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20호 BC 1411-BC 1390 |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수1:1) | |
―――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신문 ――― |
오늘의 세계표정 모세는 죽었으나 그의 후계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대권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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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가 떨어지다
병법에도 없는 방법으로 여리고성을 함락했다는데... |
(B.C 1415여 년경)-이스라엘 정보원들의 보고에 고무된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으로 아침 일찍 진군해 나갔다. 그러나 너무나도 견고한 성 앞에 이스라엘 병사들은 기가 질렸다. 그런데 그날부터 이스라엘 군대가 벌인 전쟁은 일찌기 전쟁사에서나 병볍에서도 유래가 찾아보기 힘든 방법이었다. 아뭏든 그들은 제사장 일곱명이 부는 숫 양뿔 나팔소리를 선두로 성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하루에 한 번씩 그냥 성을 돌고는 자신들의 진채로 돌아가기를 6일간이나 한 것이다. 그러다가 이레 째가 되었다. 새벽동이 트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전과같이 성을 돌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번이 아니라 일곱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일곱 번 째,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게되자, 대장군 여호수아의 군호에 따라 함성을 질렀다. 그런데 그 순간 견고하기만 하던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성이 무너지자 여리고의 군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진이 난 것도 아닌데 성과 집들이 무너져 내리자 군사와 백성들은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 이스라엘의 군사가 성에 뛰어 들어가 부딪히는 대로 찔러 죽이니 성안은 피바다가 되었고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로 끝을 맺은 것이다. 전무후무한 전투가 너무나도 싱겁게 끝난 것이다. 여호수아는 "우상을 섬기던 도시 여리고는 누구도 다시 재건치 못하리라"고 선포하며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성경 여호수아 6:16)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사진은 여리고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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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도자의 성공적 계승 - 여호수아시대는 열리는가?- |
(BC 1415년경)-모세의 시대가 가고 여호수아의 시대가 왔다. 먼저 모세는 애굽에서 나온지 서른 여덟해가 끝나갈 무렵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군대에 갈 수 있는 남자의 수효는 모두 60만 1천 7백30명이었다. 여기에는 병역의무가 없는 레위인 2만3천명이 빠진 숫자이다. 그때에 그 자리에서 모세는 자신의 마지막을 예견하고 미리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뽑은 것이다. 이스라엘이 취한 후계자 계승 방식은 '지명'의 방법이었는데, 모세가 여호수아를 지명하고 그리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는 방법으로 임직을 하였던 것이다. 새로이 뽑힌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광야에 나와 벌였던 첫 전투,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벌였던 첫 교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이래 전장에서 청춘을 보낸 용맹한 장군 출신으로서 강성 이스라엘의 건설에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군사 전문가들은 전했다. 특히 가나안 정보 전투를 벌여야 하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지도체제가 필수적이었는데 모세가 그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이러한 계산이 있었을것이라는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첫 성인 여러고 성의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형편이지만 앞으로도 수 많은 전투를 남겨놓고 있어 전쟁의 여부가 기대된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숨막히는 정보전 |
유대 정보원들
기생의 도움으로 살아나다. (여리고 연합) 여리고성 전투에서 기적적으로 구사일생 구원받은 여인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직업이 기생이어서 더욱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는 데, 그녀는 지난날 이스라엘이 여리고성과의 전투를 앞두고 이스라엘의 정보원들이 정탐을 나갔을 때 적으로 숨겨 주었던 여인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 그녀는 목숨의 위협을 무릎쓰고 지붕위 덤불 속에 숨겨 적의 추적을 따돌려 주었다는 것이다. 탈주에 성공한 정보원들은 그녀에게 보상을 약속하고 성을 빠져 나왔는데, 그 약속의 증표로 그녀의 집에 내걸린 빨간 줄을 신호로 하고 여리고의 모든 생명이 다 진멸 당할 때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녀와 함깨 그녀의 가족이 모두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모처에 안전하게 거하고 있다고 한다.(사진은 당시 정보원들이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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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속의 성경,
악마 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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鬼마귀+林두그루의 나무+ 위장,덮개 |
⇒마귀가 뱀으로 위장하여 두그루의 나무에서 하와를 유혹함. (창세기 3장1절이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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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적
- 발굴역사 여리고의 흔적을 찾아라 |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그들이 마주친 첫 번 째 요새는 여리고였다.육중한 성문과 높은 성벽을 앞에 두고 그들은 오늘날의 전술로는 이해하기 힘든 성벽 돌기를 하루 한 차례씩 6일동안 시행했다.어떤 성서학자들은 성벽중에서 가장 취약한 지역이 어디인지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성경 여호수아서(6장)에 의하면 일곱째 날 성벽을 일곱 바퀴 돌면서 뿔나팔을 불고 큰 소리로 외치자 그만 그 견고한 성벽이 무너지고 말았다.여호수아의 군대가 기적적으로 파괴시켰다는 여리고의 성벽은 성서고고학 발굴사에서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중 하나다.광활한 요단평원에 24m의 높이로 우뚝 솟은 여리고는 약 4만㎡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도시였지만,19세기 후반에 처음 발굴된 이래로 고고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이 집중된 유적지였다.끊임없이 맑은 물이 솟아나는 엘리사 샘가에 자리잡은 여리고는 광야 한가운데 위치한 비옥한 오아시스로,로마시대에는 비싼 값에 팔리는 향유의 생산지로 클레오파트라의 영지가 되었고,헤롯의 궁전과 별장이 위치한 휴양지로도 유명했다.예루살렘 탐사의 임무를 띠고 팔레스타인에 머물고 있던 영국의 워렌(C.Warren)은 1868년 4월 여리고를 방문,수십명의 인부들을 이끌고 성서시대의 여리고로 여겨지는 `텔 술탄'이란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했다.약 한달 동안 지속된 발굴에서 워렌은 마치 참호를 파듯이 텔의 동서로 이어지는 도랑과 텔의 바닥까지 도달하는 수직 갱을 팠다.하지만 그의 발굴에서 흙벽돌건물의 흔적만 밝혀졌을 뿐 이렇다 할 만한 여호수아의 성벽은 찾을 수 없었다.당시에는 돌로 만든 석조건축물만을 가치 있는 유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발굴을 지속할 수 없었다.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워렌의 수직 갱은 1만년전에 건설된 신석기시대의 성벽과 망대를 1m 정도 벗어났다.두번째의 여리고 발굴은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젤린(E.Sellin)과 독일의 바찡어(C.Watzinger)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이미 1902년부터 3년동안 이즈르엘 평원의 타아낙을 발굴하여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젤린은 엄청난 흙벽돌의 잔해 속에서 견고한 바윗돌로 기초를 다진 성벽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젤린이 여리고에서 발견한 성벽이 여호수아가 파괴한 성벽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예루살렘을 통해 온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하지만 발굴이 진행되면서 한 시대의 성벽만 발견된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서 다양한 시대의 성벽들이 속속 드러나게 되자 발굴당사자들은 과연 어느 것이 여호수아의 성벽이냐는 난감한 문제에 부딪쳤다.1868년부터 1백여년동안 유럽의 대표적인 고고학자들에 의해 네차례에 걸쳐 샅샅이 발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리고의 주거역사는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그토록 찾기를 원했던 여호수아의 성벽이 아직도 흙속에 파묻혀 있다는 낙관론과 오랜 세월 빗물에 씻겨 내려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비관론이 교차하는 가운데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으로 선포된 여리고는 지금도 새로운 발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가나안 정복 시대
출애굽후 이집트는 대제국의 몰락이 찾아왔고 중동의 여러 나라들은 서로간에 새로운 세력의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지중해 동부와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계곡의 여러 작은 도시국가들은 외방 제국에 점령당하게 되었다. 얼마 동안 그들은 자기들끼리 또한 좀 더 강력한 이웃들과 더불어 나라를 발전시키고 통상을 하였다. 이 때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을 정복하던 시대였다. 바로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였으며, 구약의 첫 번째 다섯 권의 책인 모세 오경이 편집되던 시대였다. 아마르나 시대의 풍요와 위대함은 모든 성서 연구자들을 놀라게 한다. 우리는 이것을 투탄카멘 왕의 무덤에서 출토된 보물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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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모집 조국 그리스를 위해 싸워줄 용병을 모집한다. 앞으로 있을 트로이 연합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집하니 폴리스의 뜻 있는 자 모두 지원하라 전쟁의 승리시 전리품은 그대들의 것 그리스연합군 방위사령부 | |
지중해관광안내 천혜의 관광자원과 다도해가 어우러져 있는 곳, 세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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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하는 차세대 지도자" |
여호수아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지도할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였다(출 17:8-16).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게 하시고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하셨다. 그는 그 약속의 땅을 먼저 정탐해 본 정탐군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자기들에게 주실 것을 믿었기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들어가게 허락해 주신 단 두 사람의 어른이었다. 그 이외의 어른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그리하여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고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을 여호수아의 손에 맡기셨다고 선포하였다.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라고 격려하시었다(수 1:1-9). 곧 이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이끌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다.
이스라엘의 여리고 함락과 고대의 진(陣)전투
역사스페셜 전투진의 비밀
고대의 전투는 보병의 정면 싸움이었다. 밀리지 않고 진군하는 보병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있는가가 승패의 관건이었다. 이를 실현시키는 가장 강력한 전투진은 빽빽한 밀집대형으로 이뤄진 사각형의 방진(方陳)이다. 전투 경험이 늘어나고 각종 무기가 새롭게 개발되면서 전투진도 유연해져야 했다. 정면 충돌보다 우회해 후방을 공격하는 전술이 등장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방진이 여러 단위로 나눠질 필요가 있었다. 각 단위는 기능에 따라 중무장한 보병, 포병, 기마병 등으로 역할이 분담됐다. 화약이 소총과 대포에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몸을 부대끼며 싸우는 근접전은 점차 사라져갔다. 화력으로 먼저 적을 초토화시키고 나머지를 보병이 '처리'하는 방식이 자리를 잡아갔다. 그래서 전투진은 싸움 초기에 방진을 펼치다가 싸움 후반기에 들어서면 일렬로 선을 형성하며 전진하는 형식을 취했다. 현대에 들어 첨단 화기가 대거 등장하면서 전투진의 형태는 다양하게 변화한다. 사각형이나 일직선처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된 진은 사라져갔다. 1차 대전에서 대륙의 끝과 끝을 이으며 아군과 적군이 대치한 군인들의 긴 행렬이 전통적인 전투진의 마지막 형태인 듯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함락시킨 작전은 고대의 어던 병법에도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중국의 손자병법에도 없는 방법이었다. 하나님은 여리고 전투에서 인간의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능력으로 이긴 전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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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뒤바꾼 철기혁명
(기원전 1275년)-최근 히타이트에 의해서 발명된 철기기술이 세상을 뒤바꾸고 있다고 한다. 철기 기술이 무엇보다 먼저 사용된 곳은 전쟁이었다.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전쟁을 벌였던 오른테스 유역의 카데시전투에서 이집트군이 대패한 이후 철기문화는 급속히 세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철기혁명은 인간의 문명을 한차원 높여 놓았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는 반면 오히려 전쟁을 부추긴 부정적인 면도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는 가운데 철기문화는 점점 서아시아로 가고 있다고 소식통들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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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를 차지하라
(기원전 1350년)-최근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지중해를 두고 보이지 않는 암투가 계속되고 있다. 지중해 해상권을 쥐는 자가 천하를 제패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앞다투어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특히 그리스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지중해의 맹주임을 자처하고 있어 분쟁의 소지가 되고 있다. 페니키아와 트로이 등도 이에 가세하여 서로가 지중해를 자신의 영해라고 주장하면서 각축을 벌이고 있는 지중해는 그야말로 화약고를 방불케한다고 특파원들은 전한다.분쟁의 주요원인은 경제적 문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상무역이 발달하자 이에 따른 세금의 수입이 적지 않아 각국은 자신들이 해상무역의 보호자임을 내세워 관세와 통행세를 많이 받을 목적으로 다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쟁은 해를 넘겨도 계속될 전망이다. | |
이스라엘의 국토가 될 가나안 대 탐구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가? |
국가와 민족에 우선한 세계관과 국가관 어느 나라 건 어느 민족이건 자기 국가와 민족에 우선한 세계관과 국가관을 가지고 있다. 중국인들이 한국을 가리켜 동이 곧 동방의 오랑캐라 부른 것이나 우리가 일본을 왜놈이라 칭한 것도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한다. 이런 사상은 현대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으며 근동의 고대인들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집트 고왕국(the Old Kingdom) 시대의 고대 이집트인들도 자기 민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집트를 제외한 다른 민족들과 국가들에 대한 저급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었다. 주전 2350년 경의 Uni 비문을 참고하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가나안을 Hariusha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모래땅에 사는 사람들의 땅 (the land of the sand-dwellers)이란 의미이다. 이 표현은 이집트의 우월 의식을 배경에 깔고 가나안을 천하게 부른 대표적인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주전 1950년 경의 시누헤 이야기 (Sinuhe story)를 참고하면 이집트인들은 자국을 중심으로 한 철저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이집트는 나라를 떠났던 백성들이 언제나 돌아가야 할 영원한 본향으로 나타난다. 시누헤 이야기는 국가 사랑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잘 표현된 대표적인 역사 기록에 속한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 역시 가나안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창세기 10장). 이점이 중요하다. 가나안에서 멀어져 가는 것은 어디를 가던 "내려간다"란 표현을 쓰고 가나안의 중심인 예루살렘으로 잘때는 "올라간다"란 표현을 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홍수 사건 이후 노아의 후손들은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주변 여러곳으로 흩어졌다. 셈의 후손들은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 지역으로, 함의 후손들은 이집트와 그 주변 지역으로, 그리고 야벳 후손들은 시리아의 북쪽과 소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졌다. 열국의 장이라 불리우는 창세기 10장은 비옥한 초승달 (Fertile Crescent)지역의 대표적인 성읍들을 모두 열거하고 있다. YHWH께서는 빼어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할 기업으로 가나안을 지목하셨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 땅에 뿌리를 내리며 성읍을 건축하였고 토지를 개간하였으며 양을 기르며 자손 대대로 생활해 왔다. 이스라엘 정착시대부터 사사시대를 거쳐 왕국시대를 지나 급기야는 나라를 잃은 지 수백년이 지난 후 다시 이 땅으로 돌아 온 아브라함의 후손들, 불의에서 떠나 공의로 돌아서도록 선지자들이 목이 터져라 외친 곳이 팔레스틴이다.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산, 성전산의 중심은 하나님의 성전, 성전의 중심은 법궤라는 말을 남김으로 예루살렘이 곧 세계의 중심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국가관과 아울러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하지만 그들이 차지한 가나안은 과연 젖과 꿀이 흘렀는가? 그렇지 않다. 척박하기 이를데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그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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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에선
조상들은 왜 벼를 택했나
우리나라에도 벼가 도입되어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원래 벼는 그 원산지가 열대지방으로 아시아의 야생식물에서 비롯되어 고대 동남아시아와 중국 남부지방에서 처음으로 재배되었다. 또 인도에서 니바라의 벼를 재배한데서 비롯됐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이나 인도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5000∼7000년 전 쌀이 발견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무튼 열대지방의 벼가 기온도 낮고 가뭄도 심한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아직은 적응하기에 매우 힘들고 소출도 무척 낮다. 한·온대식물인 보리나 밀은 수중재배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힘든 논을 만들 필요 없이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면 된다. 또 가뭄에도 강하고 병충해 걱정도 필요 없는데도 눈물겹도록 해마다 가뭄과 싸워가며 벼농사를 고집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영농조건이 훨씬 까다로운 벼농사에 애착하게 된 이유는 벼농사가 단위 면적 당 가장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는 소출에도 있었지만 쌀은 곡물중의 왕자라 할 정도로 맛이 좋아 발효식품을 주로 먹는 우리 식성과 정서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모든 곡물 중 가장 훌륭한 탄수화물 공급원이면서 균형 잡힌 여러 가지 필수 영양소들이 이상적으로 배합된 주식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 |
문화가 흐르는 한자, "斷袖(단수)"
대체로 인류의 역사를 보면 옛날로 올라갈수록 남녀간의 성관계가 문란했음을 알 수 있다. 춘추시대의 경우 아들이 아버지의 妾(첩)과 私通(사통)하는 烝淫(증음)이 있었는가 하면 아들의 배필을 아버지가 通淫(통음)하는 예도 비일비재했다. 또한 서로 相對方의 아내를 交換하여 淫行하는 通室(통실)도 성행했다. 중국 秦始皇은 呂不韋(여불위)와 그의 애첩 趙姬(조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春秋五覇(춘추오패)의 하나인 齊桓公(제환공)은 私娼街(사창가)를 설치해 세금을 징수 함으로써 중국 公娼(공창)의 시초가 됐다. 여자가 남자를 쾌락의 대상으로 삼은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남북조 송 廢帝(폐제)의 누이동생 山陰公主(산음공주)는 무려 30명의 '面首(면수)'를 두었는데 하나같이 美少年으로 채웠으며 당나라의 則天武后(측천무후)도 面首와 어울렸다. 그러니 同性戀愛(동성연애)인들 없었겠는가. 일부 蕩淫無道(황음무도)했던 군주들은 美童(미동)을 뒀는데 그들을 寵臣(총신) 또는 嬖(폐)라고 불렀다. 기원전 3세기 전국시대 魏(위)왕은 미소년 龍陽君(용양군)과 동성연애를 즐긴 것으로 유명하다. 서한 哀帝(애제·기원전 6∼기원전1)와 董賢(동현)의 同性戀愛는 가히 壓卷(압권)이다. 하루는 함께 침대에 누워있다가 董賢이 武帝의 옷소매를 베고 잠이 들고 말았다. 哀帝는 차마 그를 깨울 수가 없어 자신의 옷소매를 칼로 잘랐다. 이른바 '斷袖'의 고사로 '소매를 자른다'는 뜻이다. 이 때부터 斷袖는 남자들의 동성연애를 상징하게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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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http://myhome.netsgo.com/doctorkang/8.htm▶http://members.aol.com/crakkrjack/font/index.html ▶http://members.aol.com/chichi/gods.html▶http://members.aol.com/chichi/dingbats.html ▶http://members.aol.com/chichi/misc.html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