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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분식 - 도시락 검사]
‘미곡소비 절약하여, 혼분식 실천하자’.
‘너와 나의 혼식으로, 국력증강 찾아온다’.
쌀이 남아도는 요즘 이런 구호를 외쳤다가는 농민들에게 몰매맞기 십상이다. 그러나 60~70년대 학교를 다녔던 세대들에게는 고단했던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낯익은 구호다. 국민의 75%가 농사를 지었지만 보릿고개 넘기기가 힘들었던 시절, 쌀 대신 값싼 보리와 밀 소비를 권장하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혼분식 장려운동’의 표어들이다.
[70년대 시골장터와 읍면소재지에서는 혼분식을 장려하는 관공서의 가두방송차량을 쉽게 볼 수 있었다.(왼쪽) 1973년 4개부서 장관명의로 발표된 혼분식 장려 담화문.(아래)]
혼분식 장려운동은 단순한 권장 차원을 넘어 국민적 의무 사항이었다.
1964년 1월 농수산부는 모든 음식점에 대해 25% 이상의 보리쌀이나 면류를 혼합해 팔고,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이틀간 오전 11시~ 오후 5시 사이에는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이를 어기면 처벌했다. 1975년 8월 서울시는 혼분식 위반업소 1천3백36개소를 적발, 8개소는 허가취소, 691개소는 1개월 영업정지, 637개소는 고발조치했다.
당시 정부가 혼분식 장려운동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가는 73년3월16일자로 내무부장관(현 행정자치부장관) 등 장관 4명이 30%이상 잡곡과 혼식을 당부한 담화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학교에서의 혼분식 장려는 한층 엄격했다. 전국의 초중고교에서는 점심시간마다 도시락 검사를 놓고 선생님과 학생간에 숨바꼭질이 벌어졌다.
정부가 지시한 30%이상의 혼식을 지키지 않은 학생은 화장실 청소에다 반성문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비도덕적인 학생으로 낙인찍히기 일쑤였다.
전천수(45·마산시 회성동)씨는 “원래 위도 약하고 보리밥이 입에 맞지않아점심시간 직전이면 친구들의 보리밥알을 얻어 쌀밥위에 붙이는가 하면 아예 도시락을 안싸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나중에 숨어서 밥을 먹기도 했다”며 “하지만 선생님도 점검방법을 수시검사, 등교검사로 매일 바꾸는 바람에 자주 들켜 경을 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또 정부는 쌀밥보다 혼식이나 분식이 낫다는 점을 알리는 실험결과를 널리 공표하기도 했다. 문교부(현 교육인적자원부)가 75년도에 펴낸 초등학교 ‘실과’ 교사용 지도서에는 ‘흰쌀 편식은 체질의 산성화를 초래하고 끈기와 침착성이 떨어지며 대뇌 변질증을 일으켜 판단력이 흐려지고 지능이 저하될 우려가 높다’는 무시무시한(?) 내용까지 실렸다. 정부의 이같은 어긋난 영양비교는 후일 과학이 정부시책에 악용됐다는 비판을 불렀다.
성인들의 사정도 별반 나을게 없었다.
수요일과 토요일을 무미일(無米日), 즉 쌀밥이 없는 날로 정해 그날은 쌀밥먹기를 포기해야 했고 공무원들은 쌀밥 먹는게 죄악시될 정도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공직자 골프금지’와 비슷한 형태라지만 먹는 것까지 눈치를 봐야했던 시절이었다.
공무원 이동항(54)씨는 “공직에 들어간지 얼마안돼 시골 부모님께서 친구분들과 함께 올라오셨는데 마침 토요일이라 자장면을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며 “매일 꽁보리밥을 드시는 어른들께 고기에다 쌀밥을 대접해야 했지만 공무원 신분이라 식당주인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다”며 가슴아픈 추억을 떠올렸다.
소주와 막걸리 원료도 쌀이 아닌 밀가루로 만들도록 했으니 주당들의 불만도 높았다. 대신 1963년 국내 첫 생산돼 판로를 못찾던 ‘라면’은 혼분식운동을 타고 급속도로 보급됐다.
정부는 혼분식 장려운동과 함께 다수확 벼 품종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마침내 ‘기적의 볍씨’ IR667로 불리던 통일벼를 개발해냈다. 전국의 논이란 논에는 반강제적으로 통일벼가 심어졌고 마침내 77년 쌀 자급을 이루었다. 그해는 또 쌀막걸리가 다시 등장했고 수출 1백억달러를 돌파한 해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혼분식 운동도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졌다.
요즘은 쌀소비 촉진을 위해 관과 군이 분식식단을 없애고 쌀한포대 더사기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이젠 ‘쌀밥 많이먹어 나라사랑 농민사랑’이라는 표어가 등장해야 할 것 같다.
[학교종]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동요다. 몽당연필로 침을 묻혀 누런 공책에 꾹꾹 눌러 글을 쓰며 공부했던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학교 종소리.
이제 학교종은 역사가 오래된 학교에 간혹 기념물로 걸려있는 골동품일 뿐이다. 학교 종소리도 동요가사에나 남아 있을까 실제로는 듣기 어렵다.
산골, 섬마을에도 전기가 보급돼 학교들이 방송시설을 갖춰 수업의 ‘시작’과 ‘마침’을 음악소리로 알리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학교종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따라서 젊은 세대들은 학교종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을 하는 데 썼는지 잘 알지 못한다.
지난 70년대까지만 해도 두메산골의 학교에서는 수업시간 시작과 끝날 때를 종을 쳐 알려주었다. 시계도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매일 정해진 때에 울리는 종소리는 어림짐작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구실도 했다. 교무실 유리창문 밖 가까운 곳에 매달려 있는 종이 전체 학생들의 움직임을 지휘하는 도구였던 셈이다.
‘땡땡땡 땡땡땡’‘땡 땡땡 땡 땡땡’종 치는 방식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정해 놓았고, 학교 나름대로 조금씩 달랐다.
월요일 아침 교장선생님이 훈시하기 위해 전체 학생 모임을 알릴 때, 수업시간 시작과 종료, 당번학생이나 교사들의 모임을 전할 때, 그때마다 다 다르게 종을 쳤지만 되도록 기억하기 쉽도록 간결하게 쳤다.
종소리는 학교 안에서 학생,교사들끼리 무언의 약속이었다. 학생들은 종소리를 들으면 무엇을 알리는 소린지 곧바로 알아채고 상황에 맞게 부리나케 움직였다.
아침 조회나 수업시간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는데도 노는 데 빠져 종소리를 듣지 못했다가 혼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수업시간이 끝날 무렵 소변이 마려울 때,점심시간에 앞서 뱃속에서 계속 쪼르륵 소리가 나는 4교시 끝날 무렵, 그때 들리는 종료 종소리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학교종을 치는 사람은 꼭 정해져 있지 않았다. 기능직 직원이나 교무실에 남아 있는 교사, 교감, 누구든 종을 칠 시간이되면 교무실에서 창문을 열고 종에 달린 줄을 당겼다.
헐렁한 고무신을 신고 허리나 어깨에 책 보따리를 메고 학교를 다녔던 세대들에게 학교 종소리는 학창시절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동심에 젖게하는 추억의 소리다.
울산 옥동초등학교 성판술(成判述·60) 교장은 “학교에서 종을 치던 시절 되도록이면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좋은 종을 구하려고 무척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학교 주변에서 온갖 소음이 들려와 학습 분위기가 어수선할 때가 많은 요즘, 조용하고 아늑한 시골 교정에 맑고 은은하게 울려 퍼지던 학교종소리. 땡땡땡, 그 소리가 그립다.
[엿장수]
“싸구려 허허허 굵은 엿이란다 / 정말 싸다 방울엿 맛좋고 색좋고 빛깔 좋고 / 사월남풍에 꾀꼬리빛 같고 / 동지섣달 설한풍에 / 백설같이 흰엿…엿이오, 엿…엿사시오.”
먹거리가 귀했던 60~70년대 동네 입구에서부터 엿가위를 찰칵거리며 엿 사라고 소리지르는 엿장수가 들어서면 아이들은 소란스럽다.
[사진설명-공연장이나 인파가 북적이는 도심에서 가끔 어릿광대 복장을 한 엿장수를 만나 볼 수있을뿐 70 7~8 일에 한번씩 어김없이 들르던 시골마을의 엿장수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엿을 조금이라도 맛보기 위해서는 엿장수가 받아줄 만한 고물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뒤안이나 광을 뒤져 찾은 놋쇠나 고철, 깨진 양은냄비, 빈병, 플라스틱 조각으로 바꾼 한뼘쯤의 엿가락을 들고 행여 힘센 동네 형들에게 빼앗길세라 줄행랑부터 친다. 죽이 맞는 친구나 동생에게는 콩알만큼 떼주며 선심을 쓰던 기억이 새롭다.
빈병이나 고철 휴지 등의 고물조차 귀한 시절, 시골 아이들이 엿 바꿔먹기가 가장 손쉬운 것은 곡식이었다. 곡식은 몇 웅큼 퍼내도 표시가 덜해 어머니의 눈썰미를 속이기 쉬웠기 때문. 하지만 어머니에게 들켜 꾸중듣는 일도 이력이 날 정도였다. 엿을 살만한 물건이 마땅치 않으면 남의 집 함석조각을 떼내거나 장작을 가져와 엿장수를 조르기도 했다.
단맛을 내는 것이 엿이나 꿀에 한정되어 있던 시절 엿은 남녀노소, 빈부 구별없이 입맛을 돋아주던 전통 음식이었다.
한입에 넣고 오물거리면 세상에 이보다 달콤한 것은 없었고 조무래기들은 찐득찐득 입안 가득 달라붙는 엿을 삼키며 단내를 풍기는 친구를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엿은 물에 갠 전분을 가열해 걸쭉하게 만든 뒤 엿기름 가루를 섞어 졸여 만들었다. 쌀이나 감자, 옥수수 등이 엿 만드는 재료로 쓰였지만 미곡이 귀하던 시절엔 쌀을 원료로 만든 엿을 으뜸으로 쳤다. 지금이야 흔치않은 엿 공장이 명맥을 이어주고 있지만, 50년대 이전만 해도 집에서 직접 엿을 만드는 게 보편적이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찹쌀이나 멥쌀을 깨끗이 씻어 엿기름 가루와 함께 솥에 넣어 끓인다. 걸쭉한 전분을 무명 보자기로 짜내 다시 졸이면 액체 상태의 물엿이 되고 이것을 더 졸이면 강엿이 됐다.
밤새 만든 엿판을 지게나 리어카에 얹어 이 동네 저 마을을 돌던 엿장수는 애환도 많았다. 엿판을 한나절 새 다 비우는 날이면 다행이지만 엿이 팔리지 않고 너무 멀리 나온 날은 남의 집 처마밑이나 헛간에서 밤을 새고 다음 날 엿판을 비워야 집으로 돌아갔다. “곡식으로 줄테니 지난번 우리 아이가 엿바꿔 먹은 고무신을 돌려 달라”는 아주머니와 실랑이하기 일쑤였고 “철부지들이 가져온 귀한 물건을 돌려 보내지 않았다”며 마을 입구에서부터 어른들에게 쫓겨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래서 멀쩡한 고무신이나 양은냄비 베틀북 등 쓸만한 물건이 아이들 손에 들려나오면 어떤 엿장수는 “다시 집에 갖다 놓으라”고 불호령을 내리고 엿가락을 싹둑 잘라 인심을 쓰기도 했다.
경남 사천읍 평화리 박승민(49)씨는 “초등학교 1, 2학년 때 한 켤레밖에 없던 할머니의 흰고무신을 갖고 나와 엿을 바꿔먹은 뒤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얼마나 혼이 났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며 “그래도 꾸중듣는 나를 오히려 잘했다며 엿이 맛 있더냐고 물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더벅머리 동네 형들에게 엿치기는 또다른 오락이었다.
경제사정이 조금 나아지면서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 연령층은 엿치기를 즐겨 했다. 하얀 엿을 부러뜨려 구멍이 큰 사람이 이기는 게임. 지면 엿값을 모두 내야 했기 때문에 구멍을 크게 보이기 위해 엿끝을 물고 필사적으로 입바람을 불어댔다. 서로 ‘내 구멍이 더 크다’고 우기는 통에 쌈박질이 날라치면 본의아니게 심판을 선 엿장수는 그지없이 난감해 했다.
70년대 중반까지 엿장수로 생계를 꾸려왔다는 박태경(62)씨는 “그 시절엔 엿을 파는 사람이나 엿을 사먹는 아이들이나 모두 다 형편이 어려웠다”며 “농촌에서 유일한 군것질거리였던 엿도 세월따라 사라져 지금은 엿장수를 찾아 볼 수 없게 됐다”고 아쉬워 했다.
오라이를 외치던 버스 안내양
지금은 사라진 버스안내양은 60~70년대 보릿고개 시절 여공과 함께 가난에 허덕이던 우리의 젊은 처녀들이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하다시피 한 직업이었다.
그래서 영화나 책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했다. 1973년 발표된 조선작의 단편소설을 1975년 김호선 감독이 영화화한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영자는 버스안내양을 하다 사고로 한팔을 잃은 뒤 창녀가 된다.
아동문학가 임길택의 동화집 ‘우리동네 아이들’중 ‘명자와 버스비’에서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던 명자는 버스 안내양이 되어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공부시키는데 어느날 버스에 탄 옛날 선생님의 차비를 받지 않는다는 소박한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여차장은 새벽 4시 출근, 밤 10시 퇴근의 격무에도 불구하고 특히 시골출신 아가씨들에게는 인기직종으로 꼽혔다.
70년대 경남지역 버스회사에서 노무업무를 담당했던 이영철(47·부산 금정구 남산동)씨는 “70년대 초중반 9급 공무원 월급이 4만5천원일 때 버스 안내양은 8만원을 받았고 속칭 ‘삥땅’이라는 부수입도 있어 안내양 모집 경쟁률이 10대1을 넘기도 했다”고 밝혔다.
요금 삥땅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로 운전사와 차장이 하루수입중 일부를 따로 챙겨 6대4 정도의 비율로 나눠 가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70년대 양산에서 3년간 버스안내양을 했다는 김정숙(45·양산시 북정동)씨는 “당시 안내양들은 회사단속을 피해 삥땅 요금을 속옷안에 숨기거나 단골 가게에 맡겼다가 퇴근후 찾아가곤 했다”며 “적발되면 사표는 물론 형사처벌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운전사와 안내양이 마음이 맞지 않으면 어림없었다”고 회상했다.
일부 회사에서는 삥땅을 막기위해 지도원을 두었으나 지도원마저 매수돼 삥땅에 동참(?)하기도 했고 삥땅을 방지한다며 안내양을 몸수색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는 대중교통수단이 버스뿐이어서 출퇴근이나 등하교시간대에는 승객들로 초만원이었고 안내양이 버스문에 매달려 가기 일쑤였다. 이 과정에서 차문을 열고 달리는 차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고 불구가 되는 안내양도 없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안내양과 승객 사이에 로맨스가 피어나기도 했다.
70년대 중반 김해 동신버스에서 안내양을 했던 이영순(47·김해시 동상동)씨는 “안내양 가운데 학생이나 승객으로부터 편지로 데이트 신청을 받는 경우가 많았으며 일부는 결혼으로 이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버스 안내양도 사라지고 버스안내양이 받던 회수권은 토큰을 거쳐 전자카드로 바뀌었다. 10대후반 20대 초반이던 안내양들도 그만한 나이의 아들딸을 둔 어머니가 됐다.
경남 양산 세원여객 안기철 과장은 “당시 대부분의 안내양이 동생들 학비는 물론 가족 생계까지 책임지는 ‘또순이’였다”며 “그처럼 열심히 근무한 안내양들은 저축도 많이해 지금은 거의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어책]
[연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