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자감의 부실한 교육여건을 목격한 최충은 세인들의 절실한 요구에 부응하여 자신의 집에 사숙을 열고 제자들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최충이 사숙을 운영한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모여든 학도들로 그의 학당은 금세 문전성시를 이뤘다. 최충은 교육 장소를 송악산 아래 자하동에 마련했는데 모여드는 학도가 너무 많아 인근 거리까지 넘칠 정도였다. 넘치는 학생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9재학당이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학생이 몰려든 것은 최충의 명성 탓이기도 했지만, 그가 활동하던 문종 초기에 문반 현직자를 우대하는 정책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더욱이 왕실과 더불어 외척 세력이 부상함에 따라 이들과 대결하기 위한 실력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급제해야만 했다. 그가 사숙을 열자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 것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때 세워진 9재는 악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 9개로 분류되었는데, 이것은 진학의 순서와도 관련이 있었다. 초학자는 먼저 악성재에 들어가 6예를 익히고 다음 순차적으로 여러 재를 거쳐 마지막에 대빙재에서 수학함으로써 졸업하는 것이다. 9재학당의 교과서는 9경과 삼사였다. 9재에서의 교육은 아직 철학적인 궁리(窮理)의 공부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고, 9경 3사를 중심으로 한 과거시험을 위한 교육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9경 3사가 어떤 과목이었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학계에 논란이 있긴 하지만, 대개 9경은 [주역]∙[서경]∙[시경]∙[의례]∙[주례]∙[예기]∙[춘추좌씨전]∙[공양전], 3사는 [사기]∙[한서]∙[후한서]인 것으로 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