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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시인 연보
(계간 <시에> 2008년 겨울호 수록 원고)
1958년
경북 의성군 단촌면 세촌리 825-2에서 태어났다.(실제 출생은 1958년 음력 5월 22일이지만, 호적에는 1959. 5. 25) 위로 누님 네 분과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있다. 단촌면은 행정 구역상 의성군에 속하지만 마을 앞에 있는 조그만 내(川) 하나만 건너면 안동시이고, 안동 일직면 소호리에는 퇴계의 고제高俤인 조선조의 거유 대산 이상정의 사당과 달성 서 씨의 후손인 서성의 소호헌이 있는 곳이다.
이런 지리적인 요인과 어머니가 달성 '서'씨라는 것 등이 어우러져 어릴 때는 유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흔히 안동은 벼슬보다는 학문, 학문보다는 지조를 중히 여긴다고 하는데 이런 가치관이 어린 나에게 알게 모르게 내면화되어, 성장해서도 실리보다 명분과 체면, 정의를 중시하는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일직면 조탑동은 동화작가 권정생이 살았던 곳이다. 내가 태어난 곳과 권정생이 살았던 곳의 지리적인 근접성이 일찍이 권정생을 만나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63년
같은 동네 안에 있는 예수교 장로회 단촌교회 부설 단촌유치원에 입학하여 2년을 다녔다. 이때 어머니가 당시 시골에서 입기 어려운 가죽잠바를 사 주었으나 친구들이 다 나일론잠바를 입는데 나 혼자 좋은 옷을 입는 게 부끄러워 입지 않으려고 떼를 쓰다가 혼난 기억이 있다. 5.16 쿠테타 이후 미국유학이 유행이었던 당시 풍조 때문인지 어머니께서는 입 만 떼면 미국유학 보내준다고 말했다.(그러나 결국 가난 때문에 미국 유학은 고사하고 대학도 겨우 다녔다. 지금 생각해봐도 별공부가 없는 농사꾼인 어머니께서 어떻게 미국 유학을 생각했는지가 궁금할 정도이다.)
1965년
단촌국민학교 입학, 이곳에서 6년을 다녔다. 6학년 때 전교어린이회장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 조회 때마다 전교생(1200명 정도) 앞에 나와서 ‘차렷, 경례’ 같은 구령을 붙이는 게 부끄러워 이 일을 다른 친구에게 양보할 정도로 숫기가 없었다.
1970년
이 해 중학교 입학이 무시험제도로 바뀌자 의성군에 비해 비교적 학군이 좋은 안동시내 중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어머니께서 안동시내로 전학(요즘으로 치면 위장 전입)하여 안동서부국민학교를 졸업한다.
1971년
안동경안중학교 입학, 이 학교는 미션계 학교로 매주 수요일마다 예배를 봤고, 나는 신앙부장도 했지만 예수를 믿지는 않았다. 학급에서 1등을 하기도 했으나,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짤짤이’ ‘패싸움’ 등을 하기도 했다. 이때 장래희망을 적어내는 학생부란에 ‘소설가’라고 썼다가 담임이 교무실에서 소문내는 바람에 선생님들로부터 “처자식 굶길 놈”(아마 소설 ‘빈처’의 영향인 듯) 이라는 핀잔을 많이 받았다.
1974년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져 충격을 받았다. 1년 고입 재수했다. 이때 막내 누나를 따라 대구에 와서 대구시의 변두리인 비산동이라는 곳에서 자취했다. 이 동네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정도로 비만 오면 질퍽거렸다. 이 때 대구달성공원에 있는 ‘이상화 詩碑’에 가보고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고, 이 동네에 있는 변두리 3류 오스카극장에서 <별들의 고향>도 몰래 보았다.
1975년
연합고사 후 능인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사춘기를 맞이해 원래 내성적인데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객지에 나와 생활한다는 것은 무척 외롭고 힘들었다. 비가 오거나 귀찮은 날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모범생이 모인 특설반인데 유독 나만 12일을 무단결석을 하여 담임으로부터 ‘베트콩’ 이라는 핀잔을 받았다.
문예반인 <보리수문학회>에 가입하여 교내 백일장에 고향 어머니에 대한 시(「고향의 달밤」)를 써서 입선하기도 하고, 교지 <보리수>에 당시 연세대 철학 교수 김형석의 영향을 받은 ‘독서론’과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은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때 외로움을 이기려고 학교 공부보다는 독서에 열중했다. 방과 후 불 꺼진 자취방에 들어가기 싫어 학교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소설책과 불교서적(재학했던 능인고등학교는 불교 종립학교였다) 등을 읽었다. 이때 프로이트, 불교경전 등을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열심히 읽었다. 당시 도서관 사서선생이(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이었듯) 네가 그렇게 어려운 책을 제대로 이해하느냐고 핀잔을 줘 한바탕 싸우기도 했다. 김형석, 전혜린, 톨스토이를 비롯해서 소위 세계명작을 많이 읽었다. 김현의 『시인을 찾아서』(민음사)도 기억에 남아있다.
어떤 날은 책가방에 도시락과 무협지 12권만 넣어서 등교해 종일 무협지만 읽다가 온 날도 많았다. 한마디로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인 시기였다. 고3 때는 재단 관계자의 권유로 동국대불교학과에 진학해 승려가 되려고 한 적도 있다. 가족의 반대로 무산됐다.
-「문학사상」과 「독서신문」을 막내누나의 영향으로 정기 구독했다.
-지각문제로 담임과 다퉈 자퇴서를 제출했다. 시골서 어머니가 오셔서 담담에게 용서를 구하고 근신 보름으로 사태가 수습되었다.
1978년
김형석 교수가 있는 연세대 철학과에 가고 싶었으나 진학 실패했다. 고향에 내려가서 빈둥거리며 놀기도 하고 의성에서 고교 교사이던 이용섭, 시인 김금숙, 소설가 김호운 등과 <문소문학회>를 결성하여 프린트본 동인지를 내기도 했다. 이 책에 <서화리 가는 길> 등 수 편의 시를 발표했다. 불온시 되던 김지하 시집『황토』를 구해 읽었으나 큰 감동 받지 못했다.
1979년
계명대학교 야간부 영문과에 입학했다. 이 학교를 끝가지 다닐 생각은 없었고 입대 연기를 위한 방편이었다. 당시 이 대학 영문과에는 <빈 콜라병>이라는 시로 유명한 신동집 시인이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입학 후 3월 말 경 연구실로 찾아가 습작 시 몇 편과 <문소문학회> 동인지를 보여드렸더니 “음 좋다, 初薦 걸자”고 하는 바람에 대학 진학실패를 조기 등단으로 보상받기 위해 갑자기 종목을 소설에서 시로 바꿔 시를 미친듯이 쓰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주로 허무주의 경향의 시를 썼다. 가난, 외로움, 일류대 진학 실패 등에 다른 열패감 등 복합적인 정서가 허무주의와 퇴폐적인 정서로 나를 몰아갔다.
당시 학교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유일하게 도서관에 책 빌리기 위해 학교에 가곤 했는데, 혼자 속으로 이 도서관 책을 다 읽고 말겠다는 다소 허황한(?) 다짐을 하기도 했다. 수업은 전혀 듣지 않고 오로지 도서관의 책만 읽었다. 그 결과 한 학기는 19학점을 신청해 15학점을 F 받아 학사경고를 받기도 했다. 이때 신경림의 『농무』를 읽었으나, 여전히 신동집, 강은교, 박재삼, 박제천, 랭보, 보들레르의 시를 주로 읽었다. 이따금 신동집의 영시강의에 출석했는데 감동 받았다. 시를 써서 개별적으로 신동집의 연구실과 집을 찾아 다녔다.
1979년 10. 26이 일어나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 윤상수(극작가)와 함께 평리동 자취방에서 만세를 부른 후 시내로 진출했다가 형사들의 불심 검문에 잡혔다. 그때 김지하의 <오적> 필사본과 시국비판적인 글을 써서 가방에 넣고 다녔는데 다행히 가방을 뒤지던 현사가 지나치는 바람에 풀려났다. 유신시대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나, 문학은 여전히 허무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으로 진학 재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계명대 눌러 앉았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5급(현재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대구시공무원으로 발령받고 동사무소에서 11개월 근무하다가 그만뒀다.
광주항쟁(민주화운동)이 일어났지만, 정확하게 그 의미를 잘 몰랐다. 학생운동에도 관심이 없었고, 허무주의와 깊은 실존적인 고민에 빠져 있었다. 교내문학상 공모에 시로 당선했다.
여름 무렵 문학동인 <銳角>을 결성했다. 동인은 김용락, 남일우, 오승건, 오규찬, 김영욱, 윤상수, 최병규, 주재호 등이었고 시대와 예각적으로 맞서겠다는 결의를 내세웠다. 이 동인은 평론가 민현기 교수(계명대 국문과)의 연구에 의하면 대구지역에서 최초로 ‘현실주의 문학’의 싹을 보였다고 한다.
1981년
휴교 중 도서관에서 우연히 권정생 관련 글을 읽고 시골에 내려가 권정생을 만났다. 그 가난하게 사는 모습에서 충격 받았다.(이때의 정황은 『나의 스승, 시대의 스승』(솔과학, 2008)에 자세히 썼다). 권정생에게 광주사태, 농민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문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야간에서 주간으로 변경했지만 나중에 학점 부족으로 졸업에 곤란을 겪었다.
5월에 대구시내 유경다방에서 <예각> 시화전 ‘부탁한 편지는 오지 않았다’ 展을 열었다. 이때 팜플랫 서문에 내가 쓴 “펜의 힘은 칼보다 강하다”는 문구와 출품 시 때문에 신군부정권의 오해를 받아 대구경찰서에 연행돼 장시간 각목 등으로 구타를 당하고 수십 차례 조서를 쓴 적이 있다.
이때 형사가 “논 팔아서 대학 온 놈이 조용히 공부나 할 것이지 왜 이런 불순한 글을 쓰나? 부탁한 편지가 무슨 암호냐? 김대중과 연관이 있느냐? 바른 말 않으면 고향의 부모를 교통사고로 가장해 죽여 거리에 던져 놓으면 누가 알겠느냐?” 등 협박 한 것과, 회유하기 위해 고위급 경찰관이 사 준 우동 먹을 때 입술이 터져 우동국물이 들어가자 찢어지듯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1982년
신동집 시인이 <시문학>에 추천하겠다는 것을 거절했다. 문단에서 월간지 <시문학>의 권위도 그렇고, 무엇보다 문학에 대한 입장이 바뀌고 있었다. 대구시내 ‘사랑마당’ 갤러리에서 개인시화전을 했다. 이 화랑의 개관기념전은 판화가 이철수의 장판지그림 ‘동학군 떡 사먹다’ 였다. 두 번째로 내 개인 시화전을 열었는데 이때 낸 시화전 회람용 소시집『송사리떼를 몰고 하늘로』(흐름사)에 내 시 18편과 오규찬 시 2편을 실었다.
이 시집을 보고 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대구매일신문 월평란에 시단의 새로운 목소리라면서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등과 함께 나를 거론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영남대 교수이던 염무웅을 만났다. 이후 내 문학활동과 인생살이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시인 이성복이 계명대 불문과 교수로 부임해 와 2학기에 그에게 보들레르론 수업을 들었다. 이성복 연구실 놀러 갔다가 우연히 배창환 시인을 만났다. 이후 이성복에게는 예술가의 순수성을, 배창환에게는 현실참여의 역동성을 배웠다.
1983년
대학 졸업 후 군대 입대해 논산에서 신병훈련 받고 강원도 홍천 11사단에서 육군 복무했다. 후방에 있던 동인들이 예각동인 시집『다시금 그리움 하나로 선다면』(그루)을 냈다. 11사단 사령부에서 문서 수발 중 우체국에서 받은 문서 중 이 책을 발견하고 너무 기뻐 소나무 밑에서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물론 군대생활의 부적응 서러움도 함께 작용했다.
이 시집에 <귀향자의 노래> <고향> 등 18편의 시를 발표했다. 유격훈련 중 허리를 다쳐 국군병원에 입원했다가 그해 10월 말 의가사 제대했다. 군 후송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계간지 창비가 폐간된 창작과비평사로부터 15인 신작 시집 원고청탁을 받고 감격했다. 이 원고 청탁서는 동인시집에 실린 시를 보고 이시영 시인이 염무웅 교수에게 사람을 확인한 후 내 주소를 몰라 대구의 그루출판사에 보내 와, 한참을 묵다가 뒤늦게 친구가 발견하고 전방 후송병원으로 다시 보내 주었다. 원고 마감이 다 돼서 아픈 허리를 참고 엎드려 <송실이 누님> <파리 사냥> 등 5편의 시를 써서 창비에 보냈다.
10월 말에 군 제대하고 마포경찰서 뒤에 있던 창작과비평사에 인사하러 들렀다. 이시영 시인을 직접 만나고, 그 날 창비사에서 백낙청, 리영희, 임재경 선생을 만나 책에서 보던 분들을 직접 만나는 감격을 누렸다. 배창환의 권유로 <오늘의 시> 동인에 김종인 시인과 잠시 참가해 대구 하이마트 고전음악감상실에서 시낭송회 등을 했다. 당시 <오늘의 시> 동인은 배창환, 김재진, 문형렬, 류후기였다.
1984년
01월 창작과비평사 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가 출간 돼 공식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 밀었다. 2월 달에 하종오 시인이 요청해서 염무웅 선생의 추천으로 웅진출판사에 취직하러 상경했으나, 이시영 시인이 고달픈 출판사 생활 관두고 시골가서 공부나 더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권유에 따라 낙향했다. 하종오 시인 처음 만났다.
1월 말경 대구의 배창환, 김윤현, 김종인, 정만진, 정대호와 청주의 도종환, 김창규, 김희식 등과 <분단시대>동인 결성했고, 첫 동인지 『이 땅의 하나 됨을 위하여』(온누리)를 냈으나 판매금지 되었다. 3월 안동공고에 영어교사로 취직했다. 안동에서 전우익, 이오덕, 권종대, 정재돈(농민운동가) 를 비롯해 훌륭한 선후배들을 많이 만났다. 특히 전우익 선생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구의 진보적인 문화운동단체인 <우리문화연구회> 참가했다.
1985년
비판적인 교사운동에 참여하면서 마리스타 야학에서 교사를 했다. <분단시대> 동인지에 발표한 시가 문제되어 도 교위 장학사들에게 각서를 쓰고, 안동에서 독서회운동, 영화보기운동, 가톨릭 농민회활동 등 민주화운동으로 안기부안동분소, 정보과 형사들에게 수업 중 잡혀 나오고 구속시키겠다는 협박을 많이 받았다. 전교조의 전신인 ‘Y-중등교사회’ 안동지회장을 역임하면서 교육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86년
이 해 겨울 대전 가톨릭농민회 본부에서 평론가 채광석의 주도로 열린 지역문학협의회 결성 예비모임에서 분반토론 중, 그 후 발표돼 문단에 반향을 일으켰던 김명인의 ‘지식인 문학의 위기...’라는 논문의 내용을 같은 조원으로서 미리 듣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충격의 내용은 “저 친구가 서울대 빵잽이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나와 나이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뛰어난 생각을 할 수 있을까?”하는 소시민적인 충격이었다. 학교를 사직하고 문학공부를 새로이 좀 더 철저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이던 정호경 신부 처음 만났다.
1987년
04월 교사 이정란과 결혼했다. 주례 염무웅 선생. “가정을 역사 실천의 거점으로 삼으라”는 주례사가 기억난다. 신혼여행을 광주 망월동 묘역을 거쳐 지리산에 갔다. 딸 세연(1989) 채윤(1997) 낳았다.
이 해 전두환 군사정권의 4.13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성명서에 참여했고, 이 명단이 조선일보 사회면에 보도되었다. 이 일로 안기부 안동분소, 경찰정보과, 도교육청 장학사들에게 구속시키겠다 등의 협박을 교장실에 불려와 수차례 듣고 각서도 썼다. 이런 일의 반복으로 갖게 된 학교생활에 대한 회의, 소도시 생활의 답답함, 문학공부 더 하겠다는 각오 등이 복합돼 충동적으로 학교에 사표를 쓴 뒤 권정생 선생에게 "왜 혼자 맘대로 결정하느냐? 너는 혼자 몸이 아닌데"라는 꾸중을 듣고 민중적 연대감과 처신의 신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4월 말 사표를 낸 후 안동에서 대구에 올라와 <민중문화운동연합>에 참가해 문화운동에 뛰어들면서 ‘6월 항쟁’의 거리에서 참여했다. 이따금 화염병과 돌을 던지기도 했다.
11월 13일 <대구․경북민족문학회>(정지창, 이하석 공동대표)를 선후배들과 함께 만들어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후 이 단체의 사무국장을 10여년 이상했다.
첫 시집『푸른별』(창작사) 출간했다. 이때는 창작과비평사가 80년 계간지『창작과비평』 폐간에 이어 출판사마저 폐출되었다가, 6월 항쟁 유화국면에서 ‘창작사’로 재등록한 상태였다. 첫 시집을 이름을 빼앗긴 출판사에서 냈다는 사실이 이후 내 문학 활동의 어떤 운명처럼 생각되었다. <세계의문학> <문예중앙> 등 여러 지면에서 과분한 서평을 받았다.
1988년
계명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카프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도교수는 문학평론가 민현기였다. 대구 3공단과 비산동 지역의 노동자들과 <대구노동자문학회>를 만들어서 함께 공부했다. 이때 만난 이들 가운데 황병목 시인, 조선남 시인, 문해청 시인 등이 문단에 나왔다. 이때 운동가, 비구니 스님이 포함된 또다른 비합법적인 써클에 참여했다.
이 무렵 서울 신촌 노동해방문학 사무실에서 노해문에 참여하기를 권유받았지만, 정파 싸움조차 할 수 없는 지역의 미성숙한 문학(화)판 정서를 이유로 참여를 완곡히 거절하고 대학원 동료를 대신 추천했다.
1989년
영남대에서 정지창 교수의 <민중문화론> 강의에 참여하면서 대학 강의를 시작했다. 이후 2004년까지 고려대, 계명대, 대구대, 대구교대, 대구예술대, 대구한의대 등에서 15년간 강의했다. 첫 대학 강의 때 전우익 선생이 일본의 좌파 경제학자인 하상조河相肇와 같은 대학자가 되라고 격려했다. 80년대는 민중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각 대학과 단체에 50여 회 이상의 대중문학강연을 하면서 반독재, 반미를 주장했다.
1990년
<대구일보> 기자가 되었다. 이전 해부터 지역 언론사로부터 기자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던 중, 이 신문의 복간호에 기념시를 쓴 게 인연이 되어 경력기자로 취직했다. 곧이어 일어난 대구일보 노조활동으로 파면되었다. 노동청에서 노조활동 조사를 받다가 경찰에 불법 구금되어 열흘 간 대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다가 구속영장 기각으로 풀려나 도주했다. 구속영장 기각은 당시 대구지법에 현직 판사로 있던 고교 문예반동기(현재 한나라당 2선 의원이다)가 공인검사들로부터 노동운동을 비호하는 젊은 판사라는 낙인을 각오하고 적극 힘을 써서 기각됐다. 영장 재청구를 염려한 그 친구의 권유로 새벽 1시에 유치장에서 풀려나자마자 도주하여 6개월간 청송 주왕산에서 숨어 지냈다. 나를 체포하기 위해 형사들이 한밤중에 고향집 부모님이 주무시는 방에 불쑥 쳐들어가 이때 놀랐던 어머니는 아직까지 심장병을 갖고 있다. 교사이던 처를 미행하기도 했다. 6개월 간 수배생활 후 신문사와 타협해 벌금형으로 노조사태를 종결지었다.
영남일보 해직 기자 중심으로 대구경북 시도민 주주의 한겨레신문 모델을 딴 <우리신문>에 문화부장으로 참여했다. 기금 모금 과정에서 영남대 김종철 교수를 처음 만났다. 이후 김종철 곁에서 많은 공부를 했다.
1991년
계간 <사람의 문학> 창간하여 편집위원이 되었다. 김종철 교수가 <녹색평론>을 창간할 때 곁에서 지켜보았다. 이후 90년대 한 동안 녹색평론 편집자문역을 맡았다.
1992년
계명대대학원 총학생 회장을 지냈다. 이때 리영희, 김종철 교수 등을 초청해 ‘한반도의 핵 문제’ 등에 대한 심포지움을 열었다. 이 무렵 소설가 장정일에게 “시인이 시를 쓰는 게 운동인데 형은 왜 시를 쓰지 않는 거요?”라는 조크를 받을 정도로 시 창작보다는 운동권 주변을 맴돌았다.
1994년
처음으로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가 됐다. 이후 감사, 대구지회장을 지냈다.
1995년
계명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한국민족문학론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다. 홍승용(대구대), 이강은(경북대), 허상문(영남대), 서경석(대구대 이후 한양대로 옮김) 교수와 <문예미학회>를 결성했다. 출판사 문예미학사를 내 명의로 등록해 <문예미학> 시리즈를 12호까지 발행했다.
1995년
사회운동가 배남효와 <정치개혁대구시민연대>를 결성해 홍보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대구참여연대> 편집위원장, 운영위원 <평화통일시민연대> 운영위원 <우리복지시민연합> <참언론대구시민연대> 등 여러 시민운동단체에 가입해 힘을 보탰다. 향후 5년 간 배남효, 황환수(프로골퍼) 등과 술을 대취하도록 마셔 몸집이 급격히 불어났다.
1996년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기차소리를 듣고 싶다』(창작과비평사) 발간했다. 대구불교방송(라디오)이 개국하면서 문화프로 <솔바람 풍경소리> 생방송 진행을 맡았다. 이후 10여 년간 대구기독교방송, 대구문화방송 티비, 대구방송 티비 등에서 문화프로, 시사프로를 맡아 진행했다. (사)대구사회연구소 기관지 <대구경북지역동향> 편집장, 연구위원 맡았다. 이 연구소에서 노무현 정권 때 윤덕홍(교육부총리), 권기홍(노동부장관), 이정우(경제수석비서관) 이종오(장관급) 등 다수의 각료를 배출하여 노 정권의 싱크탱크라는 주목을 받았다.
권정생 선생의 핀잔을 받아가면서 선생의 흩어진 원고를 모아 산문집『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를 펴냈다.
1997년
논문집 『민족문학논쟁사연구』(실천문학사), 평론집『지역, 현실, 인간 그리고 문학』(문예미학사), 산문집 『예술과 자유』(사람) 출간했다.
1999년
‘사상문제’라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계명대에서 강사직 강제 박탈당했다. 아마 월북 했던 박영희 시인이 대구교도소에서 출옥한 후 대구지역 후배들(이 중에는 이철산 시인(사노맹), 조선남 시인(남선물산 노동파업)으로 복역한 바 있고 당국의 주목을 받는 친구들이었다)과 모임을 갖고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내가 주동자로 몰린 듯하다. 당시 학교 당국은 배후로 안기부를 암시했고, 내가 직접 만난 안기부 학원 언론 담당자(현재 한나라당 의원이 돼 있다)는 “ 김 선생이 공산주의자라고 해도 학교에 붙어 있는 게 우리로서는 관리, 관찰하기 좋은 데 왜 우리가 내 쫓겠어요. 우리는 절대 아니다”라고 한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당시 계명대 문창과 주임 교수이던 이성복 시인은 “용락아, 니가 잘못한 게 뭐가 있노? 민주화운동 한 거 밖에 더 있나? 전두환, 노태우 정권 대도 무사 했는데 민주화정권이라는 김대중 정권에서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노?”라며 나를 위로했다. 주변 민교협 교수들이 이 문제를 사회문제로 키워 싸우지고 했지만, 나는 중간에서 이성복 선생이 당국과 학교 사이에서 곤란할까봐 그냥 말없이 넘어갔다. 내가 정규직 정식 교수였다면 쉽게 못 잘랐을텐데, 힘없는 시간강사라고 함부로 자른다고 생각하니 화가 불같이 났고, 잘못된 권력의 비정함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대구지역 일간지 <영남투데이> 정치부장으로 입사했다.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최고과정) 수료했다.
2000년
세 번째 시집『시간의 흰길』(사람) 출간했다. 이 시집은 문예진흥기금 3백만 원을 받아 출판했다. 강사직에서 짤린 후 대구지역에서 본격적인 출판학술운동을 위해 그 동안 명목상 대표였던 <문예미학사>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권정생 선생이 내가 보기 딱했던지 격려금 3백만 원을 주시면서 돈 벌면 갚으라고 했지만, 출판사 운영으로 수천만 원 이상을 까먹었다.
2001년
대구 불교방송 라디오 시사프로 <아침저널> 진행했다.
2002년
격월간 <대구사회비평> 창간해 발행·편집인이 되었다. 편집위원은 김태일(영남대) 홍덕률(대구대) 배남효(운동가) 신도환(언론인) 고희림(시인) 이강은(경북대) 김태용(기자) 등이었다,
고려대 언론정보대학원 문예창작과(석사)를 수료했다. 고려대 강사. 대구매일신문에 '시와 함께하는 오후'를 연재했고, MBC-TV문화프로를 진행했다.
2003년
매일신문 선정 지역의 뉴리더 10(문화)에 선정됐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장을 맡았다. 몽골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에 한국대표 5인으로 참석했다.(이시영, 고형렬, 박영근, 한창훈, 김용락, 강형철, 유시춘, 김청미 등이 참가했다) 회의를 마친 후 몽골초원 여행 때 체력이 약해 힘들었다. <대구일보> 논설위원에 취임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의성 군위 청송)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했다. 그러나 <2004 총선물갈이시민연대>에서 선정한 ‘당선지지국민후보’ 53인 가운데 전국에서 무소속으로 유일하게 선정되어 정책능력과 도덕성이 입증되었다. 김근태(우리당) 고진화(한나라당) 권영길(민노당) 등이 같이 선정됐다. 그러나 준비 없이 출마한 탓에 결과는 참패였다. 나의 예상외의 출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출마 이유는 사회 개혁운동에 무엇보다 정치운동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밖에서 떠드는 것 보다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여 법을 바꾸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없다.
시선집『단촌역』(문예미학사) 펴냈다. 시해설집『시와 함께하는 오후』(솔과학) 출간했다. 대구 MBC-TV ‘여기는 문화도시’ 진행했다. 10월 대구 CBS라디오 시사프로 <라디오 세상읽기>를 매일(월-금) 오후 5시 6시까지 생방송했다.(향후 2년간) 대구지역 인터넷신문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취임하다.
2005년
03월 1일 경북외국어대학교 전임교수 발령났다. 교학처장 보직 받았다. 7월 창간한 대구·경북 시도민주 신문 <대구·경북시민신문> 편집위원장을 거쳐, 발행․편집인을 역임했다. 8월에 열린 남북작가대회(평양, 백두산, 묘향산 등) 남측 대표로 참가 했다. 11월 대구방송 티비(TBC_TV) 문화프로 <시야 놀자> 진행했다.
2007년
대통령 선거 때 상대적으로 참신하고 중소기업육성책이 주요 정책인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대구시선거대책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시민사회의 지원 차원이었고, 정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대선 후 결별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명칭변경소위원회에 위운으로 참여했다. 명칭 변경 안에 찬성했다.
5월 12일 권정생 선생 작고 시 임종했다. 권정생 민족문학인장 때 조사를 읽었다. 이후 유품수습위원회 7인에 참여했다.
2008년
시집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같지 않은 시』(문예미학사) 출간했다. 대담집 『나의 스승, 시대의 스승』(솔과학) 출간했다. <녹색평론> 100호 기념 대구행사에 시 낭송했다. 염무웅 교수 정년 퇴임하고 경기도 산본으로 이주했다. 6월에 내 시집 출판기념과 염무웅 선생 환송연을 대구호텔에서 열었다.
-대구시인협회가 주는 ‘2008년 대구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2009년
01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민예총) 대구지회장에 선임됐다.
* 위 연보는 2009년 03월 김용락시인께 간곡히 요청하여 받은 자료입니다 *
2006년에 작성된 ‘김용락 시인의 정체(?)’ 기존 게시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