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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 5. 17. 19:43
통정대부 승정원 우부승지 조공의 묘갈명(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趙公墓碣銘) 서문 병기
공의 휘는 석목(錫穆)이고, 자는 원중(遠仲)이다, 조씨(趙氏)는 풍양(豐壤)에서 나왔다. 고려시대 시중(侍中) 맹실(孟實)이 그 비조(鼻祖)이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숭(崇)이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서정(瑞廷)이 사인(舍人), 윤영(允寧)이 부사(府使)를 지냈고, 정(靖)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니 도학과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이분이 바로 검간(黔澗) 선생으로 공의 6세조이다.
고조 능(稜)은 생원으로 유림에서 명망이 높았고, 증조 대륜(大胤)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조고 해(瀣)는 통덕랑을 지냈으니, 모두 덕행으로 세상에 일컬어졌다. 통덕랑 해(瀣)는 5남을 두었는데, 중자(仲子) 선경(善經)은 밀양(密陽) 박성임(朴聖任)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숙자(叔子) 이경(履經)은 통덕랑을 지낸 인천(仁川) 이기인(李基仁)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은 둘째 선경의 아들인데 셋째 이경의 아들로 계후하였다.
공은 영조 병오년(1726, 영조 2)에 태어났는데, 눈망울이 맑고 무소뿔 모양의 혹이 정수리에 있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8세 때, 처음 학업을 시작했는데, 매일 아침 과제(課題)를 받으면 반드시 동학보다 먼저 하였다.
17세에 박씨의 상을 당해서는 애절한 호곡소리가 예제(禮制)를 넘었기에, 형들이 기운이 허약한 것을 염려하여 고기를 먹도록 권하였으나 울면서 듣지 않았다. 19세에 처음 명경과를 공부하였는데 스스로 부지런히 읽고 사색하여 어른들의 독려를 기다리지 않았다.
임신년(1752, 영조 28) 이씨의 상을 당해서는 예를 행함에 어긋남이 없었다. 병자년(1756, 영조 32)에 과거에 올랐는데, 당시 한 집안에서 형제가 나란히 급제하자 사람들이 영광을 흠모하였다. 공은 소년 등과가 불행이라26)는 것을 경계하여 더욱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조급하게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무인년(1758, 영조 34)에 승문원(承文院)에 선임되었고, 기묘년(1759)에는 실직으로 한권(翰圈 27)에 천거되었고, 신사년(1761, 영조 37) 8월에는 주서(注書)에 제수되었으나, 부의(副擬28)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서장(書狀)을 진달하였다.
9월에 또 주서에 제수되어 처음 경연자리에 나아가니 임금께서 ‘정긴(精緊)한 사람이다.’라고 일컬었다. 1월에 세손이 천연두에 걸렸을 때 입직한 노고로 전적(典籍)에 올랐고, 임오년(1762, 영조 38)에 형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후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정언(正言) 아홉번, 이조좌랑 다섯번, 지평(持平) 한번, 장령(掌令) 한번, 헌납(獻納) 열여덟번, 집의(執義) 네번, 사간(司諫) 다섯번이었다.
중간에 황산(黃山)의 찰방(察訪)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사복시 정과 군자시 정을 맡았고, 특별히 내린 교지(敎旨)에 의해 승지(承旨)에 제수된 것이 세 번이다. 공은 조정에 나아간 이후로 보궐(補闕29)의 직임을 다할 것을 마음먹었다.
대관(臺官)이 되어 우레의 이변을 힘써 진달할 때는 실질에 힘쓰는 것으로 스스로를 수양하는 방책으로 삼고, 간언을 듣는 것으로 성심(聖心)을 증진하는 도로 삼기를 권하였다. 큰 근본과 가장 절실하고 긴요한 점을 진달할 때면 정심(正心)․ 성의(誠意30)로 근본을 바르게 하여 다스리고 세자를 가르치는 도로 삼으며, 현량(賢良)한 사람을 등용하여 선택하는 것을 올바른 정치를 정립하고 백성을 기르는 요체로 삼을 것을 말하였다.
정조가 등극한 초기에, 가장 먼저 역적을 징토할 것을 청하였고, 다음으로는 성인(聖人)의 학문을 밝히고, 언로를 열고, 명분을 바르게 하고, 재용을 절약하고, 어진 관리를 발탁하고, 오래된 환곡을 완화하고, 경계를 바로잡고, 아울러 과거의 폐단과 인재를 천거하는 등의 무릇 수백 마디의 말을 언급하였다.
또 상소를 하여 대관들의 유약한 실상 및 문묘를 배알할 때에 선비를 뽑은 것이 아직 너무 이르다는 실책을 논하였다. 흉년을 당했을 때 백성을 구휼하는 방법으로는 덕을 닦고 근검절약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임을 진달하였다.
그리고 경상우시(慶尙右試)에서 도사(都事)가 탐오하고 불공한 것과 경상좌시(慶尙左試)에서 입장할 때 많은 선비들이 죽음에 이른 것을 논하였고, 또 과시(科試)에서의 허위(虛僞)의 폐단을 진달하였다. 또 인하여 사직소를 올리면서 지나는 길에 목격한 흉년의 참상을 진달하고 대동법(大同法31)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문효세자(文孝世子32)의 상을 당해서는 명을 받들어 만사(輓詞)를 지어 올렸다. 상소를 하여 역의(逆醫)를 징치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어진 이와 사악한 이를 구별하여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치도록 극간하였다.
시무책(時務策)에서는 ‘원자(元子)를 보필하는 방책으로 서학(西學)을 물리치고 정학(正學)을 밝혀야 하고, 굶주림과 환란에 빠진 백성을 진휼하고, 규장각(奎章閣)에 과시(課試)를 행하고, 수령 중에 치적이 있는 자는 청현직(淸顯職3)에 발탁하고, 도사(都事)는 의당 옛 규범을 회복하여 백성들의 어려운 고충을 순방하는 등의 직임을 잊지 말고 마음을 다해야 함’을 진달하였다.
이에 모두 가납하는 비답을 받았으니, 말씀하기를 ‘특별히 깊이 체념(體念)하겠노라. 응당 맹렬하게 반성하여 스스로 힘쓰겠노라.’라고 하였다. 우관(郵官34)을 맡았을 때는 직무를 게을리하지 않고, 녹봉을 내어 묵은 폐단을 혁파하였으며, 대순을 걷어서 죽제(竹堤)를 보완하는 데 공급하여 이로써 수해의 재난을 종식시켰으니, 우민(郵民)들이 이에 힘입게 되어 비석을 세워 은혜를 기리기도 했다.
임자년(1792, 정조 16) 6월에 통정대부에 올랐고 동부승지에 제수되어 인하여 사은숙배의 명이 있었다. 공은 임금의 부름을 여러 차례 어기는 것이 분수에 편안하지 않아 7월에 애써 나가 사은숙배하고 우부승지를 맡았다가 동부승지로 옮겼다.
경연에 나아가니 임금께서 말씀하기를 “과거에 급제한지 30년이 되었는데도,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얼굴을 모르니,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진실로 개탄스럽도다!”라고 하고, 인하여 영남 지역의 흉년에 대해 물었다.
공이 실상대로 아뢰고, 인하여 “진휼청을 설치하여 구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조로 바꾸어 제수하여 조금 한가로이 지내도록 하였으니, 이는 연로한 이를 예우한 특별한 은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소원한 바를 다 이루었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이 일을 끝으로 체직을 원하였다. 공을 위해 더 머물러 있으라고 만류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서둘러 돌아가지 마시오. 응당 좋은 고을의 목사(牧師)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니, 공이 더욱 놀라고 부끄러워하며 그날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다시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계축년(1793, 정조 17)우연히 걸린 감기로 생을 마쳤는데, 이날이 바로 3월 21일로 향년 68세였다. 고을 북쪽 금곡현(金谷峴) 남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근후하고 온화하며 말씀은 과묵하였고, 순실(純實)하여 마치 어린아이처럼 거짓됨이 없었고, 편안하고 고요하여 마치 처녀같이 꾸밈없이 본성을 지켰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것을 애통해하며 제부諸父들을 대신 섬기며 정성과 사랑을 다하였고 여러 형을 섬기기를 아버지처럼 하였다.
종족(宗族)과 향당에서의 처신은 화목과 공손함을 지극히 하였고, 남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충후하였다. 임금을 섬김에 우국애군은 한결같은 정성에서 나와서 일에 따라 규범을 올렸고,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품달하여 기어이 임금을 감동시키고자 하였다.
여러 정사(政事)의 실상을 조치함에 있어서는 그 가르치는 뜻의 귀결처는 격물·치지·성의·정심을 치도(治道)의 근본으로 삼으며, 부세(賦稅)를 완화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돌아보는 것을 시대를 구원하는 급선무로 삼는 데 지나지 않았다.
단아한 뜻으로 물러나 겸손하며 영리(榮利)에 담박하였다. 관적(官籍)에 오른 30년 동안 조정에 있은 지는 겨우 수십일 뿐이었고, 경연에 오른 것도 몇 차례뿐이었다. 마음을 잡고 논지를 지킨 것과 출처 거취는 오직 의리에 비추었을 뿐으로 일찍이 권세에 굴복하여 아부하려 하지 않았고 시종토록 깨끗하여 한 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았다. 진실(縉紳)들의 공의가 일치하여 ‘완명인(完名人 : 이름을 온전히 한 사람)’이라 일컬었다.
평생 청렴하고 근면하였으며, 일찍이 재물을 늘리는 것을 자손을 위한 산업으로 삼지 않았고, 의롭지 않는 것은 털끝 하나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우관(郵官)의 봉록을 덜어 종갓집을 보수하였고,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갈 때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집에 거처할 때는 조용히 지내면서 일을 만들지 않았고, 손수 주자(朱子)의 봉사(封事35)와 퇴계 선생의 서소(書疏)를 베껴 쓰고, 밤낮으로 읽고 외웠다.
우리나라 명현들의 사적을 찾아 모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항상 보았으며, 정원에는 매화․ 치자‧ 연꽃‧ 국화를 심어 그윽한 지취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정사(精舍) 두 글자를 벽에 써 놓고 이를 자호로 삼았으니, 이는 대개 성인의 가르침 중에 가장 정밀하고 긴요한 말에서 취하여 감동하여 외우고자 하는 뜻을 붙인 것이다.
공은 두번 장가를 들었는데, 초배위(初配位)는 옥산장씨(玉山張氏)로, 통덕랑(通德郞) 대의(大誼)의 딸이며, 문강공(文康公) 현광(顯光)의 5세손이다. 후배위(後配位)는 평산윤씨(平山尹氏)로, 통덕랑 여흠(汝欽)의 딸이며,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다.
4남 2녀를 두었는데, 이동유(李東維)에게 시집간 딸은 장씨소생이고, 아들 명수(命洙)․ 간수(侃洙)․ 경수(景洙)․ 양수(養洙)와 신헌조(申獻朝)에게 시집간 딸은 윤씨소생이다. 명수의 아들은 술명(述明), 간수의 아들은 술전(述銓), 경수의 아들은 술준(述峻), 양수의 아들은 술구(述榘)이다. 이동유의 아들은 아무개이고, 신헌명의 아들은 아무개이다.
공의 자손들이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자 문중의 젊은이 남룡(南龍)으로 하여금 구당공(舊堂公) 조목수(趙沐洙)가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면서 “이 노인은 말을 넘치게 하는 분이 아니니, 그대가 그 점을 살펴 가장 적절하게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보잘것없이 늙은 나를 돌아보건대 어찌 이 부탁을 감당할 수 있으리오.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구당공의 말을 공경히 참고하여 그 전말을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명리의 길 사람을 유인하여 / 名塗誘人。
모든 수레들 함께 달려가니 / 萬轂同趨。
그 누가 고삐를 잡고 / 誰撰其轡。
규칙대로 달리리오 / 範以馳驅。
아름답도다! 정옹이여 / 媺哉精翁。
일찍이 가정의 가르침을 배우고 / 早淑家謨。
규방의 여인처럼 몸을 지키고 / 閨女持身。
갓난아이처럼 거짓이 없었네 / 赤子無僞。
효도하는 마음 옮겨 임금 섬기니 / 移孝事君。
충정과 사랑 간절하고 지극했네 / 忠愛懇至。
열 가지 조목의 봉서(封書)는 / 十條囊封。
임금을 돕는 뜻이 절실하여 / 志切尊庇。
선왕께서 가상타 하시고 / 先王曰嘉。
너의 말을 내가 체념하리라 하셨네 / 汝言予體。
누가 길들여 순응하게 하리오 / 誰其馴之。
출렁이는 물결 위의 갈매기를 / 鷗波浩瀰。
서안 위에는 고서가 있고 / 案有古書。
뜰에는 국화를 모종했네 / 庭有蒔菊。
부귀영화 다 물리치고 / 屛貴遺榮。
너울너울 포의로 돌아왔네 / 婆娑初服。
대개 간직한 뜻은/ 葢其所存。
고요하게 지내며 욕심을 버리는 것 / 恬靜寡欲。
이로서 진퇴하며 / 是以去就。
오직 의로움만 벗 삼았네 / 惟義與鄰。
처음부터 끝까지 헤아려 봐도 / 循考始終。
티끌 없이 희고 깨끗하니 / 皭然無塵。
완명인이라 일컬어지고 / 葆歸完名。
천 년의 제향에 족하시리라 / 自足千禩。
여기 이 빗돌에 새겨 / 刻此貞珉。
후세 군자들을 독려하노라 / 以勵君子。
25) 포의(布衣) : 베로 만든 옷으로, 벼슬이 없는 선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26) 소년 등과가 불행이라 : 삼불행(三不幸) 즉 세 가지의 불행한 일이란 뜻이다. 세 가지란 어린 나이에 대과(大科)에 오르는 일, 부형(父
兄)의 세력으로 좋은 벼슬을 얻는 일, 재능이 빼어나서 문장에 능한 일을 말한다.
27) 한권(翰圈) : 예문관 검열을 뽑는 절차인 한림권점(翰林圈點)의 준말로, 권점은 관원을 임명할 때 추천하는 방식의 하나인 후보자
의 성명 아래에 치던 동그라미를 말한다.
28) 부의(副擬) : 관직의 후보에 두 번째로 천거되는 것으로, 부망(副望)이라고도 한다. 전조(銓曹)에서 관원의 후보로 삼망(三望)을 갖추
어 올려서 임금의 낙점을 받는데, 첫 번째를 수망(首望), 두 번째를 부망, 세 번째를 말망(末望)이라고 한다.
29) 보궐(補闕) : 임금의 잘못이나 부족한 점을 간하여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30) 정심(正心)․성의(誠意) : 치자(治者)가 갖추어야 할 덕목인 대학의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 중의 하나로, 삼강령은 명명
덕(明明德)․친민(新民)․지어지선(止於至善)이고, 팔조목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이다.
31) 대동법(大同法) : 조선 중엽에 현물로 바치던 공물(貢物)을 미곡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던 세법을 말한다.
32)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 : 정조의 첫 아들이다. 의빈(宜嬪) 성씨(成氏)의 소생으로 태어나 정조 8년(1784)에 왕세자로 책
봉되었으나 정조 10년 5월에 병사하였다.
33) 청현직(淸顯職) : 청환(淸宦)과 현직(顯職)의 준말로,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이 하던 규장각(奎章閣)․홍문관(弘文館)․선전관청(宣
傳官廳) 등의 중요한 직임을 말한다.
34) 우관(郵官) : 옛날에 역원(驛院)을 관장한 찰방(察訪) 및 역승(驛丞)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35) 주자(朱子)의 봉사(封事) :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효종(孝宗) 15년에 임금에게 글을 올려, 첫째 태자를 바르게 인도하고, 둘째 대신
(大臣)의 적임자를 선택하며, 셋째 강유(綱維)를 일으키고, 넷째 풍속을 변화시키며, 다섯째 백성의 힘을 기르고, 여섯째 군정(軍政)
을 바르게 하며, 끝으로 임금이 마음이 바르면 천하의 일이 모두 바르게 된다는 내용의 주청을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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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趙公墓碣銘 幷序
公諱錫穆字遠仲。趙氏出豐壤。高麗侍中孟實。其鼻祖也。入本朝。有諱崇商議中樞院事。諱瑞廷舍人。諱允寧府使。諱靖文科郡守。贈吏曹參判。以道學文章稱於世。卽黔澗先生。於公間六世。高祖諱稜生員。有儒林重望。曾祖諱大胤通德郞。祖諱瀣通德郞。俱以德行稱。通德有五子。仲諱善經娶密陽朴聖任女。叔諱履經娶通德郞仁川李基仁女。公以仲之子。而后於叔。a321_344c生英廟丙午。眉眼瀅澈。犀骨貫頂。見者異之。八歲始受學。每朝受課。必先同學。十七遭朴氏喪。哀號逾禮。諸兄慮氣弱。勸之肉。泣不聽。十九始治經業。孜孜思讀。不待長者程督。壬申居李氏憂。式禮罔愆。丙子登第。時同堂聯璧。人慕榮耀。公則以少年高科。有不幸之戒。愈兢惕。無躁進意。戊寅選補槐院。己卯入實薦翰圈。辛巳八月。除注書。書陳副擬難進狀。九月又除注書。初入筵席。上稱精緊人。十一月。用世孫痘候入直勞。陞典籍。壬午除刑曹佐郞。自是歷踐諸司。爲正言者九。吏曹佐郞者五。持平一。掌令。一獻納十八。執義四。司諫五。間出爲黃山察訪。又入爲司僕軍資寺正。特旨除承旨者三。公自立朝。以補闕盡職爲心。其爲臺官。因䨓異陳勉。則以懋實爲自修之方。聽諫爲益聖之道。陳大根本最切要。則勸上正心誠意。爲端本出治。敎導儲貳之道。任賢擇良。爲立政養民之要。當正廟初服。首請懲討。次言明聖學,開言路,正名分,節財用,擇良吏,緩舊糴,正經界。並及科弊貢士凡數十百言。又疏論臺臣巽軟之狀。及謁聖時取士尙早之失。陳凶歉救恤之方。以修德節儉爲要道。仍論慶尙右試都事貪汚不公。左試入場時多士致斃。及陳試虛僞之弊。又因辭疏。陳歷路所見荒歉之慘。請施大同之惠。文孝世子之喪。承命製進輓詞。疏請逆醫懲討。因極言辨別賢邪。進君子退小人之意。陳時務則以輔養元子。斥西學明正學。賑飢恤患。奎章閣課試。守令有治效者。擢授淸顯。都事宜復古規。任以灾傷詢訪等事眷眷焉。皆賜批嘉納。有云另用體念。有云當猛省自勉。其爲郵官。不以職慢。捐俸金以革積弊。撤笋供護竹堤。以息水患。郵民賴之。立石以記惠。壬子六月。陞通政。除同副承旨。因有肅謝之命。公以屢違恩召。於分未安。七月。黽勉趨肅。進右副。轉移同副。登筵。上曰。登科三十年。君臣不相知面。豈有是事。誠慨然矣。因問嶺外歉事。公從實奏對。因言不可無設賑濟竆之事。上換授吏房。使就小閒。優老數也。公曰志願畢矣。遂因事圖遞。有爲之留行者曰。母遽歸。當得好州牧。公益驚媿。卽日南還。自是無復當世之念。癸丑偶感疾終。實三月二十一日。享年六十八。葬州北金谷峴子午之阡。公謹重溫淡。言語寡默。純實無僞如赤子。安靜守拙如處女。痛早孤。替事諸父。盡誠愛。事諸兄如父。處宗族鄕黨。極其雍睦悌遜。待人接物。一於忠厚。其事君。憂愛出於悃愊。因事獻規。有懷必達。期有以感動宸聽。措諸政事之實。而其指意要歸。不過以格致誠正。爲出治之本源。緩稅恤隱。爲救時之急務也。雅志謙退。泊於榮利。通籍三紀。在朝僅數十日。而登筵數次而已。其秉心持論。出處去就。惟義是視。未嘗欲屈而勢懾。始終皦如。不受點汚。縉紳公議。翕然稱完名人也。平生廉謹。未嘗營殖貨財。爲子孫産業。非其義也。一毫不自近。割郵俸以葺宗第。歸槖無餘貯。家居簡靜無作爲。手書朱子封事及退溪書疏。日夕講誦。搜輯我東名賢事蹟。常目案上。庭植梅梔蓮菊。以助幽致。書精舍二字于壁。因以自號。葢取聖敎中精緊之語。以寓感誦之意也。公凡再娶。初配玉山張氏。通德郞大誼女。文康公顯光五世孫。後配平山尹氏。通德郞汝欽女。皆封淑夫人。有四子二女。女李東維張氏出。子命洙,侃洙,景洙,養洙。女申獻朝尹氏出。命洙男述明。侃洙男述銓。景洙男述峻。養洙男述榘。李東維男某某。申獻朝男某某。公之諸孫。爲墓道將有石。令門少南龍持舊堂公所撰行狀。示興洛曰。此老非溢於言者。子其按而最之。顧晩生寡陋。何以堪是寄。旣屢辭不獲命。則敬述舊翁之言。敍其始終。而系以銘曰。
名塗誘人。萬轂同趨。誰撰其轡。範以馳驅。媺哉精翁。早淑家謨。閨女持身。赤子無僞。移孝事君。忠愛懇至。十條囊封。
志切尊庇。先王曰嘉。汝言予體。誰其馴之。鷗波浩瀰。案有古書。庭有蒔菊。屛貴遺榮。婆娑初服。葢其所存。恬靜寡欲。
是以去就。惟義與鄰。循考始終。皭然無塵。葆歸完名。自足千禩。刻此貞珉。以勵君子。<끝>
출처 : 서산집(西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