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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집 제2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대사헌(大司憲) 한공(韓公)의 신도비명
우리 명종대왕(明宗大王)께서 재위하신 지 22년이 되면서 군자와 소인의 실정을 더욱 잘 알게 되어 오직 공론(公論)만을 채택하시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명을 내리시기를, “아, 지난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두세 명의 원흉(元兇)이 있을 당시, 내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고 불안하게 여겼었다.
그런데 그때에 외척들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을 방조한 나머지, 그들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마침내는 선량한 인사들까지 피해를 보게 만들었다. 대체로 자기들에게 아부하지 않거나 예전부터 원수처럼 미워했던 인사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아니면 가차없이 조정에서 쫓아냈으므로, 이미 죽어서 지하에 있는 이나 아직 생존해 있는 이나 모두들 지금까지 원한이 계속 쌓이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이를 비통하게 여기고 있으니, 그대 의정부(議政府)의 신하들은 억울함을 씻어 줄 수 있는 길을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이미 죽은 이로서 복관(復官)된 이가 약간 명 되었고, 생존해 있으면서 복관이 되어 다시 서용(敍用)된 이가 약간 명 되었는데, 모두가 당세(當世)의 홍유(鴻儒)요 석사(碩士)로서 성망(聲望)을 드날리던 이들이었다. 이때에 한공(韓公) 휘(諱) 숙(淑)도 가선대부(嘉善大夫) 대사헌(大司憲)으로 복관되었으니, 이는 공이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되는 때였다.
그 뒤 10년이 지난 오늘날 만력(萬曆) 을해년(1575, 선조8)에 이르러, 한공의 손자인 상사생(上舍生) 항(恒)이 공의 아우인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호(濩)가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공의 묘도(墓道)에 새길 비문을 써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사양을 하자, 그가 말하기를, “저는 선생의 문장이야말로 우리 할아버지를 불후(不朽)하게 해 주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께서도 지위가 높은 대관(大官)에게 글을 부탁하여 중하게 되시려고는 분명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저의 백부님과 아버님의 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삼가 살피건대, 한씨(韓氏)는 당진현(唐津縣)에서 나와 우리나라의 명문거족이 되었다. 휘 공서(公瑞)라는 분이 고려(高麗) 때에 등제(登第)하여 이름을 날렸는데, 높이 현달해야 할 분이 일찍 죽고 말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뒤에 자손들이 음덕을 받아 훌륭하게 될 것이라고들 하였다.
그러나 공의 고조와 증조와 조부와 부친 때까지는 모두 그다지 떨치지를 못하였다. 고조인 휘 경(慶)은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이었고, 증조인 휘 척(陟)은 제용감 부정(濟用監副正)이었고, 조부인 휘 윤우(允祐)는 계공랑(啓功郞)이었고, 부친인 휘 근(瑾)은 세자익위사 좌세마(世子翊衛司左洗馬)였는데, 공이 귀하게 됨에 따라 계공에게는 호조 참의(戶曹參議)가 추증되고 세마에게는 병조 참판(兵曹參判)이 추증되었다.
참판은 고성 이씨(固城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은 좌의정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휘 원(原)의 증손녀요 사온서 영(司醞署令)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된 휘 평(泙)의 딸로서, 홍치(弘治) 갑인년(1494, 성종 25)에 공을 낳았다.
공의 자(字)는 자순(子純)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점점 자라면서 성취한 바가 있게 되었으므로, 과거에 응시하는 것 역시 그저 여유작작하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정덕(正德) 계유년(1513, 중종 8)에 사마시(司馬試)를 통과하고 나서 가정(嘉靖) 을유년(1525, 중종 2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뒤 권지 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에 보임되고 나서 천거를 통해 내한(內翰)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고 봉교(奉敎)에 이르렀다. 제조(諸曹)의 이력을 보면, 예조에서는 좌랑(佐郞), 병조에서는 좌랑과 정랑(正郞), 형조와 공조에서는 정랑을 거쳤다. 제시(諸寺)의 이력을 보면,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 사복시(司僕寺)와 장악원(掌樂院)의 정(正)을 거쳤다.
외직(外職)으로는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간 적이 있었고, 봉상시에 있을 때에 질정관(質正官)으로 사신을 따라 경사(京師)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인묘(仁廟)께서 동궁(東宮)으로 있을 적에 벌써 학문의 조예가 깊었으므로 당시 시강원(侍講院)의 관원을 선임(選任)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공은 사서(司書)에서부터 보덕(輔德)까지의 관직을 모두 차례로 역임하였고, 필선(弼善)이 된 것만도 네 차례나 되었다.
대간(臺諫)에 있을 적에는 더욱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일찍이 헌납(獻納)과 지평(持平)을 두 차례 지내고 장령(掌令)을 네 차례나 지낸 뒤 사간(司諫)을 한 번, 집의(執義)를 또 두 번 역임하였다. 장령의 직책을 마지막으로 수행하고 있을 적에는 대사헌인 양연(梁淵) 등과 함께 ‘정유년에 권세를 휘두르던 사람이 나라의 일을 그르쳤으니 법대로 처치해야 한다’는 뜻으로 논핵(論劾)하여, 은상(恩賞)을 받고 한 등급 위의 품계(品階)로 뛰어오르면서 집의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의정부에서 공을 낭료(郞僚)로 추천한 결과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이 되기도 하였으니, 이는 누가 보아도 엄선된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또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는 영광을 입게 되었다. 공은 이전에도 선발 대상에 뽑혔다가 번번이 권력자의 음모로 인해 그 길이 막히곤 하였는데, 이 때문에 물의(物議)가 억울하게도 늦게야 들어오게 되었다고 공을 위해 탄식을 하였지만, 공은 또한 이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옥당(玉堂)에 들어와서 부응교(副應敎)와 응교(應敎)와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조사(詔使)가 왔을 적에는 문례관(問禮官)으로 참여하여 주선(周旋)을 잘 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일단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오른 뒤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며, 전직(轉職)한 끝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는데, 그저 문서만 출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유익하게 헌체(獻替)하며 군왕을 보좌하였다. 유지(有旨)에 의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랐으며,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때에 물의가 공을 외직(外職)으로 내보내는 것을 어렵게 여겨 조정에 붙잡아 두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임무를 교대하고 돌아와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공조(工曹)와 호조(戶曹)의 참판을 역임하고 나서 대사헌의 제수를 받았으니, 이것이 계묘년의 일이었다. 다시 유지에 의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뛰어오르면서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너무 빨리 승진시킨다는 언관(言官)의 논핵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갑진년(1544, 중종 39)에 동지중추부사로 사신의 명을 받고 동지사(冬至使)로 경사(京師)에 다녀왔다. 을사년 7월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있다가 다시 사신의 명을 받고 경사에 가서 인묘(仁廟)의 부음(訃音)을 전하고 시호(諡號) 및 왕위 계승에 대한 일을 청하였다. 그러던 중에 9월에 이르러 옥사(獄事)가 일어나면서, 공이 사신의 일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관작(官爵)이 삭탈되고 말았다.
병오년(1546, 명종 1) 8월에 옥사(獄事)가 더욱 치밀하게 얽혀들어, 공이 이산군(理山郡)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두려워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대부인(大夫人 모친)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는 이외에는 근심 어린 말을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경신년(1560, 명종15) 10월에 병으로 죽으니, 향년 67세였다. 이에 수레에 관곽(棺槨)을 싣고 돌아와, 양주(楊州) 해유재[蟹踰岾] 아래 선영(先塋)의 옆에 장사를 지내었으니, 이때가 그 이듬해 3월 갑신일이었다. 공은 사람됨이 온화하고 소탈한 데다가 아량이 있었으며, 자질구레한 예법 따위는 굳이 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구차하게 이야기하고 웃으려 하지를 않았으며,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크나큰 절조(節操)를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다.
공의 부친인 참판공(參判公)은 가묘(家廟)에서 일을 행할 때 한결같이 주 문공(朱文公 주희(朱熹))의 《가례(家禮)》를 준행(遵行)하였으며, 삼년상을 당했을 적에도 여묘(廬墓)를 떠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었다. 그런데 공의 행실을 살펴보아도 더더욱 효성이 독실하기만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그 가문의 전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은 조정에 몸담고 있던 중년(中年)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유배지에서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이 모두를 경례(經禮 정상적인 예법)와 변례(變禮 비상 사태에 임기응변하는 예법)에 따라 온당하게 조처하였다. 공은 동기(同氣 형제자매)를 대할 때 은의(恩意)를 극진히 하였으며, 대공(大功)ㆍ소공(小功)ㆍ시마(緦麻)의 복(服)에 해당되는 친척에 대해서도 몰인정하게 강쇄(降殺)한 적이 없었다.
공에게는 두 명의 아우가 있었으니, 바로 밑은 판교(判校)이고, 사인(舍人)인 주(澍)는 막내이다. 이 형제 세 사람도 모두 서생(書生)의 옷을 벗고서, 그동안 때를 만나지 못했던 선조의 뒤를 이어 아름다운 벼슬길에 올랐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히 공의 경우는 어사대(御史臺 사헌부)의 어른이 되기까지 하였고 보면, 현달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쯤 되었고 보면 사람들이 하던 말이 여기에서 징험되었다고도 할 만하다.
그러나 공은 적소(謫所)에서 복관(復官)되지 못한 채 죽었고, 사인공은 본래 사인의 신분으로 귀양을 갔다가 복관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으며, 판교공은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로 있다가 쫓겨난 뒤 다시 복관되어 옮겨져서 판교에 이르렀으나 금년에 역시 죽었다.
그러고 보면 이들 모두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기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지는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늘이 진정 이런 식으로 공의 가문에 보답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는 화복(禍福)이라는 것은 원래 하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유독 그런 말을 지어내어 붙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 공의 후손들에게서 징험이 나타날 때까지 아직도 기다려야 할 것인가.
공의 배필인 정부인(貞夫人) 채씨(蔡氏)는 관향이 인천부(仁川府)이다. 증조의 휘는 명양(明陽)으로 경기 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였고, 조부의 휘는 징(澄)으로 태천 군수(泰川郡守)였으며, 부친의 휘는 유손(裕孫)으로 수의부위(修義副尉)이다.
부인은 말이 없이 조용한 가운데 온화한 기품을 지니고서, 빈부(貧富) 때문에 마음이 동요된 적이 없었으며, 제수(祭需)를 삼가 마련하고 일가친척들과 화목한 분위기를 유지하였으니, 이는 천성적으로 지극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공을 내조하고 자부(子婦)를 가르치면서 모두가 아름답게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였는데, 나이 76세 되던 융경(隆慶) 임신년(1572, 선조 5) 3월에 죽어 5월 임인일에 부장(祔葬)되었다.
자식으로는 아들 둘과 딸 넷을 두었다. 장남 한열(韓說)은 함경도 관찰사 남궁숙(南宮淑)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차남 한의(韓誼)는 충의위(忠義衛) 신악(申渥)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들 모두 공이 당한 일 때문에 과거에 응시해서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급히 서두르지 않았다.
장녀는 전임 별좌(別坐) 권대성(權大成)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유학(幼學) 윤건원(尹建元)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내시 교관(內侍敎官) 안사흠(安士欽)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충의위(忠義衛) 이은(李垠)에게 출가하였다. 한열은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름이 한율(韓慄)인데 아직 장가들지 않았다.
장녀는 홍적(洪迪)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박요현(朴姚賢)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남이인(南以仁)에게 출가하였다. 한의는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바로 한항(韓恒)으로 충의위 신사(愼思)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유덕신(柳德新)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권대성과 이은의 처(妻)는 자식 없이 일찍 죽었다. 윤건원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이름이 윤익(尹翼)이고, 딸은 안세걸(安世傑)에게 출가하였다. 안사흠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안윤제(安允濟)와 안광제(安匡濟)와 안강제(安康濟)이고, 장녀는 신박(申樸)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홍적은 지금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이고, 유덕신은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이며, 나머지는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이에 내가 삼가 공의 공적(公的)인 일 가운데 큰 것만을 추려서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
군자가 닦는 것을 / 君子之修
소인은 원수로 삼나니 / 小人所仇
정유년에 행한 그 일 / 前乎丁酉
을사년에 앙갚음 당했도다 / 乙巳而後
더 이상 길이 막혀 드날리지 못한 채 / 薄遏其揚
황막한 변방에 끝내 유배당했나니 / 卒纍于荒
우리 공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던가 / 繄公曷故
모서리 깎아 둥글둥글 만들지 못했기 때문일세 / 唯不刓厥方
직질(職秩)은 육경(六卿)의 바로 아래 참판이요 / 亞卿之秩
벼슬은 사헌부의 어른 직책이었나니 / 司憲之官
관작 삭탈당했어도 영광으로 알았거늘 / 削也爲榮
더구나 지금 이미 복관이 됐음에랴 / 矧今旣還
공이야 마땅히 후세에 전해질 분 / 維公可傳
어찌 비명(碑銘)이 필요가 있으랴만 / 何待於碑
그래도 나의 글 새기는 것은 / 刻我文者
오로지 자손의 생각 때문이러라 / 子孫之思
[주해]
[주01] 헌체(獻替) : 헌가체부(獻可替否)의 준말로, 군왕의 입장에서 행해야 할 것은 진헌(進獻)하고, 행해서는 안 될 것은 폐기토록 하는
것을 말한다.
[주02] 정유년에 …… 그 일 : 한숙(韓淑)이 사헌부 장령으로 있던 정유년에 대사헌 양연(梁淵)과 함께 중종(中宗)의 밀지(密旨)를 받고
김안로(金安老), 채무택(蔡無擇), 허항(許沆) 등을 탄핵하여 처형시킨 일을 말한다.
[주03] 모서리 …… 때문일세 : 올곧은 절조를 바꿔 세상의 풍조에 따라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초사(楚辭)》 구장(九章) 회사(懷沙)에
“모서리 깎아 둥글둥글 돌아가는 세상이여, 나는야 떳떳한 법도 바꾸지를 않았어라.[刓方以爲圓兮 常度未替]”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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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大司憲韓公神道碑銘
我明宗大王在位之二十二年。益知君子小人之情。惟公論是用。乃若曰。咨。往在乙巳二三元兇時。予幼沖國疑。助外戚忌克。以構大獄。遂施于善類。凡其不依阿及故所讐疾。匪殺則逐無遺力。迄有積憾于幽明。予用隱焉。爾議政府。其議疏雪之。當是時。歿得復官者若干人。存得復以用者若干人。皆世鴻儒碩士。聲望譁然。維韓公諱淑。實復嘉善大夫大司憲。蓋卒七年矣。又後十年。卽今萬曆乙亥也。韓公之孫上舍生恒。以公弟承文院判校濩所爲狀。來乞文於岦。以刻石公之墓道。而辭不可。曰。恒知子之文足以不朽吾大父也。恒之大父。非必借重於大官者。且恒受吾世父吾父命也。岦謹按。韓出唐津縣。爲國右族。有諱公瑞。及麗朝登第有名。宜達而夭。人謂其必有後。而公之高曾祖考皆未振。諱慶。尙瑞院判官。諱陟。濟用監副正。諱允祐。啓功郞。諱瑾。世子左洗馬。公貴。贈啓功戶曹參議。洗馬兵曹參判。參判室固城李氏。左議政銕城府院君諱原之曾孫。司醞署令贈都承旨諱泙之女。以弘治甲寅生公。公字子純。幼志於學。長克有成。以應科目。綽如也。正德癸酉。司馬。嘉靖乙酉。及第。補權知承文正字。用薦入內翰。爲檢閱。至奉敎。於諸曹。禮爲佐郞。兵爲佐郞,正郞。刑若工爲正郞。於諸寺。爲判官奉常。爲僉正宗簿。爲正司僕及掌樂院。於外爲江原道都事。其爲奉常。以質正官從使京師。仁廟在東宮。學已深造。侍講之官。時難其選。公自司書至輔德皆更。而爲弼善者四。在臺諫尤號擧其職。嘗再爲獻納,持平。四爲掌令。以至爲司諫,執義亦一再。而其末爲掌令也。同都憲梁淵等。論丁酉用事人誤國。寘之法。用得賞一資。進執義。相府薦公郞僚。爲檢詳,舍人。甚選也。迺後。又錄弘文館選。公前此膺選。輒爲用事人陰沮。物議遲之。而公亦不知。入館爲副應敎,應敎,直提學。詔使之至。充問禮官。以善周旋稱。旣陞通政階。拜同副承旨。轉至都承旨。獻替有裨益。不專出納而巳。有旨陞嘉善。拜兵曹參判。尋使觀察江原。時議重公一出。欲留之。不果。代還。同知中樞府。歷工,戶二曹參判。至拜憲長。則歲癸卯也。復有旨超資憲。拜工曹判書。爲言官論驟陞而寢。甲辰。以同樞奉使。賀冬至京師。乙巳七月。以漢城府右尹。又奉使告仁廟訃。請諡及承襲。九月。獄起。公未竣事。已被削奪官爵。丙午八月。獄益密。謫公于理山郡。公於是不色駭以懼。而憂戀大夫人外。居無戚戚之言。庚申十月。以病卒。年六十七。輿櫬而歸。葬于楊州蟹踰岾下先塋之側。用明年三月甲申也。公爲人和易有量。不飾邊幅。然其接物。言笑不苟。至大節。有不可奪者。公考參判公。家廟行事。一遵朱文公禮。喪三年。不離廬墓。以著於聞。而公之爲行。尤篤於孝。蓋家法也。其在朝中年。丁外艱。曁哭大夫人于謫。則於禮之經變。盡以宜。待同氣。極其恩意。至功,緦之親。無甚殺焉。公有二弟。仲則判校。而舍人澍。其季也。三人皆釋褐。登美仕於祖先不偶之餘。公又至長御史。不可謂不達。而驗人言者矣。而公在謫未復以卒。舍人公本以舍人出謫。復未幾卒。判校公以院正字黜。復遷至判校。今年亦卒。皆不得有終以大有爲於時也。天固以是施於公家耶。無乃人所謂福禍者。天無與焉。而獨扶樹其名耶。抑猶復有待於後者乎。公配貞夫人蔡氏。籍仁川府。曾祖諱明陽。京畿水軍節度使。祖諱澄。泰川郡守。考諱裕孫。修義副尉。夫人沈靜溫懿。不以貧富爲憂樂。而謹祭饋。睦宗姻者。出於至性。以相夫子。以訓子婦。咸厥令美。年七十六。隆慶壬申三月卒。五月壬寅。祔葬有子男二人。女四人。男曰說。娶咸鏡道觀察使南宮淑女。次曰誼。娶忠義衛申渥女。皆以公故。不急應擧求仕。女長適前別坐權大成。次適幼學尹建元。次適內侍敎官安士欽。次適忠義衛李垠。說生一男三女。男曰慄。未娶。女長適洪迪。次適朴姚賢。次適南以仁。誼生一男三女。男卽恒。娶忠義衛愼思女。女長適柳德新。餘幼。權大成李垠妻。無子早死。尹建元生一男一女。男曰翼。女適安世傑。安士欽生三男二女。男曰允濟,匡濟,康濟。女長適申樸。次幼。洪迪。今爲弘文正字。柳德新。典艦司別提。餘未官。岦謹摭公事之大者以爲銘。銘曰。
君子之修。小人所仇。前乎丁酉。乙巳而後。薄遏其揚。卒纍于荒。繄公曷故。唯不刓厥方。亞卿之秩。司憲之官。削也爲榮。矧今旣還。維公可傳。何待於碑。刻我文者。子孫之思。<끝>
簡易文集卷之二 / 神道碑 銘幷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