믿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즉,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다.
* 인간이 행하게 되게 불안하고 초조해지지만, 그러나 믿으면 평안해진다는 것이다. 평안해야 되지를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것이고, 온유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재림도 초조하게 기다리지 말고,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믿음만이 있다는 것은, 행함은 우리가 믿는 주님 소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행함은 우리들 속에 있는 성령님의 행함이기에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독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홀몸(홑몸?)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이 말씀도, 앞으로 내가 열심히 행해서 욕심이 죄를 낳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는 줄 저는 인정하고, 그리고 그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낳는 줄 인정하지만, 그러나 이제부터는 주께서 저를 욕심을 좋아하지 않는 자로 만들어주실 것을 믿는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야고보서를 제대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우리는 홀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혼자밖에 없으면 무엇을 행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행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대신 하시는 분이 우리 속에 계시다는 것이다. 없으면 신자가 아니고 말이다.
* '마음이 겸손한 자는 복을 받는다' 라고 했을 때, 이번에 외무고시를 치는데 마음을 겸손하게 해서 복을 받아서 외무고시에 합격해야 되겠다는 것이 아니고, 외무고시에 떨어지고 붙는 것에 상관없이 주님께서 마음을 낮추어주신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외무고시에 합격되고 마음을 낮추어달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낮추어주시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가 모든 공로를 주님께로 돌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다. 행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 야고보서의 주제 - 위의 것을 찾아라 !!
* 지금까지는 예를 들어서 야고보서를 하나씩 집어서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야고보서를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예를 들어서 살펴본 것이고, 그 내용은 무엇인고 하니, 매우 간단한데, '위의 것을 보아라' 라는 것이다.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 야고보서의 전체 줄거리는, 땅의 것을 줄줄이 다 이야기를 해놓고, 그러니 '위의 것을 보아라' 라는 것이다. 사회, 경제, 교회 등, 이 모든 것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보면 이 세상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 땅의 모습이 어떠한가? 1장 9절을 한번 보자.
(약 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약 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 여기서 낮은 형제는 누구를 말하는가? 가난한 집안의 사람이나, 장애자들, 소년 소녀 가장들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 말이다. 물론 교회에서는 모두가 다 형제이지만, 그러나 지금 이것은 그 당시의 땅의 형편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 여가서 '높음을 자랑하라' 라는 것은, 그러니 비록 이 세상에서는 그들이 비천하게 살아가지만 높은 하늘나라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자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늘나라에서는 얼마나 낮고 무가치한 것인가를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즉, 하늘나라를 자랑하라는 것이다.
(약 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 이 말은, 교회에 가면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으니까,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다고 기가 죽지 말라는 것이다. 남의 선물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약 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약 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약 2: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 우리가 이 본문 말씀을 보면서 제일 주의할 것은 무엇인가?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부자에게 아부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우리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대하는 이상적이고 멋진 교회니까 괜찮다는 것이 아니고,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에는 행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폼을 잡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교만한 것인가?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지 않는가?
* 그렇게 한다고 경건한 것이 아니고, 지금 이 본문은 땅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것이고, 참된 경건은 위에서 온다는 것이다. 야고보서를 보면서 이대로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위선자를 배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 여기서 말하는 지혜가 무엇인가? 성경말씀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그런데 수능시험을 치면서 이런 구절을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야고보서가 말하는 것은, 이 땅의 모습이 이러하니까 우리는 오?하늘의 것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야고보서 - 땅의 모습이 이러하니까 우리는 오직 하늘의 것을 붙들자 !!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 여기서 '두 마음' 이라는 것은 그 당시 교회의 실정을 말하는 것인데, 아니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해서 어디 안 품어지는가? 두 마음이 아니라, 세 마음, 네 마음도 품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아, 이것이 바로 내 모습이구나. 그러니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기도해야지' 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 그래서 야고보서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2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유혹)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마음을 품는 유혹도 있고, 부자라고 거들먹거리는 놈도 있고, 그 얼마나 희한한 인간들이 많은지 말이다. 그래서 참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잡으려고 하지도 말고 말이다. 결코 땅에서는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약 4:11)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약 4: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 그런데 여기서 판단하지 말라고 해서 '나는 판단을 안 한다' 라고 나오면 그런 판단을 안 하는 것이 그만 그 사람의 의(義)가 된다는 것이다.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수준이 낮아지고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야고보서가 보여주는 것은, 이런 인간도 있고 저런 인간도 있다고 하는 교회 안의 실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교회에 이러한 문제점들이 있으니 개혁하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다만 너희들은 이런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 그래서 이러한 시험(유혹)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자들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도 얻고 말이다.
(약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약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 실제로 이것을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듣는 것은 빨리 듣고 말하는 것은 천천히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선자가 되는데, 교회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싱긋이 웃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음흉한가?
* 여기에 대표적인 사람이 목사 사모들인데, 참을성도 없으면서 고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처럼 그런 짓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남편이 목회를 그만 두던지 해야지, 그야말로 마누라를 정신병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 그래서 세상이 이렇고, 교회가 그런 줄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자기들 힘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고 말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그 마음을 하늘에 두라는 것이다.
(약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 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이것은 그 당시 교회의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목사와 장로들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목사가 그런 대로 설교를 하니 목사는 다 지키는 줄로 안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연말에 목사가 설교하기를, '돈을 사랑하지 맙시다' 라는 제목으로 감동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돈을 초월한 것처럼 말하면 교인들이 좀 올려주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설교자에게 주의하라는 것이다.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약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 이 야고보서는 인간들이 이 땅에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문제점들을 모두 다 끄집어내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로 교회 안에도 그대로 다 있고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예외적인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약 1: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약 1:24) 제 자신을 보?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눈이 그렇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앞만 보이지 자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거울로 본다는 것이다. 남이 아니라 자기를 비쳐보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이 말씀은, 그 당시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는 설교시간에 '아멘' 이라고 하다가, 예배를 마치고서 밖에 나가서는 모두 잊어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당시나 지금이나 별 수 없다는 것이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 여기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고 해서 지금도 이것을 문자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 치고 사고를 안 치는 인간들이 없다는 것이다.
* 그 당시는 농경시대이기에 고아와 과부는 땅이 없음으로 그야말로 굶어서 죽는 상황이지만, 그러나 지금은 산업사회가 아닌가? 돈 많은 과부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그 당시의 고와와 과부는 지금은 하루끼니조차도 해결하기 어려운 가난한 자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년 소녀 가장과 같이 말이다.
* 이제 야고보서 2장을 보도록 하자.
(약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 여기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 세상은 이미 사람을 외모로 취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문제는, 사실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모두 똑같은 유혹인데, 오히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이 더 큰 유혹이 된다는 것이다. 결코 부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구제를 해도 상대방이 자립심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고, 떠벌리지 말고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떠벌려 놓으면 도움을 받는 사람이나 주는 쪽이나 다 민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약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 여기서 가난이라는 것을 좀 설명하자면,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도 있고 부유한 자도 있는데, 그런데 잠언에 보면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지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가난하고 부유한 것은 팔자소관(?)인데, 하지만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억울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 보면, 왕의 역할이 있고, 신하의 역할이 있고, 포졸의 역할이 다 따로 있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 고엘 사상 -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대신 복수하시는 하나님 !!
*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둘 다 만들어 놓고서는 무엇이라고 하시는고 하니, 부유한 자로 하여금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가난하더라도 그런 자와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가 여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바로 가난한 자라는 것이다. 이것을 '고엘 사상' 이라고 하는데, 없는 자의 편에 서서 대신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 이것이 야고보서 5장에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약 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약 5: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약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 여기 부한 자들은 이미 돈이 많은 사람들도 포함이 되지만, 가난해도 돈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람도 해당이 되는데,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뭐라고 기도하는고 하니, '하나님,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저에게 좀 주십시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부자들이 사치를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은 서로 입장은 바뀌지만 결국 똑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가난한 대로, 부자는 부유한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가 자기 마음대로 엉터리로 살면 하나님께서 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대로 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약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약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약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 우리들 생각에는 부자를 박살내고 가난한 자를 좀 살게 해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부자들이 재물을 정당하게 취득하지 않고 일군들의 품삯을 착취하고 해서 그렇게 부유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깝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심판자가 문밖에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찰 노릇인가?
(약 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 여기서 욥을 언급한 것은, 욥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욥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까지 견디고 기다린 대표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야고보서에서는 인간이 숨기고 있는 노림수가 낱낱이 다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약 2: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가지 아니하느냐
(약 2: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 가난한 자는 너희들을 압제하지 않고, 오히려 너희들을 부자가 압제했는데,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재산을 다 빼앗고 말이다. 그런데 왜 부자를 그렇게 좋아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심성을 그대로 다 보여준다는 것이다.
(약 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약 2:9) 만일 너희?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약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약 2: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 이것은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라는 문제가 아니고, '네가 율법을 준 사람을 사랑하는가? 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젊은 남녀가 데이트를 하는데, "자기, 나 사랑해, 응, 사랑해, 그러면 내 옷이 예뻐, 응, 예뻐, 그러면 내 머리핀도 좋아, 아니, 안 좋아, 어머 자기는 나를 사랑하지 하지 않는 거야" 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 문제는 그 머리핀의 모양이 문제가 아니라, 그 머리핀을 하고서 나온 아가씨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여자가 좋으면 그 여자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좋아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방귀냄새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한다면 모든 율법을 완성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 사랑은 이웃과 나를 일치화시키는 것 !!
* 지난 주에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설교했는데, 그 비유에서 이웃은 없고, 이웃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을 배태(胚胎)하게 되면, 그런 사랑을 통해서 이웃이 생기는데, 그래서 이웃이 누구인고 하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이다.
* 여기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을 못 본 체하고 그냥 지나가 버리면, 그 사람은 강도를 만났는가, 안 만났는가? 안 만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지나간 사람이 제사장이고, 레위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과 자기를 일치화 시켰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두고 '사랑' 이라고 하는 것이다. 瀏【?사랑은 남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래서 남녀가 서로 사귀더라도 누가 누구를 서로 잡아먹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뱀도 아니고 말이다. 사랑은 서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내가 암에 걸렸다면, 자기는 걸리지 않았다고 만세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암에 걸린 아내를 자기 안으로 일치시킨다는 것이다.
* 그렇다고 해서 아내가 죽으면 뒤따라 죽으라는 것이 아니고, 뭐 좀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런 것을 가지고서 너무 폼을 잡지도 말고, 가장 좋은 은사는 위로부터 오니까 그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이다. 결코 이 세상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 여기 간음하는 여자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을 말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세상의 것과 하나님과 완전히 갈라놓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적인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아무리 구해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마귀가 그것을 좋다고 응답하는 것이다. 그래서 점점 더 이 세상에 얽매이게 한다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이 결혼문제를 가지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했는데, 다음 중 참된 응답은?
① 하나님께서 좋은 여자를 만나게 해주셔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기도원을 소개해야겠다.
② 내가 미쳤는가? 이런 기도원에서 기도하게 말이다.
* 2번이라는 것이다. 기도원이라는 것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기도원이 하나의 징크스가 되고, '타부'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부(taboo)라는 것은 고대 종족들의 법으로서, 일종의 질서체제라는 것이다.
* 만약에 누가 십일조를 안 해서 벌을 받았다고 하자, 그러면 그 다음에는 해야 하는가? 또 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십일조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주일학교의 교사를 하다가 한번 빠져서 그런 안 좋은 일을 당했다고 해서 주일학교에 계속 출석함으로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런 징크스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과 벗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 가장 좋은 것은 위에서부터 온다 !!
* 이 땅을 벗어나서 하늘의 것을 맛보고 살아야만 하는데,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기도해서 이 땅의 것을 괜찮은 삶을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이 세상과 벗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해방이 되어야 할 문제를 기독교적인 주술(呪術)을 통해서, 즉, 목사에게 양복을 사주면 복을 받는다는 사고방식 등, 이런 것을 가지고 요령 것 피해가려고 하는 전혀 하늘나라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교사로서 주일학교에 빠지면 1000원을 더 헌금한다든지 하는 사고방식도 아직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 심지어 이런 증세가 심한 사람은 기도하는 모습에 따라서, 즉, 손을 들것인가 아니면 가슴에 모을 것인가 라는 것 등을 통해서라도 응답 받는 기도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신에 빠진 사람은 가장 좋은 것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벌을 안 받고 잘 사는 방법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도 글자를 두 개 잘못 읽으면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는 것이다. 즉, 잘못하면 자기만 손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 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로운 것을 주려고 하는데, 인간들은 이 땅에서 수리하고 보수해서 재활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재활용을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가장 좋은 것은 위에서부터 오는데, 그러면 위에서부터 왔는지, 안 왔는지를 어떻게 아는고 하니, 위에서부터 온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다가 틀려도, 주일학교에 좀 빠져도 그런 것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IMF를 당했다고 해서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는가 봐' 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IMF가 뭔데 말이다. 아니 그런 것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끊어지는가? 은사라고 하는 것은 완제품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수입완제품(?)인데, 그래서 포장만 뜯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냥 우리는 감사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변함이 없고 꾸준하다는 것이다.
* 어느 날 방에 누워서 시계를 보고있노라니 은근히 약이 올랐는데, 왜냐하면,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말이다. 밤이 되도 뚝딱, 낮이 되어도 뚝딱, 비가 내려도 뚝딱, 바람이 불어도 뚝딱, 얼마나 꾸준한지 말이다.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졌다' 라는 것이다. 불계패라는 것이다. 우리도 좀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다시 말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은사는 변함이 없지만, 자기가 열심히 만든 은사는 변한다는 것이다. 거짓 믿음은, 가공된 믿음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변하는 가짜라는 것이다.
(약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사람을 믿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느냐는 것이다.
(약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도 있고 부유한 자도 있는데, 그러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음의 부요라고 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보통 이것이 야고보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도 되어있는데, 과연 그 내용이 뭔지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믿음이란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데, 변함이 없는 믿음은 흔들림이 없는 행함으로 대체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믿음+행함'이 아니라, '믿음=행함'이 될 때, 이것을 참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 '믿음+행함'이 아니라, '믿음=행함'이다 !!
* 일반적으로 믿음과 행함을 동전의 양면이라고 하는데,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동전을 쪼개버리면 두 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두 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행함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행함이 될 때, 그것이 참 믿음이라는 것이다. 즉, 두 면이 안 나오도록 되어야 참 믿음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살아가는 모습이 그것이 아니고,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서로 다르니까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기자가 말하기를,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아닌가?
(약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 여기서 주의할 것은, 헐벗은 자를 도와주는 것은 행함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냥 말로서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라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말을 했거든 행동에 옮기든지 줄 중에 하나만 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 15, 16절의 경우가 아니고, 21절에서 예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믿음+행함'이 아니라, '믿음=행함' 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행함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약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기생 라합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라합의 이름 앞에 기생을 꼭 붙이는 것은, '이런 천한 기생도 구원을 받는데 왜 너 라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겠느냐' 라는 것이다. 그리고 26절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란 말씀은, 행함과 믿음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행함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행동한 것이 윤리인가, 도덕인가? 윤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아들을 죽이는 것이 무슨 윤리이고 도덕인가? 이것은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해서 행동으로 보여준 믿음이라는 것이다.
◈ 기생 라합의 거짓말은, 행동으로 보여준 믿음의 결단력이고 용기이다 !!
* 그리고 기생 라합이 정탐군들을 숨겨주고 거짓말을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도 역시 윤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라는 것이다. 기생 라합의 거짓말은 행동으로 보여준 믿음의 결단력이고 용기라는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이고 뭐고 하는 것도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굇낫報섧湧?어떻고 말이다. 이런 말씀들을 모두가 다 윤리와 도덕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성경본문은 아닌데 말이다. 그러니 성경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교회라고 할 수가 있는가? 말씀에서 떠나있는데 말이다.
* 참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 이 세상에 대한 평가나 기준이나 안목을 버리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말만 앞세우는 모습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야고보서는 그러한 말만을 앞세우는 잘못된 태도에 대해서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믿음과 행함은 서로 구분되어 어는 것을 강조하고 안 하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왔는데, 그런데 교회 안에 가난한 자와 부자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가난한 자는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아서 복을 못 받아서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고, 부자는 그와 반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세상적인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아, 가난한 자도 천국에 갈 수가 있고, 부자라도 까불면 박살이 나는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 이제 야고보서 3장으로 넘어가자.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 이 본문은 선생이 되지 마라는 것이 아니고, 말 한마디가 얼마나 사람을 상처를 내는가를 알라는 것이다. 이것을 6절에서 지옥 불이라고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약 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약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약 3: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그 당시 교회가 엄청나게 싸웠던 것 같은데, 우리는 초대교회 시절을 무조건 교회가 교회다웠다고 여기는데 아니라는 것이다. 왜 교회에 분쟁이 있었는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혀를 조심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말이다. 혀를 다문다고 해서 말조심이 되는가? 말은 기분에 따라서 나오는 것이기에 사실 조심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취중진담(醉中眞談)이라고,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 그냥 한 마디를 던졌는데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이 본문은 그 당시의 말많고 믿음이 없는 교회(회당?)의 모습을, 아마 파벌이 많아서 그런 것 같은데, 그 모습을 그대로 폭로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말조심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본문이 아니고 말이다.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약 3: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약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약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 이것도 역시 그 당신의 교회의 풍토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본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시기와 질투라는 것은 끊어질 수 없는 것인데, 없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힘이 있는 곳에 중심체가 몰리기에,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정치판이라는 것이다.
* 인간들이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즐겨 쓰는데, 그러나 그것이 상대방에게는 해를 끼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적일 경우에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최선을 다하는 인간이 바른 인간상이 될 수가 있는가? 결단코 아니라는 것이다.
* 인간은 언제나 자기 중심이기에 시기와 다툼은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초월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것이 바로 내 모습이라고 여기고 온유한 하늘의 것을 좇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야고보서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 야고보서의 주제 - 위의 것을 구하라 !!
(약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약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 그러므로 위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믿음이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 말이다. 사람이 일관성 있게 흔들리지 않으면 얼마나 서로 대하기가 좋은가? 참으로 상대방에게 평안함을 준다는 것이다.
* 그러나 진정 이러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두고, 양선하고, 화평하고, 순결하고, 긍휼하고, 거짓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순순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청명하다' 라고 정의하고 싶은데, 수정과도 같다는 것이다. 즉, 투명한 마음인데, 이런 마음은 이 땅에는 없고 오직 하늘에만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에 있으니 구하라는 것이다. 이 땅에 있으면 자기가 쟁취하면 되지만 말이다.
* 왜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가? 그것은 이 땅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삼성에서도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 땅에 없는 것을 구함으로 소유한다는 것이다. 마치 유치부 아이들처럼 말이다.
* 기생 라합의 경우에도, 자기는 이방인으로서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이 옴으로 말미암아 믿었다는 것이다. '거짓말을 해서 되는가, 안 되는가' 라는 것은 사실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죄 용서'의 문제가 백화점 세일할 때 판다면 우리가 왜 교회에 다니는가?
* 그래서 여리고 성이 함락되고 난 뒤에 이들은 살았는데,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에게만 적용이 되는 원칙이 이들에게도 적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믿은 믿음이야말로, 그야말로 청명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즉, 이 땅에 없는 것을 구하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 이제 야고보서 4장을 한번 보자.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 그런데 그 당시의 교회(회당)는 어떠했는가? 그야말로 싸움터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으로 추측할 수 있고 말이다.
*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둘 것은, 교회는 돈을 축척해서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돈 문제에 걸리게 되면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누가 투자를 많이 했느냐에 따라서 대주주가 되고 소액 주주가 되는데, 그런데 엉터리 목사가 와서 경영을 엉망으로 하면 주식이 똥값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그래서 교회가 헌금을 어디에 투자를 하는고 하니, 그것이 부동산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육관이고 주차장이라는 것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 투자한 것을 수양관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교회라는 것은 부동산 덩어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헌금을 하면 할수록 그 교회를 떠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엉터리 설교를 해도 말이다. 그래서 점심 값만 내는 사람들이 많지만 말이다.
(약 4: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 그들이 왜 다투고 싸우는가? 믿음에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 것에 신경을 쓰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 예수님이 주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것을 가지고 싸우는 자들을 보고서 하는 말이, 4절에서 한 마디로 '세상과 벗된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 힘을 키우면 키울수록 자기로부터 탈출하기 어렵다 !!
* 사람이 힘을 키우면 키울수록 자기로부터 탈출하기가 어려운데, 즉, 똑같은 사람이라도 고등학교를 나왔을 때와 대학교를 나왔을 때와 대학원을 나왔을 때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힘을 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지금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것을 바치고 자기를 따르라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고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 바치고 따라가면 주님이 아니라, 자기 바친 것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에 헌금을 바치니까 얼마나 교회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는가 말이다.
(약 4: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 성령은 우리가 세상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는데, 그런데 자꾸만 빠지니까 성령이 근심하는데, 이것을 본문에서는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약 4: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 6절에 '교만' 이라는 것은 세상과 벗된 자를 의미하고, 여기에 애통, 울음, 근심, 슬픔과 같은 것은 마음이 낮아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교만은 마음이 높아진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신 사실을 인정하고, IMF와 같은 것으로 말미암아서 슬퍼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비젼' 이라는 것인데,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바로 이 세상과 벗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것은 하늘에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수직적으로 곧바로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수평적으로 점점 증가해서 하늘과 닿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해서 접속이 되는가? - (tape 4 끝)
* 하늘의 것을 바라면서 무슨 자기 욕심을 채우겠는가? 그러나 이 땅의 것을 바라면 그렇게 자꾸만 자기를 높이게 된다는 것이다. 금요철야기도회가 그렇고 말이다. 그곳에 자기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던가? 모두가 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해서, 자기 교회를 위해서, 그러니 결국은 그만큼 자기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지금 이것을 야고보서가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런 자기를 높이는 대표적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비젼' 이라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위해서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장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그렇게 높이니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죄가 아닌가?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장사하는 것하고 안개하고 연결이 되느냐는 것이다. 장사는 장사고 안개는 안개라는 것이다. 그러나 15절 말씀을 보고 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의 뜻' 이라는 것이다. 도시에서 장사하는 것이 왜 문제인고 하니, 주의 뜻이라면 장사를 하기 싫어도 해야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단독자라면 비젼을 가지고서 내가 알아서 하면 되지만, 그러나 우리는 단독자가 아니고 함께 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분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다시 말해서, 자기가 알아서 무엇을 고르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의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이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원수인가? 세상과 벗된 것이고, 그것은 바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라고 하는 것이다. 번지러하게 말만 그렇게 하지를 말고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야고보서가 하는 매우 이야기는 간단한데, 이 세상에서 수평적으로 성공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나님의 은사를 받아서 내 모든 움직임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여 나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청명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비젼을 가져도 자기를 위해서 가지는 것이 아니고, 주의 뜻 가운데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비젼을 그렇게 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약 4: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약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 여기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이렇게 자기를 자랑하는 것을 가지고 죄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 이제 5장을 보도록 하자.
(약 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 여기서 말하는 맹세는 무엇인가? '두고봐라. 내가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리라' 라는 것이다. 왜 우리 힘으로 성공해야 하는가?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데 말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성공인데, 그것 말고 또 무슨 성공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 이것은 지금 현재를 미완성으로 보는 것인데, 이것은 얼마나 자기 자신을 확대해서 여기는 것인가? 장래의 비젼이 너무나도 크기에 지금 현재를 초라하게 보는 것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초라하게 여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놀자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은혜에 감사하자는 것이다. 하나는 행위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 차원이라는 것이다.
◈ 놀자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감사하자 !!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면 되는데, 즉, 주께서 주시는 것을 바로 직수입하면 되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소위 '성공' 이라는 법칙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주신 선물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욕심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감사하자는 것이다.
(약 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 고난을 당하면서 기도하고, 즐거워하면서 찬송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고난 중에 기도하고, 즐거워하며 찬송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억지로 하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위선자밖에 더 되겠는가?
* 사람에게 있어서 어려울 때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우리는 그런 초조한 마음을 주께 표현하면 주께서 다 알아서 수정하고 바로잡아 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응답이라는 것이다.
(약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 이것은 한 마디로, 사랑이라는 것인데, 관심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아픈 사람의 심정을 자기의 심정으로 일치를 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의 책임자(장로)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야고보서는 행하라는 것이 아니고, 믿으라는 것이다.
(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약 5:18) 디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 여기서는 '간절히'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했더니만 善鍛酉?되었다는 것이다. 엘리야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고 말이다.
*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지, 땅에 있는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즉, 자기 성공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초조해지고 불안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현실과 자기의 뜻이 갭이 있기에 말이다. 감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 물론 매일 감사하는 사람도 있는데, 백수들이 할 짓이 없어서 매일 비디오를 빌려다보면 마지막에 뭐라고 자막이 나오는가?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괜찮은 영화는 'END' 라고 하는데, 이상한 영화들이 그런 자막을 잘 쓴다는 것이다. 아닌가?
* 다시 말해서, '감사합니다' 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 되자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땅에 없는 위의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평안을 소유한 자의 모습이 아닌가?
♨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생각이 너무나 잘못되었음을 말씀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우리가 '믿습니다' 라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욕심의 또 다른 표현이고, 아무리 열심히 충성해도 그것도 역시 우리들의 불안한 마음을 때우려는 모습임을 알았습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참된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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