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슈뢰더가 야곱 슈타이너가 제작한 악기들의 양식과 악기 제작연도에 대한 까다로운 문제를 살펴본다.야곱 슈타이너는 오랫동안 바이올린 제작자이자 수리자로서 나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나는 1980년대 초 미텐발트에 있는 바이올린 제작학교에 다닐때 처음으로 그의 작업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이학교 교장이 었던 카를 로이는 수년전 발터젠이 착수했던 슈타이너의 저서를 집필중 이었고 그것은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몇년후 나는 운좋게 슈타이너의 악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는데 뒤판과 옆판은 단풍나무와 호두나무판들을 접합해 만든 아주 특별한 비올라였다. 로이의 도움으로 이악기는 인스 부르크에 있는 페르난디움 박물관에 있다.
알프스 이북의 여타 주형을 따르지 않고 구식 제작술을 고수하고 있던 시기에 니콜로 아마티와 동시대 이였던 슈타이너는 이탈리아 이외의 지역에서 내부 주형틀을 사용한 최초의 제작자였다. 그는 또한 뒤판에서 설치된 알맞은 크기와 형태의 버튼에 의해 지지되는 탑 불록 을 넥과 분리시키고 안쪽에서 부터 탑 불록을 가로질르는 철못을 박았다.
슈타이너는 다른 제작자들과 의도적인 고립을 고집하여 자신의 제작기술을 혼자만으로 남겨두기 위하여 제자나 조수도 작업장에 접근하지 못하게했다. 그래서 바이올린 제작술에 있어서 현대적인 방법을 사용한 이태리 북쪽지역의 유일한 장인으로 남게 되었다.
바이올린의 구성과 건조라는 측면에서 동료들을 능가 하고 있었뿐 아니라 전형적인 크레모나 광택술의 기법을 자신의 악기들에 사용하기도 했다. 슈타이너가 그의 기술을 크레모나에서 배웠다는 증거는 불충분 하지만 그의 초기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악기의 형태와 재료 광택의 측면,모두에서 아마티 스타일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슬라브 커팅으로 만들어진 뒤판과 사등분된 커팅의 옆판을 자주 볼수있다. 두 부분으로 된 초기의 악기의 뒤판은 나무결 무늬가 같은 방향으로 일치해 있다. 슈나이더는 수러한 외향과 화려한 음향을 위해 앞판에 개암나무나 가문비 나무를 즐겨사용 했다.
슈타이너는 가문비나무를 아낌없이 사용했고 심지어 악기 외형의 윤곽선을 잡기 전에도 가장자리를 따라 큰조각으로 잘라내기도 했다. 단풍나무는 확실히 가문비 나무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평판으로된 악기 뒷면 특히 왼쪽 가장자리에 덧붙일수있게 만들어진다.
양의 크기의 나무조각 견본이 발견되고 있다. 초기부터 슈타이너는 이미 특정 부분들에 새눈 장식이 들어간 단풍나무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렬한 새눈 장식이 광범위하게 들어간 평판 커팅의 뒤판과 벽면은 1660년대 중반 이후에 가서야 등장하게 된다.
슈타이너가 초기에 제작한 악기들 에서는 버드나무로 만들어진 블록(biock)들과 크레모나 장인들이 주로 사용했던 적색 버드나무와 석회를 절충적으로 사용한듯한 악기 내부의 라이닝(linong)을 찿아볼수 있다. 함부르크 대학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후기에 제작된 바이올린의 내부 라이닝 재료는 "석회"로 밝혀 졌다.
이제까지는 슈타이너가 라이닝에 전통적인 독일 목재인 호두나무를 광범위하게 사용 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이것은 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악기들에 해당되는 것으로 .18세기 잘즈부르크나 뉘른베르크 학교의 제작자들에 의해서 훨씬 더 많이 사용 되었다.
코너 블록의 대다수는 가문비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앞판과 마찬가지로 나무결이 같은 방향으로 맞추어져 있다.슈타이너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유일하게 크레모나 장인들과 마찬가지로 라이닝의 마감처리를 불록안에 집어넣는 제작술을 선보였다. 그의 코너 블록의 모양과 라이닝이 나이프로 정교하게 커팅된 방식은 그가만든 모든 바이올린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중 하나이다.
슈타이너는 바이올린 제작에 있어 주로 두개의 모델을 사용했다. 몸체의 길이는 모두 344mm 내외지만 폭은 저마다 다양하며 악기의 로우어 바우트를 가로지르는 길이는 대략 201mm~204mm사이 이다. 어떤 바이올린들은 본체의 길이가 351mm 밖에 안되는데 가끔씩 이보다 더 작은 바이올린도 찾아볼수 있다.
그는 다양한 사이즈의 비올라와 여러 훌륭한 감바들을 제작했지만, 첼로는 그다지 많은 제작 주문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전시회에 공개된 진귀하고 아름다운 두 대의 슈타이너 첼로는 당대 대부분의 이탈리아 클래식 첼로들이 그러하듯이 약간 축소된 크기로 제작되었다. 슈타이너의 악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마티를 모방했다고 간주될 수 있지만, 이들 간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초기에 제작된 악기들 에서는 이러한 차이점이 그리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아프삼에서 의 독자적인 제작기간이 길어질수록 슈타이너의 작업에 어떤 점진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C-바우트(C-bout)는 점차로 더 넓어지고 더 둥글어졌으며 코너는 더 짧아졌고 가장자리는 약간 더 두터워졌다.
f홀은 크레모나 악기들의 영향을 밀접하게 받은 길고 날렵한 모양이었는데, 이 f자는 점점 더 굴곡 부분이 두드러져 둥근 곡선을 강조한 전형적인 슈타이너의 짧고 넓으며 곧추선 모양의 f홀이 되었다.(슈타이너의 f홀은 이후 알프스 이북의 악기 제조자들에 의해 많이 모방되었다)
볼륨감 있는 평판이라는 슈타이너의 독창적인 사고는 나무판의 두께가 거의 일정한 크레모나의 제작원리로 부터 확실히 구별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가 만든 악기들의 대부분은 앞판과 뒤판에서 모두 보다 견고한 중심부가 가장자리의 좀더 얇은 부분과 연결되고 있다. 슈타이너와 크레모나 제작자들 사이의 또 다른 차이점은 슈타이너의 악기 뒤판에서는 외벽에 돌출된 "핀"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치의 변화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슈타이너 바이올린들은 알맞은 높이와 균형이 잘 맞는 완벽한 아치 형태를 갖고 있다. 슈타이너 악기의 전형적인 특징인 양 간주되곤 하는 높은 형태의 아치들은 사실 예외적인 것으로, 이른바 "슈타이너의 전형적인 높은 아치"는 주로 이후의 모방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가 후기에 제작한 악기들은 가장자리의 세로홈 장식이 약간 도드라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것은 아치 형태를 더 높이 보이게 하는 가장자리 부분을 더 뚜렷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세로홈 장식의 홈이 나무판에서 지나치게 얇은 부분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몇몇 악기들의 가장자리 부분 안쪽의 두꺼운 부분들을 그대로 남겨놓았다. 이것은 f홀을 통해서 쉽게 들여다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슈타이너의 명성이 이탈리아로 역전달된 것은 그의 매우 독창적인 후기 악기들을 통해서였다. 그것들은 18세기 초기 잠시 동안 슈타이너 스타일의 유행을 낳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슈타이너 후계자들 대부분 역시 좀더 이탈리아적이 었던 그의 초기 악기들 보다 후대에 제작된 악기들을 더 선호했다.
매우 바로크적인 이 악기들은 당시 연주자들의 필요와 만났을 것이다.불행히도 18세기의 모방자들은 높은 아치 형태를 비롯한 슈타이너의 특징을 과장시키는 경향을 보였기 때분에 그의 아이디어는 이따금씩 우스꽝스럽게 변형되기도 했다.
이에 대한 하나의 예가 바로 스크롤 대신 사용된 사자머리 조각이다. 이들은 마치 슈타이너의 악기를 대표하는 등록상표처럼 간주되어 왔는데, 사실 그가 만든 대부분의 악기들은 전통적인 스크롤을 사용하고 있다. 초기 악기들에서는 아마티 스타일과 매우 유사한 섬세한 스크롤이 눈에 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스크롤은 보다 개성이 강해지고 더 장중한 모양을 갖게 되는데, 슈타이너가 아름답게 조각된 사자머리 조각을 스크롤 대신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660년대 중반 이후부터이다.
이때에도 사자머리 조각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사자머리 조각은 아주 색다른 혁신적인 발상으로, 슈타이너가 그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로 진일보한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예외 없이 모두 배나무로 조각된 이 사자머리 장식은 이따금 슬라브 컷 뒤판과 두꺼운 새눈 무늬 단풍나무 옆판과 함께 쓰이기도 했다. 이러한 재료들이 잘 결합된 두 대의 훌륭한 악기가 현재 슐로스 암브라스에 전시되어 있다.
이 사자머리 조각을 슈타이너 자신이 직접 만들었는지 아니면 숙련된 목공예가에게 의뢰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세부적인 부분들에 있어 다양하게 표현되기는 하지만, 이 조각들은 모두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슈타이너 작품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18세기 모방자들 중 그 누구도 결코 재생산할 수 없었던 훌륭한 것이었다.
슈타이너의 라벨에 관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불확실성 때문에 그의 몇몇 악기들에 대해 정확한 제작 날짜를 말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 까닭은 과거 오랫동안 독일어권 바이올린 전문가들이 자필 사인을 제작한 악기에 사용한 것은 독일어권 지역에서 슈타이너가 유일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리트겐도르프, 젠, 로이를 포함한 주요 관련 저서의 작가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주장해 왔다.
동시에 그들은 처음부터 인쇄된 라벨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 했다. 슈타이너의 인쇄된 라벨들은 18세기 이후부터 미텐발트에서 재판(再版)된 것으로 오랫동안 발표되어왔다. 그 결과, 본래 인쇄된 슈타이너의 라벨들이 이와같이 잘못 유포된 지식에 부합하기 위해서 종종 손으로 다시 필사된 것으로 대체되었고, 따라서 그러한 악기의 제작 날짜와 출처는 의문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수 년동안 가능한 많은 진품 악기들의 라벨에 대해 연구한 결과 나는 슈타이너가 실제로 인쇄된 라벨을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최초로 인쇄된 라벨이라고 거의 확실할 수 있는 것은 1650년대 초반의 것으로,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 인스부르크 가까운 아프삼에서, 야콥 슈타이너 165_ 년 작. - 1658년 경 약간 다른 글자체와 철자를 가진 라벨이 인쇄되었다.
이 라벨도 역시 제작연도의 처음 세개의 숫자만 인쇄되어 마지막 숫자의 연도 표기는 손으로 써넣을 수 있게 하였다. 이후 똑같은 버전의 라벨이 인쇄되었는데, 단지 제작연도의 마지막 "5"자가 누락된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1660년대 초기에 재판된 것으로 보인다. 이 라벨들의 유효기간이 지났을 때 슈타이너는 새로운 라벨을 만들어냈는데, 여기서도 역시 글자모양과 철자가 변형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라벨들은 동시대 이탈리아 장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인쇄되었고, 오스트리아나 독일 제작자들이 만든 다른 라벨들과는 유사점을 찾을 수 없다. 현재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는 그에 대한 원인은 대략 1667년부터 슈타이너가 필사된 라벨을 사용했으며 인쇄된 라벨은 더 이상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와 유사하게 그가 인쇄된 라벨을 사용했던 시기 동안에는 손으로 씌어진 라벨을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었다. 필사된 라벨에서 슈타이너는 제작연도 바로 앞에 "m-pia"라는 글자들을 덧붙였다. 이는 "직접 손으로 만든" 이라는 뜻의 라틴어의 약자로, 그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손수 악기들을 만들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1650년 이전에 슈타이너가 그의 악기에 어떻게 서명을 남겼을까라는 점이다. 슈타이너의 독립된 작업에 대한 최초의 기록 중 하나는 그가 잘츠부르크 궁정 오케스트라에 악기를 조달하던 1644년부터 나타난다. 이때부터 위에서 언급한 최초의 인쇄된 라벨에서 "165_"라는 숫자가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서 1640년대에는 이 라벨이 사용되지 않았음을 반증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슈타이너가 초기에 제작한 몇몇 바이올린들에 아마티 라벨이 부착되어 있는데, 이중 어떤 것도 진품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본다. 이것은 슐로스암브라스에 전시되어 있는 바이올린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 중 하나인 그 유명한 "Hammerle" 바이올린도 마찬가지이다.
이 바이올린은 1645년경에 제작되었으며 지금은 허버트 악셀로드박사가 소장하고 있는데 평소에는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가끔 연주회에서 쓰이기도 한다. 여기에는 탑 블록에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다음과 같은 수제 라벨이 붙어 있다.
- 인스부르크 가까운 아프삼 출신의 야콥 슈타이너가 16__ 년에 크레모나에서 제작함 -
이 라벨은 보다 세심하게 연구될 필요가 있지만 어쨌든 슈타이너가 1650년 이전에 인쇄된 라벨을 사용했으며, 악기 제작 당시 크레모나에서 일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