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겨울은 유달리 추웠다. 나는 2월에 상주농잠중학교를 졸업할 예정이었다. 부모님은 나보고 집안 형편상 상주농잠고등학교에 진학하라고 했다. 적은 땅뙈기에 농사를 짓는 부모님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 학비를 대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하숙비로 주신 쌀 한 말을 어깨에 지고 상주 시내로 걸어오면서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나의 경쟁상대는 서울과 대구에 있는데 여기서 나의 꿈을 접어야 하는가?
나는 상주시 화동면 신촌리에서 태어났다. 나의 집은 초갓집이었으나 집 뒤로 팔음산이 뻗어 있고 앞뜰에 논밭이 펼쳐 있어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팔음산은 눈이 왔을 때, 참 아름다웠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많은 산들을 보았지만 팔음산만큼 웅장하고 포근하게 나를 감싸 주는 산을 보지 못했다. 부모님은 농부였으나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부모들처럼 교육열이 높았다. 나의 학업성취는 부모님의 열의가 더해져 일취월장하였다. 내가 화동초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때는 철이 없어 해방의 감격을 느끼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도보가 유일한 이동수단이었다. 걸어서 안 가 본 곳이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2시간 걸어서 평산리 못 안에 있는 어각에 갔다. 그곳에는 세종대왕의 글이 보관돼 있어 세종대왕의 이름을 그때 처음 알았다. 지금도 만나는 죽마고우 이각희(화동 안일약국 경영)와 함께 팔음산에 갔다 지천에 널린 불개미에 놀라 도망을 다니기도 했다. 용바우 재를 넘고 또 고개를 두 번 넘으면 평산 마을이 나온다. 한 고개를 또 지나면 흑연을 생산하는 월명광업소가 있었다. 친구들과 무서운 줄도 모르고 그곳까지 놀러갔었다. 하루가 걸리는 거리였다. 먹을 것이라고는 주머니에 있는 감자 몇 알이 전부였다. 먹는 것이 귀한 시절이어서 가을 뒷산에 가서 도토리도 따서 먹었다. 떫었지만 오래 씹으면 단 맛이 돌았다. 그 때의 기억으로 지금도 음식을 아껴 먹고 도토리가 맛있는 음식인 줄 안다.
부모님의 배려로 상주농잠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집에서 학교까지 20km나 돼, 처음에는 학교 기숙사에서 머물렀다. 기숙사비를 아끼느라 상주시내 친척집에서 하숙을 하다가 하숙비로 줄 곡식이 여의치 않으면 자취를 하였다. 토요일이 되면 어머니가 그리워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뛰어도 4-5시간이 걸렸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지나가는 목탄차가 태워 주었지만 고개를 올라갈 때는 내려서 밀어야만 했다. 나는 지금도 다리 하나는 튼튼하다고 자부한다. 중학교 때 쌀 한 말을 지고 20km를 걸어 다닌 덕분이다.
중학 2학년때 6.25전쟁이 발발하여 북한인민군이 진주하였다. 학생들은 새로 등록하라는 전갈이 왔다. 아마 의용군으로 끌고가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등록하기 위해 상주읍으로 걸어가다 내서에서 미군비행기의 폭격세례를 받았다. 인민군으로 오인을 하였나보다. 가까스로 몸을 피하여 생명을 건졌다. 사춘기가 시작되자 어렴풋이 장래를 생각하고 공부에만 전념하여 중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하였다.
부모님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북대 사대부고에 특차 전형시험을 보기로 했다. 쌀 한 말을 지고서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대구에 갔다. 사대부고 부근에서 쌀을 베개삼아 노숙하려고 했는데 우연히 대구공업중학에 다니던 각희군을 만났다. 각희도 고모집에서 하숙을 하여 함께 갈 형편이 못됐다. 대구사범학교 선생님으로 계신 여학용 초등학교 은사님 집을 찾아가니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며칠을 머무르면서 시험을 치러 합격하였다. 이로써 상주와 관련된 내 젊음의 기억은 여기서 끝이 났다. 그러나 지금도 고향 꿈을 꾼 날이면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고 외로우면 상주를 떠 올린다. 서울에서 매월 화동초등학교 동창생 10여명을 만나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나도 이제 철이 드는 모양이다.
첫댓글 웹써핑중..발견한 글... 이각희란 분은 재학이 아부지^^
오옹..어쩐지 성함이 눈에 있다 했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