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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피노 Dr. J'라 불리는 Avelino "Samboy" Lim을 아십니까?
제가 필리핀의 농구영웅, 아벨리노 "쌈보이" 림이라는 선수를 처음 접한 것은 1984년 봄에 서울에서 벌어진 아시아 청소년 농구선수권이었습니다. 당시에 허재, 이민형, 한만성, 강인태, 김종석이 이끌었던 한국이 결승에서 송타오가 이끌던 중공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었죠. 그 대회에서 저의 이목을 끌었던 선수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부터 소개할 Avelino Lim Jr.입니다.
한국과의 결승리그 경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한국팀 벤치 바로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완벽한 코트사이드였죠. 필리핀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와 몸을 풀고 있을 때, 관중들로부터 감탄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필리핀 선수들을 본 순간 저는 잠시 경악을 했습니다. 키가 별로 크지도 않은 12명 전원이 화려한 덩크쇼를 벌인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그 보다도 그 12명 중 13번을 달고 뛰는 한 단신 선수의 점프력에 넋을 잃었던 것이지요.
그 선수는 얼핏 보기에도 180이나 될까 말까 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자유투라인 근처에서부터 덩크를 성공시키는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조금의 과장도 없이 제가 코트사이드에서 본 그대로를 진술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경기장에 있던 관중들과 한국 청소년 대표팀 선수들이 증인입니다. 제 앞에 서있던 지금은 고인이 된 한만성 선수가 다른 선수들에게 하던 말까지 기억이 납니다, "야 야, 쟤 봐. 13번. 저 XX 덩크를 자유투라인 부근에서부터 찍네?"
그 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유투 앞쪽 써클라인에서 한 손에 공을 잡고 높이 뜬 이 선수는 공중에서 360도 회전을 하고 또 다시 호쾌한 덩크를 찍었습니다. 잠실체육관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동작에서는 공을 오른손에 쥐고 떠오르더니 림 바로 앞에서 공을 왼손으로 옮기며 완벽한 덩크를 또 찍었습니다. 이제는 한국선수들도 이 필리핀 선수의 덩크쇼에 넋을 잃고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그가 필리핀의 농구영웅 아벨리노 림 2세였습니다.
아벨리노 림은 보통 "Samboy"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합니다. 마치 어빈 존슨이 애칭이었던 '매직' 으로 더 잘 알려져 있듯이 말이지요. 아벨리노 림은 수많은 별명과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선수입니다. "매직 존슨의 볼핸들링을 소유했던 필리피노", "6풋 줄리어스 어빙", "필리핀의 마이클 조던", "Dr. L", "Air Philippine", "The Skywalker", "The Dragon" 등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의 주특기는 1984년 한국전에서 워밍업 때도 보여줬던 바로 그 '공중에서 손 바꿔 덩크하기'였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 선수의 키는 181cm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벨리노 림은 1962년에 필리핀에서 태어났습니다. San Beda 고등학교에서 체계적인 농구를 시작한 아벨리노는 곧바로 자신의 소속학교를 전국우승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들어간 Letran 대학교. 농구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 무명대학 농구팀을 아벨리노는 82년부터 84년까지 필리핀 NCAA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는 농구명문대로 바꾸어 놓습니다. 바로 이 세번째 우승이 끝난 직후에 한국에서 열린 청소년 농구대회에 참가한 것이었죠. 아직 농구리그가 프로화 되기 전이었던 시절, 아벨리노는 Lhuillier라는 실업팀에 입단해 또 다시 팀을 우승시킵니다. 한국으로 치면 농구대잔치와 같은 리그였습니다.
1988년에 시작된 프로리그는 PBA (Philippine Basketball Association)라 불려 졌습니다. 농구가 국기인 나라에서, 미국계와 스페인계 혼혈들, 흑인용병들까지 득실대던 코트의 농구수준은 상당히 높았습니다. 많은 유럽 클럽팀들과도 대등한 경기를 펼쳤고, 실제로 맞먹을 수 있었던 것이 필리핀 프로리그의 수준이었습니다. 아벨리노는 San Miguel 팀에 드래프트 되었고, 그는 은퇴하기까지 오직 이 한 팀에서만 뛰며 필리핀 프로농구 역사상 유일한 프랜차이저의 영예를 누리게 됩니다.
1997년에 36세의 나이로 은퇴하기까지, 프로 커리어 10년 동안 그는 별의별 희한한 상까지 다 거머쥐며, 에이스로서 1989, 92, 93, 94년의 팀 우승에 큰 공헌을 합니다. 그의 농구 커리어에 단 하나의 오점이 있다면 리그 MVP의 운이 항상 비껴 갔다는 것입니다. 부상이나 여러가지 운대가 안 맞는 바람에 MVP 투표에서 항상 2~3위를 하며 결국엔 MVP에 관해서는 무관의 제왕으로 커리어를 마친 것이죠. 필리핀 농구의 최고스타가 MVP트로피가 없다.... 뭔가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1990년 올스타게임에서는 완전히 공중쇼로만 42점을 몰아넣고 올스타게임 MVP가 됐던 아벨리노는, 그 해 아시안게임에서 조국에 은메달을 안겨주는 기염을 토합니다. 비록 결승에서 중국의 관문을 넘지는 못 했지만, 준결승까지 팀의 전승을 이끌었고, 팀의 하이스코러이자 주장이었던 그는 1990년 아시안게임 농구 베스트 5에도 뽑히지요. 당시의 NBA 스카우터들, 특히 스퍼스의 존 썬볼드 씨와 불스의 칼 메이시 씨는 아벨리노가 NBA에서 충분히 먹힐 선수임을 강조하면서 데려가려 했으나, 당시 국보급 선수를 놓치기 싫었던 필리핀 정부가 그의 해외진출을 막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욕들만 없었다면, 우리는 90년대 초반 NBA에서 뛰고있는 허재와 아벨리노를 목격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영웅 줄리어스 어빙을 따라 컨버스 사와 광고계약을 맺었던 아벨리노
"쌈보이" 아벨리노 림의 경기는 화려했습니다.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영웅 줄리어스 어빙을 흉내내어 항상 무릎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을 신었으며, 컨버스 농구화만 신을 것을 고집했었지요. 키가 181 정도 밖에는 안 되지만, 어빙처럼 긴 윙스팬을 갖고 있었고 손도 상당히 컸습니다. 하체도 신장에 비해 길어서, 아벨리노는 주로 공을 한 손에 쥔 채 림쪽으로 돌격해 들어가며 덩크나 더블클럿치샷을 많이 성공시켰습니다. 공식 점프력은 105cm에 불과했지만, 점프 타이밍이 탁월했고, 신장을 제외한 나머지 신체조건들이 좋아서, 주로 림 위에서 노는 듯한 경기패턴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벨리노 림은 외곽슛도 정확했습니다. 조던의 초창기 시절처럼 점프를 높이 한 후에 점퍼를 던지는 스타일이었는데, 조던처럼 나이가 30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아주 부드럽고 유연한 점퍼를 장착했고, 3점슛 능력까지 있었던 선수였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의 필리핀 프로리그는 '아이솔레이션 플레이'가 허락이 되던 곳이었습니다. 아벨리노의 손에 공이 들어간 후, 그가 아이솔레이션을 시작하면 그 어느 수비수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최근에 구입해 본 경기영상에서도 보면 팀 공격의 30%는 아벨리노의 몫이었고, 그 중 대부분이 아이솔레이션에 의한 플레이들이었습니다. 현재의 마누 지노빌리처럼 페이크 동작과 지그재그 스텝에 이은 돌파나 패스, 점퍼가 자유자재였기에, 그를 마크해야했던 수비수들에게는 큰 골치덩어리였을 겁니다.
1990년 PBA 파이널 1차전에서 3초를 남기고 1점차로 뒤진 상태에서 자신이 스스로 작전을 지시한 후, 버저비터 결승샷까지 성공시키는 아벨리노 림...
지금 해설위원으로 활동하시는 김동광 씨는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비하인더백 드리블"과 "비트윈더렉 드리블"을 경기 중에 구사하신 분입니다. 아벨리노 림은 아시아가 아니라 세계에서 처음으로 "크로스오버 헤드 쇼울더 페이크" 동작을 경기 중에 구사했다는 평가를 듣습니다. 아벨리노의 공중쇼 덕분에 필리핀 프로리그 PBA는 항상 흑자였고, 매년 올스타 투표 때마다 득표수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은 아벨리노는 매 경기 출장을 할 때마다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와 기립박수를 받았던 필리핀 농구 사상 초유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잘 생긴 얼굴과 매력적인 콧수염, 엄청난 점프에서 터져 나오는 덩크와 창조적인 공중묘기, 화려한 드리블, 어느 팀이든지 우승을 시키고야 마는 카리스마, 필리핀 농구의 신화적인 인물... 이러한 것들 외에 아벨리노 림을 규명지을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는 ‘혼’을 실어 플레이하는 선수였습니다. 이를 잘 설명해줄 두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1985년 스페인에서는 세계 클럽대항 챔피언쉽이 열렸습니다. 세계 각국의 클럽 챔피언들이 자웅을 겨루는 이벤트 형식의 대회였는데, 아직 프로리그가 없었던 필리핀에서는 아벨리노를 중심으로 한 청소년 국가대표팀을 출전시켰습니다. 필리핀 팀은 평균신장이 187cm로 대회에 참가한 클럽들 중 가장 작은 팀이었습니다. 그 왜소한 필리핀 팀에서도 작은 축에 들던 아벨리노는 드레이전 페트로비치가 버티고 있던 이탈리아 리그 챔피언 Banco di Roma를 상대로 엄청난 활약을 합니다. 거의 혼자서 더블팀, 트리플팀을 뚫고 37점을 득점한 것이지요. 너무나도 강렬한 혈투와 같았던 이 경기에서 고군분투한 아벨리노는 경기가 끝나면서 과로로 인해 코트에 쓰러져 기절을 했고, 산소마스크를 쓴 채 그대로 응급실로 후송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병원을 몰래 빠져나와 팀의 훈련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원래 매일같이 점프를 하고 돌파를 하던 선수라 부상을 달고 살았던 것이 아벨리노였습니다. 한 프로경기에서는 이런 부상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지그재그 스탭을 밟으며 골밑으로 치고 들어가 덩크를 꽂는 순간, 상대팀의 국가대표 스윙맨 라스티모사의 수비로 인해 몸의 균형을 잃은 아벨리노가 그대로 코트바닥에 얼굴부터 떨어진 것이죠. 코트 바닥은 피바다가 되었고, 아벨리노는 앞머리가 찢어진 상태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 때 무릎과 어깨에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도합 26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을 받은 아벨리노가 병원에서 깨어나자마자 한 말은 지금도 필리핀 사람들 사이에 회자가 되고 있답니다. "우리 팀 졌어, 이겼어?"
얼마 전, 필리핀 농구협회가 뽑은 필리핀 농구 역대 최고 25인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아벨리노 림. 181cm의 키로 공중을 누볐던 그는 현재 자신이 프로 커리어 내내 함께 했던 클럽 San Miguel 구단의 GM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농구인생을 이끌어 준 인물로 줄리어스 어빙과 한국의 신동파 씨를 꼽습니다.
오늘 그의 다이내믹하고도 혼을 실은 플레이가 보고 싶습니다.
글: Doctor J
2005년 호주를 방문해 44세의 나이임에도 호주 프로농구선수들을 상대로 좋은 경기를 보여준 아벨리노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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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캬 멋져..
필리핀사람들이 탄력이 좋다는 말 많이 들엇었는데 작은키로 자유투라인 덩크 .. 괴물이군요
제가 한 눈에 반했을 정도였습니다. 필리핀 원주민들의 탄력이 좋은데, 아벨리노는 필리핀 원주민과 중국계 이민자 간의 혼혈입니다. 그래서 피부는 하얀 편이면서 필리핀 사람들 특유의 탄력을 갖고 있었죠.
저도 필리핀친구가 몇몇 있는데 전부다 림 그냥 잡더라구요.. 물론 모든 필리핀사람들이 그런건 아니겠지만요^^; 제 친구들 키는 170좀 넘어요.. 한명은 177정도고..
필리핀에 이런 신화적인 선수가 있다는걸 알게됐네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Doctor J님 글은 빼놓지않고 보고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마이클초단님도 농구를 보신지 꽤 오래되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제 글을 빼놓지 않고 읽고 계시다니... 감사도 되고 부담도 되는군요.^^
에구~~~~ 전 농구 접한 시기로보나, 지식으로보나 J님께는 명함도 못내밀어요^^;; 부담가지실 이유없으니 주옥같은글 계속 부탁드리겠습니다(__;)
신동파 선수는 도대체 얼마나 잘했던거죠? 어떤 선수였는지 아시는분은 좀 가르켜 주세요 ㅎ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ketball&ctg=news&mod=read&office_id=227&article_id=0000001363 에 한번 가셔서 기사를 읽어 보십시오. 40년이 흘렀지만, 신동파 씨는 지금도 필리핀에서 '농구 신'으로 추앙받고 계시고, 그의 농구를 보지 못 했던 세대들 사이에서도 그는 '영웅'으로 인정을 받고 계십니다. 60년대말이었으나 190cm가 넘는 장신슈터였으며, 아시아 선수권 결승에서 홈 팀인 필리핀을 상대로 50득점을 하신 분입니다. 필리핀에서 전설이 되신 거죠. 신 선수가 공을 잡으면, 필리핀 관중들이 한 목소리로 "신", 그리고 점퍼를 위해 솟구쳐 오르면 "동", 그리고 공이 골에 들어가면 "파"라고 외쳤습니다.
이 선수와 신동파 선수를 존경한다는 건가요 아니면 무슨 관계가 있는건가요? ㅎㅎ 신동파 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봤었는데 위에 글 보니까 대단하네요.. 아직도 필리핀에서 화자가 된다니..
신동파 씨는 필리핀이란 나라에서는 모든 국민들로부터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없는 60년대 신동파 씨의 경기영상이 필리핀 사람들 집에는 비디오나 DVD로 소장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정도로 농구를 하는 아이들에게는 막대한 정신적 영향을 끼치는 분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신동파 씨의 영웅담을 들으며 자라는 나라가 필리핀이니, 그런 관점에서 아벨리노도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한국의 NBA 팬들이 러셀이나 체임벌린 이야기, 기록들을 대하며 당시에 접해보지 못 했던 그들의 위대함을 존경하게 되듯이 말이죠.
역시 제이님 산증인이세요. 乃
플레이 스타일이 김효범과 비슷하군요.
상당히 비슷했습니다. 김효범보다는 지그재그 스탭과 수비수들의 타이밍을 빼앗는 기술 등을 이용한 돌파력이 더 좋았고, 몸도 더 유연했습니다. 그리고 큰 경기일수록 더 잘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신동파님... 대단하시죠... 전 어려서 실제 라이브로는 못 봤지만 친구집에서 예전 자료를 보고 느꼈습니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 완전 슈팅머신이라고...
제이님 도대체 언제 부터 농구를 보신건지?? 엔비에이 글도 j님꺼 엄청읽었는데 식견이 대단하신듯..ㅋㅋ
한국 대학 실업농구는 1974년부터, NCAA와 NBA는 AFKN을 통해 1976년부터 봤습니다. 그리고 제가 중학생일 때, 옆집에 미군 장교 출신의 한 농구광이 사셨습니다. 그 분 집에 6~70년대의 농구경기 비디오 테이프들이 많아서 그 경기들을 함께 보며 그 분으로부터 6~70년대를 주름잡던 농구선수들과 팀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뿐입니다.^^
라는것은 중학생시절부터 영어회화가 가능하셨다는거군요... 부럽네요...
닥터 제이님이 언급하셨던 1984년 아시아 청소년 대회의 한국팀 멤버들을 보고, 어릴적(그당시 초등학생이었습니다) 허재의 플레이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제가 기억하는 대회는 한만성과 이민형이 허재와 함께 스타덤에 오른 대회였는데, 유럽팀들도 나왔던 기억이 나요.. 분명 청소년 대회였구요.. 혹시 그 대회가 어떤 대회였는지 기억하시는지요? 그나저나 그당시에 필리핀 농구가 강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괴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네요.. 단지 흑인 용병빨로 강한 줄 알았는데.. 암튼 닥터 제이님의 글은 언제나 주옥과 같네요.. 감사합니다^^
필리핀 농구가 흑인 귀화용병 빨로 우승을 한 것은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잠깐 동안이었습니다. FIBA에서 그것을 문제삼은 뒤로는 그러질 못 했지요. 아벨리노가 주축이었던 86년, 90년, 94년 아시안 게임을 보면 순수 필리핀 선수들로만 대표팀이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유럽팀들도 나왔던 대회는 저 대회를 앞두고 벌어졌던 이벤트 형식의 작은 소규모 국제대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확한 대회명은 기억이 안 나는데, 저도 본 기억이 있습니다. 허재가 자유투라인 부근에서 장신 수비수 둘을 제치며 팔을 360도 휘저어 스쿱샷을 날렸던 것이 또렷이 기억납니다.
대단하시네요........농구의 구석구석까지 알고계시는군요........농구3년 본 저로서는 명함도 못내밀......후~~~
doctor J님 이야기 보따리 많이 많이 풀어주시길 바랄께요.^^
Doctor J님의 주옥같은 이야기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많이 많이 좋은 글 올려주세요~^^
아벨리노와 허재의 퓨전에 신동파의 슛팅력이면 엔비에이도 가능했을듯 ~
필리핀 농구 스타일을 어릴때부터 꽤나 좋아했었죠. 이제는 희미하지만 'Samboy'는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