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마테오 리치에 매료된 이유
 마테오 리치가 중국 지식인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것은 첫째, 먼 외국에서 온 인물이 중국어와 한문과 중국 문화를 깊이 알고 무엇보다도 유교를 안다는 것 때문이다. 유교 경서를 자유롭게 인용하는 그를 ‘유학자’에 가깝게 받아들였고, 중국 지식인들에게 그런 리치는 중국 문화와 유교에 대한 자부심을 충족시켜주는 ‘기특한’ 존재이기도 했다. 둘째, 리치가 놀라운 기억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상상을 통해 위치 공간과 이미지를 설정하여 많은 것을 단번에 기억하는 그의 기억술은 중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셋째, 리치가 전한 서양의 과학기술 때문이다. 천문학, 역법, 수학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리치가 구사하는 논증과 논리의 섬세함과 엄밀함에 많은 중국인들이 감탄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리치의 성품과 태도였다. “대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의 인품을 존경하여 그와 교제하였다.” ([명사](明史) 326권 중에서) “그는 행동거지에 늘 다정함과 온화함이 넘치며 누구에게도 늘 친절하다.” (예수회 동료의 말) 선교를 위한 인내심, 다른 문화에 대한 적응력과 개방성, 다방면에 걸친 학식에서 우러나오는 교양,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성품 등이 그를 중국인들 사이에서 마테오 리치가 아닌 이마두로 만들어 주었다.
마테오 리치의 선교 전략, “중국을 빌어 중국을 변화시킨다”
 마테오 리치는 처음에 불교 승려 복장을 했으나 불교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중국 사회 지배층인 유교 지식인, 관료 계층에 접근하기 위해 유사(儒士)의 복장을 갖췄다. 중국에서 선교하려면 유교와 중국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융화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대 논리를 펼쳤지만, 유교에 대해서는 가톨릭 교리와의 유사성 및 일치점을 찾고자 했다. 리치는 ‘가톨릭 선교사’라는 자의식을 내비치는 것도 삼갔다.
그는 1594년 사서(四書) 라틴어 번역을 마치고 나서야 [천주실의](天主實義](1603년 간행) 집필에 본격 착수했다. [천주실의]는 루제리가 1584년 자오칭에서 펴낸 [천주실록] 개정판에 가깝다. 리치가 루제리의 [천주실록] 집필 작업을 도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리치는 [천주실록]의 불교 위주 내용을 [천주실의]에서 유교 위주로 바꾸었다. 조선의 천주교회 성립에도 큰 영향을 미친 [천주실의]는 가톨릭 교리 및 중세철학과 유교, 불교, 도교를 비교 고찰함으로써 동서 사상교류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자리 잡았다.
리치는 하느님, 즉 천주를 유교 경서에 나오는 상제(上帝)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리치의 이런 방식은 풍응경(馮應京)이 쓴 [천주실의] 서문에 나오는 대로 ‘중국을 빌어 중국을 변화시키는’(以中化中) 방식, 즉 유교와 가톨릭이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여 중국인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이다. 리치는 공자 숭배와 조상 숭배도 용인해야 한다고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