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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현에서 420년 전의 백의종군을 돌이켜 보다
이틀째라 어느새 적응이 되어 전일 같은 불상사도 없고 더욱 편한 밤이었다.
쌍백면청 소재지(평구2리)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이른 시각인 것이 되레 불만스러웠다.
아침7시가 조금 지난 마을을 살펴보는 중인데 온전하게 밝아오지 않았기 때문인지 휘황하게
밝은 면청사가 괴이쩍었다.
모자란 데가 있다고 오해할 정도로 순박한 인상의 청년이 숙직을 하고 잔무(?)를 정리하는
중인 듯 한데 절전에는 무관심한지 청사 전체의 불을 밝힌 것이다.
용무가 없는데도 들어서는 늙은이에 놀란 듯 반기며 배낭을 받아내린 청년, 김학근.
따끈한 녹차를 내놓으며 새벽같이 방문한 연유가 궁금한 듯 바라보는 그에게 참으로 싱거운
늙은이가 되어야 했다.
그는 내가 꾸짖은 것도 아닌데 온통 불 발히고 있었던 것을 사과하고 삼가로 가는 안전한 길
(길의 난폭자들로부터 안전한 샛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조언대로 33번국도 밑을 통과하여 '합천남부농협 벼건조저장센터'를 왼쪽에 끼고 돌아
국도와 나란히 한참을 걷는 동안에 삼가면으로 바뀌었다.
질주하는 차량들을 피해서 걷는 길인데 누가 뭐라 해도 이순신이 백의종군했던 길이 아님은
분명한 농로다.
벼건조저장센터의 신설로 생긴 길이니까.
(삼가중학교(삼가면) 정문 옆에 서있는 것과 동일한 안내판이다(아래)
'우리 고장 삼가'라면 여기 평구(쌍백면)는 이 안내판이 서있을 자리가 아니잖은가.)
(별의별 욕구가 분출되는 시대지만 농촌에서 돼지똥냄새 거부 플래카드를 보게 되다니.
장차 바람결에 향수냄새가 날리는 농사라야 살아남게 될까.(위)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479호 평구리 효정각(坪邱里孝貞閣/아래)
이색의 연속이다.
건물이 중요한가 그 건물에 담겨있는 내용에 비중을 둬야 하는가.
누각(閣)을 세워 효정(孝貞)을 상찬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주인공이 있어야 하는데 주인은
간데온데 없고, 건물에 관해서만 장광설이다.)
양천(양전교)을 건넌 후 양전마을 경로회관 앞에서 양천을 되건넜다.
이어서, 신기교로 유린천을 건너서 옛 국도인 삼가로에 들어섰다.
양전교를 건너지 않고 삼가로를 따랐더라면 수월했을 텐데 조금 더 걸은 것 같다.
걸음은 걸을수록 다다익선인데 아쉬울 것이 있으랴만 의도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능동적인
것과 피동적인 것은 느낌이 다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양전리 도로변에는 강씨사효각姜氏四孝閣)이 고색을 띄고 있다.
문이 잠겨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는데 삼가면 자료에 따르면 진주강씨 의수(義守)의 부인
양씨와 아들 삼형제, 육세손 사운(士運)의 효성이 지극한 사연을 기록한 비각이란다.
비각보다 옆에 넓게 자리하고 있는 재실인 인서재(麟西齋)가 안타까웠다.
역시 삼가면 자료에 의하면 1997년에 창건한 남파 김광부(南波金光富/ ?~1379)의 제향을
모시는 의성김씨의 재실이라는데 고물 쓰레기더미에 가려있으니.
행정기관(면청)의 환경관리 소홀과 거대 재실을 신축한지 겨우 20년인 의성김씨 후손들의
무관심 중 어느 쪽이 세인의 눈총을 더 받을까.
경상남도기념물(제8호)인 삼가 고분군(古墳群) 입구를 지났다.
양전리 해발 190m의 능선 위에 있는 가야의 무덤이란다.
장신구류와 무기류를 비롯해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무덤의 구조와 유물을 볼 때 4c초
~ 6c중엽의 무덤으로 추정된다나.
가야 무덤의 발달과정, 지역문화의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삼가지역의 취락
형성시기를 가늠하는데도 크게 기여한다고.
가미교(양천강)를 건너면 삼가중학교 정문 옆에 서있는 낮익은 안내판을 보게 된다.
쌍백면경찰관파출소 앞에서 본 안내판과 동일한 것으로 2003년 6월에'합천군향토사학회'가
세운 '충무공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안내판이다.
"6월2일 우리 고장 삼가에 도착하여 장맛비로 이틀간을 관사에서 머물다가. . . . 쌍백, 대양,
율곡을 거쳐. . . . "라고 했는데, '우리 고장' 삼가 이외의 장소에 서있기는 이상하지 않은가.
똑갘은 안내판이기 때문에 내 고장 안내판이 남의 고장에 서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지금은 쌍백면으로 분면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삼가현에 속하여 있었으니까 한 고장이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글의 내용으로 보면 스스로 이를 부정하고 있다.
면사무소 방문 무위론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철회해야겠다.
방문 목적을 거창한 수확에 두는 것이 아니라 뭘 묻고 대화할 수 있는 곳이 그 곳 뿐이니까.
외국이라면 언어때문이라 하겠지만 내 나라에서 대화 상대가 사라져 가는 현상이라면 바야
흐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
차량들이 몰리고 각종 몰품이 도로를 잠식하며 진열되고 먹거리들이 길바닥을 넓게 점유해
간다면, 이에 더하여 다중이 서성거린다면 장날 말고 또 있는가.
2일, 7일의 5일장 날이다.
삼가면측은 이순신이 백의종군로에서 세밤을 잔 곳이라 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나
사실은(의미있는 밤은) 한 밤 뿐이다.
내륙인 합천의 최남난 삼가가 이순신에게 감회 깊은 곳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정유년 6월 2,
3일을 묵은 것은 백의종군하기 위해서 권율 도원수부로 가는 도중이었으니까.
이 때의 두 밤(2일과 3일)은 그의 한양~합천의 행적으로 보아 별 의미 없는 밤이다.
70대 중반인 내가 삼복더위에 걸어서 보름 걸린 길을 고문에 시달려 피폐된 몸이기는 해도
50대 초반인 장수가 말을 타고 2개월이 걸렸다면 전시에 종군하러 가는 자세가 아니다.
정한 일시에 도착하지 않으면 벌 받는 법에서 제외된다 해도 백척간두의 나라에 대한 우국
충정이라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은 접어두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이 도리니까.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기에 하루를 더 묵었는가(雨雨 不能發程 因宿焉)
온종일, 많은 비가 내리는 날은 정전일로 합의한 전쟁이었던가.
합천의 도원수부 인근에 1달 반을 머물면서도 존재감 없이 지냈다.
권 도원수가 왕명과 전관예우 사이에서 고심하고 있다면 해전에 정통한 자신이 어떤 통로를
만들어서라도 자기 역할을 해야 하건만 음성적으로 예우만 받으며 무위하게 있기 달반이다.
마치 원균의 칠천량패전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듯 비로소 표면에 나타나서 자기의 역할을
따냈는데 합천에 도착하여 바로, 달포 전에 그랬으면 비극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권 도원수와 상의하고 진언한 대로 대책을 세우기 위해 전황과 민심을
살피고 오는 것이었는데 도중에 왕의 유서를 받고 중단해버렸다.
그 임무의 수행을 계속했다 해도 이미 백의종군은 아니다.
왕이 즉각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삼가현청은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러 갈 때 합천땅에서는 첫밤을 보냈던 곳이며 그로
부터 달반 후에 백의종군길에서 또 첫밤을 자는 묘한 인연의 장소다.
인연이 있다 해서 꼭 의미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인연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 하는 듯
한 합천의 이순신사람들(합천향토사학회를 비롯해)처럼 나도 나름의 의미를 찾아본 것이다.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환갑을 7번째 맞았으며 420년 전의 일이다.
그 정신의 올곧은 계승을 바란다면 경도되지 않고 차분한 역사적 조명도 필요하니까.
아등재 넘기 전에 한 초로(初老)가 삼가에서 산청의 신등면으로 넘어가는 재를 걱정했는데
삼가면청의 부면장(안명숙/女)도 같은 걱정을 하며 가회면으로 우회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합천군의 남쪽 관문이며 읍면을 통털어 3번째로 인구가 많고 백의종군로에서는 가장 많은
(3647명) 면이지만 장날이기 때문인지 면 사무소 안도 어수선한 느낌이라 바로 나왔다.
장마당에서 막걸리를 곁들인 순대국밥은 어느 장에서나 일품이건만 들어간 집은 순대국도
막걸리도 없는 집.
벅적거리는데 미리 다짐을 받았건만 나온 것은 순대국밥이 아니고 선지국밥.
나이든 주방녀의 착각인 듯 한데 단지 한끼 뿐인 것을 물리겠는가.
지근인 양천강변 삼가교 입구에 자리한 '삼가장터 삼일만세운동기념탑' 에 들렀다.
당시의 독립만세운동은 각 지역이 예외 없이 장마당에서 벌어졌다.
다수가 집결한 곳이어야 하는데 그곳은 5일만에 열리는 장마당 뿐이었으니까.
임진과 정유에 발악을 했음에도 뜻을 이루지 못한 왜구가 300여년 후에 소원을 성취했으나
요원의 불길 같은우리 민족의 저항에 전전긍긍했는데 여기에도 저항의 자취가 살아있다.
무심코 다리(양천의 삼가교)를 건넘으로서 아주 조금 돌게 되었다.
이른 아침에 이어 두번째다.
특히 우회에 조심해야 할 날인가.
가수교를 건너 바로 이순신 백의종군로 표석을 대면함으로서 바른 길로 들어섰다.
곧 북으로 난 '하판로'(하판골)가 분기하는데 '남명로(南冥路)로도 불리나 보다.
남명은 영남학파의 거두로 평생 관직에 오르지 않고 제자 육성에만 전념했다는 조식(曺植/
1501~1572)의 호(號)로 그의 부모(趙彦亨과 淑夫人 李氏)의 유택이 4.6km 북쪽에 있단다.
조식은 1555년에 단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사직하면서 임금(이조13대 明宗)에게 올린
사직상소문(丹城疏/丹城縣監辭職疏)으로 당시의 정국을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던 분이다.
백의종군로는 서부로(60번)가 되어 하판천(금교)과 문송천(두모교)을 건너 두모리를 지난다.
두모리(내동)는 백의종군길(7월18,19일)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백의종군 전길의 일기에는(6
월 2일) 언급된 마을이다.
"일찍 떠나 단계 시냇가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삼가에 이르니, 삼가현감이 산성
으로 이미 가버려 빈 관사에서 잤다. 고을 심부름꾼이 밥을 지어 먹으라고 한 것을 먹지 말라
고 종들에게 타일렀다. 삼가현 오리 밖에 홰나무 정자가 있어 거기 앉아 있는데, 근처에 사는
노순일(盧淳鎰) 형제가 와서 봤다"
내게 있는 한문본(漢文)에는 후반부가 없지만 번역본에는 있는데, 삼가현청으로 가는 길에
쉬었다 간 것인지 현청에 여장을 풀고 오리 길을 되돌아와서 쉬었는지 애매하다.
기록순으로라면 후자가 되는데 믿기지 않고 후반부와 전반부를 바꾸려면 근거가 없고.
오리라 했지만 3.5km나 되는 길인데 홰나무 정자가 그토록 인력(引力)이 있었던가.
그보다 그럴만큼 낭만적 여유가 있었던가.
글의 순서가 바뀐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순서가 옳다면 예사롭게 볼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자나무도 시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2004년 10월 25일에 지정된 보호수가 2005년 11월에 세운 표석에는 '느티나무'로 되어 있다.
2008년 12월에 또 세운 표석에는 '팽나무'라 했으니 하나의 나무가 활엽수 교목이라는 것 외
에는 분류과목이 각기 다른 3개의 나무로 되어 있다면 어느것이 진짜?
수령도 500년이라면 420년 전 이순신이 지나갈 때는 겨우 80년에 불과한데 여러 명이 쉬어
갈 만큼 거목 정자였는가.
나무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표현상의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이순신을 홀릴 정도의 정자
나무였다면 420년전 당시에도 기백년 된 거목이었을 것이다.
백의종군로 본질에서 벗어난 일로 왈가왈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기록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일이므로 규명이 필요하다.
<위 두 문제는 번역본은 믿지 못하겠고 원본 대조는 할 수 없어서 유보하려다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도움으로 원본 정유일기의 복사본을 받아서 일시에 해결하게 되어 다행이다.
일기에 누락하였다가 좁은 여백에 추가로 삽입한 것이 분명하며 '槐亭下坐'(홰나무 정자 아
래 앉아)가 맞다.
합천군청은 보호수로 지정할 때 '느티나무'라 했고,' 3년 후에는 팽나무'로 고쳤다.
보호수로서의 가치가 있다면 신중하게 접근하고 다뤄야 하건만, 이순신이 본 이름까지 각각
달리 분류되는 3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바로잡아야 한다>
마을을 살펴보다가 누대를 살아온다는 토박이를 만났다.
54살의 宋씨와 여러 얘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어눌증이 워낙 심해서 곁에 있는 아들의 도움
으로 겨우 몇마디 나눈 것이 못내 아쉬웠다.
우물은 두레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사용중인 듯 한데 주민수가 지금은 50여명이지만
많았을 때는 마을에 3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 외에는 모두 폐기되었단다.
이 우물물도 허드렛물로만 사용하고 식수는 수돗물이라는데 산간벽촌 외딴집까지도 수도가
들어가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소 목장과 가금농장들로 인해서란다.
농. 목장들에 쏟아부은 방역제와 약품들, 그랬음에도 도처에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한 무수한
가축과 가금들로 인해 생명수라던 우물의 수질이 심각하게 오염되었기 때문이라니까.
정자의 지근에 있는 경로당에서 정자나무와 이순신의 관계에 관한 구전 설화를 들으려 하였
으나 아무도 없으니.
50명여의 마을 인구 대부분이 늙은이지만 경로당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노옹은 없는가.
도로 재포장공사중에 있는 한 청년, 거미줄 같은 도로망은 물론 백의종군로까지 이 지방의
길에는 꽤 유식한 듯 한 그가 백의종군로 정보를 주었다.
2번이나 들은 같은 조언을 세번째로 들고 나오며 무작정 이 길만 따르란다
잿밥만 노리는 자들아 어디로 가란 말이냐
내가 연배려니 생각했던 듯 말씨가 거칠다가 자기보다 7살 연상임을 알고는 수그러들었기
망정이지 시비를 작심한 듯 대들어서 당황스러웠으니까.
사단은 혼란스런 백의종군로 표석 때문이었다.
고가의 백의종군로 표석이 겹으로 서있는데도 도움되는 것은 없다.
초행자라도 쉽고 바르게 찾아갈 수 있어야 바른 표석이라 하겠는데 한쪽은 막혔음을(가서는
안됨을) 의미하고 갈 수 있다고 되어 있는 쪽은 마을인들이 막는다.
길에는 띄엄띄엄이나마 표석이 있지만 산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미로를 헤매다 마는 꼴
이 되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정을 내가 알 리 없잖은가.
모두 우측 가회면으로 우회하라고 조언했는데 그 쪽으로는 길이 없다는 영감.
길은 있으나 백의종군로가 아니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오로지, 현 위치(삼가면 덕진리)에서 농암소류지~농밭골~갓골~연산마을~신등면 간공리
(산청군)로 가야 하는데(전체 길이 7km) 산길을 갈 수 없으니까 오던 길로 되돌아가란다.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가회면으로 우회하는 길이 바른 길로 믿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불만이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데도 그래서는 안된다는데 뭐라고 대꾸하겠는가.
오로지 잿밥만 노릴 뿐 염불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이 해놓은 짓거리에 분을 삭이지 못하는
영감을 어찌 탓하겠는가.
촌로들이 한번 고집 세우면 비켜서 가야 한다.
자기 외에는 모두 틀렸고 아무런 대안이 없는데 무슨 대화가 이어질 수 있는가.
이 영감도, 아마, 7km중 산 넘어가는 구간은 얼마 되지 않은데도 거금을 들여 복원하였다는
자들의 헛소리에 분노하는 것이리라.
촌로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말을 나눌 기회가 도시와 달리 극소하기 때문에 더 심할 뿐 도농을 망라한 문제다.
서양의 촌로들은 우리의 고령자들보다 더 심하다.
길을 묻거나 다른 이유로 말길이 터지면 놓아주지 않는다.
갈길 바쁜 상대편의 사정은 아랑곳없을 정도로 그들의 고독이 절박하다.
죽음에 이르는 병(孤獨死)으로 악화되며, 범 지구촌의 문제로 확장 일로에 있다.
덕진리(삼가면) ~ 외사리(가회면)의 그뭄고개(?)도 만만한 고개가 아니며 우회한 가회해서
백의종군로(산청군)에 복귀하기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가회면청 소재지까지 걸을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정류장에 무료히 앉아서 기다리느니 걷다가 오는 버스를 타려고 걸었다
어느새 볼 일들을 마쳤는지 장보러 갔다 돌아오는 촌로들로 가득찬 버스를 보냈다.
가회면 늙은이들이 모두 삼가장으로 몰려 갔다가 무리지어 돌아오는지 빼곡한 버스 안에 큰
배낭과 함께 하는 내가 들어서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에.
지팡이 짚고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긴한 볼 일이 뭐 있겠는가마는 옛부터
5일장은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빠르고 편한 버스가 없던 때는 장날이 오면 새벽같이 아침일을 마치고 이미 지어놓은 짝들을
챙겨 길을 떠난다.
걸음을 재촉하는 아낙네의 치맛바람이 여간 아닌 것은 오랜 세월의 관습이었다
지금은 면 단위에도 농협 마트(하나로)를 비롯해 상설 가게들이 있다.
며칠쯤은 장에 가지 않아도 될 냉동냉장시설이 가가호호 있다.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댈 거리가 쌓일 겨를 없게 통화하는데 만나서 수다떨 장날 기다릴 일이
있으랴만 장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여전한 것 같다.
다음 버스도 마찬가지였으나 운전사의 배려로 정오 조금 지난 때에 가회면청 앞에 당도했다.
덕진리 영감 말대로 길이 아니기 때문에 길을 찾기 위해서는 안내를 받아야 했다.
한데, 평일(수요일)의 낮 12시 반쯤인데 면청의 모든 문이 잠겨 있다니?.
하도 어이없어 배낭을 내려놓고 출입문(정문) 앞 계단에 넋놓고 앉아 있었다.
1시가 임박하여 직원으로 보이는 여인이 문을 열고 안으로 안내했다.
오오라, 정오 이후 1시간은 면청내 직원 전원 일체의 식사시간이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그 시간에는 아무도 훼방놓지 못하도록 폐문 철시(?)하나 보다.
산골 면청의 이색적인 점심시간 관리에 고객이니까 왕이 되는 면민들의 불만은 없는지.
마음 편한 점심시간 갖겠다고 문 잠그는 관공서를 처음 대하기 때문인지 컬처 쇼크(culture
shock)가 오는 듯 했다.
역지사지의 아량이 부족하며 기다리는데 익숙하지 않은 면민들도 그랬으리라고 짐작되지만
면장이 표를 먹고 사는 단체장이 아니기 때문에 초지일관 실행이 가능한 것 아닐까
공차증을 불러온 산청의 백의종군로
삼가면 덕진리에서 가회 경유 산청으로 가는 길이 백의종군로가 아님은 이미 알고 있다.
지름길이 있다면 그 길이 최선의 길인데 1089지방도가 선택의 여지 없는 유일한 길이란다.
신등천과 거의 평행해서 오순도순 가면 된다고 나이든 직원(부면장?)이 말했다.
어느새 "경상남도에서 복원하는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 : 총 161.5km" 개요도와 어느
단체의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길 이음 도보 대행군 계획"을 프린트해준 여직원 김미영.
그녀에게 마음속 깊은 고마움을 표하고 가회면청에 들르기 참 잘했다고 자찬하며 나왔다.
가회면 중심지를 벗어나면 중앙분리선도 없는 도로라 긴장을 풀어서는 안되겠는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왕래 차량이 많지 않다는 것.
백의종군로가 홍보대로 복원이 되었다면 걸을 까닭이 없는 길을 부득이 걷고 있으므로 전화
위복의 행운이 따르기를 막연히나마 기대하며 걸었는데 건진 것은 단 1건 춘우정(春雨亭).
가회면 함방리 1089번지방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는 윤우벽(尹右辟/1585~1657)의 정자다.
벼슬은 종7품 직장(直長/현 7급 주사보)에 불과하나 공적과 학덕을 기리고 강학하기 위해서
1911년에 문중에서 건립했다는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62호다.
외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을까.
지방문화재라 하나 중고 문짝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려고 욕심을 냈을까.
문짝들을 도난당했다는데 합천군이 새로 붙인 합천활로(陜川活路)라는 이름의 테마길에 이
춘우정이 포함되었단다.
지자체들의 웰빙 길 내기 열풍이 합천군이라고 비켜가겠는가.
한데, 당일코스로 추천한 길이 해인사 ~ 망향의동산(34.16km/56분), 망향의동산 ~ 춘우정
(36.82km/59분)이라면 두 발로 걷는 것이 아니고 네 발로 달리는 것 아닌가.
차로 달리면서 "세상의 번잡함을 잠시 잊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을까.
이 땅의 사람이라는 이름의 직립동물들이 도농 불문하고 어쩌다가 걷기를 죽기보다도 싫은
형벌로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잠시 마음이 산란해졌는가.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걸었는가.
1톤 트럭 한대가 소리 없이 다가와서 옆좌석에 타기를 권했으니까.
그 위치가 덕진리에서 산을 넘은 후 1089지방도로에 합류하는 지점, 산청군 신등면 사정리
월평교 삼거리, 연산 간공 마을 입구였다.
500m도 못되는 지점, 단계리의 백의종군로 표석 앞에서 내렸다.
진주시내에 거주하는 60대 후반의 허학도, 그도 무료했던가
진주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제의했으니까.
최종 목적지를 묻는 그에게 우리의 위치인 신등면에서 최단거리에 위치한 수곡면을 빠뜨리고
진주라고 답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백m 비켜있는 신등면사무소에 들른 시각은 오후 2시 반쯤.
적촌현, 궐성현이었던 신라시대 이후 고려때는(6대 성종14년) 단계현으로 개칭되었고, 이조
때(4대 세종14년) 강성현을 더하여 단성현이 되었고, 일제때(1914년) 단성현 법물면이 신등
면으로 바뀌었다는 면이다.
상거가 10km남짓 되는 신안면 거주 이학근과의 약속이행에 지장없겠기에 여유로워졌는가.
면청 직원의 조언대로 5일장터 뒤, 단계천변에 조성되어 있는 충무공 이순신의 추모공원에
들렀는데 내 평생에 본 최소의 미니공원이다.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추모탑과 동상이 공원의 전부니까.
추모의 장소라면 광대한 면적, 호화로운 치장이어야 할 까닭은 없으나 공원이라는 이름에는
지나치게 간소하다는 느낌이었다.
주목할 것은 백의종군기간을 왕의 유서를 받은 1597년 8월 3일까지로 못박은 공식적인 글이
추모탑 건립 취지문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연한 논리로, 백의종군하기 위해서 합천으로 가는 백의종군 전길과 그 기간도 제외했어야
하는데 포함된 것은 논리가 도중에 증발해버린 것 같아 유감이다.
이에 더하여, '합천으로 가는 행로', '전황조사 행로', '재수임 행로' 등 이성적 판단을 하는 듯
하다가 '경남지역 백의종군로 총연장:161.5km'라니 현기증이 일 정도로 헷갈리게 한다.
권율 도원수부가 있었던 합천 현지에서는 그 위치문제로 치열한 공방이 진행중인데 이웃인
이곳에서는 그 곳이 율곡이라고 못박았다('단계천변쉼터'의 글)
불편부당해야 하는 이웃집 일에 한쪽 손을 들어주는 꼴이 아닌지.
지마고개(止馬)를 넘었다.
벽계역에서 단계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을 원도 이 고개에서는 하마, 걸어서 넘어갔다는 고개.
옛적부터 많은 인재가 배출되고 있는 고을(단계)이라 해서.
지나치게 여유부린 듯 하여 박차를 가하려는데 갓길 없는 도로를 쏜살같이 달리는 대형 덤프
트럭들이 연달았다.
잠잠하던 공차증이 살아났으니 남은 길을 어찌한다?
면청 직원의 말대로 1006번도로 외에는 백의종군로의 역할을 할 대체로가 없는 길에서 살인
면허증을 소유한 듯 덤프트럭들의 광기에 주눅이 들어 제대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한가로운 지방도지만 이즘에는 채석장의 돌들을 실어 니르는 대형트럭들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그 직원의 경고를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한귀로 흘려버렸는데 이렇게 심할 줄이야.
몸을 스치며 달아나는 놈들 피하느라 지쳐갈 때 이학근의 전화가 왔다.
목적지까지 반을 넘겼을 뿐이기 때문에 달리듯 해도 해 안에 도착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죽기를 각오할 수는 없잖은가.
버스를 이용하려 했으나 많이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덤프트럭과의 전쟁을 하며 조금씩 전진
하고 있을 때 다가오는 봉고트럭(?)에 손을 들었다.
무심코 들었지만 SOS신호에 다름아니었을 것이다.
정지 의사를 알리는 우측 깜박이가 점멸했고 곧 그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지근의 딸기농장을 경영한다는 성현규.
지리산 자락이 쌈터라면 호산애산(好山愛山)은 당연하며 자투리 시간을 걷는 일에 바친다는
이 젊은이가 나를 신안면사무소 앞에 내려놓고 갔다.
나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기 산청의 신안땅에, 이학근 외에 또 있을 줄이야.
(삼가면 덕진마을(합천군)에서 산을 넘는 백의종군로는 신등면 사정리(산청군) 월평교 삼거리
앞(아래사진)에서 4km쯤 돌아온 우회로(1089지방도)와 만난다.
산길 곳곳에 어떤 표지판들만 설치해도 어렵잖게 넘어갈 수 있으련만.)
(내게 도움을 준 분들의 차 어딘가에는 염주 또는 묵주가 걸려 있다.
극히 드문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진주人 허학도(위)의 차 변속레버에도 굵직한 염주가 걸려 있고.)
(신등면청(위)을 나와 바삐 걷는 걸음을 붙든 것은 여재당(如在堂/아래)
신등면 단계리의 노변에 자리한 용담정사(龍潭精舍) 외삼문의 편액이며 한결같아야 한다는 뜻이란다.
용담정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58호)는 임란때 의병을 일으켜 종사관으로 활약한 용담 박이장(朴而章/
1547~1622)을 기리는 사당이다.
임진, 정유의 왜란과 직결되어 있는 이순신의 백의종군로를 따라 걷고 있는 자로서는 갈길 바쁘다는 이유로
지나쳐서는 안되는 집이다.
이조 중기, 고령지역(경북)에서 활동한 문신으로 임란 때 활약 외에도 대사헌, 도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했고
낙향 후에는 후학양성에 여생을 바쳤다는 분인데.)
8년만의 해후 아학근
22번으로 끝났지만 매년 설 전후에 하는 지리산 종주때 대부분을 성삼재 노고단(전남구례)~
천왕봉 중산리(경남산청) 코스를 택했다.
천왕봉을 시종점으로 하는 백두대간 종주때 외에는 거의.
중산리로 하산 후 신안면청 소재지인 원지에서 서울행 버스를 탔기 때문에 산과 관련해서는
가장 많이 들른 곳으로 십지 안에 드는 지방이다.
인구가 6천명에 육박하므로 산골면으로는 큰 편인 면청 소재지.
변화의 속도가 느리기는 해도 반c가 넘는 세월인데 변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산청군 다운타운 보다 더 알차게 발전하고 있다는 평가라는데 웬만한 도시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지리적으로 산청군의 관문 구실을 하는 교통요지임을 의미할 것이다.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마감하는 유서를 받은 곳이며, 나도 걷기를 끝낼 그 곳으로 가는 길을
면청 직원으로부터 안내받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8년전, 제주로(濟州路/제주도옛길) 일주에 이어 통영에서 시작한 통영별로(통영~한양도성)
걷기가 고성, 사천, 진주를 거쳐 산청에 당도했을 때다.
산청읍 찜질방에서 1박하고 다음날도 새벽같이 지리산둘레길 일부를 걷기 시작했다.
성심원에서 웅석봉까지 힘겹게 오른 후 단속사지, 다물평생교육원, 입석리, 1001번지방도에
'호암로'를 달게 한 호암동천을 지나 전일 걸었던 길 따라 산청읍으로 가는 중이었다.
홀가분한 몸(큰배낭은찜질방에)이기는 해도 워낙 많이 걸었기 때문에 지친 상태에서 관성적
으로 걷다가 편승하게 된 이학근(신안면 안봉리)의 전화다.(메뉴'옛길' 91번글 統營別路(10)
중 "오조점 대신 안봉리 이학근 부부" 참조)
(어떤 제하의 글을 쓸 때 우연의 일치 또는 연관을 이따금 보게 되는데 지금 이순신과 이학근
을 말하면서 8년전에 쓴 이순신 장군과 이학근을 돌아보며 묘한 인연을 느끼고 있다)
곧 면사무소로 찾아온 이학근.
꼬박 8년만의 해후다.(엄마 복중에 있던 아들 송하와의 상면도 곧 이뤄졌는데 9살이라니까)
종심(從心)을 바라보면서도 예리하고 활발한 현실참여를 통해 쌓인 교분관계?
그를 향한 직원들의 정감 넘치는 인사가 부러운 늙은나그네의 심사가 꼬여가려(?) 하는가.
이학근의 출현으로 중단되었던 안내를 계속하기 바랐으나 진주시 수곡면이 접경인데도 정보
력이 서울 김영감만도 못하다면 등하불명으로 이해할까 무관심 탓으로 돌릴까.
이미 밤이 되었기 때문에 잠자리를 정하려 하는데 이학근의 강권(?)으로 숙객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과공비례라지만 과사(過辭) 또한 불례(不禮)라잖은가.
잠자리에 관해서만은 만점객(滿點客)임을 온천하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나의 지나친 사양이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인데 손수 지은 황토방을 어이 기피하겠는가.
게다가 2.5가족과 헤어졌다가 3가족과의 만찬까지 갖는 행운인데.
더구나, 소사를 먹고(飯疏食) 물마시며(飮水) 팔을 굽혀 베개삼아 자더라도(曲肱而枕之) 뜬
구름에 불과한(如浮雲) 부귀를 탐하지 않으면(不義而富且貴) 즐겁다(樂亦在基中矣/論語)는
두칠이(이학근의 nick-name)의 시간차에 잠시나마 편승하는데. <계 속>
(건물의 외내벽은 물론 창문에도 두칠이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녹아있는 황토방!(아래)
이 밤만은 늙은 길손의 안식을 위해 있는 방이다.)
(위는 0.5가족이었던 송아(2世)가 어느새 카메라 맨으로 성장하여 찍은 사진들이다.)
첫댓글 선배님 냄새가 솔솔느껴지는듯 한숨에 다 읽었읍니다, 밝은 새해에도 건강하십시요.
이사하신 곳이 자제와 인근이라셨지요?
진즉 안정되셨으리라 믿으며 양주가 더욱 강녕하시는 무술 새 해 되소서.
혹시라도, 저의 부지중 다녀가시는(귀국) 일은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