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짧고 웃음은 길었다
-속리산 문장대 산행기
권옥희
하루 해가 점점 짧아가고
살갗이 바람에 맞닿을 때마다
오소소 해지는 느낌
가을이 깊어간다는 것을 말 안해도
몸은 알고 있었다.
여름내 푸름을 자랑하며
가지가지마다 무겁게 달고 있던
잎들을 이제는 이별하며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나무도 알아서
뿌리는 수액을 올리는 것을 거부하며
잎잎마다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442264E4E9E559F28)
그리하여 우리가 추위를 감싸안으며
겨울 채비를 하듯
잎들은 저마다 감지한 이별의 적신호를
붉고 노란 빛으로 물들이며
우리들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과연 우리들도 이 세상 떠날 때 고통도
아픔도 없이 저렇듯 환하게
내 몸에 빛을 남기고 떠날 수 있는지.
가을은 짧고 할 일은 많아서 손에
들고 있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허둥대며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하루쯤 마음도 비우고 몸도 비우고
팔랑거리는 나뭇잎되어 그냥 바람에
한번 팔랑거려 봤으면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4D44494E9E55F424)
시월이면 산이 부르지 않아도
산으로 향하게 되는 발길들.
가벼운 발걸음으로 찾아 심호흡
크게 한 번 할 수 있는 가까운 산에서
높고 먼 산 올라 하늘을 이고 선
자신이 얼마나 대견한지
한번쯤 고개 끄덕이게 하는 곳까지
산은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먼저
열병을 앓는다.
그렇듯이 우리 임동 산우회도
계절이 계절인 만큼
이번 단풍산행은 속리산행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829333C4E9E57A22F)
법주사와 나무도 벼슬을 얻은 정이품
송으로 유명한 곳.
그런데 우리가 오를 산행 코스는
느릿느릿 휘~휘~ 오르자고 화북에서
문장대를 오르는 2시간 가량의 산행이라고 했다
.
하필 10월 둘째주로 우리 46회동기들
가을산행 코스도 속리산으로 잡혀 있어
셋째주에 떠나는 고향사람들과의 산행 중
어디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마음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5AD4494E9E55F40A)
고향 사람들도 좋고 친구들도 좋고,
누구를 얻고 누구를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안동 산행대장, 서울 산행대장이
휴대폰으로 입씨름
열댓번은 한 끝에야
우리 안동 산행대장 왈, 에라이~
서울늠들한테 졌다.
와우~일주일 연기해서 함께하자는
공지가 뜨고 우리는 한시름 놨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54A44494E9E55F629)
다같은 고향사람인데 뭐 어때~
많이 만나고 많이 웃으면 좋지~
장터의 누구고, 쇠전모태의 누구고
세월 흘러 얼굴은 알아보지 못해도
이름만 대면 다 알아볼 수 있는 임동 사람들
.
모두가 만나면 그립고 반가운 사람들이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산행날이 코앞인데
천둥소리 요란한 비가 내린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71CB4B4DECC3B737)
차겁게 느껴지는 빗방울에 젖은 잎들이
물도 들지 않았는데 우수수 떨어져내리고
이 비에 우리의 산행이 반감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도시락 싸는 줄 알고 부지런히 장 봐 놓고
만들 시간이 없이 아이들 수업을 마치고
오들오들 스며드는 찬바람에 젖은 채
늦은 시간에 돌아와
반찬 만들 일이 어설퍼 걱정하는데
![](https://t1.daumcdn.net/cfile/blog/1275BF4E4E9E649714)
은희가 친절하게 지하철 시간과
약간의 간식 싸가지고 늦지 않게 30분
앞당겨 오라며 문자가 왔다.
도시락 안 싸가지고 가도 된다고? 야호~
그래서 잠 안 올까봐 소주 반병 남은 거
혼자 마시고 족욕기에 발을
뜨뜻하게 해서 온몸의 피를 한 바퀴
돌린 다음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에고, 그래봤자 벌써 두 시가 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87B824E4E9E649708)
5시 알람과 함께 번쩍 눈이 떠졌는데
밖에 아직도 비가 온다.
우비와 우산을 챙겨들고 새벽같이 나서는 길.
비가 오는데도 산에 가기 위해
등산복 입고 가는 사람들이 이상했는데
내가 꼭 그렇다. 우산 쓰고 버스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자꾸 힐끗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산행이 시작되는 지하철역쯤에 다다르면
비가 오든 말든 형형색색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우루루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86CF44C4E9E72C426)
우리가 모일 잠실역도 마찬가질 테지.
늘 타던 2호선을 안 타고 9호선 급행열차를 탔는데
철현대장이 '날씨 좋슴다. 목동역 지나는데
'
어디? 하며 문자가 왔다
비 오는데 날씨가 좋긴 뭐가 좋냐! 하며 퉁을 주고
누가 더 빨리 도착하는지 보자고 했다.
결과는? 철현이 10분 빨랐다.
급행도 좋긴 하지만 갈아타고 또 갈아타는 게
더 시간 걸리는 것이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9EE484E9E731819)
그러게 뭐든 급하게 마음 먹으면 체하는 법이지.
은희는 신랑이 태워줬다며 1등 도착! 오늘은
우리 뽀병씨가 1등 신랑이다.
딱 7시 30분! 약속 시간 맞춰 잠실역에 도착해서
화장실을 들렸다 나오는데
옥희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류기헌 산우회장님이다.
회장님~ 아니 오빠!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팔장을 끼고 잠실역 너구상 앞으로 가니
웬 관광버스며 사람들이 그리 많은지
단풍철이 실감났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87D14504E9E68E40B)
향우회장님을 비롯하여 김용진 선배님이
언제나 옥희야~ 하며 반겨주시고
우리 동기 여덟 명을 비롯하여
선배님, 후배님들로 버스가 가득 찼다.
관악산에서 막걸리 한잔 따라주려는데
볼일이 급해서
은희랑 얼른 구석진 자리 가서
볼일 보고 느긋하게 돌아오니 그때까지도
그 잔을 들고 계셔서 어찌나 고맙고 죄송했던지
그 점잖은 인상 때문에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김희수 전 산우회장님과
![](https://t1.daumcdn.net/cfile/blog/115910484E9E68C322)
언제나 맛있는 반찬 싸와서 여기저기
나눠 주기 바쁘던 후남이언니,
호랑이 형을 도와 궂은 일 도맡아 하던
젊은 피를 가진 기중이가 빠져
조금 허전했지만 그래도 산이 좋아서가 아니라
고향분들 얼굴 보며 웃는 게 좋아서 올 사람은 다 왔다.
그런데 잠실이 떠나갈 듯 호령해야 할
우리 기룡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알고 보니 산행 신청 인원이 60여 명이어서
봉고차 한 대를 렌터했는데
그 차가 늦게 도착한데다 이것저것
먹을 거리를 싣고 오느라 늦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0CF14A4E9E682F06)
에고~ 우리 동상 얼마나 애가 탔을고.
하지만 버스의 인원은 두 세 자리가 비었다.
봉고차를 쓸모없게 만든 장본인들은 누구란 말인가?
분명 아침에 일어나니 비도 오겠다,
'에이 귀찮으니까 가지 말자.이렇게 생각한
누구누구는 기룡이한테 미안해야 할 거다.
그 차를 가는 도중 복정역 근처에다
세워놓고 가는 기룡이는
저 늦은 것만 미안해서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일만 잘하는 게 아니라 유머도 있고 예의도 있고
우리 동생 노래만 조금 잘하면 금상첨화일 텐데...
![](https://t1.daumcdn.net/cfile/blog/1803544B4E9E67EA0C)
우린 이런 친구가 있어 무슨 일이든
거저 이루어지게 되는 줄 알고
그 힘든 줄을 모른 채 내 편한 것만 생각하려 한다.
새벽같이 출발하느라 아침들도 못 먹었을 시장기를
떼우기 위해 우리 46회에서 준비한 백설기가 돌려지고
느헤미야 강창호 후배님이 보내준 과자와 사탕, 미꾸리?
시학이 동생이 했던 말인 것 같은데 캬라멜인가?
![](https://t1.daumcdn.net/cfile/blog/177FBF4A4E9E672C18)
은희가 밤새 봉지, 봉지 나눠싼 것들도
선배님의 애향심에 대한 고마운 마음까지
두툼하게 보태져 한 봉지씩 돌려졌다.
우리 알뜰살림꾼 은희~ 그렇게
딱딱 맞춰넣기도 힘들었을겨.
향우회장님은 우리 예쁜 지영이랑 동무해서
나란히 앉고
늘 오빠라고 불러주길 바라는 용진 오라버님은
처음으로 산행을 함께 한 같은 동기 유수번 선배님과
짝꿍이 되셔서 '나도 친구가 있다~. 이런 표정으로
얼굴에 보이지 않는 힘과 웃음이 가득하시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56544484E9E716033)
우리 친구 용번이의 형님이셔서 그런지
처음 뵙는데도 친근감이 간다.
용진선배님 사모님은 설악산으로 가고
그쪽으로 끌려갈 뻔 한 걸 이쪽이 좋아서
사모님께 용돈 5만원을 주고
귤 다섯 개를 얻어왔다는 말씀에 연세 들어도
금슬 좋게 사시는 모습이 아름답게 와 닿았다.
저 맨 뒷자석에는 시학이랑 병덕이랑 49회 동무들이
함박꽃 필현이는 어디다 떼놓고 왔는지
느긋하게 자리를 잡았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570D04C4E9E718C15)
짱구아빠, 병삼이, 상탁이, 내 친구 원희 동생이자
내년에 고향에서 총동창회 행사를 치룰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재경 50회 동기회장인 인희,
그리고 성렬이, 기룡이까지 끼어
술 마실려고? 아님 신나게 놀려고?
그것도 아님 부족한 잠을 잘려고?
원래 뒷자리는 그런 부류로
나눠진다는 걸 난 조금 알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727EC4A4E9E720905)
그 앞쪽으로 59회 꽃분이들 삼총사 두 영희와 주희,
그런데 병련이는 왜 빼놓고 왔을까?
공주님 오는데 왕자님 빠질 수 없어 명원이도 낑겨앉고
지난번 임동인잔치에서 가장 멋진 사진을 건져낸 두 스타
새들 우리 친구 박기원 동생 은경이와
순식간에 오빠 재성 선배님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아직도 슬픔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한
맛재 자야 동생이 또 한자리에 앉았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41ACC434E9E6C6B08)
앞에 앉아야 할 산우회장님은 젊음이 좋아서
중간쯤에 친구와앉고
향우회, 산우회 도맡은 일꾼 금옥 총무도 중간쯤에
언제나 웃는 모습이 사람 좋아 보이는
내 동생 권영대와 친구인 권영표와 앉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형제 아닌 형제~
그 앞의 45회 재수오빠와 막내 주희가 고종사촌이듯
한 다리 건너면 우리 고향 사람들은
다 형제고 피붙이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962F74C4E9E725533)
나는 나들이 사상 처음으로 내 단짝 은희랑 짝꿍이다.
하지만 왔다갔다 하느라 궁둥이 붙일 짬이 없는
자리는 빈자리나 마찬가지ㅜㅜ
가방만 덩그렇지만 친구니까 떡도 하나 더 주고
과자도 하나 더 줬다. (이건 비밀인데...)
시끌시끌하게 웃음소리 가득한 버스는
계속 앞만 보고 달리고,추수가 된 곳도 있고
아직 걷혀지지 않은 들판엔 누런 벼들이
제 몸을 지탱못해 쓰러진 곳도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51C904D4E9E73872E)
9부능선에서 조금 맛보기를 보이는 단풍들은
아직은 제 철이 아니라는 듯
푸르기는 하지만 벌써 그 힘을 잃은 빛이 역력하다.
비가 오다가 개다가 작은 땅덩어리어도 하늘은 넓어서
공간마다 햇빛과 구름이 치열하게
제 자리 찾기 위한 경쟁을 하는 듯 하다.
휴게소에 들려서 일들을 마치고 버스에 오니
아이구~ 자야, 은경이, 영희 주희 팔거둬부치고
칼질도 이제 후배들이 알아서 척척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0054D454E9E6CC52A)
갓 만들어낸 듯 뜨끈한 두부 척척 썰어서 상큼한 겉절이,
새큼달큼한 홍어무침,
아~으 군침이 절로 돈다.
이 맛있는 걸 누가 했어? 하고 기룡이한테 물으니
엄지손가락도 아니고 새끼손가락을 꼽는다.
치~ 내가 모를 줄 알고.ㅋㅋㅋ
어디가 됐든 맞춤 음식점 하나는 잘 알아둔 것 같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2438404E9E6CF117)
속리산에 도착하면 우리 손 큰 옥례가
저 무릎 아파가면서 산을 훑다시피 주워모은 도토리로
꿀밤묵을 쑤어서 한방티 가져온다고 했는데
두부로 배를 채우자니 도토리묵이 눈앞에 왔다갔다 하고
이 맛있는 두부 그만 먹자니 나도 모르게 손이 가고
먹는 것에 갈등 느끼기도 처음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6BBB4C4E9E740922)
집에서 이른 시간에 나오려면 귀찮고 번거롭기도 하지만
나서기만 하면 이런 호사가 주어진다.
안동 친구들은 어느덧 문경새재를 넘어서고 있다고 하고
우리도 조금 있으면 속리산이라고 했는데
네비게이션 없는 운전기사분이 길을 잘못들어서
우리가 가야 할 화북면쪽이 아니라 법주사쪽으로
길을 잘못들었는지
다시 돌려나가는 길은 산을 통째 넘어가는 말티고개,
![](https://t1.daumcdn.net/cfile/blog/197A744C4E9E73CB0D)
차가 한 바퀴 돌 때마다 꼬불꼬불~
잘 먹어서 즐거웠던 배들은 울렁울렁~
차를 세우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여리디 여린 영희는 비닐봉지를 든 채 달려나가고
다들 차에서 내려 막걸리로 채운 뜨거움을 찬바람 쐬면서
속을 달래며 멀리 천왕봉, 관음봉, 칠성봉, 시루봉, 투구봉,
문수봉, 비로봉을 두루고 있는
속리산의 정기를 한껏 받아들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0A5C474E9E746C04)
충북 보은군과 경북 상주에 걸쳐 있는 국립공원 속리산은
세조 임금과의 일화가 얽혀 있는 만큼
굳이 말 안 해도 명산임에는 틀림이 없다.
밑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울퉁불퉁 솟은 기암괴석들이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아 있고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식물과 동물과
새들과 곤충들이 살고 있을지
산이 품고 있는 것들은 거짓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산은 말이 없는가?
![](https://t1.daumcdn.net/cfile/blog/171D434A4E9E749E2E)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저만큼 화북매표소 입구에
먼저 온 안동 애들이 보인다.
옥례야~ 순희야~ 좋아서 달려가 얼싸안고 일일이
친구들과 악수한다.
청송에서 성번이, 진보에서 무은이랑 정분이,
예천에서 화영이, 그 먼 강구에서
아들이 태워다줬다며 석순이까지 무려 열 세 명이 왔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4FE34B4E9E87B824)
옥례랑 경란이는 묵을 써느라 정신 없고
우리는 먹느라 정신 없고
그 깊고 아린 우리 고유의 도토리묵맛에, 또
친구의 정성어린 손맛에
우리는 산행보다 더 즐거운 행복을 맛보았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8304E494E9E74D83E)
산도 주소가 있어서,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산 삼십번지의 주소를 가진
해발 1054미터의 속리산 문장대는
오늘 우리 임동인들이 떠들어대는
웃음소리로 귀가 약간 아플 거다.
단풍보다 더 고운 색깔의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산길을 따라 줄줄이 오르고 화북매표소내 매점에 걸린
도종환 시인의 산경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3103404E7B4C361E)
산경(山景) -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430843B4E9E86C425)
우리도 오늘 그렇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말이 없는 산을 여전히 시끌시끌한 웃음소리로 깨우며
언제 비 왔냐는 듯 말짱하게 산이 열어준 길을
따라가는 걸음들은 가볍기만 했다.
그런데 산의 안으로 들어갈수록 굽이굽이
이어지는 돌계단과 나무계단,
하늘을 쳐다보니 문장대는 아득히 높기만 하고
숨은 턱을 넘어 콧구멍까지 다 찾다고 헉헉댔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233A494E9E76E331)
분명 앞에 가신 것 같았는데 뒤에 계신 용진 선배님께
"보지도 못했는데요?" 한다는 게
"보지도 못 봤는데요?" 하고 말이 헛나와서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우리 말은 참 신기해서 그냥 들으면 될 것을
꼭 야리꾸리한 것을 상상하니까
별 거 아닌데도 웃음이 터진다.
그래서 더 야한 석순이의 Y담이 튀어나오고
우린 입에서 침이 질질 나오도록 또 웃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240AD394E9E85F72E)
그런데 나만 숨이 찬가? 돌아보니 다들 생생한데...
아, 내 심폐주머니가 걱정된다.
더 이상 못가! 소리가 목에 걸릴즈음
꿈 같은 휴식이 주어졌다.
우리 안동산행 대장이자 안동탁주 사장인 광호가 가져온
안동 막걸리잔이 돌려지면서
옥례표 도토리묵이 다시 펼쳐지고
앗! 영표 동생이 썰고 있는 게 뭔가 봤더니
강구에서 석순이가 가져온 문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0404C4B4E9E87B22D)
옆에서 침만 꼴깍대고 있었더니
영표가 썰다 말고 입에 넣어준다.
고맙고 맛있다. 골고루 입맛들은 다셨는지
귀한 것일수록 맛있는 건 당연하겠지.
아이~ 그런데 비가 쏟아진다. 벌써 발빠른 사람들은
1차로 올라갔는데
발 느린 우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일단 우비를 챙겨입고 그래도 가야지~ 하며
발걸음을 떼려는데
먼저 오르던 옥례와 화영이가 못 간다고 내려온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44DDA4B4E9E87B031)
비도 오고 미끄러운데 이런 날에
계단길을 오르다간 무릎이 다 나간다나~
그래서 에어로빅 20년에 연골 다 닳고 무릎이 시원찮은 난
다시 오르기를 주저하는데 우리 철현대장 왈~
회장님도 올라가고 안동 아~들도 다 올라갔는데
우리가 빠지면 되냐고 꼬드겨서 할 수 없이 또 올랐다.
여기서 쓰러져 죽더라도 그 유명한
문장대는 봐야 하지 않겠냐는 일념으로
그저 미끄러질까봐 밑에만 보며 계단 하나 하나
세듯이 하면서 올라가는데
![](https://t1.daumcdn.net/cfile/blog/143B38494E9E785A08)
세조 임금도 오르다가 한 번 쉬었을 법한 넓적한 바위에
향우회가 잘돼야 산우회가 잘되고,
산우회가 잘돼야 향우회도 잘되며
향우회카페가 잘돌아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고
찰떡 같은 인사말씀을 하셨던 류필휴향우회장님과
류기헌 산우회장님, 그리고 용진선배님이
자리를 잡고 금옥총무가 싸온 도시락을 들고 계셨다.
아, 여기가 한계이다. 지영이, 은희와 함께
철퍼덕 자리를 잡는데
철현대장이 또 꼬드긴다. 할 수 없이 일어서는데
"옥희야, 더 가지 말고 여기서 고만 쉬어라!"
하고 만류하는 용진선배님 말을 뒤로 하고
힘주어 따라나섰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44EEE4F4E9E7B001E)
조금 더 가니까 경란이가 못 간다고 내려온다.
마음 바뀐 우리 대장, 저 문장대까지 우릴
데리고 올라갈 일이 아득한지
그만 경란이따라 내려가란다.
흑흑~ 저 위에 경란이 물고기조림 맛나게 한
도시락이 기하 가방에 들어 있는데...
은희가 준비한 홍어도 동원이가 짊어졌는데...
![](https://t1.daumcdn.net/cfile/blog/1632F03B4E9E86C722)
은희와 나는 아쉽게도 낙오병이 되어
눈 앞에 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것봐~ 내가 뭐랬어. 준비 안된 니들이 어떻게 산을 알아.'
저들끼리 키득대는 소리를 엿들으며 에이,
여보란 듯 그 앞에서 사진만 자꾸 찍어댔다.
조심조심 올라오는 길 보다 내려가는 길은
비가 그치긴 했어도 더 미끄럽고
무릎에 힘이 더 가해졌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440163B4E9E86C302)
이렇게 힘든 산을 왜 와~ 하면서도
때가 되면 산에 오고 싶어진다.
산의 숨소리, 산의 보이지 않는 은덕을 느끼고 싶어서...
더 크게는 우리 고향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드디어 회장님 얼굴이 보이고 또
"것 봐 내가 뭐랬어, 가지 말고 여기서 맛있는
도시락이나 먹자고 했지."
하는 용진 선배님, 진짜로 진작 그럴걸요.
하면서 앉아쉬는데 막걸리 한잔 생각이 간절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55E82374E9E863512)
철현이 가방에 든 막걸리 한 병 빼올걸.
애꿎은 남근석을 배경으로 화풀이하듯 사진 찍고
지영이는 그 바위에 올라가서 아예 깔고 뭉개며 사진을 찍는다.
지영아, 남근석 올라탄 기분 어때?
어떻긴 좋지~
말 안 해도 지영이 얼굴이 흐흐흐다.
그런데 자야의 오빠 돌아가신 얘기를
들을 때는 숙연하기까지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3B9F484E9E8A721B)
사람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
공무원들의 죽은 사람 일처리에는 원칙이 우선이라서
유족들의 슬픔이나 인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배웠다.
그래서 건강할 때 건강도 미리미리 챙겨야 하고
혹여 나 없을 때의 세상도 대비해서 식구들에게
무언의 준비도 해둬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아 탈이다.
우리가 여기서 신선놀음 할 때
저 위에선 벌써 문장대에 올라
온 세상을 움켜잡은 듯 한바탕 호령하고 있을지도 모를 터,
![](https://t1.daumcdn.net/cfile/blog/151D09474E9E7D3B11)
하지만 먼저 내려간 옥례와 화영이,길란이, 정분이는
어떻게 해.먹을 것도 없이 비에 젖어서 떨고 있을 텐데...
그래서 부랴부랴 산을 내려갔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저 산 꼭대기 한 번 쳐다보고 또 돌아보고
늘 구름에 가려 있어서 운장대였다가
세조가 문신들을 데리고 올라 글을
읊었다고 해서문장대가아닌가?
50여 명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바위가 저 위에 있다는데
그곳에 앉아 나도 시 한 수 읊고 왔으면
아주 띵호와일 걸.
낙오자라는 생각에 자꾸 미련이 남는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573B4F4E9E7CA908)
(시학후배가 찍어온 문장대 정상 사진)
조그만 꼬맹이들도 엄마 아빠 손잡고 올라갔다 온 산을
엄살 떨며 주저앉기도 또 처음이다.
그렇게 내려가니 아니나 다를까.
참새떼들처럼 햇볕 드는 길가에
옥례랑 정분이랑 화영이랑 길란이가 쫄래기 앉아 있다.
저 높은 문장대에 올라간 사람들은 맛난 것들 먹으며
야~호를 외칠 텐데
쯧쯧 우린 뭐람. 옥례가 건네준 오리지날
감주 한잔을 달게 마시고
뒷풀이 식당이 예약되어 있는 송암가든으로 내려갔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3B464E4E9E7C5A14)
버스에 실려 있던 막걸리에 자야가 준비한 머리고기며
두부 안주해서 먹으니
뭐~ 이제 문장대 안 부럽다.
해가 문장대 머리에 걸릴즈음 나머지 일행들이 내려오고
속리산에서 채취한 버섯전골로 밥을 먹는다.
우리는 말이 없는데 나머지는 시끌시끌~
저마다 안고 온 문장대의 정취를 풀어놓자
산꼭대기가 식당까지 내려온 듯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10974C4E9E7C0D12)
안개 속에 가려져서 문장대의 경치를 보지 못하다가
30여분 뒤 거짓말처럼 안개 걷히고 해가 나서
다시 올라가 감상을 했다는 뉴스속보!
식당 안이 꽉차도록 모여앉은 사람들은 먹고 또 먹고
웃고 또 웃으며
속리산에서의 하루는 짧고 웃음은 길었다.
단체사진을 찍은 뒤 안동 친구들도 손 흔들며 떠나고
땅거미 내리는 속리산 문장대를 뒤로 한 채
우리를 태운 버스도 떠난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0A5C474E9E7BB51E)
배는 부르고 술도 올랐겠다 그냥 가면 서운하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짱구아빠가 나서서
오지 않은 해동오빠 대신 마이크를 잡고
노래 순서로 들어간다.
서울로 오는 내내 차가 들썩거릴 정도로 흔들어야 했던 끼들.
비단 나 뿐만 아니라 우리 고향 사람들은 자리만 깔아주면
하루종일 놀으래도 지치지 않고 놀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흥일 수도 있고 가슴 서늘한 한(恨)일 수도 있다.
그리움이 없으면 추억도 없고
고향이 물에 잠기지 않았다면 이리 절절하게
그립지도 않았을 테니까.
![](https://t1.daumcdn.net/cfile/blog/161020474E9E7B6926)
설악산에는 단풍객들이 육만 오천이나 들었다는데
내년에는 가을산행 만큼은 재구산우회나 재포산우회,
또 각 동기산행도 함께 모여 같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나름대로 해봤다.
하루를 웃음으로 채우기가 쉽지 않은 요즘
그래서 더 많이 우울해지고, 더 많이 그리워지고,
더 많이 허전해지는 계절을 넘기기도 쉽지가 않지만
오늘 속리산의 새로운 힘을 웃음과 배부름과
아름다움으로 충전했으니
그 만큼은 잘 살아낼 자신감으로
서로의 하루가 꽉 차게 빛났으면 좋겠다
(편집,김은희)
첫댓글 누냐의 구수하고 아름답고 거짓없는 기행문을 읽고 난 그저 말없이 잠시 멍하게 있었습니다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1![~](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감사하구요. 송년산행때 뵙겠습니다.
난 왜 해마다 10월 산행하고 인연이 안맞을까 올해는 꼭 갈것이라고 다짐했는데 .뜻대로 안되는것이
있나봅니다. 기중이 형이 산우회 회장이고 또 기중이형이 총무 기룡인데 .허허허허허 참@
잊지않고 동생 기중이를 생각해준 누냐
언젠가는 함께 할날있겠지~~
아직은 바뿐일도 많고 형들이 계시기에
조금 미루는것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