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 내가 교단에서 이십여 년을 보내면서 특별한 휴가는 본가와 처가의 부모상을 입었을 때 네 번이었다. 이것도 정한 일수를 다 찾아 누리지 않았고 하루 이틀 먼저 출근해 근무했다. 오래전 아버님을 선산에 묻고 내려온 어느 봄날 며칠 동안 눈을 청결히 하지 않아 두 눈시울에 아주 큰 다래끼가 나서 벌겋게 부어 아이들 앞에 서기가 몹시 난감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입은 세 번의 상사에는 피로가 누적 되어도 잠시 잠깐 얼굴은 신경을 써서 씻었든 기억이 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객지에서 젊은 날 총각으로 지낼 때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해 나의 몸은 몹시 야위었다. 그 시절 내 몸무게가 오십칠팔 킬로그램 나갔으니 정말 장작개비처럼 바싹 마른 몸이었다. 눈도 움푹 들어가고 광대뼈도 툭 튀어나와 보였던 것이다. 겨울방학 맞아 고향을 찾았을 때 중학교 삼학년 시절 담임의 막내 여동생과 맞선을 본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삼 년이 흐른 뒤 나이 서른에 접어 들 무렵 그 사람과 인연을 맺어 두 아이를 보고 오늘까지 한 지붕아래서 살고 있다.
당시 내가 맡아 가르쳤던 초등학생들을 졸업시켜 보낸 뒤 결혼식을 올리고 봄방학 틈새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도둑장가 간 것도 아니었는데 왜 하필이면 남들은 편히 쉬려는 그런 때를 택했는지 참 순진하기도 했었나 보다. 삼랑진의 단칸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려 큰 녀석 출산을 앞둔 때였다. 아내가 다니던 마산 산부인과까지 이동이 염려 되어 삼랑진의 개인택시를 예약해 두었다. 초저녁부터 조금씩 산통이 오기에 밤을 넘길 수 없어 늦은 시각 마산으로 긴급 후송했다.
깊은 밤 아내가 다녔던 산부인과에 닿아 입원 수속을 마쳤다. 그 때 먼저 결혼하고 자녀를 둔 어느 선배가 떠올랐다. 평소 무덤덤한 그 선배는 첫아이를 보고나니 인생관이 바뀌고 좀 더 심하게는 우주관까지 달라지더라고 하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날 심야에 병원 인근 포장마차에서 마산의 사립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던 대학시절 친구를 불러내어 전교조 이전의 교육민주화운동을 안주로 쓴 소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에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타고 삼랑진의 학교로 출근했다.
당시에 나는 출산하는 남편에게 주는 하루 동안의 특별휴가가 있는 줄도 몰랐다. 아니 알았다손 쳐도 나는 그 휴가를 찾아 먹을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연분만을 원하기에 산통이 오고 있어도 언제쯤 분만시각이 될지는 모른다기에 나는 간호사에게 잘 부탁한다는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병원을 박차고 나가 학교로 달려갔다. 당시 살아 계신 본가의 어머님이나 처가의 장모님께선 병중에 계시진 않았지만 연세가 고령이어서 아내의 출산에 특별한 조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내는 일주일 전 검진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임신중독증이 분만을 앞두고 갑자기 심했나 보다. 이미 삼랑진에서 마산의 병원으로 급히 옮겨질 때에도 신발을 신지 못할 정도로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런 증세가 심각한 줄도 모르고 그 산부인과에서는 자연분만을 준비하다 산모의 혈압이 높아지자 덜컹 겁이 났을 것이다. 간호사와 의사는 산모의 진통과 함께 혈압은 급격히 치솟자 대학병원 급의 종합병원으로 긴급 후송을 해야 하는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단다. 그렇다고 보호자가 곁에 없기에 제왕절개의 동의를 받을 처지도 아니었든가 보다.
마침 첫아이가 태어난 날이 토요일이었다. 오전 수업을 끝내고 아이들을 보낸 후 학교에서 마산의 산부인과로 전화를 넣어 보았다. 간호사가 전화를 받더니만 다짜고짜 나를 몹시 원망하면서 나무라기만 했다. 직업이 뭐냐기에 ‘교사’라고 했더니 이런 무책임한 사람이 어디 있냐는 투였다. 산모만 병원에 내버려두고 사라진 무정한 남편이 세상에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 새벽에서 오전 사이 의사와 간호사는 산모의 높아진 혈압 수치로 분만사고의 악몽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종합병원 후송도 제왕절개도 산모 곁에 보호자가 없기에 어떤 조치도 할 수 없더라는 것이었다.
큰 녀석을 출산한 그 병원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병원장을 승계할 정도로 명망이 있던 산부인과로 안다. 그런데 나와 같은 한심한 철부지 남편이 들어 자기네 병원의 권위를 추락시키지는 않을까 몹시 걱정했을 것이다. 진료카드에 적힌 주소지 삼랑진 단칸방으로 전화를 넣어도 받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요즘처럼 휴대폰도 없었기에 마땅히 다른 비상연락이 오갈 수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토요일 일과를 끝내 놓고 느긋하게 병원으로 전화를 하니 아주 다급한 고비 끝에 출산했다고 전했다.
나중에 간호사한테 들은 얘기로 그렇게 힘들게 출산하면서 혼절한 산모의 첫소리가 “왜, 아기가 울지 않아요.”라고 하기에 간호사가 아기 엉덩이에 살짝 손바닥을 치자 비로소 ‘으앙’하고 울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곁에서 지켜보지 않았지만 아내의 진한 모성애에 코끝 시큰한 감동을 받았다. 나는 분만 시에 곁에 아내 곁에 있어주지 않은 벌을 단단히 섰다. 아내는 출산 시 과다출혈로 인한 빈혈과 높아진 혈압 수치가 내려가지 않아 일주일 넘게 그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얼굴이 부석부석하고 화장기 없는 아내의 얼굴이지만 그렇게 천사처럼 보인 적이 없었다. 팔불출을 무릅쓰고 이제야 털어 놓습니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깊은 정을 사모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동안 표현 못하신 사랑 많이 표현하시고 더 많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더 잘하는 남편 , 아빠가 되시겠지요.....가족의 행운을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