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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격의법으로서의 ‘상기’와 수행법에서의 기본적인 쓰임새
격의법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었거나 다른 종교에서 이미 쓰고 있던 격식화된 단어를 차용하는 격의법을 구사한 것은 이들 단어가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기본적으로 같은 뜻을 나타내는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기본적인 뜻으로 한결같이 사용하되 개념은 여러 차원으로 깊어지도록 규정하고 적용하였다. 불교 용어의 깊어지는 개념의 스펙트럼을 이해하지 못하면 지속적인 헷갈림에 시달리게 된다.
‘尋떠올리기’라는 개념이 잡혔다면 상기라는 개념은 보다 쉽게 잡히게 된다.
앞의 인용문에 의하면 기억하고 떠올리는 개념을 합한 개념이 상기라는 말이 된다.
상기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므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문장으로 읽힌다. 자꾸 반복해서 상기할수록 기억도 강화되고 떠올림도 강화되게끔 되어 있다.
무엇을 상기하느냐는 인용문에서 법을 상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이라고 한정하지 않았다.
인용문은 ‘일곱 가지 깨닫는 통로들’의 ‘상기’에 대한 정의 중에 가장 보편적인 정의다.
여기에서의 법은 넓게 말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일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경전상의 어떤 구절이거나 계율상의 공부조목이거나 본인에게 주어진 수행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수행 주제로는 멈춤(사마타) 수행의 주제일 수도 있고(예컨대 ‘열 가지 온통들’이나 ‘네 가지 무량함들’) 분석관찰(위빠사나) 수행의 주제일 수도 있다.(예컨대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四念處) 이런 주제들은 ‘다섯 가지 기능들’(五根)에서의 상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다섯 가지 기능들’과 ‘일곱 가지 깨닫는 통로들’에서의 상기는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에 한정되지 않는다.(물론 주되게 닦는 대상이다. 반면에 ‘성스러운 8차선의 길’에서 ‘바른 상기’는 오로지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에 한정된다. ‘바른’을 붙여 한정한 이유는 깨달음으로 가는 ‘안전하고’ ‘확실하며’ ‘빠른’ 상기의 대상이란 네 가지 출처들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른 상기’란 곧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을 말하지만, 여러 수행법에서의 상기의 대상은 반드시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다섯 가지 기능들’과 ‘일곱 가지 깨닫는 통로들’은 자체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다.(상5-328, 상5-552)
‘다섯 가지 기능들’과 ‘일곱 가지 깨닫는 통로들’에서의 상기가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에 국한된다면 ‘성스러운 8차선의 길’이라는 수행법만으로 충분하고도 정확한데 쓸데없이 ‘다섯 가지 기능들’과 ‘일곱 가지 깨닫는 통로들’이라는 수행법을 많은 비중을 할애하며 따로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여러 측면으로 살펴볼수록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번역과 주장은 잘못된 편협이라는 것이 계속 드러난다.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독선과 배타는 다른 많은 불교 수행법들의 가능성을 말살하고 다른 수행법들에 대한 무시와 편협한 해석을 낳게 할 뿐만 아니라, 교법에 많은 군더더기가 생기게 하고(부처님은 잘 설해진 이 법은 군더더기가 없다고 하셨다. 맛1-566)교법을 매우 편협하고도 단조롭게 옹색하고도 딱딱한 형국으로 몰고 간다.
깨닫는 길이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밖에 없다면 간명해서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여러 경로로 깨달아지는데 어쩌랴!
지금까지는 부처님께서 상기에 대해 직접 정의 내린 문장들을 살펴봤다.
그러나 다른 말씀에서도 상기의 개념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부처님의 언어 사용법은 격의법(格義法)이라고 누차 말해 왔다.
부처님께서는 아마도 우리와 같은 말법의 변방 중생이라도 주의를 기울여 말씀을 꼼꼼히 읽고 음미한다면 불법의 핵심 용어들의 기본 개념과 상응하는 번역어를 찾을 수 있도록 단어의 일차적이고 일반적인 뜻을 파악하게 해주는 격의법을 구사하셨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었거나 다른 종교에서 이미 쓰고 있던 격식화된 단어를 차용하는 격의법을 구사한 것은 이들 단어가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기본적으로 같은 뜻을 나타내는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기본적인 뜻으로 한결같이 사용하되 개념은 여러 차원으로 깊어지도록 규정하고 적용하였다.
불교 용어의 깊어지는 개념의 스펙트럼을 이해하지 못하면 지속적인 헷갈림에 시달리게 된다.
예컨대 명상이라는 단어는 당시에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던 단어였지만 부처님은 ‘조용하게 골똘히 생각함’이라는 ‘명상’을 기본 뜻으로 사용하되 네 가지 차원의 명상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명상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런 네 가지 명상들의 차원은 이전에는 정리되어 알려진 적이 없었기에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개척해서 선보인 경지다.(많은 이들이 이런 부처님의 업적을 폄하하며 그런 경지는 이미 이전 수행자들도 체험했을 것이어서 부처님이 최초로 개척한 경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특히 대승교도들은 극단적으로 부처님을 신격화하거나 아니면 인도 전통의 수행자 중에 한 명으로 만들고 불교도 비슷한 유형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려는 또 하나의 극단적으로 무분별한 성향을 보인다.
그들은 불교를 특별한 종교가 아닌 방편의 하나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3귀의마저 무너져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파격적인 자신은 불교에만 얽매이지 않는 드높은 개방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자부한다.
물론 방편에 불과한 불교의 계율도 마음먹은 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본다. 그러한 자신들은 보편적인 ‘큰 진리’(?) 속에서 불교를 그 일부로 파악하는 넓은 안목의 큰 그릇이자 큰 수레로 여기는 것 같다.
모든 수행과 종교는 양태만 다를 뿐 결국 큰 진리로 다들 들어가고 만난다고 회통 치길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막연한 ‘큰 것’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불교의 진리가 뭐냐고 물으면 언어도단인 ‘근원적인 자리’가 있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공식을 인류의 이전 역사에서 누군가 이미 발견한 사람이 있었지만 발표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 추정과 단정으로 ‘이전의 과학자들은 다 바보였다는 말인가?’라며 화를 낸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최초로 개척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과 부처님이 최초로 네 가지 명상들을 개척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은 무엇이 다를 것인가?)
물론 첫 번째 무방해물인 ‘무한공간의 영역’(공무변처)과 두 번째 무방해물인 ‘무한식별의 영역’(식무변처)도 부처님께서 개척한 경지다.
다만 유의할 점은 성도하신 후에 정리된 ‘아홉 가지 점진적인 거처들’(九次第住. 기존의 九次第定이라는 법수 제목은 후대에 잘못 붙인 것이다. 대끝-424를 참고하라.)을 보고 무조건 이 순서대로 달성이 진행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순서는 달성하기 용이하도록 표준으로 제시된 것일 뿐이다. 부처님께서 성도 전에 달성한 ‘아무 것도 없는 영역’(무소유처)이나 ‘인지가 있지도 없지도 않은 영역’(비상비비상처)은 각각 따로 해당되는 고정됨(삼매)으로 바로 달성되었던 것들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외도들도 따로따로 달성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렇지 않고 아래 단계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면 ‘인지가 있지도 없지도 않은 영역’을 가르치던 웃따까-라마뿟다에게만 지도 받으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영역’을 가르쳤던 알라라-깔라마의 단체는 소멸했거나 웃다까라마뿟다의 제자로 흡수되었어야 했다.
물론 각각 달성하는 법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나중에 체계적으로 정리된 ‘아홉 가지 점진적인 거처들’만을 기준으로 삼아 아래 단계 없이 상위 단계의 달성은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면 부처님께서 잊고 있었던 유년 시절에 경험한 첫 번째 명상을 떠올리며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자각한 대목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고정됨의 단계들은 나중에 능숙한 달성의 수준에 이르면 다른 단계로 건너뛰며 바로 진입할 수 있게 된다.(청론2-286 참고)
심지어 사리뿟다 존자가 신도의 복덕을 증장시키기 위해 잠깐 상수멸에 들었다 나온 후에 탁발했다는 것을 보면 상수멸이라는 멈춤 또한 바로바로 입출입이 가능한 달성의 차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도 입멸 직전에 다른 고정됨들처럼 연이어서 상수멸에 들었다 금세 빠져나오는 경지를 보여준다.(디2-289)
또 한 가지 유념할 점은 네 번째 명상(색계 4선)이 명상의 궁극이라고 해서 네 번째 명상의 특징으로 명상의 개념을 규정하거나 번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네 번째 명상의 특징으로 ‘흔들림 없음’이나 ‘청정’ 혹은 ‘담담함’(upekhā, 捨)등이 있는데 이것들을 명상의 기본적이고도 핵심적인 개념으로 잡아서는 안 된다. 중국 선사들이 선(명상)을 정의할 때 이런 잘못을 범했다고 생각된다.(네 가지 명상들과 선불교의 선의 비교는 대끝-509를 참고하라.)
그런 오류로 말미암아 ‘선’은 생각이나 식별이 끊어져서 발도 못 붙이는 자리라고 여겼다고 보인다. 그러나 네 번째 명상에도 ‘인지’(saññā, 想), ‘의도’(cetanā, 思), ‘마음’(citta, 心), ‘욕구’(chanda, 欲), ‘결단’(adhimokkha, 勝解) 등등의 15가지 법들이 들어 있다.(맛4-85. 이것은 사리뿟다와 후대 선사들을 비교했을 때 정밀함에서의 실력차를 여실히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중국 선사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사리뿟다를 넘어서는 부처님의 제자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맛4-544. 이런 위대한 분을 대승에서는 ‘썩은 종자’敗種라며 비웃고 매도하는 악업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도 짓게 하고 있다.
이 악업의 가장 큰 과보는 정법과 멀어지는 일이다.
마음 길이 끊어지거나 생각이 끊어진 자리가 아니다. 욕망, 망상, 잡념 등은 끊어지지만 명상의 차원에서 마음, 식별, 사유, 결단 등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무방해물의 고정됨에서도 끊어지지 않는다.(맛4-87)
식별이 끊어진 자리는 알아차림도 끊어진 자리이므로 깨달음이 불가능한 자리다.(식별과 알아차림의 불가분리성은 미주 26번을 참고하라.)
반대로 알아차림으로 깨달음이 가능한 자리에는 식별도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만 알아차림과 식별은 상보적인 관계여서 알아차림이 강할 때에는 식별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는 있다.
특히 깨달음의 순간이 더욱 그러하다. 반대로 식별이 강할 때의 경우도 마찬가지 원리로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끊어진 자리는 상수멸이지만 상수멸은 선, 즉 명상도 아니고 삼매, 즉 고정됨도 아니다. 격의법으로 구사된 다른 용어들에 있어서도 명상에서와 같이 궁극적인 차원으로만 한정된 번역과 해석을 하는 일은 편협한 오류를 낳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sati상기도 명상처럼 일상적으로 쓰이던 단어였고 격의법으로 차용된 단어다.
그러므로 높은 수행의 경지에서 쓰이는 측면에만 천착해서 개념 정의를 내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일상적인 쓰임새에서 기본적인 개념과 궁극적인 개념을 동시에 잡아내야 한다.
격의법에 대한 강조에 대해 어떤 종교든지 처음에는 격의법으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밖에 없어서 불교만의 특징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정도로 강조할 수 있다.
첫째는 부처님은 전에 없던 진리나 깨달음에 관계된 몇몇 용어들(따라서-같이-생겨남, 이-연유로-됨, 기원에 맞게 정신을 기울임,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등등)을 제외하면 자기들만의 전문성과 차별화를 위해 전에 없던 용어들을 수없이 생산해 내는 다른 종교 사상들과는 달리(다만 후대 불교의 번역어와 설명들이 이러한 수법에 빠져들었다.)
최대한 평범하고 쉽고 일상적인 단어로 표현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심지어 타종교의 용어들도 기꺼이 차용한다.
둘째는 핵심적이고 궁극적인 용어들일수록 격의법은 두드러지는데(꺼짐, 동격자, 명상, 상기, 고정됨, 멈춤, 풀려남, 달성, 포착, 알아차림, 규제, 재계, 요청, 급선무, 가닥…), 그것도 그 용어들의 핵심과 궁극에 해당하는 뜻이 일상적인 용어의 기본적인 뜻으로 한결같이 적용되었을 때 명쾌하게 해결되도록 의도적으로 구상되어 짜여 있다.
제도적으로 전문화된 용어에 길들여진 자들이 원어의 일상적인 의미와 번역어를 접하면 뭔가 수준이 낮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초기의 낯선 느낌일 뿐이며 그러한 번역어를 사용할수록 불법의 장대한 정합성이 꿰뚫어지는 안목과 그 쾌감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상기 또한 일상적인 기본 뜻으로 파악했을 때 그 의미와 기능과 연계성이 온전히 드러나게 되고 수준 높은 경지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역할과 작용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주 감지하겠습니다 (vedissāmi)
vedissāmi는 ‘감지하다’(vedeti, 感知)의 1인칭 미래형이고, 어원인 ‘√vid’(분명히 알다)의 사역형으로 파생한 단어다.
여기에서 명사형으로 파생된 단어가 ‘느낌’(vedanā, 受)이다. 느낌도 앎(ñāṇa, 知)의 하나이다. 알긴 아는데 ‘느끼어 아는’ 것이다. 심지어 외도의 62가지 견해도 ‘감지한 것’(vedayita)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디1-166) 본문에서는 침묵의 상태 속에서 청정함을 더욱더 느끼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경전에서 앎은 대략 네 가지 차원으로 거론된다. 즉, 느낌, 인지(saññā, 想), 식별(viññāṇa, 識), 알아차림(paññā, 慧)이다. 이 네 가지는 서로서로 겹쳐 있어서 따로따로 분립시킬 수 없다.(맛2-293, 296.
그러므로 식별만이 단독으로 재생연결 되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두드러지는 측면이 있을 뿐이다. 두드러진 특징으로,
느낌은 느껴서 아는 감지이고,
인지인지(saññā, 想)는 관념적으로 파악하는 앎이고,
식별은 분별하여 아는 분명한 앎이고,
알아차림은 꿰뚫듯이 직접적으로 아는 것이다.
알아차림의 결정체가 깨달음이고 깨달음의 최고봉인 동격과는 ‘직접 앎’(aññā)이라는 알아차림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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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띠란 기억이 살아 있어 활성화된 상태로서 '상기'라는 번역어가 수행하시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억과 상기의 차이를 먼저 이해하시는 노력을 한다면 사띠가 상기임을 받아들이고 인지하여 수행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번역이란 그 당시의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높은 단어를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본인 만이 가지는 개념의 범주를 모든 이들이들에게 받아들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상기]와 [기억]의 범주 차이는
어감에 따라 문맥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때 우리는 사전을 참고합니다.
요즈음에는 일일이 책에서 찾지 않고 검색을 합니다.
이미 상기와 기억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최근에 소개해 드렸습니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상기는 기억의 3가지 측면에서 1가지 측면이 강조된 어휘입니다.
그렇다면 sati는 우리말 기억에 가까운 단어인지 상기에 가까운 단어인지
직접 실참에 의해서 혹은 경문의 용례에 의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실참 경험이 많으신 들을 그러한 경험이 경문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알려 주시면 좋을 것 같고
최근에 여러 용례들을 올린다고 올렸는데 계속해 보겠습니다.
그것에 대한 실참하시는 분들의 의견도 기대하겠습니다.
한가지 제안- 기존의 번역어가 상당히 오해의 문제가 많다면
당연히 변경해야 합니다.
적당한 번역어가 없거나 바꾸어도 또한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면 바꾸면 더 큰 혼란이 옵니다.
보수적인 접근.
//상기는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아마 4념처를 유일한 길(이른바 1승)이라고 번역한 것을 언급한 것 같습니다.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번역을 근거로 논지를 이어나갈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번역어를 고를 때 혼자 만의 범주를 사용할려면
각 단어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말이 되곤 맙니다.
예를 들어 //네 가지 상기의 출처들//---은
이른바 4념처에 대한 다른 번역어로 이해됩니다.
상기라는 단어는 제쳐두고
[출처] 는 사전에 의하면
1. 사물이나 말 따위가 생기거나 나온 근거.
2. 사람이 다니거나 가는 곳.
4념처의 처도 출처도 경문에 나오는 의미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어떤 번역서에서는 시발점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던 단어 빠따나의 번역어 이지 싶습니다.
빠따나가 고유명사로 쓰이면 <발취론>으로 번역되는 논서의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4념처에서 빠따나는 수행의 [토대/받침] 즉 대상/주제로 이해하면 되지 싶은데
굳이 토를 달지 않는 것은 많이 쓰고 있어서 굳이 혼란을 주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크게 문제가 없으면 보수적으로. 그렇지 않으면 혼란만.....
@봄봄 상기와 기억의 차이가 충분히 설명되고 있으며,
상기는 움직이는 활발발 즉 작업이 가능한 상태이고
기억은 상기 이전의 단계입니다.
상기와 기억의 분별이 어려우나 사띠 수행에 유익하며
전문적인 수행을 위하여 필요합니다.
@형성의 바탕을 초월한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취지는 이해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번역어의 선택은 번역자의 의견을 존중하나
언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의미를 포함하지 않고
개인적인 범주를 강조하면 의견 전달에 불필요한 낭비가 발생하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초불에서 많이 나타나는 '마음에 잡도리하다.'라는 표현이 그러한 예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