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 날개 같은 의상, 하늘을 향한 손끝과 시선, 중력의 영향을 벗어나려는 발짓. 날고 싶지만 날지 못하는 인간이, 몸으로 표현하는 비상(飛上). 춤은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면바지에 셔츠 차림의 남자가 노래에 맞춰 움직이는 것을 본 이후다. 가사와 그의 움직임이 하나였다. 그 속에 이야기가 보였다. '춤은 몸으로 쓰는 글' 이라는 말을 비로소 이해했다. 몸짓으로 삶을 쓰는 현대무용가 김설진씨를 만났다. |
편집부가 독자에게 ...
너희 안에 춤 있다 아이들과 실험을 해봤습니다. "초강력 진공 청소기가 네 오른발을 빨아들였어. 어떨것 같아?" "너의 왼쪽 부분만 무중력 상태라면 어떤 모습으로 다니게 될까?" 춤 한 번 춰봐 라고 얘기하면 콧등으로도 안 들을 아이들이 흥미로워하며 자세를 잡아봅니다. 좀비 같기도 하고, 한쪽 날개만 있는 새 같기도 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힙합 뮤직을 틀어놓고 아이들을 보니 제법 독특한 무대 느낌이 납니다. 뻣뻣 대마왕이면서 무대 공포증이 있는 아이들을 춤추게 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들만의 세상' 이라 여겼던 춤의 세상이 아이들의 몸 속에 살아 있었습니다. 댄싱나인 시즌 2 우승자인 현대무용가 김설진 씨에게 배운 춤의 비밀입니다. 아이들을 춤추게 하고 싶다면 김설진씨의 인터뷰가 좋은 선생님이 되어드릴것입니다. 함께 만나보시지요. _김지민 리포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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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그의 목소리는 순하고 겸손했다. 인터뷰를 위해 여러 번의 전화와 문자 메시지로 그를 '괴롭힌' 리포터가 못마땅할 법도 하건마는 통화 끝에는 항상 "감사합니다" 를 잊지 않았다. 약속 시간. 탈탈탈탈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배낭을 메고, 운동복이 든 낡은 천가방을 들고 작은 스쿠터에서 그가 내리는 순간 최근 받았다는 오디션 상금이 떠올랐다. "상금으로 연습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부족하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자동차로 여러 곳 다니려면 주차하기도 힘들고, 주차비도 만만치 않잖아요." 방송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은 꾸민 것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 놓이든 감사하고, 동료는 물론 경쟁자도 배려하던 그의 모습이 '리얼' 이었음을 확인하는 기쁨! |
예측 불허, 김설진 |
질문 1 "미래의 김설진은 어떤 춤을 추고 있을까요?" 질문 이유 '예술가는 평생 한 길만 간다' 라는 예술가에 대한 고정관념. 예상 답변 "나이가 들어도 춤을 추고 있겠죠. 나이 든 몸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또 다른 모습이 있을 거예요. 저와 제 춤의 모습 끝까지 기대해주세요." 김설진 "춤보다 좋은 것이 나타나면 그걸 하고 있을 거예요."
질문2 "몸 관리를 위해 하시는 특별한 식이요법이 있나요?" 질문 이유 '폴더 폰처럼 접히는 몸. 길고 단단한 근육들. 당연히 몸에 나쁜 것은 하지 않을 것이고 먹는 것도 확실히 일반인과는 다를 것' 이라는 확신. 예상 답변 "몸에 무리가 되는 식사는 하지 않아요. 몸 관리는 무척 중요한 일이니까요." 김설진 "가리는 음식은 거의 없어요. 식사량도 엄청 많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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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본 듯한' 춤은 가라 |
춤은 자세마다 이름이 있다. 하지만 그의 춤은 사뭇 다르다. 몸짓 하나하나가 그만의 고유명사다. "지금 네 살인 딸 아린이가 처음 목을 가눌 때, 뒤집을 때, 배밀이할 때, 기기 시작할 때, 일어설 때, 걸음마를 시작할 때 아이의 몸짓 하나하나가 신기했어요. 그 움직임들도 내 춤에 담겨 있어요." 그의 춤사위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 사물의 움직임, 소리들이 춤의 소재가 되고 몸짓의 스승이 된다. "처음 춤을 배울 때는 춤의 기능적인 면, 테크닉이 우선이었어요. 지금은 '음악을 어떻게 표현할까' '무슨 이야기를 담을까' 라는 생각을 먼저 하죠." 그리고 거기에 맞는 동작을 생각하고 세상 어디에도 없을, 자신만의 동작을 만들어간다. '나만의 몸짓' 이란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그가 소속되어 있는 피핑톰(Peeping Tom)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벨기에의 현대 무용단이다. 그의 상상력 훈련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절대로 동작이나 테크닉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아무리 아름다운 춤도 '어디서 본 듯한' 춤은 의미 없는 것이었죠." 이를테면, 걸어가는데 강력한 진공청소기가 오른발을 빨아들인다면? 갑자기 중력이 몸의 한쪽에만 작용한다면? 이런 질문을 주고 몸이 하는 대답을 원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면 정말 상상치 못했던 몸짓들이 나와요. '춤' 은 그런 것이거든요. 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면 생각보다 춤은 가까이에 있어요." 그는 부모와 아이가 함께하는 많은 몸짓들이 다 춤이 될 수 있음을, 현대무용은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
'내 춤' 에 대한 소망이 생기다 |
춤만 출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춤을 추고 싶었던 제주도 소년은 고2 때 무작정 상경했다. 백업댄서 활동을 하며 하루 천 원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자취방의 전기 가스 수도가 끊기는 경험도 해봤고, 유행하는 춤으로 돈을 벌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돈을 위해 춤을 추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의 포커스도 다 돈이고. 소모되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추고 싶은 춤을 선택하자 그의 지갑은 다시 비어버렸다. 하지만 '내춤' 에 대한 소망이 생겼다. '춤을 가르쳐주는 학교' 가 있다는 것도, 현대무용이라는 말도 처음 들었다. 스물한 살 때의 일이다. "고전무용으로는 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거든요. 현대 무용이라면 가능하다 싶었죠." 춤을 좋아하던 제주 소년이 세계 정상급 무용단에 들어가기까지 정작 그 과정은 단순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해낸'것뿐이죠. 춤을 배우고 싶어서 학교에 가기 위한 준비를 했고, 좋은 스승에게 가고 싶어서 또 필요한 준비를 했어요. 피핑톰의 공연을 보고 그 무용단에 들어가고 싶어 방법을 찾았고, 오디션을 통해 그곳에 발 디딜 수 있었어요." 피핑톰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은 어떤 무용수가 되었을까 하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아마도 그는 끝내 그 길을 찾아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춤이 그에게 길을 열어준 적은 없다.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스스로 열었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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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꿈꾸는 춤의 축제 |
"세종문화회관에 큰 포스터가 걸려 있어도, 사람들은 춤을 보러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방송 이후에는 작은 공연도 어떻게 알고 오시는지, TV 매체의 힘에 놀라긴 했지요." 최근 그가 MVP를 차지한 댄스 오디션 프로그램 <댄싱 9>의 참가도 춤을 널리 알리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춤이 낯선 많은 사람들에게 춤의 다양성과 즐거움을 알리고 싶었다. MVP라는 명예와 상금은 어부지리로 얻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아직 할 일이 많다. 제주도에서 워크숍이나 페스티벌을 개최해 다양한 춤이 함께 어우러지고 일반 관객층을 넓히려는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다.
"관객의 취향이나 눈높이에 맞추면 많은 관객을 끌어들일 수는 있어요. 하지만 예술가는 관객들의 안목과 수준을 높여야 할 책임이 있어요. 관객의 문화적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도 저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는 강원도의 <평창 스페셜 뮤직 페스티벌>이 세계적인 음악행사로 자리 잡았듯이 그가 계획한 '제주 춤 페스티벌' 이 세계적인 춤의 축제가 되길 바라는 당찬 꿈을 가지고 있다. |
'공부의 이유, 춤추는 이유' 질문하라 |
하지만 춤추는 모든 이가 다 '김설진' 일 수는 없는 일. '춤만 춰서 밥먹고 살 수 있을까' 가 궁금했다. "그럼 학교 다닐 때 열심히 공부만 하면 평생 먹고살 수 있나요?" 라는 질문이 그의 대답이었다. "저는 석·박사 학위가 없거든요. 간혹 대학에서 강의 의뢰를 받을때가 있는데 학력을 얘기하면 정규 수업은 없던 일이 되곤 해요. 전문성보다 '한 줄의 자격' 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의 지적은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춤을 추고 가르치는 데 학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도 학위 공부를 계속 한다면 다른 환경에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고 필드에서는 얻을 수 없는 점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학교를 가고 안 가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왜 대학에 가야하지' 라는 의문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타트 라인이 같아도 목표 지점을 알고 달리는 사람과 무작정 달리는 사람의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
에필로그 |
바쁜 일정으로 그의 상태가 100% 컨디션이 아니어서, 사진 촬영은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잠깐의 촬영을 위해서도 완벽한 스트레칭이 필요했고 긴 시간 몸짓은 멈추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음악도 녹여내고 끊임없이 변하며 흐르는 몸짓을 보며 사람의 몸이, 그 움직임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생각했다. "춤은 거짓말을 못해요. 연습한 만큼 정직한 결과물을 주지요. 다리 한 번 제대로 들기 위해서도 천 번 이상의 연습이 필요하거든요."
그는 자신의 춤은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고 말한다. 아직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고. 춤보다 좋은 것이 생기면 그것을 하겠다는 말은 아마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성기를 인정하지 않을것이고, 그의 춤은 언제나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이니 말이다.
미즈내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