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광복 50돌을 맞은 우리 정부는 일본어투 생활용어 순화자료 702개 단어를 야심차게 내놨다.
당시 고시 사유는 '일제 강점기 이래 국민의 언어생활 속에 침투해 국민의 의식과 언어습관을 굴절시켜온 일본어투 생활용어를 순화하여 일제의 잔재를 말끔히 지움으로써 민족 주체성 확립과 국민언어 생활 개선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안에는 서민들이 즐겨 먹는 '우동'도 자리 잡고 있다.
스시(초밥)나 사시미(생선회)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일본의 상징적인 음식 가운데 하나인 우동은 우리에게 그때나 지금이나 동네 중국집이나 분식집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흔한 음식이다.
너무나 친숙하고 많이 쓰이다 보니 우동이 순우리말인 줄 아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우동(うどん)은 일본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가락국수로 순화했다.
일본의 국수라 할 수 있는 우동은 원래 7,8세기께 당나라에서 전해진 것이라 한다.
이를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수백 가지로 다양화해 오늘날 일본 하면 우동의 원조 격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특이한 것은 우리는 이 우동을 가락국수로 순화하면서 우동의 한 종류인 가케우동(또는 가께우동)도 똑같이 가락국수로 바꿨다.
나베우동은 냄비국수로 순화했다.
사람들이 순우리말인 줄 알고 있는 '냄비'란 말은 실은 일본말 '나베(鍋)'가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발음이 변한 형태다.
예전에는 '남비'라고도 했으나 지금은 '냄비'가 바른 표기다.
이 가운데 가케우동은 사전에 표제어로 다뤄진 데 비해 더 많이 알려졌음직한 냄비우동은 아예 오르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소설가 김동성은 1998년 한 월간지에 일본어투 999개 단어를 우리말식으로 바꿔 제시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는 당연히 우동도 있었는데 그는 이를 '왜면(倭麵)' 또는 '왜국수'로 쓰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가락국수이든,왜면이든,왜국수이든 이런 순화어는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우동을 능가할 만큼 언중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락국수의 사전적 풀이는 '가락을 굵게 뽑은 국수의 하나.
또는 그것을 삶아서 맑은장국에 요리한 음식'이다.
이때 '가락'은 엿 한 가락,국수 가락 등에서와 같이 가늘고 길게 토막이 난 물건을 세는 단위를 뜻한다.
그렇다면 가락국수는 그냥 수많은 국수의 한 종류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일본의 우동이란 음식이 들어오기 전부터 국수류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게 온면이다.
온면(溫麵)은 더운 장국에 만 국수를 말한다.
흔히 잔치국수라고 하는 걸 떠올리면 알기 쉽다.
예부터 잔치를 하면 흔히 국수를 준비하는데,이때 나오는 국수가 잔치국수다.
그러나 사전에 잔치국수란 말은 올라 있지 않다.
이에 비해 차갑게 해서 먹는 국수가 냉면(冷麵)이다.
냉면은 흔히 메밀국수를 냉국이나 김칫국 따위에 말거나 고추장 양념에 비벼서 먹는데,예전부터 평양의 물냉면과 함흥의 비빔냉면이 유명했다.
소면(素麵)이란 말도 많이 쓰는데,이는 '고기붙이를 넣지 않은 국수'를 말한다.
가락국수나 냄비국수 같은 말이 우동이나 냄비우동에 밀려 사람들의 입에 잘 오르내리지 못하는 까닭은 순화어들이 원래의 말에 있는 분위기와 맛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에선 요즘도 여전히 '우동은 쓰지 말 것, 가락국수를 쓸 것'으로 강요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가끔 우동이란 단어가 나올 때 괄호 안에 가락국수를 병기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러니 이 우동과 가락국수의 관계는 우리가 전에 이미 살핀 오뎅과 꼬치안주 사이만큼이나 어색하다.
이 말에 대한 10년 이상의 순화 작업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동이 오뎅 못지않게 거센 순화의 도전을 받았고,그런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말 체계 안에서 그 나름대로의 위치를 꿋꿋하게 고수하고 있는 모습도 같다.
이제 '우동'은 '~으로 순화'란 언어적 족쇄에서 벗어나도 될 때가 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