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哲禹(이철우) 열린당 의원의 조선 노동당 가입 논란을 계기로 1992년 10월 발표됐던 「남한 조선 노동당」 사건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 수사자료와 재판기록 등을 보면, 이 사건은 自生的 主思派 조직이 북한과 직접 연계된 간첩단 사건이었다.
당시 안기부가 밝힌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
<「남한 조선 노동당」 사건은 북한이 1995년 赤化(적화)통일을 실현한다는 전략목표下에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권력서열 22위)인 對南공작원 李善實(女·본명 李花仙)을 南派, 합법 前衛 정당과 非합법 지하당 건설을 기도한 사건이다. 李善實은 1989년부터 장관급 거물 공작원 등 10여 명을 지휘해 남한內 현지 지도부를 구축했다.
李善實은 4·3 제주폭동 유가족을 칭하고 在野단체와 민중당 등에 접근, 민중당 대표 金洛中(김낙중), 민중당 조국통일위원장 孫炳善(손병선) 등으로 하여금 운동권과의 연대투쟁 공간을 마련하고, 연방제 통일 실현을 위한 「상층부 통일전선공작」에 주력하도록 했다.
李善實은 과거 남로당과 같은 지하당을 구축하기 위해 1980년 舍北(사북) 사태를 주동한 바 있는 黃仁五(황인오)를 포섭, 강원 및 충남·북 일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한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위장명칭·민족해방애국전선·이하 민애전)을 구축했다,
안기부는 북한이 민중당에 침투시킨 간첩 金洛中·孫炳善 일당 여섯 명과 「남한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 조직원 400여 명 중 총책 黃仁五 등 124명을 검거, 이 중 68명을 간첩·反국가단체 구성 혐의 등으로 구속, 송치하고 잔당을 추적 중이다. 同수사과정에서 권총, 수류탄 등 각종 무기류와 무전기, 亂數表(난수표) 및 공작금 100만 달러 등 총 149종 2399점에 달하는 공작금품을 압수했다>
李哲禹 열린당 의원은 「남한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 강원도당(위장명칭·조국통일애국전선) 산하 춘천市責이었다.
『사북사태 주동자인 黃仁五는 북한 쪽에서 보면 혁명열사』
남한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수사기록과 판결문, 중부지역당 總責 黃仁五의 수기 등을 종합하면 북한이 노동 및 학생 운동권 인사들을 어떻게 포섭했는지 잘 나타난다.
안기부 자료에 의하면, 李善實은 1990년 6월 중순 서울 YMCA 회관에서 민중당 창당 발기인 대회가 끝난 후 열린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張琪杓(장기표) 민중당 대표의 아내 趙珷夏(조무하)씨는 참석자들에게 『평생을 바쳐서 번 돈을 민중당에 헌납했고, 전에 민가협 사무실을 얻을 때에도 돈을 보태 주신 분』이라고 李善實을 소개했다.
이 자리에서 李善實은 민가협 활동을 하고 있던 黃仁五의 어머니 전재순씨를 소개받았다. 李善實은 전재순씨로부터 『黃仁五는 노동운동, 동생 黃仁旭은 학생운동에 투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해 7월 초 李善實은 黃仁五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북한은 왜 黃仁五를 포섭대상으로 선정했을까. 「남한 조선 노동당」 사건을 수사했던 鄭亨根(정형근) 당시 안기부 수사차장보(現 한나라당 의원)는 이 사건 발표 직후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黃仁五씨는 1980년 사북 사태의 주역이었습니다. 북한은 光州사태와 함께 사북사태를 남한에서의 민중 무장봉기 사건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남한 쪽에서 볼 때는 黃씨는 광부에 지나지 않지만, 북한 쪽에서는 혁명 열사입니다.
李善實은 民家協을 이끄는 조무하씨에게 「아들 중 두세 명이 구속된 가족을 소개해 달라」고 했고, 黃仁五씨의 어머니인 전재순씨가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입니다. 黃仁五씨의 동생인 黃仁旭도 구속된 적이 있는 등 3형제 모두 左翼 前歷이 있어 李善實에게는 더 없이 좋은 포섭 대상자였던 것입니다』
포섭
李善實은 1990년 7월 하순 黃仁五를 찾아갔다. 黃仁五의 수기를 보자.
<1990년 7월 하순 어느 날 李善實이라는 노파가 나를 찾아왔다.
집에 찾아온 이선실은 어머니와 우리 삼형제의 민주화 투쟁 경력, 특히 기본 계급으로서 탄광 노동운동에 헌신한 내 전력에 대한 칭찬을 하다가 잠시만 나가서 얘기하자는 것이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 나섰다. 슬리퍼에 운동복 바지 차림으로 가볍게 배웅하는 기분으로 400m 가량 떨어진 신대방 전철역 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신대방역 둑방의 벤치로 가니 웬 50代 초반으로 보이는 사나이가 있었고, 노파는 어느 틈에 사라지고 없었다. 반쯤 머리가 벗겨진, 165cm 가량의 키에 다부진 사나이였다. 거두절미하고 빨리 용건을 털어 놓도록 재촉하는 나에게 사나이는 자신이 北에서 왔다고 말했다.
『北이라니! 평양말이오?』
사나이는 『黃선생님이 노동자를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투쟁해 왔는지 다 알고 왔다』고 했다. 그래서 『다 그만두고 당신이 北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느냐』라고 했다. 사나이는 그렇다면 약 10여 일 후인 8월5일과 6일 밤 12시 정각에 평양방송을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날 12시에 시보가 울리고 「赤旗歌(적기가)」가 방송된 다음 『평양에 사는 이철봉이가 서울의 박춘호에게 보내는 편지는 사정에 의해 다음 번에 보내드립니다』라는 아나운서 멘트가 나온다. 그것이 바로 신분 증명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확인이 되면 그 다음날인 8월7일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자는 것이다>
평양방송 통해 李善實 신분 확인 <다음날인 8월6일 낮, 사나이가 직접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얼른 가까운 다방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권중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 자리에서 권중현은 『黃선생, 우리와 함께 통일 사업에 협력해 주시오』라고 제안하였다. 잠시 대화가 오고 나서 권중현은 옆 자리에 앉아있던 한 청년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組員이며 우리들의 회동을 엄호하는 중이라고 소개했다. 그 청년은 김돈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 김돈식은 만 5년 뒤인 1995년 10월 충남 부여에서 군경과 대치, 총격전을 벌인 끝에 체포된 간첩 김동식, 바로 그 청년이다>
黃仁五가 북한에 포섭된 1992년은 소련·동구권 붕괴의 여파로 운동권에서도 많은 이탈자들이 생기던 때였다. 그런 시기에 黃仁五가 북한 對南공작기구에 쉽게 포섭된 이유는 무엇일까. 黃仁五는 수기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나중에 운동권의 양대 산맥이 된 친북적인 NL파와 민족문제보다는 계급문제를 더 중시하는 PD파, 즉 민족해방파와 민중민주주의파 중에서는 정서적으로 NL에 더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것도 사실이었다. 1990년 당시에도 이 같은 내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렵 東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의 급속한 붕괴를 보면서 북한만이라도 끝까지 버텨서 보란듯이 회생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이 생각은 1990년 무렵에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운동권 인사들의 공통된 소망이었다. NL이나 PD 등 정치적 태도 차이를 떠나 하나같이 현실 사회주의 마지막 보루로서 북한이 버텨 주기를 바라는,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나와 함께 지하당 사업을 하던 이들이나 우리가 체포되어 일망타진된 뒤에도 親北활동을 계속해 오다가 적발된 「구국전위」 등의 성원들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黃仁五, 북한 밀입북한 다음날 노동당 입당
안기부의 「남파간첩 李善實」이라는 자료에 의하면, 李善實은 1990년 10월 초순 서울 관악구 봉천동 전재순씨의 집을 방문했다. 李善實은 黃仁五의 가족들과 식사를 한 후 그들에게 『나와 손잡고 일하면 이렇게 고생하면서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이 달 안으로 北에 갈 것이니 준비하라』는 지시를 했다.
黃仁五는 李善實과 함께 1990년 10월16~23일 密入北했다. 이 기간 중 그의 행적을 안기부가 발표한 「남한 조선 노동당 사건 수사결과」 자료를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90년 10월16일 17:00경 간첩 권중현과 사전 약정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인근 야산 쌍묘에 도착, 그곳에서 李善實, 권중현, 김돈식과 접선
▲타석 신호로 3명의 무장 호송 안내조와 조우, 방수용 고무 외피를 받아 착용 후 20분간 개펄을 도보 이동하여 정박 중이던 半잠수정에 탑승
-10월17일 09:00경 북한 해주 해안에 도착, 사회문화부(舊노동당 연락부) 부부장의 영접을 받고, 해주 근교 헬기장으로 이동
-군용 헬기편으로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 사회문화부장 리창선과 벤츠 승용차편으로 평양만수대를 방문
-金日成 동상 참배 후 12:00경 평양 근교 대동강변에 위치한 초대소에 도착
※순안비행장에는 양복을 입은 북한 고위인물 수십 명이 도열, 李善實 일행을 영접
▲1일째(10월17일)
-사회문화부장 주최 환영 만찬 참석
-金日成·金正日 찬양 영화 및 임수경 체북 기록영화 관람
-입당원서 및 자서전 작성 제출
▲2일째(10월18일)
-주체사상 연구소장 박승덕으로부터 주체철학 등 사상교육
▲3일째(10월19일)
-박승덕으로부터 남조선 혁명에 관한 사상교육
-당원증에 부착할 사진 촬영
▲4일째(10월20일)
-브로닝 권총으로 사격훈련
-만경대, 주체탑, 혁명열사릉 등 관람
▲5일째(10월21일)
-사회문화부 부부장으로부터 지하당 조직 방법 등 간첩교육
-조선 노동당 정식 입당(당원부호는 권중현으로부터 부여받은 「대둔산 11호」를 그대로 사용)
-무전기 조작, A-3 지령 수신, 해문 등 통신연락방법 교육
-초대소 생활 총화
-사회문화부 부부장, 간첩 공작임무지령
○『조선 노동당 건설은 강원도당 뿐 아니라 충·남북지역까지 포함하는 全 중부지역에 각 도당을 결성할 것』
○『강원도당은 도당지도부를 구성한 후 춘천·원주(학생), 동해·삼척(공장·군사), 정선·태백(탄광), 영월·강릉(지역 중심) 등 8개 지구당을 우선 조직할 것』
○『이곳에서 지도원이 내려갈 경우 접선에 대비, 상호 인식용 십자가 목걸이를 준비했으니 갖고 갈 것』
▲6일째(10월22일)
-사회문화부 부부장으로부터 공작 금품받아
○ 권총 1정, 소음기 1개, 탄창 2개, 실탄 30발
○ 신형 메모리式 무전기 및 난수표·기본 암호표·약어표 각 1매
○ 자살용 독약캡슐 11개
○ 조선 노동당 당헌 1부
○「조선의 별」, 「민족의 태양」 제하 비디오테이프 10개
○「조국통일과 남조선 혁명 관계에 대하여」 등 소책자 및 유인물 3부
○ 남파공작원과 접선시 상호 인식용 십자가 목걸이 1개
○ 양복(영국제) 및 와이셔츠(일제) 각 1벌
○ 일제 만년필 1개, 일제 쑥찜팩 10개, 일제 위장약 1병
○ 日貨 500만 엔 수수
○ 사회문화부장·李善實 참석하에 환송 만찬
▲7일째(10월23일)
-13:00경 사회문화부장, 李善實, 권중현, 김돈식 등의 환송과 격려를 받으며 초대소 출발, 14:00경 순안 비행장에 도착
-대기 중이던 사회문화부장으로부터 『남조선에 돌아가면 金正日 동지께서 축지법으로 남조선에 내려가 인민들에게 통일의 꿈을 심어준 후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퍼뜨리라』는 지시를 받고, 사회문화부부장과 함께 軍헬기편으로 해주에 도착
-산속 군인 막사에서 2~3시간 취침 후 해주 해안에 도착, 사회문화부 부부장으로부터 『무사히 복귀하여 성공리에 사업을 완수하라』는 격려를 받고 헤어짐
-10월23일 21:30경 2명의 무장 안내원 호송하에 半잠수정에 승선, 입북시의 逆경로로 同日 23:00경 강화도 양도면 건평리 해안에 도착
-인근 야산에서 1박 후 10월24일 07:00경 직행버스편으로 서울 잠입>
노동당원임을 밝히자, 崔虎敬 『무조건 지도에 따르겠다』
北에서 돌아온 黃仁五는 지하당 조직에 착수했다. 밀입국 前 黃仁五는 이미 동생 黃仁旭을 포섭했다. 黃仁旭은 1986년 북한 정권 기관지 「민주조선」 기사를 대자보로 알린 「서울대 대자보」 사건으로 구속되어 2년 가량 복역하고 나왔다
당시 그는 서울大 主思派 조직인 救學聯(구학련·구국학생연맹) 조직부장으로 운동권에서 주체사상에 정통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었다. 黃仁旭은 黃仁五의 가담제의를 승낙하고, 수차례 黃仁五와 함께 권중현과 김돈식 등을 만났다.
黃仁五는 한동안 지하당 조직에 가담할 사람을 물색했으나 적당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가 떠올린 사람이 옛 동지 崔虎敬(최호경)이었다. 黃仁五는 수기에 이렇게 적었다.
<1991년 5월 중순께 연락을 시도하여 5월 하순 어느 날 崔虎敬군을 만났다. 그의 정치성향을 떠 볼 셈으로 『주체사상을 공부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반색을 하며 자기가 어떤 사람들을 소개해 주겠다며 주체사상 학습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주선할 테니 대학생 그룹을 하나 맡아서 지도해 보라는 것이었다.
일단 헤어졌다가 10여 일 후 다시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에게 『崔형이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북한의 對南 공작 前衛기구. 1968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적발돼 해체된 통일혁명당의 後身)과 혈연적 관계를 맺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한민전과 혈연적 관계를 맺고 그 지도에 따르는 것은 내 필생의 소원이다』라고 대답하는 그에게 『나는 조선 노동당 당원이다. 당신이 소망하는 한민전과의 혈연적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내 정체를 털어 놓았다.
적지 않게 놀란 그는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6월 중순의 내게 지정된 방송수신 날짜에 나오는 내 고유 인식번호를 일러 주고 그날 그 시에 내가 지정해 준 숫자가 방송이 되면 그것이 내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6월21일쯤 崔虎敬군을 다시 만났다.
내 「당원증」을 확인하고 나온 그는 『앞으로는 무조건 黃형의 지도에 따르겠다』며 몹시 기뻐했다.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이미 「1995년 위원회(1995년까지 적화통일을 이룩하겠다는 의미-기자 注)」라는 주사파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조직원을 평양에 파견하는 등 열성적인 親北 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崔虎敬 한 사람을 포섭하려던 黃仁五는 崔虎敬의 「95년 위원회」를 접수하고, 입당서약을 받고, 장차 활동 내용 등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지금껏 남한에 실체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한민전」은 실은 조선 노동당의 선전기관으로서 한민전과 혈연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곧 조선 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것이라는 점이다. 강원도와 충청남북도를 조직 대상으로 하는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건설하라는 것이라는 것을 일러 주었다.
그에게 「95년 위원회」의 성원 중에서 중부지역당을 함께 이끌 만한 인물을 두 사람 선발,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의 보고를 토대로 「95년 위원회」의 조직형태가 지하당 조직으로서는 매우 산만하고 허점이 많으니 개편하되 부적절한 조직 명칭부터 바꿀 것을 당부했다. 그가 추천한 정경수, 은재형 두 사람에게서도 입당원서를 받았다>
현지 입당
崔虎敬 등의 입당은 「현지 입당」의 형식으로 행해졌다. 수사자료에 나타난 현지입당 절차는 다음과 같다.
<-입당 대상자는 黃仁五 등 입회자와 함께 중앙에 서서 노동당기와 金日成·金正日 초상화를 향한다
-입회자가 『「조선 노동당」강령과 규약을 승인하였으므로 지금부터 입당식을 거행하겠습니다』라고 선포.
-「赤旗歌」와 「수령님께 바치는 충성의 노래」 제창
-오른손을 들고 「맹세문」 낭독
-맹세문 내용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우리 조선이 치켜든 찬란한 주체의 횃불에 따라 장엄한 역사적 진군을 시작하는 성스러운 이 시각에 나는 조국과 민중 앞에 숭고한 사명을 심장깊이 새기며 영광스런 우리 전선과 수령님 앞에 나의 전생애와 생명을 걸고 다음과 같이 맹세한다.
1. 나는 수령님께 무한히 충직한 수령님의 전사이다.
1. 나는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주체형의 혁명가이다.
1. 나는 전선의 영예로운 전사이다.
1. 나는 한국 민중의 애국적 전위이다.
1. 나는 민중과 운명을 같이하는 민중의 벗이다.
1. 나는 목숨 바쳐 전선과 혁명을 지킨다』
▲맹세가 끝나면 입회자가 『조선 노동당 당중앙의 위임에 따라 동지의 조선 노동당 입당을 허가함을 선포한다』고 말하고 입당자에게 당원 부호(대둔산 ○호)와 조직內에서 통용하는 조직명(가명)을 부여
▲이어 입회자가 『오늘 동지의 맹세가 영원토록 변치 않기를 바란다』고 다짐한 후 『우리의 임무는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제 당신도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 지도부 성원이다』라고 고지
▲입당자와 입회자 간에 악수를 나눔>
춘천 市責이었던 李哲禹 의원의 1심 재판기록에 따르면, 李哲禹 의원, 민족해방애국전선 조직원 이형두·최종만 등이 위와 같은 절차를 거쳐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위장명칭 민족해방애국전선)에 가입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金正日 남한 방문설 유포
「95년 위원회」를 접수한 黃仁五는 이 조직을 바탕으로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지도부를 결성했다. 黃仁五의 수기를 보자.
<조직의 실체는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이되 만약의 경우 적발되었을 경우에는 한민전 노선을 따르는 자생조직임을 내세우기 위해 「민족해방애국전선」이라는 이름을 예비해 둔 것이다. 최악의 경우 「한민전 중부지역위원회」를 자처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이것은 「중부지역당」 지도부만이 아니라 앞으로 조직될 산하 각 道黨과 市郡黨 역시 「민족해방애국전선」이 아닌 독자적인 위장 명칭을 예비해 둠으로써 조선 노동당의 계선조직인 것은 물론 각 상급 조직과의 연계도 미리 차단하기 위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예컨대 崔虎敬군이 梁洪館씨를 道당책으로 하는 강원도당을 결성케 하고 그 명칭을 「민족해방애국전선」이 아닌 「조국해방애국전선」으로 한 것은 그 예이다>
黃仁五의 지하당 조직은 북한과 교신하면서 방송청취, 군사기밀 탐지, 金正日 찬양 유인물 배포 등의 활동을 벌였다. 黃仁旭은 1991년 8~12월 金大中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의 개인비서이자 국회 국방위원회 입법보조원으로 활동하던 이근희로부터 「1992년 국방예산(안) 개요」를 입수했다. 이근희는 黃仁旭과 함께 구국학생연맹 조직원으로 함께 활동했던 사이였다. 黃仁五은 이 자료를 사진으로 찍어 북한에 隱書(은서)로 보고했다.
중부지역당은 黨정치신문 「백두산」, 북한방송 녹취자료집 「새날의 주인」 등을 발간했다. 「특보 사업」이라는 것도 벌였다. 黃仁五의 수기를 보자.
<1991년 11월 초에 서울에서 개최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각료회의)에 주목하여 이를 「특보」 사업으로 명명한 金正日의 남한 순례설을 조작, 유포하기로 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전기침 중국 외교부장과 함께 참석한 이람청 중국 대외경제부장의 수행원을 가장하여 金正日이 서울에 들어왔으며, 서울에 들어온 즉시 남쪽 공안기관원의 감시를 따돌리고 렌터카를 대여하여 2박3일 동안 남한 전역을 순회하며,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어루만지고 곧 다가올 통일된 나라에서는 누구나 똑같은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사는 낙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꿈 같은 희망을 주고 갔다는 내용으로 「특보」를 만들었다.
사실대로 말해서 이 「특보」 사업은 그것 자체의 의의에 주목하기보다 이창선 부장으로 대표되는 평양의 지도부, 아마도 金正日에 이르게 될 평양의 對南사업 담당자들에게 의무이행을 보고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 「특보」를 강원도와 대전, 충남지역에 200부 가량 배포했다>
黃仁五 등은 중부지역당 前衛 조직인 「애국동맹」 산하 「5·1 노동동맹」 조직원들을 동원해, 金正日 생일 등에 「충성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검거
黃仁五는 1992년 9월, 對北 무전교신을 위해 감춰둔 무전기를 찾으러 의정부 화룡골로 갔다가 안기부에 검거됐다. 안기부는 이전부터 黃仁五를 감시하고 있었다. 李善實의 또 다른 공작 대상이던 민중당을 수사하다가 黃仁五가 1992년 총선 당시 강원도 정선에서 출마한 정운환에게 50만원을 지원한 사실을 포착했던 것이다.
黃仁五의 수기에 의하면 안기부 수사관들은 그를 체포하자 마자 金洛中과 그의 수하인 심금섭과의 관계부터 물었다고 한다. 그를 李善實-金洛中으로 이어지는 민중당 계통 조직원인 줄 알았던 것이다. 黃仁五는 『여보시오, 잘못 짚었소. 나를 제대로 건지긴 건졌는데 나는 그쪽이 아니오. 나는 지하당 사업을 한 사람이오』라고 말한 후 자신이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 총책이라고 실토했다고 한다.
黃仁五와 함께 그의 아내, 동생 黃仁旭 부부, 어머니도 검거됐다. 수기에 의하면 黃仁五는 비교적 수사과정에 순순히 응했다고 한다. 「지난 시절의 경험에 비추어 상상으로 지레 겁먹은 것 같은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했다. 그가 조사에 순순히 응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수기에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많이 나온다.
안기부 수사백서에 의하면 안기부는 「남한 조선 노동당」 사건 수사 과정에서 1992년 8월25일~11월4일 신청자 전원에 대해 변호사 접견을 1회 이상 허용, 총 33회의 변호인 접견을 허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변호인들은 피의자들에게 「남한 조선 노동당」에 가입해 활동한 사실 여부를 주로 확인하면서 가혹행위 여부에 대해 물었다. 피의자 대부분은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재판기록에도 피고인들이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한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피의자들의 접견기록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崔虎敬의 산하 조직원이었던 변의숙은 『오늘은 두 시간 동안 벽을 보고 서 있었다. 처음 이틀 동안은 전혀 못 잤다』고 말했다. 중부지역당 강원도당 위원장 梁洪館은 1992년 9월25일 변호사와의 접견 때 『지금까지는 가혹행위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黃仁五의 아내 송혜숙은 『가혹행위나 강제신문은 없었다』며 『애기가 안 떨어지려고 하고, 또 애가 없으면 버티기 힘들었다. 수사관에게 부탁해서 애기와 같이 있는 것이니 시아버지께 잘 이해시켜 달라』고 했다.
중부지역당 조직원 신동욱은 『한민전이 노동당인 줄 알고 활동했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인 장창호로부터 입당 제안을 받았고, 평양방송에서 「평양에 사는 이철봉이 서울에 사는 박춘호에게 서신을 띄운다」라는 방송을 듣고 입당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李哲禹 의원은 변호사가 『무슨 사건인가, 상부선인가, 하부선인가』라고 묻자,『조국통일애국전선이다. 하부선이다. 지금은 더 이상 할 말은 없으며, 구치소에서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조선 노동당」을 알고 가입했다』 黃仁五가 수사에 순순히 협조하자, 崔虎敬을 비롯한 다른 조직원들은 혼란과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자신들을 지도할 북한 노동당의 대리인 黃仁五가 너무나 쉽게 변절해 안기부 수사에 협조하고, 자신들이 혁명의 지도부로 받들고 있는 북한 노동당과 한민전이 「남조선 노동당 사건은 미국 CIA의 조작」이라는 입장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민애전 조직원들은 「조선 노동당의 노선을 추종하기 위해 黃仁五가 만든 조직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나, 黃仁五가 만들었다는 조직은 안기부와 美 CIA의 모략」이라는 선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했다.
이들은 黃仁五를 변절자로 매도하면서 주체사상에 입각한 혁명노선을 고수할 것을 다짐했다. 「95년 위원회」 시절부터 崔虎敬과 함께 主思派 운동을 했던 趙德垣(조덕원)은 재판 과정에서 발표한 「한민전의 기치는 우리의 열렬한 지향-이른바 남한 조선 노동당 사건에 대한 민족해방애국전선, 애국동맹의 공식적 입장」이라는 문건(항소이유 보충서)에 이러한 그들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문건에는 민족해방애국전선 가담자들이 조선 노동당에 가입한다는 사실을 알고 민애전에 가입했으나, 옥중 투쟁 과정에서 이 사실을 부인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잘 나타나 있다.
<(前略)민애전 성원(조직원·구성원-기자 注)이 경험한 사건의 진실은 다음과 같다. 모든 민애전 성원은 이른바 「조선 노동당」을 알고 가입했다. 우리는 한민전 가입을 염원했고, 한민전이 곧 「조선 노동당」이라는 언급을 듣고 「입당」했다. 이는 명백한 진실이다.
다시 말해 「한민전 중부지역위원회」가 곧 「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이며, 그 위장명칭이 민애전이고, 그 강원도 위원회의 별칭이 「조국통일애국전선(이하 조애전)」이라는 설명을 분명히 들었다.
우리는 반신반의하면서 「입당」했다. 「입당」하며 의혹을 품지 않은 민애전 성원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민전이 곧 「조선 노동당」이라는 언급은 한민전의 공식발표와 달랐고, 그 「입당」 방식이나 활동내용과 방식이 기존에 품어 왔던 한민전에 대한 이상과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추천해 준 동지와 가입을 권유한 성원에 대한 동지적 신뢰와 A-3 담보방송 등의 「객관 물증」을 확인하면서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사항은 「입당」 후 수개월 동안 「중앙당」으로부터 「지령」을 전달받은 사실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우리 민애전 성원 전원은 일제히 검거되었다>
『李善實과 黃仁五는 결코 노동당원일 수 없다』 <수감된 초기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구치소에 구속 수감되고 검찰 수사과정이 진행되면서 민애전 성원들은 발표된 조직의 엉성한 체계와 드러난 총책의 너절한 변절에 심대한 충격과 더불어 금할 수 없는 실망과 분노를 느꼈다. 그 와중에 조선 노동당의 「조작모략극」 발표와 한민전의 「애국인사 탄압을 위한 자작극」이라는 성명을 접하게 되었다. 민애전 성원 모두의 생각이 다를 정도로 혼란의 폭과 깊이는 심각했다.
투쟁 속에서 진실은 확연해졌다.
우리가 너절한 변절자 黃仁五보다 한민전, 조선 노동당 성명발표를 더 신뢰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복잡한 혼란 속에서도 大選과 1심 재판을 앞두고 『우린 간첩이 아니다』, 『안기부의 조작극이다』, 『우리가 결성한 것은 「남한조선 노동당」이 아니라 민애전이다』라고 주장하며 과감한 단식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강력한 1심 투쟁을 일치단결하여 전개하였다. 그 결과 1심 재판부의 「이번 사건은 조작된 것이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우리는 투쟁 속에서 「자작극」과 「CIA의 자작공작」을 파악했다. 우리는 이번 사건과 한민전, 조선 노동당이 절대적으로 무관하고 이선화(李善實-기자 注)와 黃仁五는 결코 당원일 수 없음을 자각했다>
趙德垣은 이 글에서 『한민전 성원이었다면 평생 징역을 산다 해도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민전이 건재하기에 더욱 행복하다』고 주장했다. 趙德垣은 『위대한 주체사상과 필승불패의 한민전이 있는 한 우리의 승리는 확정적이다. 한민전의 기치는 우리의 열렬한 지향이다. 주체사상 만세! 한국민족민주전선만세! 애국동맹·민족해방애국전선 만세!』라는 외침으로 글을 끝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