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할아버님에 의해 들어간 청주 희망 고아원 이야기와 그 일이 바탕이 되어 신물을 배달하며 자립 의지를 키워간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실어봅니다. 고난은 딛고 일어난 이들에게 삶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청주 희망 고아원 이야기’
연평도에서 살던 우리는 할아버님이 양을 몰고 청주로 이주하여 옥산에 거주하게 되었고 산을 넘어 멀리 덕촌교회에 다니시던 할아버님이 옥산 면소재지에 옥산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옥산교회서 자랐고 군 입대하기 까지 그 교회는 나의 신앙을 키워준 자양분이었다. 중 2때부터 주일학교 교사였던 나는 당시 교역자셨던 박성동 전도사님이 장신대 기숙사로 들어가시면 새벽기도와 수요 예배를 인도하는 대리 교역자였다.
아버님이 남기신 집에 있는 설교집이나 예화집 등을 참고로 겁도 없이 쪽지 하나를 들고 설교를 했다. 우스운 일이지만 그 모든 것이 나를 교역자로 훈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인터넷에 나온 간단한 옥산 교회 역사를 적어본다.
옥산 교회소개 연혁
1952.01.15. 덕촌교회 다니던 이상백 안국원 백의숙 민영세 고해원 제씨가 이익건 전도사를 모시고 옥산초등학교 가교사에서 백인석 목사를 청하여 전도 강연회를 가진 것이 본 교회의 시작이다.
1952.03. 제2대 김봉관 목사 부임. 오산리 539번지 대지 111평과 초가 8칸을 매입 수리하여 가을에 입당
1952.03.20. 충북노회에서 교회 설립을 허락받다.
1953.10. 제3대 이성수 전도사 부임
1954.12. 제4대 정영구 여전도사 부임 이상백 장로 장립. (이상백 장로가 우리 할아버님이시다.)
할아버님은 내게 강한 자립심을 요구하셨다.‘넌 아버지가 목사여서 가족들을 돌 볼 수 없기 때문에 맏이인 네가 동생들을 거느려야한다. 그러려면 강한 훈련을 받아야한다. 청주 희망원으로 들어가라.’
세상에. 손자를 고아원에 보내는 할아버지가 어딨나. 나는 중 2의 몸으로 갑자기 할아버님이 평소 노회에서 가깝게 장로로 지내며 교류한 김경해 장로님이 운영하는 충북 희망원으로 입소했다. (이분이 나중에 옥산 땅을 구입해서 영아원을 그곳에 세운다.)
희망원은 당시 전쟁고아들로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 모인 곳으로 주로 외국에서 원조를 받아 운영했기에 상황은 열악했다, 도시락은 꽁보리밥에 검은 콩을 졸여 한 슷갈에 한 개 정도 먹을 수 있게 싸주었고 한방에 여러 명이 잠을 자며 살았다.
견디기 힘든 일은 학교 다녀오면 과일나무에 퍼세식 변소에서 퍼낸 변을 양쪽에 통을 매단 들통에 담아 어깨에 메고 다니며 나무에 주어야하는 일이다. 그 일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어 걸을 때마다 통이 출렁거리며 변이 쏟아져 바지와 옷에 묻었다.
키도 작고 왜소한 내가 그런 일을 감당하기란 정말 힘들었다. 그럴수록 나는 아버님이 원망스러웠고 나를 이렇게 방치하는 부모가 미웠다.
아무도 의지할 것 없는 아이들은 서로 똘똘 뭉쳐 누구든 걸리면 떼로 덤벼들어 아무도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것 하나는 내게 좋았다. 희망원 애들이 중 고등학교 내내 나의 울타리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산에서 변을 퍼 나르다 쉬고 있는데 저 멀리서 어머님이 나를 부르며 달려오셨다. “형우야!” 나는 번개같이 달려가 어머니 품에 안겼다. 세상에 이토록 행복한 순간이 내게 또 있던가.
나는 예수님이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리라‘는 말씀의 감격을 골백번 이해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못하는 인생이 가장 불쌍한 인생이다.
요 14 :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 : 12 - 1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 아버지 제가 지금 힘들어요, 도와주세요.’ ‘아버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사는 이들은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한 인생인가?
신문 배달로 자수성가의 꿈을 키우다
고아원에서 돌아 온 후 나는 스스로 일어서기로 결심했다. 친구와 청주로 나가 자취를 하며 신문 배달을 하기로 한 것이다. 친구의 친척이 경향신문사 지국장으로 일하는 곳에서 학교 수업을 마치고 300부를 맡아 수동과 우암동 일대에 신문을 배달했다.
체력은 거의 매일을 달리기로 단련했기에 얼마든지 가능했다. 집에서 정봉역까지 약 5리 길을 시간을 재서 기차 시간과 맞춰 집에서 나가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달려 기차 통학을 했기에 신문 300부 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정한 시간에 신문사로 나가 그날 광고지들을 신문에 끼워 넣는데 당시는 광고 간지들이 많았다. 세 가지 네 가지를 요령껏 빠른 시간에 끼워 넣고 저녁시간에 늦지 않도록 달려가 신문지를 반으로 접어 날려 보내면 종이비행기 날 듯 목표지점에 정확히 꽂힌다.
내가 원하는 방의 문 앞에 꽂히는 기분은 아이들 비행기 날리는 기분과 같다. 일을 즐기는 것이다. 당시는 신문 배달부가 수금까지 해야 했는데 나는 거의 제 날짜에 입금을 했다.
돈을 안주고 몇 달씩 미루다 떼어 먹고 달아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당신 자녀들이 수금을 못해 얼마 안 되는 알바 비를 대신 빼고 줘서 학비를 못내 학업을 중단하는 일이 있으면 되겠느냐 하소하니 대부분 떼먹지 않고 잘 주었다.
문제는 겨울이었다. 날이 일찍 어두워지면 마지막 우암 산자락에 있는 청주대학 건물에 신문을 몇 부 넣어야 하는데 눈이 하얗게 쌓인 길을 걸으면 ‘사박사박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캄캄한 밤에 건물이 그렇게 무서운지 몰랐다.
겨울바람이 건물을 훑고 지나가면 ‘우웅’ 울리는 소리가 마치 누군가 곡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시골 외딴집에서 밤에 변소 갈 때면 동생들 밖에 보초세우고 일을 보던 내가 이렇게 무시무시한 일을 겪다니!
마지막 신문 3부는 해부학 교실인데 거기는 사람의 시체를 갖고 연구 한다는 곳이다. 게다가 그해 가을 그곳에서 청년이 양잿물을 김에 싸서 먹고 자살했는데 불룩 나온 부패한 배를 누르니 누런 썩은 물이 울컥 쏟아져 나오더란다. 목격자로부터 직접 들었다.
그러니 시체 해부 모습과 청년의 끔찍한 영상이 머리털을 치솟게 한다. 해부학 교실을 올라가노라면 내 발자국 소리에 내가 놀란다. 뚜벅, 뚜벅, 뚜벅, 나도 모르게 걸음은 몇 계단씩 날아오르고 마지막 교실에 신문을 던져 넣자마자 계단을 비행기 타듯 날아 내린다. 아마 그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으면 토픽 감이었을 게다.
그렇게 한해 겨울 나는 동안 나는 어떤 것도 겁 내지 않는 사내로 변해있었다. ‘뭐든지 덤벼라. 내가 상대해주마.’ 나는 다음부터 무서운 게 없어졌다. 이 용기는 후에 어떤 일도 겁내지 않는 담대함으로 내 삶의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극도의 공포를 이겨내면 더 이상 무서운 게 없다. 할아버님의 고아원 훈련은 정말 내게 가장 좋은 인생의 보물이 되었다.
# 오늘의 명언
어려울 때 우리는 가장 많이 성장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 조지 워싱턴 –
~ 바보 이형우 목사의 힐링편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