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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가을 골로새서강의
주께 하듯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3:23)
오늘 말씀의 주제는 ‘신자의 인간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신자는 옛 사람과 삶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가 세상에서 맺는 인간관계도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말할 필요도 없는 말씀인 것 같고, 성경 말씀치고는 좀 싱겁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당시의 유대 문화나 로마 문화에서는 여자나 자식이나 노예는 수에도 치지 않았고, 아비가 자식을 죽여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회를 생각할 때 아내나 자녀나 노예를 남편과 아비와 상전과 동등하게 놓고 윤리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날에 편지를 썼다면 더 많은 인간관계에 대해서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회에서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든 신자의 근본적인 자세는 “주께 하듯 하라”는 한마디 말씀에 있습니다. 신자는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든 먼저 주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인간관계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남편과 아내 (3:18,19)
18,19절을 봅시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바울은 신자의 인간관계를 가르침에 있어서 먼저 남편과 아내, 아비와 자녀 등 가정 윤리를 말합니다. 여러 가지 통계나 경험으로 볼 때 사회의 모든 문제는 가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가정윤리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중에서도 맨 먼저 아내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만큼 한 가정에서 아내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아내의 책임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오늘날 여성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화를 낼 것입니다. 여성 운동가들은 이 말씀 때문에 성경을 배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 이렇게 야멸치게 들릴 만큼 단순하게 말씀하는 데는 여기밖에 없습니다. 에베소 5:21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에 복종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아내들에게만 일방적인 복종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남편들에게도 똑같이 복종을 가르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내가 약하고 못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종은 동등한 인격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덕성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부부가 의견이 충돌할 때 누구 하나는 양보해야 하는데, 그럴 때 아내가 양보하라는 뜻입니다. 아내의 의견이 더 옳고 훨씬 더 지혜로운데도 양보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가 훨씬 옳고 지혜롭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들에게 더 깊고 넓은 내면이 요구됩니다. 벧전 3:4,5에서는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사모님들이 온유하고(gentle) 안정된 심령(quiet spirit)으로 남편을 세우고 남편의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이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남편들에게 요구되는 의무는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 세 가지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에로스(eros)’는 남녀 사이의 성적인 사랑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필로스(philos)’는 친구 사이나, 부모자식 사이나, 스승제자 사이의 사랑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아가페(agap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잘 쓰지 않는 말이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형제끼리의 사랑이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을 에로스나 필로스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서 아가페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아가페라는 단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쓰인 사랑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신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이요, 자신을 전부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또 영원한 사랑이요, 변함 없는 사랑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해하고 감당해 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25에서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명령합니다. 남편들이 이런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들이 가정의 주인이라고 권위를 부리거나, 돈 좀 벌어온다고 위세부리지 말고, 아내들을 깊고 뜨겁게 사랑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괴롭히지 말라’는 말씀은 신체적 학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괴롭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독한 말로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내를 괴롭히지 말라는 말씀은 모진 말로 아내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내는 남편보다 주먹이 약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지만, 대개는 그러합니다. 또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더 정서적입니다. 이래저래 남편보다 아내가 더 상처받기 쉽습니다. 남편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아내의 삶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작심하고 괴롭히는 말을 하거나 손찌검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구나 외도를 한다거나 한 눈 팔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내가 서지 않고서는 가정이 설 수 없는 것을 생각할 때 남편들이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메시지를 듣고 가서 “거 봐라, 복종하라 하지 않았느냐?” “거 봐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면서 부부싸움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들의 가정이 질서와 사랑 속에서 든든히 서고, 자녀들과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아비와 자녀 (3:20,21)
20절을 봅시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앞에서 아내더러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자녀들더러 아비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가정 내의 질서를 위함입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과는 다릅니다. 자녀는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부모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하듯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권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녀가 아비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미국의 유명한 가정 의학자요 상담가인 제임스 답슨이라는 분은 미국의 교육이 부분적으로 크게 실패했다고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까지 미국의 교육은 자율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자율성을 강조하는 그만큼의 농도로 책임감을 강조하지 않았다. 또 우리는 독립성을 강조했지만, 독립성 못지 않게 중요한 권위에 대한 순종을 가르치는 일에 완전히 실패했다. 미국은 지금 그 실패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
남의 나라 얘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민주적으로 키운다, 기를 죽여서는 안 된다 하여 버릇없이 키우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녀가 순종심을 배우지 못하면 자기를 감당하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이 됩니다. 또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신앙생활 하는 데 있어서 아주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물론 부모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불순종이 되는 경우에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또 부모님이 도둑질 해 오라고 해도 순종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부모님에게 순종할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아름답게 유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21절은 이제 아비들이 새겨들어야 할 교훈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여기서 먼저 ‘부모들아’ 하지 않고 ‘아비들아’ 하신 뜻을 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부모들아’ 하지 않고 ‘아비들아’ 한 말씀은 아버지가 가정의 지도자라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으며, 자녀 교육 또한 그러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세계에서 제일 바쁜 한국의 아버지들은 “아니, 가족들 벌어 먹이기도 바쁜데 언제 자녀 교육까지 책임집니까?” 하고 반박하고 싶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 교육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다고 가르칩니다. 아버지는 가정예배를 인도하며 말씀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자녀들에게 성경 가르치는 일을 맡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가 이 일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경기센타의 아버지들이 내년에는 가정예배, 또는 가정 기도모임을 주관하며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비들이 자녀교육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자녀들을 노엽게 하거나 낙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무엇이 자식들을 비뚤어지게 하거나 낙심하게 하는 지는, 우리가 경험해 보아서 잘 압니다. 자녀들을 훈계하되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자기 기준만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4에서는 “또 아비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자녀들이 순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대하고 악담이나 저주를 퍼붓기 때문에 자녀가 노합니다. 편견을 갖고 판단하거나, 한 가지 행동으로 넘겨짚거나, 일관성이 없거나, 다른 자녀들이나 다른 사람들에 비해 공평하게 대하지 않을 때, 자녀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면서도 분노합니다. 부모들은 근본적으로 자식들을 책망하기 보다 격려해야 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낳았다고 해서 자식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자녀의 분노가 싹틉니다. 자식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교육을 책임지도록 잠시 맡겨주신 존재로 생각하면 공평과 온유와 평화로 자녀를 교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비가 아무리 잘 해도 자식이 분노하고 반발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아비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때는 아비도 힘들고 자녀도 손해입니다. 그러므로 자녀 교육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3. 상전과 종 (3:22-4:1)
당시 로마 제국에는 6,000만이나 되는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 제국 인구의 절반이 노예였습니다. 그러므로 상전과 종에 대한 가르침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노예제도는 성경적으로 볼 때 악한 제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등의 정치적인 주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도 바울은 인간관계의 근본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사람이 상전이든 종이든 사람에게 하듯 하지말고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먼저 22,23절을 봅시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동기는 우리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는데, 노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노예는 없습니다. 그러나 피고용인의 신분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직장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우리를 이 직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일해야 합니다. 일을 하면서도 “누구 좋으라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나?” 하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게 바로 ‘노예근성’입니다. 우리가 노예는 아니지만 노예근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직장생활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대개 이런 노예근성이 있습니다. 직장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신분이 어떠하든 결코 노예가 아닙니다.
25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피고용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불쌍하게 여기거나, 약자라고 해서 두둔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마음을 다하고, 주님을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직장생활을 주께 하듯 하는 사람은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쁨으로 일합니다. 또 자기 분야의 일에 대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속이지 않고 성실하게, 도둑질하지 않고 바르게 일해야 합니다.
다음에 사도 바울은 상전들을 가르칩니다. 4:1을 봅시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자기가 회사의 최고 경영인이라고 해도 자기 위에 상전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부리는 종업원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에 맡겨주신 사람으로 인식해야 하고, 상전으로서의 자기 삶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 의와 공평, 이 두 가지 덕목입니다. 약속한 생활비는 반드시 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피고용인이라고 해도 자기 맘대로 부려서는 안 되며, 반드시 휴가를 주어야 하고,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또 피고용인들을 공평하게 대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딸랑거리는’ 사람에게만 잘 해주는 것은 공평하지 못한 일이요, 피고용인의 인격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주인의 잘못을 피고용인에게 떠넘기는 것도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하는 공평하지 못하고 비겁한 행위입니다.
우리가 고용인이든 피고용인이든, 주님을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주님께 하듯 마음을 다해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근본적으로 주님을 섬기듯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 외인에 대하여 (4:5,6)
4:5을 봅시다.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여기서 ‘외인(外人) ’은 교회 밖에 사람들 혹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생각할 때 빼놓을 없는 사람들이 이 외인들입니다. 시간적으로 따지자면 우리가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교회 밖의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을 생각하면 더욱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외인에 대해서는 먼저 지혜로 행하라 가르칩니다. 신자가 지혜롭게 행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 말려들어 그리스도를 멀리할 수 있습니다. 지혜롭게 행하라는 말은 또 “세월을 아끼라”는 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혜롭게 행하라는 말은 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할 기회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또 6절에서는 말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신자는 맛있는 말, 영양가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 유머러스하게 말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5. 기도를 계속하라 (4:2-4)
2절을 읽겠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이 말씀은 기도에 대해서 세 가지를 가르칩니다.
첫째는 기도는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계속하지 않는 것은 게으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바쁘고 번잡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도에 대한 개념이 잘 못된 데 문제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기도를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기도의 목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기도에는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게 해 준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때만이 우리의 지각이 깨어 있고, 영적인 생각을 하고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3:3) 제대로 숨쉬고 제대로 활동해야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육신적으로 숨쉬고 살아 있다고 해도 영적으로는 죽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신의 본능대로 살 수밖에 없고,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신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계속해서 기도함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을 호흡하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둘째는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깨어서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또는 마지못해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러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그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거나 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셋째는 기도에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는 앞으로 이루어질 것을 비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면 과거에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내가 원하는 것을 빌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앞으로 빌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고, 깨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는 기도를 믿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도우실 것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특히 자기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고 부탁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감옥살이를 빨리 마치게 해달라거나, 사식비가 넉넉하도록 해달라거나 하는 기도를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전도의 문이 열려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합니다. 요즘 ‘마인드’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경영가 마인드, 성공 마인드, 부자 마인드, 등등입니다. 그 사람의 마인드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는 전도 마인드가 있었습니다. 기도를 부탁해도 전도하게 해 달라 부탁하고, 그가 감옥에 매인 것도 전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어찌하든지 전도하려는 전도 마인드로 꽉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학생들의 마음이 복음을 향해 열릴 날이 다시 올 것인가?” 하면서 7,80년대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우리 현실을 바라보고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볼 때 우리가 전도 마인드를 갖고 열심히 기도하면 다시 그런 시대가 오리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 선배목자님들은 7,80년대 참으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당시 전망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 믿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모였다 하면, 때로는 50명 이상이 한 그룹이 되어 돌아가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통행금지 시간에 걸려 집에 가지 못하고 센타에서 자고 학교로 바로 가는 날도 많았습니다. 여름수양회 때에는 백사장에 나가 세계로 뻗은 먼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그랬을 때 한국의 온 캠퍼스를 다 개척할 수 있었고, 많은 선교사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1학년 때 UBF에 와서 충격 받은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철의 장막으로 굳게 닫힌 공산주의 국가 러시아에 선교사를 보낼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르바쵸프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개혁(Perestroika)과 개방(Glasnost) 정책을 들고 나오더니 러시아의 문이 열렸습니다. 문자 그대로 갑자기 열렸습니다.
한 목사님의 설교집에서 허드슨 테일러의 얘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중국 내의 각 선교지로부터 늘 선교보고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조우(廣州)의 경우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은 전도하기 쉬운 지역이 아니었는데도 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허드슨 테일러가 선교보고를 하기 위해 본국인 영국에 갔는데, 한 사람이 허드슨 테일러를 만나자고 하더니 아무개 선교사를 아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교사가 바로 광조우 선교사였습니다. 그래서 안다고 했더니, 그의 근황이 어떤지, 그를 통해 전도가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지는지 등등 자세하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걸 그렇게 자세히 묻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 선교사가 자기의 친구인데, 자신이 지난 6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광조우의 전도를 위해 무릎꿇고 기도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테일러는 그제야 광조우의 비밀을 알고 기도에 대해서 크게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2007년에 경기대 자매들의 마음이 열리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목자들과 관계성을 맺는 자매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가을 자매역사를 위해 기도하는 심정으로 룻기와 에스더를 공부했습니다. 경기대 자매가 아니고 한국의 대학생이 아니어도 자매역사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섬겼습니다. 그러자 2008년에는 자매들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우리를 목자로 인정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좋은 선배로 여겼고, 마음을 열고 와서 고민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믿습니다.
골로새서 공부를 마치면서 우리가 다시 전도 마인드를 새롭게 하고 기도를 믿는 믿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우리 캠퍼스와 온 세계에 전도의 문을 활짝 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