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이씨 14세 이유회의 묘역. 아래쪽으로 종손들의 묘가 차례대로 있으며, 명당의 기본 요건을 갖춘 땅이다.
함평이씨 여러 지파 가운데 참판공파(參判公派)가 있다. 그 파조(派祖)는 이종수(李從遂)다. 가장 번성한 함성군파(咸城君派) 파조 이종생(李從生)의 동생이며, 시조 이언(李彦)의 11세손이다. 그 후손들은 나주시 다시면에서 많이 거주해 왔다. 그 세거지(世居地)는 다시면 영동리 초동마을(샛골)이다. '샛골 열두 동네'란 말이 있지만 원래는 샛골은 초동(草洞)을 지칭한 것이라 한다. 초동마을은 한창 번성할 때는 100여 호가 넘었고, 이들 중 절반가량이 참판공 후손들이었다.
이 마을의 입지 조건은 첫째 논경지가 넓다. 남도의 젖줄인 영산강이 넓은 들판을 적시며 흐른다. 수리시설도 매우 좋다. 나주 금성산에서 뻗어온 용이 다시면 신걸산에서 낙맥하여 들판으로 내려와 옹기종기 둥글고 납작한 산봉우리들을 맺어놓았다. 그 봉우리들이 모두 낮고 단아하며 부드럽다. 그 봉우리들 사이사이에 마을이 들어섰다. 또 기차를 비롯한 육로교통이 편리하다. 마을풍수의 명당 조건을 거의 갖춘 셈이다. 이 마을은 6ㆍ25전쟁 이전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만큼 살기 좋은 부자마을이었다는 뜻이다. 이 마을에서 태어났고 참판공 18세손 이재문(李載文ㆍ전 교장ㆍ74) 씨는 마을 터가 명당임을 누누이 설명한다. 그는 가승보(家承譜)를 혼자 펴낸 애족심이 강한 사람이다.
여기서 풍수적 관심거리는 영산강의 흐름의 형태다. 영산포에서 구진포와 회진마을을 거의 반듯하게 흐른 물길이 샛골마을을 지나면서는 들판과 마을을 멀리 돌아 요대수(腰帶水)를 이루며 흘러간다. 샛골마을을 환포하면서 감싸고 허리띠 같이 흐르는 물길이다. 이런 물길을 금성수(金星水) 또는 면궁수(眠弓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등을 돌리고 흐른 물길은 반배수(反背水) 또는 반궁수(反弓水)라 한다. 요대수는 부를 쌓고 인물을 배출하지만, 반배수는 가난을 면치 못하고 배신과 이혼의 흉한 물이 된다. 이런 물길의 길흉화복은 묏자리 경우에는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샛골마을은 영산강이 요대수가 되어 부자마을의 터가 된다. 그런데 지금은 영산강이 썩어있어 악기(惡氣)를 뿜어내는 흉수로 변했다. 아무리 좋은 수세(水勢)라도 깨끗한 물이 아닌 오염된 물이면 오히려 흉수가 된다.
참판공파의 선산은 다시면 신수리산에 있다. 주산을 비롯해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둥그런 금체(金體)들이다. 어디 모난 산이 없다. 살기(殺氣)를 띤 산이나 바위도 보이지 않는다. 순하고 점잖은 터다. 이 터가 샛골 이씨네 조상들이 모여 잠든 곳이다.
평소 여러 문중의 선산을 볼 때마다 전주이씨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선산이 떠오른다. 선산의 묘지가 잘 정돈됐고. 조상들이 누워있는 집으로 느껴지고, '문중의 역사관'으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광평대군은 세종대왕의 5남이다. 그의 묘역은 서울 수서에 있다. 광수산(光秀山) 자락의 13만 평에 700여 기의 묘가 규모 있게 정돈돼 있다. 그 후손들의 숭조사상과 자기네 뿌리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의 선산도 3만 평 이상은 될 것 같다. 이 선산의 맨 우측에 종손만 안장한 묘역이 있다. 이씨 문중의 먼 대 선조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런 묘역을 추하(楸下)라고 한다. 추하의 상단에 참판공의 증손자 이유회(李惟誨) 묘가 있고, 그 아래로 후대 종손들의 묘가 차례대로 용사됐다. 둥그스름한 봉우리에서 중출맥(中出脈)이 꿈틀대며 내려와 혈장을 맺었다. 묘역의 상단 부분으로 밝고 포근한 곳이다. 아래쪽으로 계속 묘를 쓴 탓으로 혈장이 크게 훼손됐다.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선산처럼 혈장을 살려놓고 다른 묘역을 조형하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 청룡과 백호가 혈장을 옹위하듯이 둘러싸고 있다. 혈에서의 거리와 높이도 적당하다. 청룡과 백호가 혈보다 너무 높으면 아랫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하게 된다. 혈 앞의 안산도 무난하고, 앞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장성 삼서에서 문평을 거쳐온 물이다. 진원지가 멀어 길수가 된다. 명당의 요건을 고루 갖춘 묘지라고 볼 수 있다.
이 묘역의 우측에 또 하나 결국(結局)한 묘 터가 있다. 전남교육청 학무국장을 지낸 이재완(李載完ㆍ85) 씨의 부모와 조부모의 묘가 위아래로 용사된 묘역이다. 바위로 뭉쳐진 봉우리에서 내려온 입수룡이 튼실하고, 입수도두(入首到頭)에 박힌 단정한 암석은 이 터가 길지(吉地)라는 물증이 된다. 청룡과 백호가 잘 감싸주고 있으나 혈에 비해 높고 가까워 보국이 협착하게 보인다. 혈장 주변의 소나무들을 베어 혈장을 밝게 해야 하겠다. 곁의 흙으로 보아 깊게 천광해야 할 것 같다. 수맥은 전혀 없으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 안식하기에 편안한 땅이다.
또 선산의 좌측을 조금 오르면 정성으로 단장된 쌍분이 있다. 이광범(李光範ㆍ전 교장) 씨가 정년퇴임한 후 부모님 유택을 조성한 것이다. 석물과 조경수 하나하나에서 자식의 효심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효자가 명당을 만난다(孝子逢吉地)'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닌 것 같다.
함평이씨 참판공파 샛골 이씨네 양택과 음택 터는 형상은 점잖고 편안하며, 기운은 곱고 부드럽다. 또한 수세(水勢)가 부(富)를 기약한다. 이 터의 특징이다. 이 터가 배출한 인사를 소개해 본다.
첫댓글 함이는 역시 대단해요
자세히도 기록했네요. 글 읽으면서 샛골을 눈으로 더듬어 봅니다, 구구절절 다 옳케 보신 것이네요.
내가 태어나고 자란곳이 그렇게 좋은곳인줄몰랐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