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 황벽 스님의 법을 완벽하게 도둑질 하다 / 종광 스님
황벽과 임제 두 스님에 대해
높고 낮다는 세간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황벽은 스승으로 완벽하고
임제는 제자로 더없이 훌륭
勘辨
감변은 수행하는 스님들이 서로 문답이나 특이한 행동을 통해
상대방의 안목을 점검하는 것을 말합니다.
감(勘)은 조사하거나 살핀다는 의미이고
변(辨)은 구별하고 가리거나 또는 판결한다는 뜻입니다.
감변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뤄지는 문답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선종이 지향하는 활발발한 현장감이 잘 살아있습니다.
黃檗이 因入廚次에 問飯頭호되 作什麽오 飯頭云, 揀衆僧米니다
黃檗이 云, 一日에 喫多少오 飯頭云, 二石五니다
黃壁이 云, 莫太多麽아 飯頭云, 猶恐少在니다 黃壁이 便打하다
해석) 황벽 스님께서 부엌에 들어갔을 때, 공양을 담당하는 반두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는가?” 반두 스님이 대답했다 “대중 스님들이 먹을 쌀을 고르고 있습니다.”
황벽 스님이 물었다. “하루에 얼마를 먹는가?” 반두 스님이 대답했다.
“두 섬 닷 말을 먹습니다.” 황벽 스님이 다시 물었다. “너무 많이 먹지 않는가?”
반두 스님이 대답했다. “오히려 적을까 걱정입니다.”
황벽 스님이 곧바로 반두 스님을 후려쳤다.
강의) 반두 스님은 선원 대중 스님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스님입니다.
군대로 따지자면 취사병입니다. 신병이 군대에 오면 취사병을 맡는 것처럼
반두 스님도 이제 갓 선문에 들어온 초심자입니다. 그야말로 햇병아리 스님입니다.
그런 스님에게 황벽 스님이 묻습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고.”
사실 황벽 스님의 질문은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쌀을 대상으로 삼았지만 속내는 수행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얼마나 진척이 있는지 묻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두 스님은 이해를 못합니다.
큰 스님의 속뜻도 모르고 쌀에만 푹 빠져 있습니다.
쌀이 불성을 의미하는 말일 수도, 깨달음의 정도를 묻는 말일 수도 있다는 점을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수행자인데도 스스로 부엌데기로 착각하고 있으니
스승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몽둥이가 나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묻는 족족 삼천포로 빠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飯頭却擧似師한대 師云, 我爲汝勘這老漢호리라
纔到侍立次에 黃壁이 擧前話어늘 師云, 飯頭不會하니
請和尙은 代一轉語하소서하고 師便問 莫太多麽아
黃檗이 云, 何不道來日에 更喫一頓고 師云, 說什麽來日고
卽今便喫하소서 道了하고 便掌하니 黃壁이 云,
這風顚漢이 又來這裏捋虎鬚로다 師便喝하고 出去하니라
해석) 반두 스님이 이 일을 임제 스님에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말했다.
“내가 그대를 위해 이놈의 늙은이를 시험해 보겠다.”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이 계신 곳에 도착하여 옆에 서자마자
황벽 스님이 먼저 앞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말했다.
“반두 스님이 알지 못하니 스님께서 깨달을 수 있는 한마디 말씀을 해 주시지요.”
그리고는 물었다. “너무 많지 않습니까?” 황벽 스님이 대답했다.
“내일 다시 한 번 더 먹는다고 왜 말하지 않는가?” 임제 스님이 말했다.
“어째서 내일을 말씀하십니까? 지금 당장 잡수시지요.” 하고는 바로 손바닥으로 쳤다.
황벽 스님이 말했다. “이 미친놈이 또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만지는구나.”
그러자 임제 스님이 ‘할’하고 소리를 지르고 나가버렸다.
강의) 황벽 스님과 임제 스님의 대화 장면입니다.
황벽 스님의 말씀을 임제 스님이 대신 물으며
반두 스님이 어떻게 대답해야 했는지를 일깨워 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선의 자유로움입니다.
선원은 권위로 유지되는 곳이 아니라 진리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스승을 ‘늙은이’로 표현하고, 스승을 대상으로 법거량을 할 수 있는 것도
선의 열린 자세 때문입니다.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전통도 이래서 가능합니다.
선은 모든 권위와 위선을 털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위 대화의 요체는 무엇일까요. 즉시현금(卽時現金) 갱무시절(更無時節)입니다.
“바로 지금 현재만 있을 뿐 또 다른 시절이란 없다.” 임제 스님의 말씀입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고 현재를 주인으로 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을 한 번 더 음미하자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부처라는 뜻으로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後에 潙山이 問仰山호되 此二尊宿意作麽生고 仰山云,
和尙은 作麽生고 潙山이 云, 養子에 方知父慈니라
仰山이 云, 不然하니다 潙山이 云 子又作麽生고
仰山이 云, 大似勾賊破家니다
해석) 뒷날 위산 스님(771~853)께서 앙산 스님(803~887)에게 물었다.
“두 존숙의 뜻이 무엇이겠는가?” 앙산 스님이 되물었다.
“화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산 스님이 대답했다.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앙산 스님이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산 스님이 물었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앙산 스님이 대답했다.
“마치 도적을 집에 끌어들여 집안을 망쳐 놓는 것과 같습니다.”
강의) 위산 스님은 황벽 스님과 함께 백장 스님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대화는 충분히 있음직한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황벽 스님과 임제 스님이 두각을 나타내기 전
이미 이 두 분 스님은 위앙종(仰宗)이라는 종파로 일가를 이룬 분들입니다.
그러나 황벽 스님과 임제 스님은 그리 크게 추앙을 받던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사숙격인 위산 스님이 임제 스님을 존숙으로 부를 정도로 존칭을 한 것도 맞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대화는 위산 스님과 앙산 스님의 권위를 빌려
임제 스님을 높이기 위해 후대에 가탁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어찌됐든 황벽 스님과 임제 스님의 대화에 대한 두 스님의 평가가 다릅니다.
위산 스님은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의 사랑을 안다는 말로
황벽 스님이 임제 스님을 위해 자비를 베푼 것으로 해석합니다.
무례한 법거량에도 친절하게 응대해 주고 나중에는 칭찬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보다 더 지극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러나 앙산 스님은 제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임제라는 뛰어난 제자가 황벽 스님의 법을
완벽하게 도둑질해 버렸다고 평가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두 스님의 평가를 굳이 높고 낮다는 세간의 잣대로 봐서는 안 됩니다.
황벽 스님은 스승으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임제 스님 또한 제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아마도 선문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은 없을 겁니다.
호랑이 수염을 만지고 있다는 황벽 스님의 말씀에
제자인 임제 스님에 대한 뿌듯함이 잔뜩 담겨 있습니다.
師問僧호되 什麽處來오 僧이 便喝이어늘 師便揖하고 坐케하니
僧이 擬議라 師便打하다 師見僧來하고 便竪起拂子하니
僧이 禮拜한대 師便打하니라 又見僧來하고 亦竪起拂子하니
僧이 不顧어늘 師亦打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그 스님이 곧바로 “할”하고 고함을 쳤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공손히 인사를 하며 앉게 했다.
그러자 그 스님이 머뭇거렸다. 임제 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임제 스님이 한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곧바로 불자를 세웠다.
그러자 그 스님이 절을 했다. 임제 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또 한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임제 스님이 불자를 세웠다.
그 스님이 본체만체했다. 임제 스님이 이번에도 역시 후려쳤다.
강의) 임제 스님께서 학인을 대하는 방법은 이미 앞서도 여러 차례 등장했습니다.
이 단락의 내용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살펴보면 처음의 학인은 임제 스님을 보자마자 바로 부정해 버립니다.
두 번째 스님은 임제 스님을 보자 바로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스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임제 스님에게 죽비로 얻어맞습니다.
긍정과 부정, 긍부정도 아닌 세 가지 양태에서 적어도 하나는 정답이어야 할 텐데
모두 틀렸다고 하니 모를 일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아마도 보이는 모습으로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습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면 영원히 그릇되게 됩니다.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볼 때 여래를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이들 학인들이 하나같이 주인은 되지 못하고
주인의 흉내만 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행동은 제각기 다르지만
어느 누구도 답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전통 현악기 중에 거문고와 가야금이 있습니다.
손으로 누르고 뜯는 것으로 소리를 내는데,
누르고 뜯는 힘이나 강도를 절대 수치로 나타낼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 악기가 유독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 예술고에 다니는 어린 학생이 선생님에게 물어봤답니다.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낼 수 있는 힘이나 강도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그랬더니 선생님이 그랬답니다. 세월이 가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오랫동안 연주하다보면 몸이 안다고 했답니다.
모든 악기가 그렇겠지만 거문고나 가야금은 특히 몸으로 체득해서 연주해야 한다고 합니다.
눈 밝은 선생님이라면 제자가 흉내만 내는지
진짜로 가야금을 타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임제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인들이 할을 하든, 인사를 하든,
본체만체 하든 관계없이 깨닫지 못했음을 바로 알아차린 겁니다.
흉내만 낸 것임을 알고 있기에 몽둥이질을 한 것입니다.
만약 이들 학인들이 진리의 자리에 서 있었다면
그들의 행동에 관계없이 모두 정답이었을 것입니다.
선의 달인이 임제 스님이 그걸 놓쳤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의 질문에 대한 학인 스님들의 반응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하고 흉내를 내는 것으로 선지식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스승이 알아보기 전에 본인이 먼저 알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명심해야 합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영영 멀어지게 말게 될 것입니다.
2013. 05. 07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