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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모범답안
1997년, 나라에서는 ‘문화유산의 해’로 정하고 대대적으로 행사를 벌인 적이 있다. 당시 <중앙일보>에서는 각계 인사들에게 ‘내 마음속의 문화유산, 셋’이라는 릴레이 특집을 기획했다. 그때 내가 꼽은 것은 한글·백자, 그리고 산사(山寺)였으며 산사의 대표적 예로 든 것이 선암사(仙巖寺)였다.
선암사는 내 마음속의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내가 답사를 다니기 시작한 지 30년이 되도록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다녀온 남도답사의 필수처다. 그러나 선암사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딱 집어 말하기는 참으로 힘들다. 따지고 보면 미술사적 유적으로 뛰어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관이 빼어난 것도 아니지만 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나고, 가면 마음이 마냥 편해지는 절집이다.
굳이 말하자면 선암사는 우리나라 산사의 전형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데, 본래 전형적이라는 것은 평범하다는 뜻이기도 하여 그 특징으로 잡아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럴 때는 오히려 외국인, 특히 안목 있는 외국인의 눈을 통해 그 구체적 내용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1995년 개막한 제1회 광주비엔날레 때 나는 7명의 커미셔너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그 중 외국인 커미셔너가 4명이었는데 지금 뉴욕현대미술관(MOMA) 부관장으로 있는 캐서린 할브라이치(Catherin Halbreich)가 미주지역을 맡아 참여했다. 캐서린은 당시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워커아트센터 관장으로 있었다. 나는 캐서린과 선암사를 다녀온 이후 그 매력의 정체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 뒷이야기
제1회 광주비엔날레는 급조한 전시회여서 외국인 커미셔너들의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전시회 개막을 1주일 앞두었는데 아직도 전시장에는 망치소리,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로 귀가 따갑고, 구름다리 아래에는 공사장 쓰레기가 쌓여 있어 커미셔너들이 선정해온 작품들이 도착했어도 설치하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있었다.
이제 와 그때의 전후 사정을 들은 대로 전하자면, 300억 원이 들어간 광주비엔날레의 시작은 문민정부가 호남의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급히 내놓은 정치적 목적의 문화정책이었다.
예향을 자부하는 광주에서 제대로 된 국제전을 열어주자는 것이었고, 그 개막식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함으로써 1980년 광주민주항쟁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로 삼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준비가 시간에 쫓겼다(그러나 대통령은 결국 남총련 학생들의 반대로 개막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늘 그랬듯 외국 커미셔너들과 점심을 같이했는데, 영국인 커미셔너가 오늘도 자기 구역은 페인트칠을 다하지 못해 일을 할 수 없다며 푸념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이제까지 다섯 번 올 때마다 크게 놀랐다고 했다. 첫 번째는 이런 큰 전시회를 불과 10개월 후에 열겠다고 한 사실이고, 두 번째는 11월에 1차 커미셔너회의에 참석했더니 허허벌판을 가리키며 거기에 새 전시장을 짓는다고 해서 놀랐고, 세 번째는 이듬해 4월 2차 회의에 오니 건물 뼈대가 벌써 다 돼 있어 놀랐고, 네 번째는 7월 3차 회의에 왔더니 성수대교가 무너져 놀랐고, 지금은 전시장 공사 쓰레기를 개막전에 다 치우지 못할 것 같아 놀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모두 똑같은 심정이라면서 이구동성으로 개막식이 제 날짜에 열리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라고들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주최국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있어 나는 이렇게 제안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이제부터 진짜 놀랄 것입니다. 날짜를 정해 놓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는 것이 대한민국의 저력입니다. 내 생각에 전시장을 완전히 마무리하려면 이틀은 더 걸릴 것 같으니, 이렇게 앉아서 걱정만 하지 말고 나하고 한국의 환상적인 옛 절집을 구경갑시다. 다녀오면 전시장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을 것이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일합시다.”
그러자 모두 고맙다면서도 당장은 사양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일이 먼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시회가 무사히 개막되면 귀국하기 전에 꼭 한번 보러 가고 싶으니 개막 이튿날 가기로 약속하자고 했다. 그들이 걱정하던 산더미 같은 공사장 쓰레기 문제는 이튿날 아침 해결되었다.
육군 30사단 1개 중대 병력이 투입되어 순식간에 말끔히 치워버린 것이었다. 그때 솔밭 언덕에 설치미술가 김수자 씨가 진열해 놓은 헌 옷가지들까지 쓰레기로 담아가는 바람에 이를 되찾아오는 소동도 벌어졌다.
그리고 119구조대가 와서 말끔히 물청소를 하면서 3시간 만에 끝났다. 커미셔너들은 이 광경을 보면서 “믿을 수 없다(unbelievable)”는 소리를 연발하였다. 이리하여 개막식은 어김없이 제 날짜에 열렸고, 다음 날 아침 9시 나는 약속대로 이들을 데리고 선암사로 떠났다.
가을 들판의 논
비좁은 내 포니 승용차에 4명을 태우고 출발하니 그들은 마침내 일에서 해방되어 바캉스라도 가듯 못 알아들을 영어로 재잘대는데, 내 귀에는 대화 중 나오는 “아니다(no)” 소리밖에 안 들린다. 차가 광주 시내를 벗어나자 들판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시끄럽던 뒷자리가 조용해졌다.
백미러로 살짝 보니 모두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캐서린은 아예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있다 “저게 무엇이에요(What’s that)?”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묻는지 몰랐다. 그래서 “못 알아들었는데요(excuse me)?”라고 되묻자, 논을 가리키며 “누런 풀(yellow grass)”이라는 것이었다.
“벼(rice plants)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아, 알겠습니다(Oh, I see)”라고 하고는 다시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들 이방인이 벼가 익어가는 들판을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서린은 또 내게 항상 저렇게 누렇느냐, 논둑이 왜 평평하지 않고 계단식으로 되었느냐는 등 계속 물었다.
내 짧은 영어로 대답하기는 정말 힘들었다. 이럴 때 내가 쓰는 술책이 있다. 그것은 내가 질문해서 그쪽이 계속 말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캐서린에게 “어때요 (How do you like it)?”라고 묻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아름다운 풍광이라면서 동양의 색감이 서양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여러 나라를 다녔어도 현대도시의 현대미술만 상대했는데, 이런 시골 풍경과 일상(everybody’s everyday life)의 모습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내로라 하는 미술평론가들이기 때문에 보는 눈이 여러 모로 달랐다. 미술평론 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시각적 경험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종의 직업병적 즉발적 반사작용이어서 그것은 - 편견일 수는 있어도 - 거짓은 아니다. 지금 이들 이국의 미술평론가가 논을 보면서 느끼는 반응은 마치 시베리아 스텝에 핀 들꽃을 보는 듯한 감동인 것이다. 그때 이후 나는 더욱 자신 있게 하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논이다.”
지금은 광주에서 순천으로 가는 27번 국도가 4차로에 시속 80km로 달릴 수 있는 반듯한 길로 바뀌었지만, 그때만 해도 산굽이 따라 강물 따라 느리지만 운치 있게 돌아갔다.
우리의 차가 곡성 태안사를 저만치 두고 보성강변을 따라 가는데 캐서린이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해서 허름한 휴게소에 세웠다. 모두 잠시 차에서 내려 유유히 흐르는 보성강과 강 건너 논, 발 아래 작은 마을, 그리고 먼 산을 무슨 큰 구경거리인 양 바라보았다. 다시 차에 올라 운전하면서 캐서린에게 물었다.
“사진 잘 찍었습니까?”
“물론이죠. 참 아름답습니다. 나는 여러 나라를 여행해 보았지만 지금처럼 산과 들과 마을과 강이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풍광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신네 나라의 사람들은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대해 불만만 말하던 그가 이 평화로운 풍광 앞에서 목소리마저 나긋나긋해지는 것이 반갑고도 고마워 추임새를 넣듯 대화를 이끌어갔다.
“특히 산이 그렇습니다. 당신네 나라 사람들에게 등산이라고 하면 전문 산악인이나 하는 일이지요? 그러나 한국인에게 산은 곁에 두고 살면서 언제 어느 때나 어린애부터 노인까지 누구나 오르는 대상입니다. 한국인에게 산은 일상의 공간인 셈입니다.”
“그렇군요. 산이 높이 솟은 것이 아니라 여러 겹으로 겹쳐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이 산을 보니 동양화에서 산을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알 수 있겠네요.”
그는 미국의 시카고 지방에 살고 있었으니 우리의 산등성을 보고 그런 이국적 감정을 느낄 만하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미국에서 해발 4,000m가 넘는다는 파이크스피크를 자동차로 올라 보면서 세상에 이렇게 싱거운 산이 다 있는가 허망했던 기억이 났다. 그 산은 몸뚱이 하나가 달랑 산이었다. 그래서 캐서린에게 다시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저렇게 생긴 산을 높은 산이 아니라 깊은 산(deep mountain)이라고 합니다. 내가 뉴욕에서 만난 동양미술 큐레이터에게 한국의 사찰은 깊은 산속에 있다고 말했더니, 그는 평소 내 영어가 서툰 것을 알고 산은 깊은 것이 아니라 높은 것이라고 교정해 주면서 깊은 강(deep river)은 있어도 깊은 산은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할 말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내 영어가 틀렸습니까?”
“깊은 산이라…. 그것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완전히 한국화한 영어(Koreanized English)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풍광에 맞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캐서린은 미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deep mountain’을 몇 번인가 되뇌었다.
승선교와 강선루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야산의 정취를 만끽하며 걷던 길이 승선교로 접어들었을 때 이들은 일제히 “멋있다(wonderful)”는 감탄사를 큰소리로 내었다. 승선교는 선암사 진입로의 하이라이트이다.
평범한 산길이 여기 와서 드라마틱하게 변한다. 승선교 무지개다리 아래로는 아무렇게나 굴러 있는 바위덩이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데, 멀리 계곡 돌아가는 길목에는 강선루 2층집 정자가 우뚝 서있어 우리에게 여기서 쉬어가라는 무언의 사인을 보낸다.
냇물이 잔잔히 흐를 때는 무지개다리가 물속의 그림자와 합쳐 둥근 원을 그리고, 그럴 때 계곡 아래로 내려가 보면 그 동그라미 속에 강선루가 들어앉은 듯 보인다. 모든 선암사 안내책과 글에는 계곡 아래에서 승선교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이는 강선루 사진이 실려 있을 정도로 여기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선암사의 제1경이라고 할 만하다.
승선교는 보물 제 400호로 지정된 우리나라 돌다리 중 명작으로 손꼽힌다. 무지개다리를 놓으면서 기단부를 계곡 양쪽의 자연 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무너질 일 없게 하고 홍예석을 돌린 다음 잡석을 이 맞추어 쌓아 올린 다음 그 위는 흙을 덮어 양쪽 길로 연결하였다.
그리고 포물선 꼭짓점에 해당하는 홍예 정가운데는 멋지게 조각한 용머리를 냇물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돌출시켜 그것이 중심추 역할을 해서 다리는 균형이 매우 잘 맞는다는 느낌을 준다. 이 승선교는 숙종 24년(1698) 대화재 이후 선암사를 중축한 호암선사가 축조했고, 순조 25년(1825) 해붕대사가 중수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선암사 스님들은 이 무지개다리를 놓은 경험 덕분에 인근 보성 벌교의 무지개다리(보물 304호, 1729년 축조)도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승선교의 원래 디자인 취지는 새로 난 찻길로 제 맛을 상실했다. 승선교는 아래쪽의 작은 다리와 위쪽의 큰 다리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선암사 진입로는 이 작은 다리 건너 계곡 건너편 길을 통하여 큰 다리를 통해 다시 건너오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길과 다리의 구조가 더욱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른쪽 산자락에 붙여 새 길을 내어 사람들이 그쪽으로 다니니, 승선교 두 다리는 그저 장식으로 남아 있는 셈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일부러 작은 승선교 넘어 큰 승선교를 건너 다닌다. 그것은 본래 진입로의 디자인 취지를 맛보려는 뜻도 있지만 승선교 다리의 건강을 위해서다. 특히 해동기인 봄철에는 사람들이 다리를 밟아주어야 돌 틈 사이로 흙이 메워져 장마철에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해 준다.
옛 풍속에 3월3일 삼짇날 아낙네가 머리에 돌을 이고 108번 왕래하면 복이 온다며 놋다리밟기, 성곽 밟기를 한 것은 중노동을 놀이 형식으로 바꾼 민속놀이였다. 그러나 요즘은 기껏 다리를 만들어놓고 사용하지 않다 보니 지난 30년간 보수에 보수를 거듭하여 제 모습을 보여준 기간과 공사 기간이 비슷할 정도다.
집이든 다리든 사람이 사용하지 않으면 망가진다. 그것은 기계제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화재 보호의 기본 방향은 그것을 사용하면서 보존하는 것이 최상책인 것이다. 나는 이들을 이끌고 작은 승선교를 건너가 한참 동안 이 장관의 풍광을 이모저모로 살펴보게 하고 다시 큰 승선교를 건너 강선루로 향했다.
강선루를 지날 때도 옆으로 난 찻길이 아니라 누마루 밑으로 지나갔다. 강선루 옆 기둥 하나가 계곡에 빠져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의 정자는 연못이나 계곡 가에 지을 때 위험스러울 정도로 되도록 물 가까이로 내밀어 짓는다. 그 이유는 정자에서 풍광을 내려다볼 때 시선이 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물로 떨어지게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강선루는 그 많은 관람객을 감당할 수 없어 항시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난다.
삼인당이라는 연못
강선루 지나 삼인당이라는 못에 이르러서는 잠시 이들을 이끌고 못 위쪽으로 올라가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쉬게 했다. 이제 저 모서리만 돌면 절문이 나오니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자고 했다. 본래 학생들과 함께 오면 꼭 이 자리에서 이 못이 갖는 토목공학적·종교적·미학적 의미를 설명해주고는 한다.
삼인당 연못은 산비탈 한쪽에 일부러 조성한 것이다. 굳이 이 자리에 못을 만든 것은 여름 장마철에 큰물이 오면 일단 여기에 가두었다 계곡으로 흘려 보내는 기능을 한다. 이 못이 없으면 이 산자락에는 홍수 때 지나간 물길 자국만 남아 토사가 빈번히 일어났을 것이다.
삼인당 물은 선암사 동쪽 기슭에서 내려오는 작은 개울물을 모아 채우는데, 발굴조사에 의하면 땅에 묻힌 암거(暗渠) 자취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선암사는 산자락을 타고 집들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경내에는 비탈진 곳마다 이런 못을 여러 개 조성했다. 삼성각과 천불전 계단 아래에는 네모난 방지(方池)가 있고, 심검당과 종무소 곁에는 쌍둥이 못 쌍지(雙池)가 있고, 범종각과 대변소 사이의 석축 아래로는 자연스러운 형태의 지원(池苑)이 있는데 모두 조경적 기능과 토목적 기능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 못의 이름을 삼인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상(諸法無常)·열반적정(涅槃寂靜) 등 세 가지 새김[印]을 말하는 것인데, 요지인즉 마음속에 불법의 기본 원리를 각인한다는 뜻이다. 왜 그런 마음의 새김을 다른 곳 아닌 못에서 상기시키는 것일까?
그것은 판유리가 나오기 이전에 사람이 자신의 전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못에 비친 그림자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삼인당의 구조가 타원형으로 생긴 것은 그 지형 탓도 있지만 경내의 네모난 방지와 석축 밑의 자연스러운 못과는 다른 다양성을 위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타원형의 못 한쪽으로 치우쳐 달걀모양의 섬은 왜 만들었을까?
거기에는 아마도 두 가지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삼인당으로 흘러 드는 물길은 위쪽 가운데로 들어와 아래쪽 옆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어, 이 섬이 없으면 못 왼쪽은 물의 흐름이 생기지 않아 고인 물이 썩게 된다. 그러나 섬이 있음으로 해서 유입된 물은 못 전체를 돌아나가는 회로가 생기는 것이다.
또 하나는 미학적 배려다. 인간의 시각적 습관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극장 객석에 앉으면 무대 오른쪽보다 왼쪽으로 눈이 먼저 가고 또 많이 간다. 그래서 연극에서 무대장치의 기본 원칙을 말해주는 ‘무대지도(stage geography)’를 보면 오른쪽을 무겁게 하고 왼쪽을 비워두라고 한다.
이런 연구에 능했던 예술심리학자인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aim)의 <시각적 인식(Visual Perception)>을 보면 “하나의 공간에 나타난 물체는 또 다른 공간을 창출해 낸다”고 했다. 즉,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빈 바다에 오징어잡이배가 떠 있으면 그로 인해 바다는 더 넓고 다양한 공간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삼인당에 섬이 있어 못은 더 커 보이고 깊은 공간감을 갖게 된 것이다. 삼인당 섬에는 전나무 한 그루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그래서 겨울이면 늘 푸른 전나무가 삭막한 계절의 쓸쓸함을 달래주고, 여름이면 배롱나무 빨간 꽃이 석 달 열흘간 해맑은 빛으로 피어난다. 내가 캐서린 일행과 왔을 때는 배롱나무의 철 지난 마지막 꽃대 서너 송이가 부끄럼을 빛내듯 홍채를 발하고 있었다.
묵은 동네 같은 절
선암사 경내에 들어와 나는 이들을 대웅전 앞마당부터 시작해 경내를 두루 산보하듯 걸어 다녔다. 학생들과 답사할 때면 선암사의 내력부터 여기가 조계종이 아니라 태고종 사찰인데 그 차이가 왜 생겼는지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들 이방인에게는 그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 건물만 둘러보고 즐기는 방식으로 안내하였다.
대웅전 뒤로 돌아 돌 축대를 올라 정원처럼 가꾼 빈터에서 매화나무·벚나무·철쭉나무 노목 사이를 지나 팔상전과 불조전을 둘러보고, 처마 밑 길을 통해 다시 돌계단을 올라 원통전과 노전 앞을 지나갔다.
스님의 허락을 받아 달마전 안채로 들어가 4단 석조(石槽)를 보고 돌아내려오면서 무우전 툇마루에 이들을 앉혀 놓으니, 이제는 건물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절집에 사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느긋이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한 건축의 기능과 아름다움은 이처럼 관객이 아니라 사용자 입장이 되어야 그 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누구나 이 자리에 와본 사람은 알겠지만 무우전 툇마루에서 무덤덤한 산등성이 느리게 뻗어나가는 조계산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듬직하고 차분한 맛을 줄 수가 없다. 조계산의 이런 모습을 육당은 “천지변화를 통으로 잡아 수제비 국으로 끓여내는 것 같은 장관”이라고 했다.
무우전에서 나와 팔상전 앞 큰길을 따라 천불전 방지로 가서 길게 누운 소나무의 기묘한 자태에 웃음을 한 번 주고, 길 아래로 내려와 쌍지에 머리채를 담근 버드나무 곁을 지나 샘물에서 모두 물 한 모금씩 마셨다. 원래 나의 답사 코스는 여기서 대변소를 들러 해천당 돌담길을 끼고 돌아 대각암으로 올라가는 것이 상례였지만,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이만하여도 이방인들의 산사 구경은 넘쳤다는 생각에 만세루 아랫길로 접어들었다.
선암사는 절집의 배치가 매우 독특한 경우다. 우리나라의 산사는 그 위치와 건물 구조에 따라 대략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강진 무위사처럼 소박한 절집이다. 둘째는 부안 내소사처럼 규모를 갖춘 화려한 절이다. 셋째는 구례 화엄사처럼 궁궐 같은 장엄한 절이다.
넷째는 영주 부석사처럼 장대한 파노라마의 전망을 가진 절이다. 그러나 선암사는 이도 저도 아니고 크고 작은 당우들이 길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어 마치 묵은 동네 같은 절이다. 그래서 선암사는 어느 절보다 친숙한 느낌,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실제로 선암사는 어느 한 시점의 마스터플랜에 의해 지은 절이 아니다.
몇 차례 대화재로 전소하고 17세기 호암선사의 중창 때부터 처음에는 대웅전과 삼층석탑의 쌍탑이 있는 앞마당을 둘러싼 요사채의 심검당, 선방인 설선당, 야외 법당인 만세루만 있었을 것이다. 그 후 필요에 따라 크고 작은 건물을 하나씩 증축한 것이 오늘날에는 25채에 이르고, 6·25 전에는 50채나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건물의 규모도 일정하지 않고, 건물이 앉은 레벨도 일정하지 않아 올라가는 계단도 각기 다른 모습인데다 곳곳에 돌담을 둘러 공간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연륜 있는 양반마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전문적으로 말해 선암사의 평면에는 중심축이 보이지 않는다.
선암사가 우리를 더욱 매료시키는 것은 지금 이루 다 말하지 못하는 저 다양한 꽃나무 덕분인데, 이들 나무도 일정한 질서를 갖는 정원 개념으로 심은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빈 칸을 메우듯 심어 지금처럼 어우러져 있다. 혹자는 이것을 선암사 정원의 부족함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을 장점으로 본다.
서양 정원이나 일본·중국 정원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조성한 정원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긴장시키지만, 선암사의 정원에는 그런 경직됨이 없다. 선암사 진입로가 디자인한 태를 보이지 않으면서 사실은 더 디자인적 배려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깊은 산, 깊은 절
선암사 경내를 두루 둘러보고 막 절문 쪽을 향할 때는 정오가 조금 못 되었다. 그때 홀연히 설선당 안에서 스님들의 범패소리가 합창으로 은은히 흘러나왔다. 이방인들은 모두 주춤 멈추고 그쪽으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긴 음으로 연이어지는 육중한 저음의 범패소리를 들으며 느린 걸음으로 발길을 옮겼다.
범패소리는 점점 더 크고 높게 올라갔다. 지나가던 탐방객들도 우리처럼 그쪽으로 향해 서서히 발을 옮겼다. 산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은 역시 범패라는 것을 그때 새삼 깨달았다. 우리가 절문을 나설 때 범패는 끝났다. 캐서린은 나에게 눈길을 주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기막히다(incredible)”고 했다.
같은 길이라도 나가는 길은 들어가는 길보다 짧게 느껴진다. 절문을 나서 삼인당 아랫길로 돌아 강선루를 지나 승선교를 넘어 장승과 부도밭을 지나니 다시 굴참나무 늘어선 빈터로 나오게 되었다. 나는 일행을 이끌고 사하촌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까 선암사에 당도하자마자 단골식당에 들러 이들의 의견을 물어볼 것도 없이 산채비빔밥을 맞춰 놓았다.
이들과 보름간 일하면서 점심을 같이 먹을 때면 그들은 예외 없이 무조건 비빔밥을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식성에 맞을 뿐 아니라 한 상에서 이 사람 저 사람 떠먹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접시를 따로 갖고 먹는 음식 습관에도 잘 맞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한국음식 중에서 비빔밥은 국제화할 수 있는 메뉴라는 생각을 가졌다.
식당 앞마당 평상에서 산채비빔밥을 맛있게 다 먹고 잠시 두 다리 뻗고 커피를 마시면서 쉬는데 캐서린이 일행을 대표해 내게 이렇게 감사의 마무리말을 했다.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오늘 당신이 말한 깊은 산속에 있는 절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사실 나는 건축을 좋아해 세계 여러 나라의 건축을 보았는데, 이 절처럼 특이한 건축은 처음 보았습니다.
모든 건축은 자기 고유의 표정이 있습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네모뿔 모양이고, 파르테논 신전은 맞배지붕집이고, 타지마할은 네모난 상자 위에 양파가 얹힌 것 같고, 중세의 교회들은 파사드(facade;정면)로 특징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 절은 건물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내가 이 절을 다 보았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건물을 돌아 뒤쪽으로 가면 아까 본 건물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고, 또 한쪽으로 옮기면 새 건물이 드러납니다. 그 넓이와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한국의 산은 깊은 산(deep mountain)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런 건축을 깊은 건축(deep architecture)이라고 합니까, 깊은 절(deep temple)이라고 합니까?”
‘깊은 산속의 깊은 절’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산사의 미학적 특질인 것이다
첫댓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보고 듣고 느끼기 보다는 내눈과 귀와 몸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공부를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하고 살고프다. 항상.....잘보고 갑니다. 들릴때마다 시간의 테를 떼어버리지 못하고 되돌아온 아쉬움이 항상 함께 했드랬습니다. 그 곳 그 자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