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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조금 남아서 병마용 인근에 있는 화청지로 이동합니다..
인근에 진시황릉도 있지만 신빙성도 없고 또 개발도 되지 않은 가운데에 현재 만든 것만 대부분 있는 장소로
많은 관광객이 외면하고 저 역시 외면하였습니다!!
과거에 한번 가 본 적은 있지만 정말 볼 것 없는 장소입니다..
진시황릉을 가는 것보다는 더 많은 곳을 보고 싶으면 모택동 군대의 훈련장이 있었던 화청지 뒤쪽의 민산을 케이블카로
오르는 것이 과거와 중국 현대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에 시간이 없어 가보지 못했지만 시간 여유가 있는 분들 뒤에 서안을 방문하면 화청지 뒤에 민산에 올라보세요!!
입구도 과거와 달리 깔끔하게 만들어져 있고
양귀비가 저를 반깁니다!!
서주말기 온천이 흐르는 이곳에 주유왕이 리궁을 건립하였으며
당태종 이세민은 탕취안궁(汤泉宫)을 지었고, 양귀비와 로맨스로 유명한 당현종이 증축하고 화청지로 명명한 장소..
이세민이 문헌에 의하면 4번을 방문하였고, 당현종은 무려 44번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양귀비"와 로맨스 장소였겠죠..ㅎㅎ
화청지 입구!!
당현종(唐玄宗)과 양구비(杨贵妃)의 연애시절에는 이곳이 매우 번성!!
왕이 이곳에서 정무를 봄으로 당시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가 유명한 안사의 날(安史之乱) 이후로
왕이 황궁으로 돌아감으로 화칭츠[华清池]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화칭츠 온천수의 수온은 43℃ 이다. 풍부한 광물질과 미량의 원소가 함유되어 있으며, 온천욕을 하기에 적합하다.
구탕츠[古汤池]위에 탕화칭궁위탕이즈박물관[唐华清宫御汤遗址博物馆]을 새로 건설했으며,
리룽지[李隆基]와 양귀ㅣ비(杨贵妃)가 사용한 롄화탕[莲花汤],하이탕탕[海棠汤], 쥐룽탕[九龙汤], 구이페이츠[贵妃池] 등이
보존되어 있으나 물이 흐르는 곳은 일부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화청지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 장소 다음에도 또 한번 역사에 부각입니다!!
1936년 유명한 서안사태..
장개석[蔣介石]이 장쉬에량[張學良]의 군대에 붙잡힌(1936년의 시안사건) 것도 이곳이었죠!!
서안사태!!
1931년 9월 13일 만주사변을 야기한 일본은 중국의 침략을 위한 군사작전을 가속화하였지만
당시 집권자였던 장제스는 장 제스의 국민당은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밖을 막으려면 안을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
정책을 고집하면서 일본보다는 홍군을 토벌하는 데 힘습니다..
장 제스는 홍군을 토벌함과 동시에 자기 직계 군대가 아닌 다른 군대들의 역량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동북군과 서북군을 섬서 북부로 옮겨 공산당군을 토벌하는 전쟁의 선두에 서게 했죠!!
동북군과 서북군은 마오 쩌둥이 지휘하는 공산당군에게 누차 패해 사기가 약해져 있었으며
홍군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항일민족통일전선공작, 즉 내전을 그만두고 다 같이 일본 침략자를 물리치자는 공작을
적극적으로 벌였으며 자기의 땅이 침략당하던 동북군, 서북군들 사이에서는 항일사상이 고양되기 시작합니다..
장 제스는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구망운동(抗日救亡運動)이나, 동북군과 서북군의 항일 정서에는 아랑곳없이
‘양외필선안내’ 정책만 고집했다.
1936년 10월에 동북군과 서북군에게 압박을 가해 홍군에 대한 포위 토벌을 다그치려는 목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날아왔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홍군과의 싸움을 지휘할 작정이었다.
서안에 온 장 제스는 경호대 1개 연대를 데리고 임동(臨潼)의 화청지(華淸池)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장 제스가 서안에 오자, 장 쉐량(張學良)과 양 후청(楊虎城)은 그에게 항일을 간곡히 권했다.
공산당 토벌을 포기하고 나라와 민족의 생존을 위해 공산당과 연합하여 일본 침략자를 물리치자고 권하면서 자신들
동북군과 서북군은 항일의 초전선으로 나아가 일본인들이 침략하여 점령한 국토를 수복하겠다고 한 것이다.
심지어 동북군 사령관인 장 쉐량은 장 제스 앞에서 ‘곡간(哭諫)’, 즉 통곡을 하면서 간언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장 제스의
꾸중만 들었을 뿐이었다.
장 쉐량과 양 후청은 ‘병간(兵諫)’, 즉 장 제스가 항일하도록 무력으로 압력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사전에 모의하여, 양 후청의 서북군은 서안 성내에 있는 장 제스의 친신들과 장 제스 계통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임무를 맡고, 장 쉐량의 동북군은 임동으로 가서 장 제스를 사로잡기로 했다.
12월 12일 새벽 5시에 총소리가 서안성 안의 조용한 대기를 가르자 서북군은 헌병대의 무장을 신속히 해제시켰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동북군에서는 백봉상과 유계오가 군대를 거느리고 임동으로 갔다가 장 제스의 경호대와 격전이 벌어졌다.
한동안의 격전 끝에 방어선을 돌파한 동북군 장병들은 장 제스의 침실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
런데 그 사이에 어디로 도망갔는지 장 제스가 보이지 않았다.
의복이며 가방이 그대로 있었고 이불에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또한 장 제스의 전용차도 그대로 있었다.
장 제스가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고 판단한 장 쉐량은 주위를 샅샅이 뒤지게 했다.
나중에 그들은 화청지 뒷산에 숨어 있는 장 제스를 찾아냈다.
날이 밝자 서안성에서는 선전차가 돌아다니면서 ‘장 제스를 붙잡았다’는 제목이 찍힌 전단지를 도처에 뿌렸다.
집에서 뛰쳐나와 앞다투어 전단지를 읽는 서안 시민들의 얼굴에서는 희색이 돌았다.
이미 중국 인민들은 공산당에게 경도되어 있었으며, 중국 공산당은 이 사건으로 괘멸직전에 극적으로 회복하며
장시간 국민당에 쫒겨다니던 대장정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장 제스를 나포한 후, 동북군과 서북군의 장군들 중 상당수가 장 제스를 아예 죽여버리자고 주장했다.
일종의 반란을 주도한 장 쉐량과 양 후청은 중앙 공산당 사람들을 불러 이 일을 상의하기로 했다.
그전에 장제스의 생환을 위한 국민당측의 노력에서 그의 아내인 여걸 "송미령"의 활약이 있었으나 당시의 역사는 여자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임으로 그냥 야사로 전해질 뿐..
대단한 여자 "송미령"!! 그에 비하면 쪼다에 가까웠던 "장제스(장개석)"!!
12월 17일, 중국 공산당에서는 저우 언라이(周恩來)를 위수로 하는 대표단을 서안에 파견했고
저우 언라이는 장 제스와 양 후청에게 당시의 형세를 면밀히 분석하고 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제안했고,
결국에는 장 제스도 어쩔 수 없이 공산당 토벌을 포기하고 함께 항일하겠다는 것을 전 중국 국민들에게 알렸다.
이렇게 해서 서안사변은 평화적으로 해결되고 공산당은 극적으로 회생했습니다!!
서안사변 이후 장 쉐량은 장 제스를 남경까지 직접 호송했는데 남경에 도착하자마자 장 제스는 신의를 저버리고
장 쉐량을 잡아 가두었다.
서안사변은 중국 항일투쟁의 전환점이다.
이때부터 공산당과 국민당은 연합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했으며 일본 침략자를 몰아내는 어려운 전쟁을 시작했다
(국공합작(國共合作)).
국민당의 군대는 일본군과 전면전을 펼쳤으나, 공산당의 군대는 막강한 일본 군대에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는 양동 작전을
펼치면서 한편으로는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인민선전활동에 주력하므로
일본과의 전쟁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우세한 위치와 인민들의 지지를 얻음으로 전 세계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인식한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합니다!!
중국 현대사의 반전이 이루어진 곳 "화청지"!!
가장 유명한 조각!! 양귀비상..
추우나 더우나 벗고 있으니 조금 안스럽네요!!
당나라 6대 황제 현종!!
685년에 태어나 762년 77년 살았네요!! 대단한 장수입니다..
예종의 세째아들이며 26살때 골육상쟁의 난을 현명하게 극복하면서 아버지를 제위에 옹립하고 황태자에 등극하였으며
28살때 부친의 양위로 황제에 등극합니다..
현종은 당시 세도를 중심이었던 "태평공주"일파를 타도함으로 "측천무후"이후 반세기에 걸친 부인들의 정권 개입을 근절합니다!!
초기에는 정치를 잘해 "개원의 치", "첝보의 치"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으나
말년에 정치를 등한시 하고 도교에 치중하였으며, 35살 연하의 양귀비와 로맨스에 빠져 권신 이임보가 정권을 관리합니다!!
화청지는 당현종이 양귀비와 로맨스를 즐긴 장소!!
천보 14년(755)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사천(四川)으로 난을 피해 가던 도중에 양귀비는 병사에게 살해되고
정치에 뜻을 잃은 현종은 이듬해 아들 숙종(肅宗)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 은거했는데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뒤 죽었다.
호색가는 음악을 좋아한다고 특히 음악에 뛰어나 스스로 작곡까지 하면서, 이원(梨園)의 자제 남녀를 양성했다.
서예에도 능해 명필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시호는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다.
당현종을 이야기하면 양귀비의 이야기가 빠질 수가 없다!!
756년 6월 15일 양귀비는 안사의 난을 피해 도망치는 도중 자결아닌 자결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 안타까운 순간을 시인 백거이는 장한가의 가사로 묘사!!
서쪽으로 도성 문 백여 리를 나오더니.
어찌 하리오! 호위하던 여섯 군대 모두 멈추어서네
아름다운 미녀 굴러 떨어져 말 앞에서 죽으니
꽃비녀 땅에 떨어져도 줍는 이 아무도 없고,
비취깃털, 공작비녀, 옥비녀마저도.
황제는 차마 보지 못해 얼굴을 가리고
돌아보니 피눈물이 흘러내리네.
화청지 원탕입니다!! 물은 쫄쫄..ㅎㅎ
백거이의 시 속에서 양귀비를 총애하던 황제는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외면하며 오로지 피눈물만 흘리는
소극적이고 비겁한 남자일 뿐입니다..
안사의 난을 피해 쓰촨으로 도망가던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의 가마가 마외파에 이르렀을 때였다.
호위하던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나라를 망친 양귀비와 그 일족을 죽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주저앉은 것이다.
뒤에선 안록산의 군대가 쫓아오고 피난 가마는 조금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다급해진 현종은 병사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양귀비의 일족은 병사들에게 내어주어 주살하게 했고 사랑해 마지않던 총비 양귀비는 내팽개쳤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다고 했던 양귀비가 환관 고력사의 손에 이끌려 죽으러 가는 것을
그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양귀비는 마외파 인근 불당 앞 배나무에 비단천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자결했다고도 하고 고력사가 죽였다고도 한다.
당시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는 여인,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의 10여 년 권세는 이렇게 끝이 났다.
그런데 이렇게 죽은 것을 보면 현종에게는 아름다웠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저 그런 여인이었던 모양이다!!
정말 아름다운 여인을 그냥 죽일만큼 간 큰 남자가 어디 있나??ㅎㅎ
양귀비는 중국사를 보면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 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중독시키는 아편 꽃에 양귀비란 이름을 붙인 걸 보면 그녀의 미모는 어지간히도 치명적이었던 것 같네요!!
본명은 양옥환이며 잠시 도가에 입문했을 때 법명은 태진(太眞)이다.
산시성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쓰촨성 관리이던 숙부 양립의 집에서 자랐다.
양옥환은 노래와 춤에 능하고 미모가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가 되었다.
수왕 이모는 당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황제계승권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수많은 왕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양옥환과 수왕의 사이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별 풍파 없이 양옥환이 수왕과 6년간 결혼생활을 이어간 것을 보면 그다지 나쁜 사이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마디로 적당하게 잠자리 잘 하고 살았다는 이야기죠!!
당 현종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양옥환은 수왕 이모와 천수를 다하며 해로하였을지도 모르고,
당나라도 혼란에 휩싸여 자멸의 길로 걸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타고난 자의 운명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6년간 수왕 이모의 아내로 살던 스물세 살의 양옥환은 현종 처소의 환관인 고력사의 은밀한 방문을 받는다.
고력사는 총애했던 무혜비가 죽고 나서 외로워하는 현종을 위로하기 위해 중국전역의 미녀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였다.
그 중에 수왕 이모의 아내 양옥환이 특히 아름답다고 들은 고력사는 그녀를 현종의 술자리로 불러낸다.
양옥환은 이 자리에서 음악 애호가였던 현종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자신의 장기인 아름다운 춤을 선보였다.
춤이 끝나기 전에 남녀 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당시 예순을 바라보던 현종의 마음에 사랑의 불길이 당겨진 것이다.
현종은 양옥환이 아들의 아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아름다운 그녀를 품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망설이는 양옥환을 고력사가 특별히 파견한 궁녀들이 설득하기 시작했고 물량공세와 구애가 이어졌다.
마침내 양옥환은 수왕을 버리고 그 아버지 현종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대단한 여자인가?? 예나 지금이나 여자는 권력과 돈에 약한 거지 근성이 있는 것인가??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주위의 눈은 신경 쓰이는 법.
아들의 아내를 바로 빼앗을 수 없었던 현종은 일단 양옥환을 화산으로 보내 도교의 도사로 입문시킨다.
도가에서는 일단 입문을 하면 그 이전에 있었던 속세의 일들은 다 지워지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종은
이런 도가사상을 자기의 몰염치한 사랑에 이용했다.
이때 양옥환은 태진이라는 도호를 얻었다. 그 사이 미안해진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도록 주선하였다.
마침내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고 현종은 꿈에도 그리던 여인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도사를 모셔와 가르침을 받는다는 핑계로 태진궁을 짓고 그곳에 양옥환을 살게 하였다.
이때부터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이후 양옥환은 27세가 되던 해 귀비 책봉을 받아 양귀비가 되었다.
양귀비는 비록 비의 신분이었지만 현종이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지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황후와 다름없는 귄력을 휘둘렀다. 현종이 양귀비를 맞으면서 당나라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현종은 젊었을 때 꽤나 정치에 소질이 있는 황제였다.
치세 전반기는 현종의 연호를 따 <개원(開元)의 치(治)> 라는 칭송을 받으며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태평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기나긴 태평성세에 마음이 해이해진 현종은 양귀비를 맞으면서 사랑에 눈이 멀어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 되고 말았다.
양귀비를 낀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백성들의 삶은 급속히 몰락해 민심은 흉흉해졌다.
그런데 그게 왜 양귀비 잘못인지 모르겠네!! 어름한 현종 잘못 아닌가??
양위하고 그냥 늙은이가 로맨스나 즐기면 되지 정치에 욕심까지 있어 가지고..
늦게 배운 도둑질!!
현종에게는 오로지 양귀비뿐이었다.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누대로 유명한 온천, 화청지에 궁을 짓고 오로지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양귀비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라 부르며 양귀비의 아름다움 앞에는 꽃조차도 부끄러워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양귀비가 즐겨 먹는다는 이유로 2천리 밖에서 열리는 과실 여주를 매일 공수해오도록 하였고 양귀비가 원하는 모든 사치를
다 누리도록 해주었다.
지금도 서안 지역에는 여주가 아주 유명하다..ㅎㅎ
더불어 그녀의 친인척을 궁과 관직에 대거 등용하였다.
양귀비의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괵국(虢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이때 등용된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는 건달출신의 부도덕한 간신배였지만 현종에게서 국충(國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 받았다.
양국충은 당 현종 말기의 대표적 부패권력이었으며 종내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다.
늙은이는 자기가 집권하면서 여자들의 권력을 근절시킨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다!!ㅎㅎ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매번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하였고
또 목욕을 즐겨 늘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양귀비는 날씬하고 가녀린 미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역사서에는 그녀의 용모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하였는데 이는 풍만하고 농염하다는 의미이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는 매일 온천물에 몸을 닦고 새로운 화장법으로 미모를 가꾸어
밤이나 낮이나 당 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연꽃 휘장 속에서 보낸 뜨거운 봄밤
봄밤에 너무 짧아 해가 높이 솟았구나.
황제는 이날 이후 조회에도 안 나오네
후궁에 미인들은 3천명이나 되었지만
3천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네.
금으로 치장한 궁궐에서 화장을 끝내고 기다리는 밤
백옥누각에 잔치 끝나면 피어나는 봄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 꽃은 열흘 붉은 것이 없고 권세는 10년을 가지 못 한다)’ 이란 말이
있듯이 양귀비의 권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양귀비의 몰락은 현종 외에 양귀비가 총애하던 두 남자 사이의 알력에서 시작되었다.
양귀비는 중국 변방 돌궐족 출신인 안록산을 가까이 하였다.
안록산은 일개 군졸에서 시작하여 용맹으로 공을 세워 일약 중앙정계로 진출한 인물이었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
20대의 양귀비는 40대의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고 그를 매우 가까이 하였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안록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도 한다.
젊은 여인이 늙은 영감과 살아가다보니 그럴수도 있겠으나 여자를 폄하하는 역사가들의 표현일수도 있겠죠!!
현종은 안록산과 양귀비의 관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귀비가 안록산을 총애하는 것만큼 더욱 안록산을 높은 지위로 등용하였다.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양국충은 안록산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안록산은 변방에서 난을 일으키고 곧이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 왔다.
이것이 바로 안사의 난이다.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장안에서 100여리쯤 가 섬서성 마외파에 도착했을 때였다.
성난 군중들과 현종을 호위하던 병사들은 나라꼴을 이렇게 만든 양귀비와 그 일족들을 처벌하기를 원했다.
현종을 조져야 하는 것 아냐?? 참 이상한 중국 사람들..
현종은 사랑과 목숨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는 양귀비와 함께 장렬히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종은 양귀비를 보호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백성의 분노를 수수방관함으로써 그녀에게 죽음을 종용하였다.
정치를 내팽개치고 나라를 몰락하게 만든 모든 책임을 양귀비에게 덮어씌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종은 사랑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선택했다.
결국 현종의 뜻을 알아차린 환관 고력사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양귀비가 자결 아닌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나자 현종은 그녀의 시체를 수습해 인근 조그마한 산에서 장사 지냈다.
양귀비가 죽고 간신히 피난길을 떠났던 현종은 황위를 아들 숙종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
이후 그는 숙종에게 안사의 난을 진압하도록 모든 것을 맡긴 채 자신은 양귀비만 그리워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현종은 양귀비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끝내 그녀를 지키지 못한 회한과 그리움 속에서 6년 세월을 보내다가
762년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양귀비의 죽음에 대해서는 또 다른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다.
양귀비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대단해 고력사나 따라간 군졸들이 차마 죽이지 못하여 그녀를 일본으로 탈출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양귀비는 30여 년을 일본에서 더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유물과 사당, 무덤이 일본 야마구치현에 남아 있는데,
실제로 양귀비의 후손이라고 족보까지 들고 나선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역사는 수도 없는 야사를 생산하는 모양입니다!!
양귀비가 현종을 따라 떠나지 않고 수양아들로 삼은 안록산의 진영으로 갔으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조금 궁금합니다만 가정없는 역사는 없으니 그냥 묻어야죠!!
양귀비와 현종의 러브스토리는 "이백의 좌천"등 다른 여러가지 일화도 있습니다만 여기까지만..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알면 양귀비가 음탕한 여인이 아니라 조금 불쌍하게 보이지 않나요??
어떻게 보면 남자들의 욕심에 의하여 희생된 여인!!
저는 너무나 애잔하게 불쌍하고 연민이 느껴지는 여인입니다만..
양귀비가 목욕을 했던 목욕탕에 보면 장생전에 대한 소개가 그림과 글로 약 40여 액자가 있는데
놀랍게도 허균이 지었던 장생전과 너무나 흡사하다!!
시간적인 관계가 없어 그림만 대충 보았는데 누가 중국의 "장생기전"과 허균의 "장생전"의 관계를 아는 분 있으면 조언 좀!!
허균의 장생전 복습..
「장생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렁뱅이 행세를 하는 장생이 기생집 오입쟁이로 풀렸다.
그는 노래를 잘 부른다.
술이 취하면 눈먼 점쟁이, 술취한 무당, 게으른 선비, 소박 맞은 여편네, 밥비렁뱅이, 늙은 젖어미 등의 흉내를 낸다.
그리고 입을 움직여 모든 악기와 조수(鳥獸)들의 소리를 모사하기도 한다.
장생은 악공 이한(李漢)의 집에 하숙을 하였다.
하루는 그 집 여종이 머리꽂이를 잃고서 울기에 저녁에 여종을 데리고 경복궁 담을 뛰어넘어 경회루 위에 올라 가서
머리꽂이를 찾아 준다.
장생은 그 뒤에 술에 취하여 수표다리 위에서 죽었다.
그런데 시신이 썩어서 벌레로 화하여 날아가 버렸다.
그의 친구 홍세희(洪世熹)가 조령(鳥嶺)을 넘다가 그를 만났다.
그는 홍세희에게 자기가 실은 죽은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저 동해 속의 한 이상적인 섬나라를 찾으러 간다고 하였다.
그는 홍세희에게 몇 가지 예언을 남겼다. 그 뒤에 그의 예언은 모두 현실로 나타난다.
장생전」과 비슷한 이야기를 담은 글들이 『해동이적(海東異蹟)』이나 김려(金鑢)의 『담정총서(藫庭叢書)』에서 보인다.
그 구체적 내용이나 길이가 약간씩 다를 뿐이다.
그 당시에 「장생전」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이 유포되고 있었던 듯 하다.
이런 글을 보니 허균의 장생전은 중국의 장생전과 그 맥락이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별 변변하게 볼 것이 없는 화청지가 되다보니 저녁에는 공연이 열린다고 합니다..
아마 양귀비 이야기를 절묘하게 공연하면서 간혹 액자에 있는 장생전의 내용을 보여주는 모양!!
현종이 도교를 신봉하였다고 하더니 여기도 기복하는 방패인 리본이 많이 있네요!!
당 현종 시절의 화청지를 묘사한 듯..
당 현종과 양귀비의 좋았던 시절을 묘사!!
역사를 알고 유적지를 보면 더 많은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제 서안 시내로 이동..
서안 성내에 성루와 고루의 야경을 보는 것으로 이번 여행을 마감합니다!!
중국 역사의 이해라는 생각으로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적었는데 지루하면 그냥 통과하십시오..
야경이 더 아름다운 종루..
맞은 편의 고루..
유명한 만두집 "덕발장"앞입니다..
몽땅 중국 음식점 일색이었는데 스타벅스도 생기고 서양식 패스트 푸드점도 생겼네요!!
중국 급격하게 변합니다..
고루앞의 퓨전 허궈집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
허궈를 우리의 궁중 떡복이처럼 변형시킨 음식인데 맛있습니다..
내년 형제간들과 구채구, 황룡 여행을 위해서 서안을 다시 한번 방문예정인데 그때 다시 한번 와도 좋을 곳..
형제간 여행에서는 항공이동 구채구 황룡을 보고나서 이번에 가보지 못한 호구 폭포 화산 일정을 만들어 보아야 겠습니다..
내년 좋은 계절에 토요일 출발 일요일 귀국 7박8일 일정 생각있는 사람 같이 갑시당..ㅎㅎ
마무리는 수제 국수로..
맛있네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중국 여행 마감합니다!!
첫댓글 복잡한 중국 역사도 꽤뚫고 있는 만공~!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중국~! 한 삼년 여행만 하고 돌아 다녀도 다 못볼것 같네....ㅎ
부지런히 다닙시당..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