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박남일 번작 -19 -

19. 왕의 부름을 받고   1261년이었다. 최씨 무신 정권이 몰락하고 김인준이 그 권력을 이어받았으나 고려 백성들의 생활은 크게 나아진 것은 없었다. 백성들은 여전히 몽골의 침략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백성들의 삶이 이러할진데 왕인 원종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런 원종은 일연을 불러 자신의 곁에 있게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일연처럼 학식이 높고 덕망이 있는 승려라면 틀림없이 자신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일연은 다른 승려들처럼 임금 가까이에 머무르고 싶어하지 않았다. 외려 권력에서 멀어져 백성들과 함께 하거나 산속에서 은둔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일연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원종은 좀더 곁에 두고 싶은 욕심이 났던 것이다. 원종은 다시 한번 간곡하게 일연을 청했고, 마침내 일연은 임금의 청을 받아들여 강화도로 왔다. 강화도로 온 일연은 선월사에 머무르며 왕이나 신하들에게 설법을 했다. 원종은 일연이 베푸는 법회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일연의 말들 마음 둘 곳 없는 원종에게 큰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일연이 강화도 선월사에 머무른 지 한 달이 지났다. 어느 날 머리가 하얀 노승 한 분이 찾아왔다. 그는 원오국사 왕영으로 보조국사 지눌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조계종을 이끌어온 인물이었다. 일연보다 50년 가량 먼저 태어나 조계종을 열고 국사의 지위에 오른 지눌을 일연은 늘상 흠모해 왔다. 그런데 그의 후계자인 원오국사 왕영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일연은 한없이 기뻤다. "어서 오시오, 원오국사." 일연은 선방(참선하는 방)에서 맨발로 뛰어 나와 원오국사 왕영을 맞이하였다. 원오국사는 긴 수염을 날리며 뜰 아래서 합장을 했다. 일연도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합장했다. 왕영과 일연은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과 불교계가 타락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보조국사 지눌에 대한 흠모와 찬사로 하루 해가 넘어가는 줄도 몰랐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지난 날 불교계는 정권을 잡은 무인들과 손을 잡고 부정부패로 심하게 얼룩져 있었지요. 이와 같이 불교계가 타락한 것을 크게 걱정하고 개탄한 분이 바로 큰 스님(보조국사 지눌)이지요." 왕영은 그의 스승인 보조국사 지눌의 모습을 떠올리기라도 하는지 지긋이 눈을 감고 말했다. 왕영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일연은 보조국사 지눌에게 가졌던 존경심을 한층 더 깊이 느끼게 되었다. "소승도 큰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일연은 진심으로 간절하게 말했다. "소승이 어찌 큰 스님의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왕영은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일연은 왕영에게 지눌의 가르침을 받게 해달라고 말했다. 왕영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자리를 고쳐 앉고 보조국사의 가르침을 차근차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연은 왕영이 말하는 것을 한 구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밖은 이미 어두웠고 선월사 뒷산에서는 부엉이 울음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보조국사 지눌은 일연보다 어린 나이인 여덟 살에 절에 들어왔다. 그 무렵은 중이 되는 것이 집안의 경사였으며,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으레 불교 교육을 받아야 했다. 여러 곳에서 도를 닦다가 스물 다섯 살 되던 해에 승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지눌은 출세의 길을 버리고 훌쩍 방랑의 길에 올랐다. 그는 흘러가는 물처럼, 하늘의 구름처럼 정처없이 떠돌았다. 그는 일찍부터 중이 인간 세계에 욕심을 내는 것을 싫어했다. '거짓 위엄으로 신도들을 속이고 어지럽히고 있구나. 이것이 이 세상의 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오로지 불교의 세계에만 빠져 인간 세계를 두려워하는 중도 못마땅했다. '근본을 찾지 않고 보이는 것에만 매달려 있구나. 사람을 떠나 부처가 따로 없는 법인데...' 그런 지눌은 마흔세 살이 되던 해에 마침내 그의 마음에서 모든 의심이 없어지고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진리란 밖에 있지 않고 자신 속에 있다. 진리라는 보배가 제 품속에 있다는 걸 모르고 그 보배를 밖에서 찾는다면 천년 만년 애쓴다 한들 헛일일 것이다.' 이렇게 깨달은 보조국사 지눌은, 당시 불교의 혼탁하고 어지러운 분위기를 바로 잡기 위해 전국의 절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홉 개로 흩어져 있던 불교계를 조계종으로 통합하였다. 그리고 '나 자신이 곧 부처'라는 진리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글을 쓰고 설법을 했다. 그리하여 '수심결'이라는 유명한 설법책을 썼다. 왕영은 보조국사 지눌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전하고 나서 일연에게 넌지시 말했다. "지금 우리 나라에 승려는 많은데 정작 큰 스님의 법통을 이어갈 만한 선사를 찾기가 어렵소. 바라건대 대선사께서 보조국사 지눌의 법통을 이어주기 바라오." "감히 제가 어찌... 저한테는 과분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선사는 일연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연은 몇 번 정중히 거절하다가 결국 노승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자신을 인정하고 중요한 일을 맡긴 거라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보다 옳은 일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백성들의 삶을 돌보지 않고 자신 하나만을 생각하는 불교라면 예나 지금이나 개혁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강했다. "대선사님, 저도 그 말씀을 따르는 데 온힘을 쏟겠습니다." 일연이 공손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사람을 떠나 부처가 따로 없다'는 보조국사 지눌의 절실한 가르침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였다. 또한 '수심결'의 한 구절을 음미해 보았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죽지 않더냐? 그러나 참된 마음은 푸른 하늘처럼 없어지거나 변하지 않는다.' 그후 일연은 왕영을 만나서 보조국사 지눌의 뜻을 이어받고 곧바로 여러 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었다. "저는 지눌국사를 가장 존경하는 스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지눌국사님은 제가 불교의 세계에 들어오기 9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분이 지은 책들을 읽고 느낀 것이 많습니다. 그 분의 앞에서 직접 말씀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일연은 보조국사 지눌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알린 다음 말을 이었다. "그 분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여러 갈래로 나눠진 불교를 하나로 통일한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백성들이 따를 수 있는 고려 불교를 만들자고 주장하셨습니다. 저는 지눌 국사님의 뜻을 받들어 여러 스님들 앞에서, 이 나라에 있는 모든 불교가 하나로 똘똘 뭉쳐 고려 땅 안에 들어와 있는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연은 많은 승려들 앞에서 자신이 지눌국사의 법통을 이어받은 제자라고 알린 뒤, 불심으로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회는 며칠 동안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일연이 지눌국사의 제자임을 스스로 밝히고 지눌국사의 교리를 널리 알림으로써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 그 명성을 듣고 온 나라 안에서 승려들이 몰려들어 선월사의 앞마당은 늘 북적거렸다. 그 즈음 고려에는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그것은 기필코 몽골을 몰아내여야 한다는 의지였고, 그 의지는 고려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하지만 몽골군은 고려에 대한 탄압을 굽히지 않고 더욱 악랄해졌다. 몽골군은 요양의 옛성을 고쳐 '안무고려군민총관부'라는 것을 설치하고 고려 수탈의 발판으로 삼고 있었다. 1264년 가을이었다. 일연은 천천히 뜰을 거닐고 있었다. 나무꾼 한 명이 절 문앞에 나무를 한 짐 부려놓고 도망가듯 뛰어가는 것을 보고 일연이 불러세웠다. "왜 그렇게 도망치듯 가시는 거요?" 일연이 묻자, 나무꾼은 고개를 못 들고 당황해했다. "아!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부처님께 불공이라도 드리고 가면 좋지 않소?" 일연이 웃음을 띠고 나무꾼을 바라보며 넌즈시 말했다. "아이고, 스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같이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어찌 높은 분들이 찾는 이 곳에서 불공을 드린답니까요." "허허허... 부처님 앞에 귀하고 천함이 어디 있겠소." 일연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스님 말씀은 맞사옵니다만..." 나무꾼은 슬슬 꽁무니를 빼면서 절 문을 급히 빠져나가버렸다. 도망치듯 절문을 빠져나가는 나무꾼을 보면서 일연은 백성들이 선월사를 찾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 찾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허, 백성이 찾지 못하는 절에 부처님이 계신들 무엇하랴?" 일연은 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또한 이런 절에 있은 들 무엇하랴." 일연은 백성들과 지낼 수 있는 조용한 시골로 하루 빨리 내려가고 싶었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일연은 임금에게 말했다. "전하. 소승은 본디 배움이 부족하여 공부를 더 해야 합니다. 이곳에는 저보다 훌륭한 스님들도 많이 계시고 절도 많으니 저는 이제 시골로 내려가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십시오." "호오. 역시 일연 스님의 생각은 훌륭하오. 그렇게 욕심 없는 생각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겠소. 하지만 일연 스님이 여러 차례 나의 청을 거절했듯 나도 일연 스님의 청을 거절하겠소. 백성들도 백성들이거니와 짐 또한 일연선사가 필요하오. 부디 짐의 곁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주오." 원종 임금은 간절한 얼굴로 일연에게 말했다. 그런 원종의 마음을 이해 못할 일연이 아니었다. 비록 권좌에 있기는 하나 외로운 왕이었다. 몽골의 압력은 접어두고라도 왕권을 우습게 아는 신하들 틈에서 버겨내기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일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일연의 결심은 이미 굳어 있었던 것이다. 일연은 조용한 곳에서 자신이 쓰고 있던 글을 마저 정리하고 싶었다. 임금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려 백성들을 위하는 일이었다. 지금 고려 백성들은 몽골의 숱한 침입에 얼마나 신음하고 있는가. 그들에게는 희망도 없을 것이며, 고려 백성의 자랑스러움마저도 없을 것이었다. 그들에게 고려인의 자긍심을 키워주는 일, 그것만이 몽골의 말발굽 아래 신음하는 백성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일연 자신이 해야만 했다. 그래서 일연은 굳이 임금의 곁을 떠나려 하는 것이었다. 결국 일연의 결심이 워낙 굳었던 터라 원종은 더 이상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일연이 매우 중요한 일을 하려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내 원종은 일연을 떠나보내기로 했다. 일연은 원종 앞에 허리를 깊숙이 숙인 뒤 강화도 선월사를 떠났다. (이어 20. 수제자 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