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김(金)씨 삼현파(三賢派)
0.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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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시조대왕 존영- |
-가락국 시조왕후 존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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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수로왕은 가락국의 시조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신화에 의하면 42년에 가락국의 북쪽 구지봉에 6개의 황금알이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반나절 만에 이 알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여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수로는 그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 키가 9척이나 되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금관 가야국의 왕이 되어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 김수로왕릉 > 인도 아유타 국의 공주인 허황옥을 왕비로 맞았다고 하며, 199년까지 158세를 사는 동안 그가 이룬 업적도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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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로왕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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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년까지 158세를 사는 동안 그가 이룬 업적도 많았다고 한다. 김해 김씨의 시조이며 능은 경남 김해에 있다. 고구려(高句麗) 대무신태열제(大武神太烈帝) 25년 삼월 보름에 북구지에서 구간이 대계(大契)를 연후 수로(首露)를 왕으로 모시니 나라를 대가락(大駕洛)이라 하였으며 또 가야국(伽倻國)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수로형제 다섯은 각기 오가야(五伽耶)의 왕이 되니, 동으로는 황산강(黃山江), 서남으로는 창해, 서북으로는 지리산(地理山),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해설) 그 여섯 가라를 말하면 "신가라", "임라가라", "안라가라", "고링가라", "별뫼가라", "구지가라" 니 여섯 가라국이 처음에는 형제의 연맹국이었으나, 나중에 연대가 내려갈수록 촌수가 멀어져, 각각 독립국이 되어 각자의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 1대 수로왕(首露王) 1년(7239-AD42) 성은 김(金)으로 9간에 의해 6형제와 함께 6가야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2년 봄 정월에 임시대궐 남쪽 신답평으로 가 주위 1,500보 되는 외성에 궁궐전각과 일반관사와 무기고, 곡식창고들의 자리를 잡고, 그달 20일 부터 견고한 성터를 짓는데 그 기간을 농한기를 타서 성을 짓게 하였고 좋은 날을 받에 새로운 대궐로 들어갔으며 일체사무에 근면하였다. 7년(7245-AD48)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許黃玉)이 오빠인 장유화상과 같이 불탑인 파사석탑 (婆娑石塔)과 불경 등을 가지고 들어오니 친히 그녀를 마중나가 성으로 데려오고, 결혼을 하였다. 37년(7275-AD78)년 신라의 길문(吉門)이 쳐들어 와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54년(7293-AD96) 9월 신라의 남쪽을 습격하여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죽였으나, 신라임금이 친히 5천군사로 쳐들어 오니 물러났다. 60년(7299-AD102)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국토 논쟁을 벌이니 임금이 바르게 판결하였다. 74년(7313-AD116)년 신라가 침범하니 황산하(黃山河)에서 이를 물리쳤다. 147년(7386-AD189)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임금은 매양 구슬픈 공방살이 노래를 부르면서 언제나 비탄에 잠겼었다. 157년 왕후가 죽은 지 10년만에 임금이 죽으니 그 나이가 158세였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한길, 주위가 3백보 되는 빈궁을 만들고 여기에 장사하니 수릉왕묘라 불렀다.
>>2대 거등왕 1년(7396-AD199) 3월 13일에 즉위하니, 아버지는 수로왕, 어머니는 허왕후이다. 왕비는 천부경 신보의 딸 모정이니 그는 태자 마품을 나았다. 12년(7407-AD210) 포상팔국(浦上八國)이 침략을 도모하여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니 신라 내해이사금은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찬) 이음(利音)에게 이를 치게 하니 팔국이 모두 항복하였다. 61년 임금이 태자 마품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3대 마품왕 1년(7456-AD259) 아버지 거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왕비는 종장감 조광의 손녀 호구이니 태자 거즐미를 낳았다. 39년 1월 29일에 임금이 승하하니 태자 거즐미가 왕위에 올랐다.
>>4대 거즐미왕 1년(7488-AD291) 일명은 금물(今勿)이니, 왕비는 아궁 아간의 손녀 아지(阿志)니 왕자 이품(伊品)을 낳았다. 56년 7월 8일에 임금이 승하하니 태자 이품이 왕위에 올랐다.
>>5대 이시품왕 1년(7543-AD346) 임금이 거즐미왕의 뒤를 이어 즉위 하니, 왕비는 사농경 극충의 딸 정신이니 왕자 좌지(坐知)를 낳았다. 24년(7566-AD369)에 백제가 병력을 나누어 침공하니 이기지 못하고 패하였다. 58년(7598-AD401) 고구려가 침범하여 들어오니 이를 막지 못하니 임나가라(任那加羅), 아라가야가 항복하였다. 62년 4월 10일 왕이 승하하니 태자 좌지가 왕위에 올랐다.
>>6대 좌지왕 1년(7604-AD407) 일명은 김질(金叱)이니 왕비는 도령 대아간의 딸 복수로서 왕자 취희를 낳았다. 15년 5월 12일 임금이 승하하니 태자 취희가 왕위에 올랐다.
>>7대 취희왕 1년(7618-AD421) 김즐왕이라고도 이르니 왕비는 진사 각간의 딸 인덕이니 왕자 질지를 낳았다. 31년 2월 3일에 임금이 승하하였다.
>>8대 질지왕 1년(7648-AD451) 김질왕이라고도 부르니 왕비는 김상 사간의 딸 방원이니 왕자 감지를 낳았다. 2년 시조왕과 허황옥왕후를 위하여 수로왕과 왕후가 결혼하였던 곳에 절을 세워 황후사라 부르고 전토 10결을 바쳐 여기 충당하게 하였다. 29년(7676-AD479) 바다건너 남제와 통교하였다.(해설) 31년(7678-AD481) 고구려가 신라를 침범하여 신라가 도움을 청하니 군사를 내어 이를 물리쳤다. 42년 10월 4일에 임금이 승하하니 태자 감지가 왕위에 올랐다.
>>9대 감지왕 1년(7689-AD492) 금감왕이라고도 이르니 왕비는 출충 각간의 딸 숙이니 왕자 구형을 낳았다. 30년 4월 7일에 임금이 승하하니 구형이 태자 구형이 왕위에 올랐다.
>>10대 구형왕 1년(7718-AD521) 감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왕비는 분즐 수이즐의 딸 계화이다. 2년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 결혼동맹을 요청하니, 신라임금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딸을 임금에게 시집보냈다. 9년(7726-AD529) 신라가 동맹을 파기하면서 북경과 금관가야를 공격하였다. 12년(7729-AD532) 신라가 본국의 금관가야에 침범하니 금관국왕(金官國王) 김구해(金仇亥)가 항복하였다. 42년(7759-AD562) 신라 진흥제가 본국을 침범하니, 이를 능히 막지 못하여 패하니 신라에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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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김씨의 유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고유한 성과 이름을 가진다.
[ 조선씨족 통보] 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성씨는 모두 623본이라고 한다. 이 숱한 성씨는 나름대로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그중 시조가 뚜렷이 밝혀진 것은 100여본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중에서 김씨가 대성으로 되어 있는데, 김씨는 가락국 수로왕 계통과 신라의 김알지 계통이 있다. 수로왕은 서기 42년 김해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을 세우고, 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 의 시조가 되었다. [ 삼국사기] [삼국유사] 에 의하면 천지 개벽 이래 나라가 없던 이 땅에 기원전 57년 경주 지방에 6촌장들이 모여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진한 12개 부족을 통합하여 신라를 세우고, 기원전 37년에는 압록강변 계루부에서 주몽이 출현하여 다섯 개의 부족을 통합하여 고구려를 세우고 기원전 18년에는 백제(하남 위례성)에서 온조가 나타나 마한 54개의 부족을 통합하여 백제를 세웠다. 이들 제국들은 각기 세력 확장을 위해 땅을 비옥하고 농산물이 풍부한 낙동강 하류의 김해를 중심한 변한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하자 이 지방 부족장들인 9간들이 서기 42년 3월 3일 구지봉에 모여 지도자을 추대하기 위한 의식을 행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라고 노래하며 춤추고 있는데 돌연 구지봉 상공에 자색 밧줄에 금합이 달려 내려 왔다 9간등 무리들이 달려가 금합을 열어 보니 황금빛 번쩍이는 6개의 알이 있었다. 이를 9간 중에 우두머리인 아도간의 집에 모셔 놓았다가 그 이튿날 가보니 6개의 알이 6동자로 변해 있었다. 이 중에서 먼저 나왔다하여 성(姓)을 김(金)이라 하고 추대하여 왕으로 삼으니 이가 김해김씨 시조인 김수로왕이다.[ "삼국유사" 중에서 - 그중 먼저 나온 수로는 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으로 하였다.] 이 수로왕을 시조로하는 성씨가 바로 김해 김씨(金海 金氏) 이다.
[김해는 가락국의 고도로서 지명도 여러가지로 변했으나 고려 충선왕 때 김해부가 설치됨으로써 본관을 김해로 하였으며 가락 김씨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나머지 5동자들에게 차례로 영토를 정하여 분봉하였으니 아라가야(함안지방) 고령가야(함양지방) 대가야(고령지방) 성산가야(성주지방) 소가야(고성지방) 이른바 6가야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선택하고 왕을 추대할 때 김수로왕처럼 알에서 나왔다는 난생설화나 단군신화의 환웅이나 일본의 니니기 강림신화처럼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천손강림설로 그들의 초 인간적인 능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신라 건국 설화는 예로부터 경주지방에 여섯 마을이 있었다. 기원전 69년에 여섯 마을의 우두머리(6촌장)가 알천(軋川)가에 모여서 왕을 모시고 나라를 세우고자 의논하고 있었는데 나정(蘿井)에 하늘로부터 수상한 기온이 뻗고 있어서 가 보았더니 흰 말이 박같이 생긴 알을 보고 절을 하고 있었다. 알을 깨었더니 귀여운 동자가 나타났는데 동쪽 샘물에 씻기니 온 몸에서 빛이 났다. 그래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 성(姓)을 박(朴)씨라고 하고 신라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신라의 건국주요 박씨의 시조다. 이런한 난생설화는 고구려 시조 주몽,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 등에서는 볼 수 있으니 이는 우리 민족에 전승되어 온 건국에 얽힌 사상적 소산이며 강한 자기 긍정과 자존을 심어주는 씨족사적 사실(史實)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3.김해김씨의 파
京 派 경 파 三賢派 삼현파(版도判書公派판도판서공파) 監務公派 감무공파 判書公派 판서공파 都摠管公派도총관공파 府使公派 부사공파 文敬公派 문경공파 忠貞公派 충정공파 司正公派사정공파 翰林公派한림공파 左政丞公派좌정승공파 判典公派판전공파 副正公派부정공파 參奉公派참봉공파 承仕郞公派승사랑공파 副護軍公派부호군공파 判決事公派판결사공파 芸慇公派운은공파 副護軍公派부호군공파 進士公派진사공파 大栽學公派대재학공파 崇政公派숭정공파 등이 있다.
-경파: 경파의 파조인 김목경(金牧卿)은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당시 혼란한 국정을 개탄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누차 왕에게 상소 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 김목경의 맏아들 김보(金普)는 공민왕이 세자 때 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갈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김보의 6세손 김영견(金永堅 : 동지중추부사), 김영서(金永瑞 : 현감), 김영정(金永貞 : 성종 때 대사헌), 김영순(金永純 : 한성판관)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때 명신 김우항(金宇杭)은 김영정(金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사군파: 사군파에서는 파조인 김익경(金益卿)의 손자 김진문(金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색(李穡), 박자검(朴自儉) 등과 함게 은둔 생활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김추(金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김석(金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김조는 세종 때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 자격루(自擊漏), 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그는 벼슬이 옮겨질 때마다 몽은제(蒙恩祭)를 올리는 충신으로서도 이름이 났고, 세종이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榻 : 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化)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한 것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한편 김진문(金振門)의 6세손 김극희(金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김완(金完 : 학천군 김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 할 때 벽동(碧潼)의 성(城)을 사수했던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우(金宇)의 아들 김여준(金汝峻)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 : 인조의 맏아들 인열왕후 한씨의 소생)와 인평대군(璘坪大君)을 호종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중국 심양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를 소리내어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거(禹巨)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잊어 과거의 시제(時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송상현(宋象賢), 유극량(劉克良)과 더불어 삼충절(三忠節)로 일컬어진 김동광은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재직시 임진왜란 일어나 성이 함락되자 좌우를 피난시키고 성의 정문 앞에 조복단장한 채 관인을 쥐고 단좌하여 적에게 저항하다가 참살당하여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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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삼현파(판도판서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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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이십이대 정종대왕(서기 1777년)께서 김해김씨(金海金氏)를 가리켜 삼한갑족(三漢甲族)이라 하시며 절효(극일), 탁영(일손), 삼족당(대유) 세현인을 가리켜 청도 三賢이라 하였으며, 한 집안에서 四代間에 三賢人이 났다는 일은 古來로 드문 일인고로 이로 인해 삼현파(三賢派)로 정하였다 한다. 수로왕이 즉위 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의 고대국가)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인 허(許)씨(태인 허씨)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7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 이씨가 있으며 세 성씨가 다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도 '가락중앙 종친회'로 하였다. 김해 김씨의 중시조는 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金庾信)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며 각간(角干)인 김무력(武力)이고, 아버지는 무열왕의 장인이며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 계파 ] 계파는 금녕군파를 비롯한 142개파가 있으며 김유신의 직계종파인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경파(京派 - 영견, 영서, 영정, 영순) : 고려의 김목경(牧卿)을 중시조로 한다. ·사군파(四君派 - 극조, 완, 여수, 세기) : 목경의 동생 김익경(益卿)이 중시조다. ·삼현파(三賢派 - 극일, 일손, 대유) : 김관(管)을 중시조로 한다.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일세조(一世祖)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學校)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1486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儒)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 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李克墩)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 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 (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 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은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이 목(李 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 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일손(馹孫)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中宗朝) 영의정(領 議政) 남 곤(南 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 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 고 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는 일손(馹孫)의 조카이 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叔父) 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 께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 足堂)에서 73세로 일생(一生)을 마쳤다. 일손(馹孫)의 증손(曾孫) 언유(彦諭)는 고양(高陽)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孝行)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 여 공사(公私)의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彦諭)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 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1. 김수로와 함께 마지막으로 나온 김말로왕은고성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2. 근원이 다른 김해 김씨가 있는데 임진왜란때 왜장 김충선이 조선에 귀화하여 성을 하사 받은 김해(우록) 김씨가 있다. 삼현파 조 관은 고려 충선왕때 판도판서를 역임했고, 왕에게 간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많은 공을 세웠으며, 조선에서는 그의 5세손 극일이 유명했다. 극일은 일찍부터 세종때 조정으로 부터 효자정문이 세워졌고, 그의 둘째아들 맹은 세종때 급제하여 집의를 역임했고, 맹의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올라 당대의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김씨삼주>라 불리웠다. 이밖의 인물에는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운 조선의 명장 경서(景瑞)와 조선의 화가중에 제 일인자로 꼽히는 홍도(弘道)가 있다.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中國語)에 능통했던 덕승(德承),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예직(禮直), 조선 풍속화의 조종(祖宗) 이유명했고, 충효정려(忠孝旌閭)를 사액(賜額)받은 진희(晋熙)와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천택(天澤) 등이 명문거족(名門巨族)의 김해 김씨(金海金氏)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892,328가구, 3,767,0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5.항렬표
派 |
始祖 |
67 |
68 |
69 |
70 |
71 |
72 |
73 |
74 |
75 |
76 |
77 |
78 |
79 |
80 |
81 |
金寧君派 경파(京派) |
51大파조목경 |
17현鉉 |
18제 濟 |
19식植 |
20 현顯 |
21 배培 |
22종鍾 |
23태泰 |
24영榮 |
25겸謙 |
26재載 |
27진鎭 |
28호浩 |
29근根 |
30익益 |
31용用 |
板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
49大파조관 |
19 67
昌 (창)
|
20 68
斗 (두) |
21 69
容 (용) |
22 70
坤 (곤) |
23 71
鍾 (종) |
24 72
洙 (수) |
25 73 相 (상) 東 (동) |
26 74 煥 (환) 熙 (희) |
27
75
廷 (정) 在 (재) |
28
76
鎬 (호) 鎭 (진) |
29
77
永 (영) 汶 (문) |
30
78
根 (근) 杓 (표) |
31
79
炳 (병) 炅 (경)
|
32
80
埰 (채) 基 (기) |
33
81
錫 (석) 銘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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監務公派 사군파(四君派) |
51大파조익경 |
17석錫 |
18태泰 |
19상相 |
20현炫 |
21재在 |
22호鎬 |
23영永 |
24식植 |
25형炯 |
26규奎 |
27용容 |
28순淳 |
29동東 |
30환煥 |
31기基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