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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정형외과에 계시는 어머님, 거동을 못하시니 시골에 가실 수는 없고 그렇다고 집에서 모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머니를 향한 진정이 있으면 어떤 경우라도 집에서 누구라도 모셔야 하지만 환경이나 여건상 어쩔 수가 없었고 매일 어머니를 뵙는 것으로 형의 집에서 가까운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결정을 내렸다. 오후에 병원을 방문하여 시설및 위치를 확인하는데 3층에는 중증 환자들이 2층에는 요양 환자들이 남,녀로 나누어져 있고 비용은 간병인과 식사비를 포함하여 매월 120만원이다.
2일 노무현 대통령이 방북하는 역사적인 날이라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TV에 집중되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공항에 내리는 순간도 극적이었는데 그 때는 비행기로 오늘은 육로로 가는 차이가 있다. 남북 경계 지점에 노란 금을 긋고 북쪽에 발을 딛는 대통령의 구두가 확대되는 화면은 긴장감보다는 어린이 장난같기도 하다. 오늘 정형외과를 퇴원하여 자연애 요양병원 203호실에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서니 전체 13인의 환자가 같은 모습으로 누워서 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기에서 회복을 하여 다시 일상으로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죽음의 시간까지 대기하는 옛날의 고려장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안타까운 장소이다.
3일 개천절 수요일 청명한 아침이다. 휴일이지만 인창중학교 체육대회가 있어 아들은 학교에 가고 아내는 학급 임원으로 도시락을 준비한다. 나는 안산에 올라 3시간을 보내고 아들 체육대회가 열리는 학교에 가 보니 운동장에서 기마전, 제기차기, 씨름, 달리기 등의 행사를 진행 중이다. 마침 1학년 반대항 단거리 경기를 시작하는 아들이 출발 준비를 하고있다. 유소년 축구한다고 전지훈련을 다니고 서대문 구장에서 달리던 모습이 기억되는데 오늘도 기대가 되는 시간이다. 출발과 동시에 아들은 여유있게 예선 1위로 오르더니 결선에서도 빠르게 달려 인창중 1학년 전체에서 단거리 1인자로 두각을 나타낸다. 이어서 벌어진 계주에서도 예선을 2위로 통과하고 결선 4명중 2반 마지막 주자로 최종 1위로 골인하여 들어온다. 코너를 돌아 질주하는 아들에게 나도 박수를 보냈지만 학생들의 환호성으로 학교가 떠나 갈 듯했다. 어느 체육대회에서나 가장 기대되고 흥미로운 시간은 4명이나 8명으로 이어지는 계주경기인데 잘 달린 아들의 실력으로 1학년 2반이 결국 종합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운동의 기본바탕인 달리기도 잘하고 키도 크고 아들도 하고 싶다는 축구를 유학이라도 보내어 시켜볼까 고심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초저녁에 여동생 전화가 와서 받으니 밤에 어머니는 잘 주무시는지 간병인은 잘 하는지 약은 제대로 쓰는지 여러가지 걱정스런 마음을 나에게 이야기한다. 아내는 저녁에 대학 1년 선배 희숙이 언니가 42살에 사망하여 분당 영안실에 가서 많이 울었다며 충혈된 눈으로 돌아왔다. 젊은 나이에 이승을 이렇게 빨리 떠나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일 오늘부터 노량진학원 10월달 개강으로 11월 중반까지 45일반 2007년 마지막 강의가 시작된다. 입시학원은 11월 중순 수능을 앞두고는 최종 45일반이나 50일반을 개설하여 한 해를 마무리한다. 12월에는 논술, 1월에는 방학특강 재학생 중심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이다. 금년에는 예전처럼 수강생이 많지도 않았고 내년에는 인천에 투자한 상가와 어머니 병원 방문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며 또한 40대 후반에 새로운 길을
가야 할 시간으로 노량진 입시강의는 마지막이 될 것도 같다. 여동생이 중계동에서 어머니 병원까지 교통편이 좋지 않아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데 차라도 한 대 사줄까 생각하고 인천에서 중고차 수출을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5일 오늘 안산초등학교 다니는 딸의 운동회 날이다. 운동회는 즐거운 축제로 나도 추억이 많다. 이른 시간에 학교에 들어서면 만국기가 펄럭이고 청군과 백군의 대결은 손에 땀을 쥐게 하기에 충분했었다. 이른 아침 서대문구장으로 축구하러 간다고 아들은 먼저 서둘러 나가고 나는 노량진학원에 가면서 아내를 태워 학교에 내려주었다. 집에서 가깝기는 하지만 운동회 날에 먹을 음식을 몇 개씩 들고 있기 때문이다. 오후에 운동회를 마치고 돌아온 딸이 단거리는 5명중 1등이라고 손등에 도장까지 받아 보여주면서도 릴레이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며 시무룩하다. 구경했던 아내가 창피할 정도였다고 말하는 걸 보니 아마 속도가 느려 뒤쳐지는 수모를 당하고 그래서 반 친구들한데 원망의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릴레이는 잘하면 영웅이 되고 못하면 놀림감이 되기 일쑤다.
6일 서대문역 근처에 있는 농협에서 쌀을 구입하여 집에 왔다가 다시 북한산을 오르기 위해 정릉까지 갔다. 입구에서 속이 시원한 어묵 국물을 마시고 칼바위 능선을 따라 보국문 정상으로 올라 오른쪽으로 걸어 대동문에서 점심을 먹었다. 가을이 오는 소리와 정상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이 시원하여 상쾌한 기분으로 식사를 마치고 수유리 4.19탑 방향으로 내려왔다. 곧장 병원으로 이동하여 하루종일 누워 계신 어머니를 뵈니 오늘 긴 거리를 다닌 나와 대조적인 삶의 모습이라서 안타까움이 더 많았다.
7일 아들은 교보문고에 아내와 딸은 농협박물관 견학을 한다기에 태우고 갔는데 박물관은 오늘까지 휴관이다. 장소를 변경하여 동아일보사에 있는 신문박물관에 내려주고 나는 밖에서 기다리며 청계광장 아침 공기를 마시며 걸었다. 거제도에서 단체로 서울에 온 장애인들이 광장을 차지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신체적 어려움 속에서도 밝은 얼굴로 살아가는 그들과 주변을 지나치는 정상인의 찌푸린 표정이 확연하게 구분될 정도다. 행복이나 고통은 누구에게나 동시에 존재하지만 마음 가짐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저녁에 아내의 외할머님께서 별세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처가에 계셨던 이유로 여러 번 뵈었는데 안타까운 마음으로 명복을 빌었다.
8일 금년들어 가장 쌀쌀한 11도까지 내려간 오늘 아침 아들은 사골국 나는 된장국으로 아침을 먹었다. 하루가 다르게 튼실해 가는 아들이 자랑스럽지만 성실함과 인내심 그리고 학문에 열중하는 자세를 더 갖추었으면 하는 나의 마음이다. 노량진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와서 안산 산행을 하고 어머니 요양원에 가니 여동생이 오늘도 자전거로 여기까지 오면서 고생했고 설상가상 어머님이 치매까지 왔다고 거의 울상이다. 동생을 위로하고 바로 청주의료원 영안실로 직행하여 새벽 2시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9일 발인식이 있어 일찍 의료원에 다시 가니 아들인 외삼촌보다도 재규 아빠가 역할을 더 정성껏 하고 있다. 영안실을 출발하여 청주시 근교 옥산 끝지점에서 관을 들고 선산에 도착하니 산의 지형이나 위치가 안락하고 편안해 보이는 명당같은 느낌이다. 11시에 하관식을 마치고 먼저 서울로 오면서 이천휴게소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가뿐하였다.
10일 요즘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서는 SSAT가 필요하여 동영상으로 강의를 하려고 자료를 만들다 보니 연구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인천에 투자한 상가때문에 현장에 갔다가 개봉동 상가사무실로 와서 시행사 임원들과 점심을 먹었다. 노량진학원 수입이 적다 보니 자꾸 다른 일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다시 강의를 소홀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11일 건설이나 상가등을 모르고 투자업을 시작하려니 어려움이 많다. 금전을 돌려서 상가와 아파트를 받는 일로 오늘도 금천구 가산동 아파트를 보고 왔지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점심쯤에는 노량진 공무원학원에서 연락이 와서 내일 동영상 촬영하기로 약속했다. 오후에 김성만 선생이 요구한 1억5천만원을 이자 1천만원을 제외하고 입금해 주고 그의 노량진 다가구 주택을 담보로 설정받았다. 분당에서 차상률 선생도 1천만원을 차용해 가고 이자 150만원을 보내왔다.
12일 요즘 너무 바쁘게 다니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새벽에 일어나 안산에 올라 1시간 30분을 걸었는데 새벽 기온이 낮아서 땀은 나지 않고 몸만 가뿐하다. 가족의 생일도 기념일도 지나쳐 내일 토요일에는 외식을 하려고 계획을 잡아 놓고도 아내의 일정으로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인천 상가 투자로 개봉동 법무사 사무실 갔다가 어머니 병원에 가고 다시 방배동으로 갔다가 늦은 저녁 종로 3가까지 다닌 오늘도 긴하루였다.
13일 평소 친하게 지내는 김용 선생이 관악산에 가자고 이야기해서 토요일인 오늘 약속을 했는데 지키지 못하였다. 엊그제 결혼 기념일을 그냥 보내서 남이섬 가족여행 일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도 아내의 수업과 겹쳐 저녁에 여의도 불꽃놀이에 가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오전에 아들을 교보문고에 딸은 농업박물관에 내려주고 관악산에 못 가는 대신 혼자 북한산에 올랐다. 보국문과 동장대를 거쳐 12시40분에 험난한 위문을 통과하여 백운대에 올랐다. 북쪽 방향의 울긋불긋한 단풍을 감상하며 점심을 먹고 백운산장을 거쳐 도선사로 내려와 서대문역에서 가족을 만나 불꽃놀이 구경을 갔다. 현장에 도착하니 구경하는 시민이 1백만명은 된다는데 넓은 한강 주변이 발 디딜 틈이 없다. 화려한 축제를 마치고 한강다리를 걸어서 용산구청 근처로 가까스로 이동하여 택시로 무악재에 도착했다. 집 근처에서 우동과 어묵탕 등으로 야식을 하고 옆자리로 음식을 먹으러 온 종석이네 가족들 비용까지 내가 계산해 주었다.
14일 어제는 산행과 불꽃놀이 구경으로 10시간은 걸었다. 아침에 아들과 김치찌개로 식사하고 서대문 도서관으로 함께 가서 나는 4층에서 어휘를 정리하고 아들은 2층에 자리를 잡았다. 12시경 내려가 공부하는 아들을 격려하고 노량진 일요특강을 위해 출발했다. 입시학원은 이제 마지막으로 하는 수업이라 기억에 남는 강의를 준비하고 있는데 돈이 30원뿐이어서 점심을 못먹는다는 아들의 문자가 왔다. 집으로 연락하여 결국 아내가 달려가 점심을 사 주고 식사 마친 아들은 신현중학교에서 축구한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15일 새벽에 아내가 무서운 꿈을 꾸었다며 목소리를 높여 횡설수설 '그 놈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더니 오전 늦게까지 코를 골며 잠을 잔다. 종로에서 동영상 계약서 작성하고 공증사무실로 이동하여 김성만 선생하고 1억 5천만원 공증서류를 작성했다. 오후에 아들을 학교 정문에서 태우고 집에 내려주고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답답하신지 논이라도 팔아 간병인을 붙여 달라며 눈물을 흘리신다. 힘들어 하시는 어머님을 보며 내 마음도 당황스럽고 괴롭기만 했다.
10월16일 종로 SATT동영상 계약으로 교재를 만들어야 한다. 자료까지 보충하여 신경을 써야 좋은 교재 그리고 좋은 강의가 될 수 있다. 노량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 안산에 올랐다가 5시경 내려오니 아들이 인터넷에 자신의 이름이 인창중학교 싸움 짱이라고 올랐다며 보여준다.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나와야 좋은 거라고 말하데도 아들은 혼자 킥킥거리며 재미있어 한다. 아들이 펀드에 대하여 묻기에 현재 통장에 있는 돈 70만원을 은행에 맡기면 이자가 월 3천원이고 나한테 맡기면 2만원(3부)이라고 알려주니 내일 당장 돈을 찾아 맡기겠다면서 아빠는 직업이 뭐냐고 묻는다. 저녁에 예일학원 갔다가 홍제역 근처에서 딸의 옷걸이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17일 수요일 아침 창밖을 보니 가을이 깊어 간다. 밤도 길어지고 새벽에 눈을 뜨면 밖은 어스름하고 이불 속이 오히려 따뜻하다. 노량진에서 학원 초창기에 함께 강의한 이차연 선생을 우연히 만나 그가 강의하는
목동학원으로 갔다가 집으로 왔다. 학교에서 아들이 친구를 데리고 와서 라면을 끓여 주고 나는 집을 나서 요양병원으로 갔다. 불안해 하는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밖으로 나와 대소변도 처리해 주는 좋은 세상이니 걱정마시라고 했고 서로간 자주 볼 수 있는 지금이 나는 가장 행복하다고 말씀을 드렸다.
18일 그제도 어제도 번개치고 비가 온다고 예보하더니 계속 청명한 가을 날씨다. 최첨단 과학이 있다는 현재도 기상예보가 엉터리이니 과거에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던 부모님의 모습이 기억난다. 라디오에서 날씨가 계속 맑을 것이라고 방송하여 전날 벼를 베어두면 다음날 비가 내려 물속에 둥둥 떠 있는 것을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한숨을 쉬며 거두고 계셨던 장면이다. 아침 6시30분에 한자시험 수행평가를 준비하라고 아들을 깨웠는데 뒤척이다가 늦어 식사도 거르고 학교에 간다. 게으르다고 화를 내고 불똥이 튀어 아내한테도 어머니 병원에 바쁜 나보다 자주 안 간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는 효행이 필요한 것이지 강요하는 내가 뻔뻔스럽고 미안하기도 했다.
19일 비 오는 금요일이다. 아들이 실습한다며 아침부터 호박으로 전을 부치는 연습을 하더니 또 등교시간이 늦어 허겁지겁 옷과 양말을 들고 차를 타러 나간다. 식사후 어머니 병원에 간다는 아내를 태우고 노량진에 가면서 1호선 서울역에 내려주었다. 대소변을 치우는 동안 내가 옆에 있는게 쉽지 않는 일이라 바쁘기는 하지만 수시로 가 주었으면 하는 나의 마음이다. 점심쯤 남영동에서 친구 영식이를 만나니 가평 땅 매매금 3억을 우선 받았다면서 나에게 1억을 투자하겠다고 하고 오후에는 아들이 있다는 홍제역 비염한의원으로 갔더니 한방으로 비염 및 축농증을 치료한다고 1시간 설명을 하고 한약 값이 1개월분 36만원이라고 권한다. 저녁에 체육관 운동을 마치고 케익을 사 들고 집에 오니 가족들이 칼국수와 육개장 볶음밥 등을 배달시켜 미리 잔치를 하고 있다.
20일 음력 9월 10일 아내 생일, 호적에는 9월 14일로 되어 있어 해마다 혼란스럽다. 출생 신고를 늦게하여 실제 나이보다 어린 경우는 있지만 태어난 날과 생일이 다르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토요일인 오늘 아들은 학교에서 음식바자회를 한다. 학부모들이 돈을 걷어 음식을 준비하고 학생들이 자기 비용을 지불하여 사 먹고 그리고 수익금은 학교가 가져간다. 재주 부리는 원숭이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같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식사를 하고 북한산에 올라 족두리봉에서 향로봉을 거쳐 사모바위를 지나 문수봉을 넘으니 3시간이 지나 오후 1시가 되었다. 대남문 아래에서 음식을 먹고 대성문 방향 성곽 주변에 다다르니 바람이 거세게 불어 형제봉 길을 경유하여 국민대 근처로 내려 왔다. 기온이 내려가 곧바로 논술교실로 가서 겨울 히터를 꺼내주고 아들에게 전화하니 신현중에서 경기장 문제로 축구를 못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팀들이 이미 운동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바삐 달려가 아들과 친구들을 고은초로 인솔하여 경기를 하게 했다.
저녁에 생일파티 하려고 서대문 바비엥에 가니 자리가 없고, 홍은동 힐튼호텔에 가니 거기도 예약 마감이 되었다. 연말도 아닌데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고 결국 명지대 근처 샤브샤브 집으로 가서 식사를 하고 오는 길에 축하의 의미로 꽃을 샀는데 아내가 좋아한다.
21일 일요일 아침 SATT 문제를 정리하다가 9시에 일어난 아들에게 컴퓨터 자문을 구했는데 새벽부터 작업한 내용을 뒤바꾸어 버렸다. 애초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는 내 잘못이지만 아침부터 화를 내어 집안 분위기가 냉냉해졌다. 11시 지나 노량진학원 도착하여 특강하고 여의도 6.3빌딩 아래로 이동하여 동호대교까지 코스모스 핀 한강을 7.5킬로 왕복 15킬로를 달렸다. 이렇게 긴 거리 1시간30분 이상을 달려보기는 오늘 처음이다.
22일 새벽에 일어나 오늘도 컴퓨터 작업을 하는데 어제 만들어 둔 자료 1번이 또 사라졌다. 아내와 아들까지 나와서 함께 찾았으나 복구가 안 되어 스트레스가 연속으로 쌓인다. 오전에 노량진 수업마치고 오후에 중고차를 가지러 인천역 종점에 내리니 타임머신을 타고 70년대의 김제역에 와 있는 것처럼 착각이 되었다. 대합실과 역사의 모습이 일본식 건물로 1900년 5월에 건립된 그대로이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그 곁을 지키고 있다. 길 건너편에는 중국인 음식거리로 우리나라 최초의 중국집도 위치하고 있는데 화상이 금방 부를 것만 같았다. 인천 외곽 북항에 있는 친구 사무실로 가서 여동생이 탈 수 있는 중고차 세피아 한 대를 100만원을 주고 구입하여 경인고속도로를 달려 병원으로 가니 어머님은 오늘 말기암으로 최종 진단을 받았다고 형이 전한다. 충격으로 말도 못하고 있다가 주무시는 어머님에게 사랑한다는 기도만 하고 집으로 왔다. 초저녁에 아파트 마당에서 오늘 가져온 차로 아내에게 운전 연습을 시켰는데 순발력이 떨어진다.
23일 4시에 일어나 7시까지 유형별로 동영상 자료를 분류하며 새벽을 보냈다. 육사 1,2차에 합격한 진우 조카한테 아침에 전화가 오더니 언어영역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평소에 관심을 많이 보이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었다. 끝까지 합격할 수 있기를 바라며 제복을 입은 의젓한 진우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아들은 아침에 샤워하고 화장실에 앉아 오랜 시간을 보내고 오늘도 늦어서 허둥댄다. 식사 후 집을 나서 약수동 김성우 사장을 만나 인천 상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병원으로 가서 여동생과 어머니와 함께 근처 갈비집 야외식탁에 앉아 식사를 했다. 1개월 동안 한 번의 웃음도 없으시던 어머님께서 오늘 대화를 하면서는 소리내어 웃으셨는데 오히려 생소한 모습이었다. 오후에 친구 영식이가 훗날 잘 되면 갚으라며 투자 명목으로 1억원을 입금하였다. 현금이 없어서 힘든 중인데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고마웠다. 오후에 집에서는 딸이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있고 가족 사진을 빨리 찍어 두자는 중계동 여동생의 절박한 전화도 온다.
24일 세피아 브레이크를 새 것으로 교환하러 당산동에 갔다 와서 도시락을 준비하여 안산에 올랐다. 정상 아래 바위에 앉아 점심을 먹고 누워 있으니 구름이 무더기로 흘러간다. 떠 가는 구름처럼 우리의 인생도 삶의 반대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슬프고 덧없기만 했다. 산에서 내려와 엊그제 영식이가 차용해 준 1억원에 대하여 후배인 채형석 변호사와 함께 광화문에서 공증문서를 작성하고 병원으로 동행했다. 지난 달에 이어 오늘도 친구는 어머니에게 위로금을 전한다.
25일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아들과 딸이 학교에 가서 식사도 함께 못했다. 오전에 인천 상가 처리로 개봉동에 갔다가 집으로 3시경 다시 와서 개인수업을 진행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어깨에 매고 다니는 가방보다 폼이 나고 좋아 보였는지 들고 다니는 가방을 사달라고 요구한다. 주말에 사 주기로 약속하고 라면을 끓여 아들 딸과 함께 먹었고 밤에는 신유식 선배가 대진고 선생을 제시하는 연락이 왔지만 벌여 놓은 일도 있고 이제와서 틀에 밖힌 학교로 갈 수는 없다고 말하였다.
26일 새벽에 일어나 동영상 자료를 정리하고 신설동 임대료 독촉장도 작성했다. 어제 비가 오더니 금요일 오늘은 화창한 날씨다. 아내가 늦잠을 자고 아들이 그냥 나가는 것을 붙들어 내가 밥을 준비하여 먹게 했다. 늦게 일어난 딸은 어제 먹은 도시락을 아침에 반납하여 불편하고 게으르다고 지적을 하였다.
27일 가정학습 토요일이라 아들 딸과 북한산 가을소풍을 가기로 했다. 오전 10시경 점심과 과일을 준비하여 구파발을 거쳐 북한산성 입구에서 대서문을 지나 대남문쪽으로 오르다 다시 대동문으로 올랐다. 가을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 앞에 있는데도 아들은 지루해 하고 반면에 초등학생 딸은 아무 소리없이 정상까지 잘 오른다. 대동문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렇게 가족인 우리들이 건강하여 함께 산에도 오고 식사도 할 수 있는 지금이 훗날 생각하면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아들에게 말했다. 산을 내려와 병원으로 이동하니 아들은 병원 뒷부분 배추밭 근처까지 휠체어를 밀고 나와 의젓하고 따뜻하게 할머니를 위로한다. 집으로 오면서 동대문 쇼핑을 하며 일전에 약속한 아들의 가방과 운동화 그리고 옷 등을 사 주었다. 20만원 이상을 지출했는데 아들이 만족하고 좋아하니 나도 보람이 있다. 짓누런 색 주머니가 많이 달린 요란한 가방이다.
28일 어제 산행에 이어 일요일인 오늘은 11월10일 하프마라톤 연습하러 아들 딸과 한강에 가기로 했고 오전에 원효대교 건너 여의도 한강변에 도착하니 바람이 심하게 분다. 달리면 땀이 날텐데 잠바를 입고 달리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들을 달래어 반팔 차림으로 함께 출발을 했다. 딸은 일전에 경매로 받아 온 자전거를 타고 뒤를 따르겠다고 하더니 얼마를 달리다 뒤를 돌아보니 바퀴가 작아 따라 오지를 못한다. 아들에게 마라톤은 천천히 달리되 쉬지 않는 것이 기본이라고 가르쳤는데 처음부터 스피드를 내어 6킬로 지점에서 뒤로 처지기 시작하여 결국 1시간 20분에 15킬로를 달려온 나보다 6분 늦게 들어왔다. 그래도 중학교 1학년 아들이 짧지 않은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 왔다니 대단하고 기특하기만 하다. 한강변을 나와 노량진 비타에듀학원 내가 수업하는 강의실을 구경시켜 주고 돌아오는 길에 남영동 미성회관 중국집에서 자장면으로 점심도 함께 먹었다. 오후에 퇴계원에 오셨다가 병문안 오신 장모님과 어머니께서 만났는데 한 분은 서서 또 한 분은 누워서 손을 맞잡고 있다.
29일 어제 비가 많이 오더니 월요일 오늘 아침 맑게 개었다. 아들이 토요일에 사 준 운동화를 신고 새로 산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데 아들 눈에는 오늘 가지고 가는 가방이 멋있어 보이는지 우쭐대는 모습이 역력하다.
무엇이든 가급적 아들의 시각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도와줄 일이다. 오전에 홍제천을 달려 성산대교 근처 한강과 월드컵공원까지 1시간 20분 15킬로를 달리고 왔다. 지난 번 동생에게 사 준 승용차를 금전적 문제로 타기 어렵다고 돌려주겠다는 여동생 전화가 왔다. 오빠의 마음으로 배려해 준 것인데 세금이나 보험료 그리고 원석이 아빠의 입장 등을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기도 한다.
30일 원자력 병원에서 어머니 PET 촬영한다기에 아내와 도착하니 접수를 마치고 주사를 맞고 계신다. 형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예 돌아가실 때를 대비하여 장례식장까지 상담을 하고 나오는데 병원 입구의 붉은 단풍이 심난한 나의 마음을 정화라도 시킬 듯이 화려한 모습으로 서 있다.
31일 노량진학원 교무실은 야유회 일정으로 어수선하더니 이내 참가자를 태운 차가 출발한다. 1년을 마무리 하면서 처음으로 학원장과 미팅을 하여 개인이나 학원의 입장을 서로 이야기하였다. 수강생이 많아야 5:5로 수익금을 배분하는 학원과 강사가 좋을 것이라며 불경기같은 현재의 상황에 염려와 걱정을 하고 나역시 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이 될 점심을 함께 했다. 오후에 집에 왔다가 홍제천으로 나가 11킬로 1시간 달리고 친구 영식이와 만나서 식사를 했다. 노량진 대성학원에서 근무하는 그가 이제 강의는 그만 두겠다면서 다른 계획을 이야기한다. 가던 길을 버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모험일 수 있으니 신중하게 결정하고 가급적 탁월한 수학실력을 더 발휘하라고 충고를 했다. 사실 내 입장과 다르지 않은 갈림길에서의 고민이었지만 친구의 실력과 능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나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고뇌하는 10월의 마지막 방배동의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