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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팽이버섯 원문보기 글쓴이: 김백신(엉개덩개)
2022 매일신춘문예 수필 당선작-막사발의 철학 / 복진세
한국의 그릇에는 도자기와 막사발이 있다. 가만히 보면 생김새도 다르고 쓰임도 달라서 재미있다. 사람도 도자기 같은 사람이 있고 막사발 같은 사람이 있다.
도자기는 관요에서 이름난 도공에 의하여 질흙으로 빚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다. 도자기는 관상용 또는 화병이나 찻잔, 식기 등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대부분은 만들어질 때부터 용도가 정하여진다. 격식 있는 상을 차릴 때는 밥그릇 국그릇 탕기 찜기 접시며 주병 등과 같이 용도대로 사용해야 한다. 국그릇에 밥을 담을 수는 없다. 그릇 하나에 하나의 용도만이 정하여졌다. 도자기는 활용 면에서 보면 매우 편협한 그릇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깨끗이 닦아서 장식장 등에 전시되어 관상용으로 사용된다. 행여 다칠세라 다루기에도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우리 집 대청마루 장식장에는 꽃무늬가 선명한 도자기가 항시 진열되어 있었다. 언뜻 보아도 값이 꽤 나가는 듯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어머니가 시집와서 처음으로 샀다는 도자기는 어머니가 가장 자랑하고 싶은 목록 중 으뜸이었다. 우리 집 도자기는 귀한 손님이 오실 때나 아버지 생신 등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늘 장식장에 모셔져 있다. 어머니는 훤칠한 키에 뽀얀 살결을 가지고 도자기를 닮은 형을 무척 사랑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형은 장인 소리를 들을 만큼 빼어난 솜씨를 가진 꽤 유명한 전문가였다. 전문가는 자기 직분만 충실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도자기 그릇과 닮았다.
막사발의 모양새는 투박하나 기품이 있어 보인다. 두껍고 거친 겉면은 부드럽지 않으나 기세등등한 장수의 넉넉함을 닮았다. 하늘을 향하여 벌린 주둥이는 당당하고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가졌다.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수수하고 꾸미지 않은 자연미에 빠져든다. 도자기와 같이 일상생활에 주로 식기로 사용되었으나 사용 빈도 면에서는 막사발이 단연 앞선다. 막사발은 음식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담아낸다. 도자기가 용도 외에는 사용되기를 거부하는 이기심 많은 그릇이라면, 막사발은 다양성과 포용성을 지닌 서민들의 그릇이다.
형은 특별한 용도로만 사용되는 도자기를 닮았다. 형은 당연히 전문가의 일 외에는 집안일을 전혀 거들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가졌다. 당연히 집안 심부름이며 잡일은 내가 도맡아 하였다. 어머니는 나를 종그락이라고 불렀다. 작은 표주박인 종그락처럼 부리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언제든지 손에 끼고 다니며 온갖 일을 맡기기에 좋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도자기를 닮은 형이 부러웠다.
그릇은 채워졌을 때는 그 용도를 다한 것이다. 다시 비워졌을 때 비로소 그릇의 임무를 다시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비어 있어도 그릇 본연의 의무를 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막사발처럼 내용물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채우고 비울 수 있는 그릇이 좋다. 공자는 논어 위정 편에서 군자불기(君子不器)를 가르쳤다.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아서는 아니 된다.", "군자는 한 가지 재능에만 얽매이지 말고 두루 살피고 원만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키우는 데 혈안이 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심각한 개인주의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개인 이기심이 극치를 이룬다. 정치인들도 국가나 국민의 안위보다는 자기 개인이나 정당의 이익만 좇는다. 도자기처럼 편협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사회는 전문가도 필요한 세상이지만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아는 막사발처럼 넉넉함을 가진 사람들이 더 필요하다. 스마트폰은 현대 문명의 총아다. 그 원리가 막사발을 닮았다. 모든 걸 다 담았기 때문이다. 막사발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최첨단 그릇이다.
막사발은 막 만들어서 막사발인지, 막 사용하여서 막사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나는 후자의 편이다. 막 사용하다가 금이 가거나 이가 빠져나가도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행여 다칠세라 아까워서 사용하지 못하고 구경만 하는 도자기를 대신하여, 집안의 온갖 행사에 불려 다니며 고생을 한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국물이 새거나, 깨진 부분이 일정 선을 넘으면 그때서야 버려진다. 아니 재수가 좋으면 개밥그릇으로 용도가 지정된다. 처음으로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개 밥그릇……!" 개의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자유 시간이다. 가끔 술 취한 주인장의 호된 발길질에 채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도자기를 닮은 첫아들인 형은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앞서갔다. 정해진 용도대로 자기만의 길을 걷다가 장식장에 갇힌 채로 간 것이다. '한 마리 산토끼를 잡으려고 온종일 산속을 헤매다가, 아름다운 경치는 구경도 못 해 보고, 해 질 녘에 내려와 잠드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것을 모른 채로……!' 그토록 도자기를 사랑하던 어머니도 도자기의 사망 소식을 모른 채 종그락만을 남겨 둔 채 소천하셨다.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막사발이 되고 싶다. 그동안 도자기처럼 생각 없이 살다 보니 이기심으로 살아온 나날들이 후회스럽다. 여생은 막사발을 닮은 넉넉함으로 살아가리라. 설혹 개밥그릇이 되면 어떠하랴.
[심사평]
202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는 무려 533편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최근 들어 갈수록 높아가는 수필 문학에 대한 열기를 잘 방증해 주는 결과라 하겠다. 또한 코로나19가 휩쓸고 있는 어두운 시기에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높아가는 덕분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양적인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질적인 깊이를 담보해주는 작품이 충분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의 손에 남은 작품은 '꽃눈개비 내리던 날에', '지도리', '막사발의 철학'이다.
'꽃눈개비 내리던 날에'는 화자의 아이가 아끼던 장난감인 레고를 친구에게 주어버린 에피소드에 대한 작품이다. 우리 시대에 갈수록 상실되어가는 어려운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새로이 생각하게 하는,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그렇지만 작품이 지나치게 사건의 서술로만 이루어져 있어 주제의 깊이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지도리'는 여닫이문에서 문을 받치면서 회전축을 가능케 하는 '지도리'를 모티브로 하는 작품이다. 균형과 중심을 잃어가는 우리 시대에 지도리 같은 중심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착상은 좋았으나, 하반부로 넘어갈수록 주제의식이 다소간에 혼돈스럽고 달팽이라는 보조관념의 채택도 작품의 주제와 유기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이었다.
'막사발의 철학'은 도자기의 일종인 막사발을 통하여 화자의 형의 모습을 소환하는 작품이다. 우리가 쉽게 스쳐 지나가는 흔한 사물을 통하여 그 두께와 깊이를 생각하는 작가의 사물에 대한 형상화의 솜씨가 돋보였다.
그러나 이 작품도 수사나 묘사보다는 지나치게 서술에 치중하다 보니 명징한 문학적 언어 사용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지적되었다. 이런 아쉬움을 남기며 '막사발의 철학'을 당선작으로 하는 데 심사위원들은 힘들게 합의했다.
끝으로, 기존의 여러 매체를 통하여 등단하거나 수상한 기성 작가들이 신춘문예에 다시 응모하는 일에 대하여 지적하고자 한다. 아무리 모든 분야에서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시대라고 하지만, 문학판에서만이라도 새로운 후배를 위해 길을 양보해 주는 미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당선작에 축하드리며 이번에 수상하지 못한 분들도 더욱 정진하여 좋은 작가가 되기를 빈다. /심사위원: 구활(수필가), 허상문(문학평론가)
[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쪽항아리- 김희숙
그가 움직인다. 손짓춤에 살결 같은 무명천이 내려서고 조리질에 참깨 올라오듯 누런 진흙물이 일어난다. 토닥거리며 매만지고 빠른 장단으로 휘몰아치니 항아리 안에 울돌목 회오리바람이 인다. 강바닥이 뒤집힌 듯한 너울에 정신이 혼미하다. 토해낸 물거품이 모여 수런거린다. 그가 젖은 천을 치켜들고 훑어 내리자 하늘 한 조각 떼어온 양 푸른 쪽물이 주르륵 쏟아진다.
흙을 빚어 태어났다. 잘록한 목선 타고 흘러내린 허리는 어린아이 두어 명을 거뜬히 품을 정도로 넉넉하고 진한 흑갈색 겉옷엔 빗금 몇 개 그어 멋을 부렸다. 풍만한 맵시는 미스 항아리 대회라도 나섰더라면 등위 안에 당당히 들었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녹여버릴 듯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이 타들어가는 뜨거움을 견딜 때는 어느 종갓집 볕 드는 마당가라도 놓이려나 기대했다. 구수한 향내 깊은 간장을 우려내 가문의 장맛을 늠름하게 지켜내겠노라 호기로움도 가졌고, 윤기 흐르는 햅쌀 담아 굳건히 좀벌레 막아내어 세상사에 지친 사람들에게 밥심을 세워주어야지 다짐도 했다. 동기간인 백자는 거실 문갑에서 거만하게 우쭐거리고, 앙증맞은 꿀단지는 조신하게 벽장에 머물고, 덩치 큰 장독이 고방 안쪽에서 어른 노릇할 때도 하릴없는 처지에 간질거리는 풀벌레 벗 삼아 기다림의 시간도 길었다.
부풀었던 단꿈은 별안간 흙속에 묻혔다. 어디까지가 위인지 얼마만큼 깊은지 내비칠 수도 없이 땅과 하나가 되었다. 용암을 쏟아낸 분화구 마냥 두툼한 입만 허공을 향해 벙그레 벌려둔 채 둥근 가장자리엔 푸르스름한 분칠이 덕지덕지 엉켰다. 집안에 있는 줄도 모르고 무심한 발자국들만 지나친다. 땅으로 들어온 지 어언 십여 년이다. 흘러간 세월이 가뭇하다.
천연염색 장인을 만나 쪽항아리라는 이름 하나 얻었다. 간장항아리는 햇살 좋은 봄날에 겨우내 살려낸 메주 띄워 한 해를 시작하고, 소금항아리는 사시사철 입맛 돋울 바다 알갱이를 받아들인다. 오지항아리는 콩이며 들깨를 갈무리하고 김칫독은 차곡차곡 버무려 둔 배추와 무를 익혀 밥상 차림을 돕는다. 장방에 늘어선 항아리들이 떨어지는 빗줄기 장단삼고 정화수 아래 기도 올릴 때도 마당가 한켠에 따로 자리했다. 먹을거리를 담아내지 못하니 그들과의 비교는 안중에 두지 않는다. 그저 몽글몽글 쪽꽃 피우는 일에만 열중한다.
그의 쪽염료인 니람을 품는다. 식성은 좀 유별나서 조개껍질 빻아 콩대 태운 잿가루를 섞어 배를 채운다. 쪽대 우려낸 물을 마시면 혀끝이 알알해온다. 소화시키기에 제격인 걸쭉한 막걸리는 그가 건네는 합환주다. 고무래질까지 해주면 쿰쿰한 트림내가 사방으로 진동한다. 새파래진 쪽물 위로 햇볕에 그을린 그의 얼굴이 안겨온다.
그가 쪽풀에서 잎사귀만 뜯어 문지른다. 팔의 솟은 힘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지만 쉬지 않고 짓이긴다. 땀방울이 비처럼 내리는데도 멈추질 않는다. 초록물이 데워지기 전에 잽싸게 천을 물들여야 투명한 빛깔을 얻는다. 생쪽물에서 건져 올린 옥빛이 싱싱하다. 등줄기 타고 기어오르던 더위를 끄집어 내리는 옥색이 갓 잡은 생선회 맛이라면 오랫동안 우려낸 쪽빛은 맛들이면 또다시 찾게 되는 잘 삭힌 홍어 맛이다. 쪽은 간들바람 재료 삼아 뙤약볕 소를 넣어 버무린 후 긴 시간 공들여 발효시켜야 남색 쪽발을 세운다. 깊이 품은 색을 드러내면 처음엔 쑥빛이 보였다가 씨앗 뿌리 내린 땅빛도 잠시 스치고 새순 틔운 봄날 연두도 설핏 내비친다. 어둡게 드리우던 먹구름은 날름 감추고 이슬에 반짝이던 청록 아침을 어렴풋이 그려내더니 마침내 높은 하늘이었다가 깊은 바다색을 펼쳐낸다.
복닥거리기만 하면 썩는다. 그가 천을 물들일 때 말고는 찾는 이조차 없어도 흙속을 헤집는 지렁이집 지붕도 되어주고 어쩌다 날아드는 잠자리에게 바깥소식 들으며 세월을 견딘다. 새끼 품은 어미처럼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자는 강해야 한다. 찬 겨울에는 어떻게든 한 줌의 온기라도 끌어당겨 얼지 않도록 둘러싸고, 장맛비 거센 물길 따라 흐르려는 흙무지는 힘껏 움켜쥐어 버틴다. 죽은 색을 품었을 때는 그와 함께 보듬고 울었다. 실타래 풀듯 맺혔다 풀렸다 가는 길이다. 편리한 플라스틱 고무통은 결코 품어내지 못하는 색이다. 도도한 빛깔이 까탈이라도 부리면 녹색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홀로의 시간을 가라앉혀야 물색이 익는다.
떠나보내는 것이 숙명이다. 물들지 않은 백색 천을 애지중지 쪽빛으로 단장시킨다. 넘실대던 가슴속이 거북등처럼 굳어간다 한들 다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다. 행여 물빛이 탁해 순순한 결에 얼룩이라도 질까봐 노심초사다. 세상과 맞닥뜨려 제 빛깔을 내지 못할 때는 그가 몇 번이고 제 자리에서 지켜준다. 돌아보지 않는다 해도 누군가의 옷자락이 되어 근근이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잊혔던 쪽빛을 되살려내자 찾는 이들이 늘었다. 배우겠다며 들어서고 쪽물 들이기 체험을 위해 줄을 선다. 종종대는 그의 발걸음 따라 쪽물이 너울거린다. 그의 심장이 뛸수록 항아리 안도 덩달아 뜨거워진다. 흙에 묻힌 형편이라 드러나지 않아도 그림자인 삶도 괜찮다. 보이지 않는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알아주는 이 없어도 세상의 모퉁이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이들이 더 많다는 걸 안다. 쪽물을 껴안아 보살피는 일이면 족하다. 주어진 몫의 생을 누린다.
그가 돌아온다. 손에 쪽빛천이 들렸다. 두 다리로 감싸 안더니 천천히 어루만진다. 왼손이 부드럽게 내려가고 오른손이 후렴처럼 따른다. 가다듬는 손길에 마음이 씻기고 머릿속이 맑아진다. 출렁거리는 가슴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다. 리듬을 타며 온몸을 내맡긴다. 그늘 드리우던 차양 끝은 여전히 살랑거리고 풀잎 부딪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파랑에 초록이 더해진다. 그의 등 근육이 성난 짐승처럼 우르릉거린다. 마른하늘에 천둥이 번뜩이고 항아리 안으로 걷잡을 수 없는 폭풍우가 몰아친다. 희열의 파열음을 뱉으며 드디어 쪽빛 문이 열린다. 그의 손톱에도 먹구름 같은 검은 물이 든다. 건너편 장독대 항아리들은 한여름 열기를 모르는 척 돌아앉았다.
다시 하늘이 푸르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빨랫줄에 무명천이 걸리며 빈 하늘이 메워진다. 한들거리는 바지랑대를 쳐다보다 아득한 잠에 빠져든다. 한낮의 긴 꿈을 꾼다.
2022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 껍질의 길 / 김도은
건조했던 나의 귀가 수족관을 채우는 맑은 물소리에 촉촉해진다 . 병원 관리원이 복도에 있던 유리 속 세상을 대청소중이다 . 호스를 타고 들어온 투명한 물줄기들이 수족관으로 콸콸 쏟아지고 물이끼로 불투명했던 유리 안쪽 세상이 말갛게 깨어난다 . 붕어 , 잉어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주저앉았던 수초가 다시 일어선다 . 느릿느릿 우렁이들이 서로 몸을 비빈다 .
입원 중인 엄마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렀다 . 작년에 결혼해 임신한 딸이 입덧이 심해서 새콤한 무생채를 해볼 참이다 . 막상 무를 사 오기는 했는데 무생채를 만드는 일이 아득하다 . 커다란 무를 썰려니 칼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 칼을 힘주어 누르니 중간에 단단히 꽂혀 칼날이 빠지지 않는다 . 아삭아삭 씹히는 무가 이렇게 단단했던가 . 무에게도 근육이 있었던 모양이다 . 문득 ,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심이 박힌 무가 떠올랐다 . 어쩌면 그것이 무의 뼈였는지도 모르겠다 . 겨우 칼을 빼내고 다시 힘을 내어 채칼에 무를 가져갔다 . 커다란 무가 내 손안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 채 써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
작년까지만 해도 팔순이 넘은 어머니는 김장을 200 포기나 했다 . 썰어야 할 무가 산더미였을 것이다 . 체구가 작은데 그것을 혼자 다 해치우셨다 . 나는 직장을 이유로 평생 엄마 김치만 얻어먹었다 .
사계절 김치가 내 집에 넘쳐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 . 그러고도 엄마의 한숨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 소리 없이 모든 일을 척척 해내셨다 . 무를 썰며 자식 사랑에 돌연 눈이 매웠다 .
텃밭에 배추와 무를 심어 기르신 어머니는 김장하는 날은 이른 아침부터 손질하여 앞마당에 수북이 절여놓았다 . 이튿날 새벽까지 밤새 몇 번을 뒤집고 찬물에 헹구어 물기를 뺐다 . 고무대야에 수북이 무채 썰어놓은 것을 보면 언제 그 많은 것을 다 하셨을까 생각했지만 뜬 눈으로 밤을 지샌 고단함은 생각지 못했다 .
김장을 주말에 하시면 거들어 드리고 얼마나 좋을까 . 그런데 자식들 힘들까 봐 한사코 주중에 일을 다 해치우고 김치를 가져가라고 연락하셨다 .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더니 평생 엄마 덕분에 무생채 한번 썰어보지 않던 내가 , 내 자식 먹이려 무를 썰고 있었다 . 우여곡절 끝에 무생채를 완성해 딸에게 보내고 엄마 몫을 따로 담아 입원해 계신 병원에 면회를 갔다 .
지난번에 수족관 청소하던 분이 물 위에 뜬 검은 뭔가를 연신 건져냈다 .
"어머 , 우렁이가 죽었나 봐요 ?"
"예정된 죽음이죠 . 토종 우렁이는 성체로 산란을 해요 . 우렁이 새끼들이 어미 살을 모두 파먹고 밖으로 나오면 어미는 껍데기만 남아 이렇게 물에 뜨죠 ."
그 말을 듣고 등골이 오싹해져서 관리원 곁으로 다가가 물속을 살폈다 . 수십여 마리 건강한 토종 새끼우렁이들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 새끼들에게 몸을 내준 어미는 허깨비가 되어 물 위로 둥둥 뜬 것이었다 . 관리원이 내 손에 건넨 껍질은 가볍다 못해 푸석푸석 부서졌다 .
"어디 우렁이뿐입니까 ? 우리 어머니들의 삶도 똑같지요 . 진자리 마른자리 다 갈아주고 금이야 옥이야 키우잖아요 . 철없는 우리는 저절로 큰 줄 알지요 . 이곳에 늙고 병든 부모들 많은데 , 자식들은 부모 면회를 자주 오지 않아요 ."
어디선가 들은 말이 생각났다 . 새끼 우렁이가 제 어미의 살을 다 파먹고 껍질이 물에 뜨면 "우리 엄마는 뭐가 저리도 신나서 둥실둥실 춤을 출까 " 하면서 기뻐했다던가 .
그때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 다른 어미 우렁이가 몸을 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 어디로 가나 한참을 지켜봤더니 수족관 구석에 몸이 뒤집힌 새끼를 향해 가고 있다 . 어미 우렁이는 새끼를 구하기 위해 달리는 듯 보였지만 너무 느린 속도였다 . 한참 몸을 밀고 간 어미가 몸이 뒤집힌 채 허우적대는 새끼를 향해 자신의 몸을 들이밀었다 . 새끼가 재빨리 빨판을 엄마의 몸에 갖다 댔다 . 어미가 새끼의 손을 잡아주듯 중심을 다시 잡아 주었다 . 몸이 바로 돌아온 새끼는 수족관 벽을 유영하며 다시 이끼를 먹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본 어미 우렁이는 그제야 느릿느릿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 발이 없어 배로 기어가는 복족류인 우렁이 , 우렁이도 두렁 넘을 꾀가 있다더니 오직 그 마음은 새끼를 향해 있다는 걸 알았다 .
"엄마의 이런 희생 덕분에 내가 이렇게 잘 사는구나 ...."
나도 모르게 눅진해진 눈가를 닦으며 어설피 버무린 무생채를 들고 205 호 병실로 들어섰다 . 한 생을 자식에게 다 파먹힌 우렁이가 거기 둥둥 떠 있었다 . 이제는 손만 대도 바삭 , 부서질 듯 텅 빈 노구가 병상에 힘없이 누워 계신다 . 나는 가만히 다가가 엄마의 손을 잡아보았다 .
차갑고 핏기 없는 손마디 , 평생을 우렁이 새끼처럼 딸이 파먹어 엄마는 껍데기만 남았다 . 작은 몸은 이미 모서리마다 금이 가고 부서져 내리는 중이었다 . 엄마에게 눈물을 들킬까 봐 잠시 밖으로 나왔다 . 복도에 있는 수족관에는 새끼를 등에 업은 우렁이가 또 어딘가로 천천히 가고 있었다 .
[심사평 ] 탄탄한 구성에 문장을 끌고 가는 힘
금년에 수필부문 응모자는 총 80 명에 196 편이었다 . 주로 독거노인 , 질병 , 죽음에 대한 소재가 많았다 . 문학예술은 산문이든지 시든지 신선미가 있어야 한다 .
신선미가 있기 위해서는 작가의 새로운 발견이 필요하다 . 스토리가 중요하지만 스토리에 매어 있어 작가의 세계인식 , 그리고 새로운 시선이 없으면 지루하게 만든다 .
투고한 작품 중에서 강기영씨의 '매듭 ' 진서우씨의 '나의 장례식 ' 김장배씨의 '군새 ' 김도은씨의 '껍질의 길 ' 등은 숙고하게 했다 . '매듭 '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 하지만 스토리 전개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예술적 형상화가 부족함을 드러냈다 . '나의 장례식 '은 죽음에 대한 성찰이 돋보였다 . 성찰에 비해 문장의 구성력이 약했다 . '군새 '는 일상적인 일을 끌고 가는 힘이 좋았다 . 이에 사물에 접근하는 새로운 인식이 더 필요했다 .
'껍질의 길 '은 어미 우렁이의 죽음을 어머니의 삶으로 표현한 은유법이 돋보였다
새끼들이 어미 살을 모두 파먹고 밖으로 나가면 어미는 껍데기만 남아 물에 뜬다고 하니 , 마치 자식들에게 몸을 내준 우리네 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 .
작가는 이러한 비유를 자신이 설명하지 않고 관리인의 입을 통해서 표현하게 한다 .
얼마나 능숙한 방법인가 , 문장을 끌고 가는 힘도 있었다 . 단연 뛰어난 작품을 만나 기뻤다 . 망설임없이 당선작으로 밀수밖에 없었다 .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
이구한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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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팽이버섯 원문보기 글쓴이: 김백신(엉개덩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