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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x.doi.org/10.17090/kcwls.2016..32.131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32집,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6. 131-165면.
‘정순왕후 송씨’를 둘러싼 기억과 그 거리 서미화(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차례>
1. 머리말
2. 정순왕후 송씨의 생애와 추복과정
3. 정순왕후 송씨를 바라보는 시선의 세 층위
1) 과거 재정립과 충절 강조의 일측면
2) 세조를 비판하기 위한 우회적 매개자
3) 남편 잃은 여성, 애달픈 사연
4. 정순왕후 송씨를 기억하는 방식과 의미
5. 결론
<국문초록>
본 논문은 단종의 비(妃)인 정순왕후 송씨의 삶을 복원한 후, 후대에 그녀를 둘러싼 이야기가 어떠한 양상으로 기억되는지를 살펴보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 것이다. 계유정난과 관련한 인물들인 단종, 세조, 사육신 등 남성 서사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 송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리하여 그녀의 삶과 관련한 기록들을 면밀히 조사하여 그녀가 후대에 어떠한 이미지로 자리매김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순왕후 송씨에 대한 흔적은 삭제되고 말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이 거론되면서 정순왕후 송씨에 대한 기록과 흔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크게 세 층위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첫째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국가 주도의 기억, 둘째 야담에 전해오는 사대부의 기억, 셋째 구전되어 오는 민간의 기억이다. 국가 주도의 기록에서는 과거를 재정립하고 신하들의 충절을 강조하는 왕권강화의 한 측면에서 그녀를 기록했다. 일부 사대부들은 정치 비판의 발언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세조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매개자로서 그녀를 소환했다. 구전되는 이야기에서는 한 많고 애달픈 사연의 주인공으로 그녀를
위로하고 기억했다. 후대에 복원된 그녀에 대한 기억은 과거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회나 개인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단절된 시간은 그녀에 대한 기억을 혼재되게 만들었다. 그녀의 삶과 관련한 기억들은 일부분만이 파편처럼 전해져 왔을 뿐이다. 한 인물에 대한 기억이 여러 층 위에서 변주되는 양상을 통해 역사를 기록하는 주체에 따라 기억이 달라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머리말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는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계유정난과 관련해 단종의 애사(哀史)에 대해서는 익숙히 회자되지만 단종의 비가 정순왕후 송씨임을 아는 이는 드물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정순왕후 송씨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계유정난, 단종복위운동)과 담론(충신, 의리론), 인물(남성에 국한)들은 강렬한 인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연구사에도 그녀에 관한 정보는 거의 전무하다. 저작물에서도 찾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각도에서 조사해보면 그녀의 존재감에 비해 적지 않은 이야기들이 흩어져 있다. 이에 그 기록들을 한 자리에 모아 그녀의 대한 기억과 의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정순왕후 송씨에 대한 재구는 ‘계유정난’부터 시작한다. 계유정난은 조선 초기에 일어난 일종의 충격적 정치사건이다. 수양대군은 1453년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두 아들을 죽였다. 김종서의 죽음은 곧 수양대군의 승리를 뜻했다. 사변 직후 수양대군은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계획에 따라 여러 대신과 친동생인 안평대군을 죽였다. 정상적인 왕위 계승을 통해서가 아니라 조카를 내치고 정권을 차지한 것이다. 단종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정순왕후 송씨 또한 ‘부인’으로 강등되어 궁에서 나가 살게 된다. 이러한 비극은 당시의 유교윤리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사람들에게 심리적 충격과 안타까움을 주었고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세조가 집권한 이후 단종은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발화하기가 어려운 인물이었다. 단종을 언급한다는 것은 당대 통치 세력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달라졌다.
선조, 숙종대를 거치면서 그간 쉽게 거론되지 못했던 단종 및 사육신 추복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다. 단종의 복위는 그와 관계된 많은 신하와 가족들이 함께 복권됨을 의미한다. ‘정순왕후 송씨’도 그러한 맥락과 이해관계 안에 있다. 그녀는 남편이 폐위 당한 후 공식 역사 속에서 사라져갔지만 숙종 때에 이르러 다시 부활한다. 단종 담론을 자유롭게 거론할 수 있는 때부터 그녀에 대한 기억은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서 본고는 다음과 같은 절차로 진행하고자 한다. 먼저 남성 정치 서사에 가려진 정순왕후 송씨의 삶을 복원해 보고자 한다. 공식 역사를 통해, 정순왕후 송씨가 왕비로 간택되었다가 부인으로 강등된 정황을 살피고 숙종대에 추복되는 과정을 정리해 본다. 다음으로는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을 한 자리에 모아 여러 기억들이 어떤 지점에서 갈리는지 살펴본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는 관점이 조금씩 달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기억’이라는 단어는 특정한 함의를 갖는다. 그것은 공식적 차원의 ‘역사’와 다소 거리가 있다. 역사가 권력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라면 기억은 잠재되고 잊힌 진실에 해당한다.1)
1) 전진성,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 휴머니스트, 2005, 15면.
이 글에서 더듬어 가는 기억들은 정순왕후가 살았던 당시의 기록보다 후대의 기억에 더 방점을 둔다. 단절된 시간은 그녀에 대한 기억을 혼재되게 만들었다. 그녀의 흔적은 세조대에서 숙종 때까지 오랜 시간 멈춰져 있다가 재구된 것이다. 나아가 재현하고자 하는 기록자나 구술자의 의도에 따라 그녀의 삶이 고정되지 않고 변주되었다는 점도 확인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기억들이 왜 저마다의 시선을 지니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미를 짚어 볼 것이다.
2. 정순왕후 송씨의 생애와 추복과정
조선의 제6대 왕 단종의 정비인 정순왕후 송씨(1440-1521)는 세종22년(1440), 1월 28일에 태어났다. 단종 2년(1454), 15살의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아버지는 송현수2)이고 어머니는 민소생(閔紹生)의 딸이다. 민소생과 민대생(閔大生)은 형제간으로 민대생의 딸이 한명회에게 시집갔다.3) 송현수의 누이는 세종의 8번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부인(송씨의 고모)이다. 당시 송현수는 궁중에 바치는 곡물을 취급하는 풍저창4)(豊儲倉)의 부사로 종 6품에 지나지 않는 말단의 미관직이었다.
시기를 따져보면 정순왕후 송씨의 간택(1454)은 계유정난(1453) 이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애초에 정순왕후 송씨는 수양대군5)이 정치 권력을장악한 이후에 궁에 들어온 것이다. 그때의 정황을 살펴보자.
세조(世祖)가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
한남군(漢南君) 이어(李 )와 좌의정 정인지(鄭麟趾)․우의정 한확(韓
確)․이조 판서 정창손(鄭昌孫)․병조 판서 이계전(李季甸)․예조 판서
김조(金銚)․좌승지 신숙주(申叔舟)․우승지 박팽년(朴彭年) 등이 빈청
(賓廳)에 모여서 의논하여,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비(妃)로 하고 김사우
(金師禹)․권완(權完)의 딸을 잉(媵)으로 할 것을 아뢰었다.6)
2) 본관은 여산(礪山). 아버지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복원(復元)이며, 단종의 장인이다. 1454년(단종 2) 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로 있을 때 딸이 단종의 비로 책봉되자 여량군(礪良君)에 봉해졌고, 곧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제수받았으며 이어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숙종 때 영돈녕부사에 추증되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정조 때인 1791년(정조 15) 2월에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한명회는 여흥 출신인 민대생(閔大生)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처가를 통해 여흥 지역에도 연고를 가지고 있었다. 강제훈, 「조선 초기 훈척 한명회의 관직생활과 그 특징」, 역사와 실학 43, 역사와 실학회, 2010, 9면 참조.
4) 고려․조선시대 중앙의 제반경비를 주관하던 관서.
5) 이 시기는 단종 때이므로 수양대군으로 밝혀둔다. 이후 세조집권기부터는 세조로 통칭한다.
6) 단종실록 권 10, 단종 2년 1월 10일.
정순왕후가 간택되는 데에는 수양대군의 입김이 상당히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송현수와 세조는 오랜 지기7)로 알려졌다. 수양대군 편에 서 있는 종친8)인 영응대군과 인척관계9)에 있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한명회와 여산 송씨 집안도 혼맥을 맺고 있었다. 여러모로 그녀는 수양대군의 앞날에 방해될 것이 없었다. 간택이 이루어질 당시 문종의 상(喪)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터라 국혼을 하는 것 자체에 대한 반대의견10)도 있었고 최종간택까지도 여러 안팎의 대립11)이 있었으나 수양대군이 이를 묵살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정순왕후 송씨는 철저히 수양대군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정순왕후는 1454년 1월 왕비가 되었다가, 1455년 7월 단종이 상왕이 되면서 의덕왕대비12)가 되었다. 이듬해 사육신을 중심으로 단종복위운동(세조2년)이 일어났다. 송현수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세조의 배려로 목숨은 건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457년(세조3년) 6월, 송현수와 권완이 반역을 도모한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쫓겨났고 그녀 또한 노산군부인이 되었다. 같은 달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주변의 인물들을 포섭하여 거사하려 한다는 정보가 세조에게 알려지면서 송현수와 금성대군은 사형에 처해졌다. 영월에 있던 단종(17세)도 죽음을 맞이한다.13)
7) 세조실록 권 4, 세조 2년 6월 13일 : 임금이 송현수(宋玹壽)에게 술을 부어 올리게 하고 그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근일에 경의 마음의 움직임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 모두 경이 참여하여 들었으리라고 의심하였으나, 내 굳게 고집하여 듣지 아니한 것은 경이 나의 옛 친구인 까닭이다.”하니, 송현수가 머리를 조아려서 사례하였다.
8) 김경수, 「세조대 단종복위운동과 정치세력의 재편」, 사학연구 83, 한국사학회, 2006, 99-100면 참조.
9) 영응대군은 세종27년(1445), 12세에 혼인하였다. 송복원의 딸 송씨(송현수의 누이)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혼인한지 5년만에 송씨가 병약하다는 이유를 들어세종이 며느리를 내보낸다. 세종은 직접 나서 영응대군의 재혼을 서둘렀고 정충경의 딸 정씨와 다시 혼인한다. 그런데 영응대군은 세종이 죽고 난 뒤 단종 1년에 후처인 정씨를 내쫓고 전처인 송씨를 다시 맞아들였다. 한희숙, 「조선 초기 대군들의 이혼사례와 처의 지위」, 여성과 역사 22, 한국여성사학회, 2015, 71-74면.
10) 단종실록 권 9, 단종 1년 12월 29일.
정순왕후 송씨가 실제 왕비로 살아간 기간은 1년 6개월이다. 대비로 2년을 살았고, 이후 노산군 부인으로 강등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부인.
11) 단종실록 권 9, 단종 2년 1월 6일.
12) 세조실록 권 1, 세조 1년 7월 11일 : 노산군을 봉(封)하여 공의 온문 상태왕(恭懿溫文上太王)으로 하고, 송씨(宋氏)를 의덕 왕대비(懿德王大妃)로 하였다.
13) 세조실록 권 8, 세조 3년 6월 21일, 27일, 자세한 정황은 김경수, 앞의 논문, 78-83면 참조
정순왕후 송씨는 말년에 시양자 정미수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정미수(1456-1512)는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와 영양위 정종의 아들로 경혜공주와 정종이 사육신 사건에 연류되어 광주에 유배가 있을 때 태어났다. 세조 7년(1461) 부친이 단종복위 음모에 관련되어 처형되자 세조(와 정희왕후)가 데려다 기르고 미수(眉壽)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477년 정희왕후가 정미수를 정순왕후 송씨에게 시양자로 맺어준다. 정미수는 성종에게 자신이 직접 정순왕후를 봉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으며, 성종이 허락하자 봉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미수는 정순왕후보다 먼저 죽는다. 정순왕후는 세상을 뜰 때 자신의 노비며 재산을 단종과 자신의 후일을 위해 정미수의 처에게 넘겨준다. 정순왕후 송씨가 실제 왕비로 살아간 기간은 1년 6개월이다. 대비로 2년을 살았고, 이후 노산군 부인으로 강등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부인(夫人)14)으로 사가에 나가 있었다. 그녀는 왕비에 책봉된 뒤 곧이어 지위가 급변하고 아버지와 남편을 차례로 잃은 것이다. 그러다가 여든 두살(1521, 중종16년)에 생을 마감했다. 정순왕후가 살아 있을 당시에 기록된 정사를 통해 드러난 정순왕후 송씨의 궤적은 대략 이 정도이다.
송씨가 궁을 나가 어떻게 보냈는지는 그 시기 사료에서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녀는 중종 때를 마지막으로 한동안 역사기록에서 사라진다. 이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 단종의 추복이 조심스럽게 수면위로 등장한다. 정순왕후의 추복은 단종추복의 부차적 결과물이다. 단종의 운명은 곧 그녀의 인생이었고 단종추복은 정순왕후가 역사에서 다시 부활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노산군은 그간 치제(致祭) 문제15)로 왕조실록에 종종 나타나지만 복위문제는 쉽게 거론되지 못했다.
14)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다음 기록에서 전한다. 중종실록 권 42, 중종 16년 6월 5일 : “노산 부인(魯山夫人) 송씨(宋氏)의 상사(喪事)는 의거할 예(例)가 없으니, 왕자군(王子君) 부인의 호상하는 예수(禮數)에 의하여야 하겠다. 예조로 하여금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내가 짐작해서 정하겠다.”// 이런 전교가 내려진 이후에서야 노산군부인으로 다시 칭해졌다는 것도 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중종실록 권 53, 중종 23년 2월 11일 : 예조가 아뢰기를, “충청도 관찰사의 장계(狀啓)에 ‘노산군(魯山君)의 후궁(後宮) 김씨(金氏)가 충주(忠州)에서 살다가 죽었다.’고 했는데, 김씨가 생존했을 때에도 해마다 쌀과 소금 등의 물건을 내렸었고, 노산군 부인 송씨(宋氏)가 졸(卒)하였을 적에는 부의(賻儀)를 내리도록 했었으니,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하리까?” 이를 통해 궁에서 나간 당시에는 군부인, 대군부인(君夫人, 大君夫人)도 아니라 부인(夫人)의 위치로 살아갔음을 추측할 수 있다.
15) 중종 11년, 선조 9년, 선조 14년, 선조 36년, 광해군 2년, 효종 4년, 현종 3년 등, 보다 자세한 정황은 윤정, 「숙종대 단종 복위의 정치사적 의미」, 한국사상사학 22, 한국사상사학회, 2004, 212-218면 참조.
여기서부터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조선후기에 어떤 상황에서 복위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17세기 선조 때이다. 15세기 후반 이래 중앙에 진출하였던 사림세력은 이후 몇 차례의 사화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선조의 즉위와 함께 재집권하게 되었다. 선조 2년 5월 석강에 참석한 기대승은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운동’을 거론하였다. 이때의 논의는 종묘에서 문종의 신위를 체천(遞遷)하는 것을 언급하면서 노산군이 세조에게 선위하였다고 거론하는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선조는 노산군과 세조의 입장은 이해하면서도 당시 단종의 편에 섰던 신하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16) 육신전 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
“이제 이른바 육신전 을 보니 매우 놀랍다. 내가 처음에는 이와 같은 줄 은 생각지도 못하고 아랫사람이 잘못한 것이려니 여겼었는데, 직접 그 글 을 보니 춥지 않는 데도 떨린다”17)
선조는 육신전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고 누구든 이 문제를 발설하면 중죄로 다스리겠다고 천명하였다.18) 이때는 사육신 사후 100여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 문제를 역사의 사실로 볼만큼 거리가 생기지 않았고 감정적으로 처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한 세기가 흘러 숙종 대에 이르렀다. 이때에 와서야 분위기는완전히 달라진다. 우선 논의 자체가 국왕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사육신 복권을 비롯해 상당수의 복권 조치가 이루어졌다. 숙종 17년(1691)에 사육신이 먼저 복권되었다. 그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저 육신(六臣)이 어찌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거스를 수 없는 것인 줄 몰랐겠는가마는, 그 마음이 섬기는 바에는 죽어도 뉘우침이 없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사람이 능히 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그 충절(忠節)이 수백 년 뒤에도 늠름(凛凛)하여 방효유(方孝孺)․경청(景淸)과 견주어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당세에는 난신(亂臣)이나 후세에는 충신이라는 분부에 성의(聖意)가 있었으니, 오늘의 이 일은 실로 세조(世祖)의 유의(遺意)를 잇고 세조의 성덕(盛德)을 빛내는 것이다.” 하였다.19)
16) 이근호, 「16~18세기 ‘단종복위운동’ 참여자의 복권 과정 연구」, 사학연구 83,한국사학회, 2006, 127면.
17) 선조실록 권 10, 선조 9년 6월 22일.
18) 선조실록 권 10, 같은 날.
19) 숙종실록 권 23, 숙종 17년 12월 6일.
숙종은 세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신료들로 하여금 국왕에 대한 충절을 강조하고자 했다. 세조는 천명을 봉행하고 민심을 구현한 것으로 남겨두었으며 사육신은 군국에 대한 충정을 이행한 자로 강조되었다.
숙종은 사육신 복권에 앞서 노산군이 정비(定妃)의 소생이라 하여 ‘대군’으로 추증토록 하였다.20) 이는 노산군에게 합당한 명분을 부여하는 조치였다는 점에서 복위의 가능성을 전망케 하는 것이었다.21) 이러한 일련의 배경 아래 숙종 24년(1698), 단종의 추복이 이루어진다.
노산 대군(魯山大君)의 시호(諡號)를 추상(追上)하여 ‘순정 안장 경순대왕(純定安莊景順大王)’이라 하였는데, (…중략…) 묘호(廟號)는 단종端宗)이라 하니,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잡음을 단(端)이라 한다. 능호(陵號)는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부인의 시호(諡號)를 ‘정순(定順)’이라 하니, 순행(純行)하여 어그러짐이 없음을 정(定)이라 하고, 이치에 화합하는 것을 순(順)이라 한다 하였다. (…중략…) 능호(陵號)는 ‘사릉(思陵)’이라 하였다.22)
이 시기 왜 이러한 변화가 나타났을까? 우선적으로 선조 때에 비해 시간이 더 흘렀기에 객관적 거리감이 확보될 수 있었다. 또한 잇단 전란 이후 유교 윤리 강화를 통한 통치체제의 재정비가 필요했다. 또한 숙종이 사육신 문제에 대해 결정적 인식변화를 보이게 된 것은 앞서 발생했던 기사환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23) 마침내 숙종은 노산대군을 국왕으로 복위시켰다. 그리하여 정순왕후도 함께 추복이 된다.
정순왕후는 본디부터 고려대상이 아니었지만 단종이 국왕으로 복위되자 역시 자연스럽게 추복이 된다. 그녀는 단종에게 종속된 사람이었다. 이 시점부터 오랫동안 수면 아래 있던 그녀에 대한 기억이 다시 공론의 장으로 들어온다.
20) 숙종실록 권 12, 숙종 7년 7월 21일.
21) 윤정(2004), 앞의 논문, 220면.
22) 숙종실록 권 32, 숙종 24년 11월 6일.
23) 자세한 사항은 윤정(2004), 앞의 논문, 227-233면 참조.
3. 정순왕후 송씨를 바라보는 시선의 세 층위
정순왕후 송씨에 대한 언급과 발언은 단종 복위 운동이 거론되기 시작한 조선 중후기 시기부터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세조이후 지배세력에게 단종은 어느 한때 분명한 잊음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어떤 목표점 자체를 부여치도 않았다. 그럼에도 산발되어 잔존하는 기억들이 있었다. 그녀에 대한 후기 흔적들은 이런 기억과 망각의 접점에 놓여있다. 흔적은 소략했지만 남겨진 형식은 매우 다양하여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공식 역사서나 야담 등에 실려 전해지거나 구전으로 전해져 오기도 한다. 정순왕후에 대한 기록들은 서로 각기 다른 관점에서 정순왕후를 바라보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에 정순왕후 송씨를 바라보는 시선의 층위를 셋으로 나누어 그 양상과 의미를 짚어보기로 한다.
1) 과거 재정립과 충절 강조의 일측면
먼저 공식 역사서에 드러나는 송씨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숙종대의 상황을 살펴본 바와 같이 단종 추복은 그 시기 정치적 사건(세 차례의 환국)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국왕에 대한 충절 강조의 일환으로 가능했다. 영조 역시 마찬가지의 입장에서 줄곧 단종의 제신들에 대한 포장 조치를 꾸준히 이행했다. 정치적으로 쟁점이 되는 큰 사건들이 생겼을 때는 물론, 국왕이 신하들을 견제하며 왕권 강화 및 탕평을 실행하고자 할 때 ‘군신 의리’의 강조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이들과 관련된 사적의 정비와 인물 현창에 대한 조처를 확대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24) 정순왕후 송씨는 이와 같은 정치상황 속에서 사회적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궁을 나간 이후 그동안 알기 어려웠던 그녀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영조 47년(1771) 8월 28일의 기록을 살펴본다.
임금이 정업원(淨業院)의 옛터에 누각(樓閣)을 세우고 비석을 세우도록 명 하고,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다섯 자를 써서 내렸다. 정업원은 흥인문(興 仁門) 밖 산골짜기 가운데에 있는데, 남쪽으로 동관왕묘(東關王廟)와 멀지 않았으며, 곧 연미정동(燕尾汀洞)으로, 단종 대왕(端宗大)의 왕후 송씨(宋氏) 가 손위(遜位)한 후 거주하던 옛터이다.25)
이들 이야기는 세조 시절 송씨의 삶에 대한 실증적 보고들이 아니다. 당시의 사연이 구술로 전해지다가 영조 때에 사적으로 정비되어 기록된 것이다. 정업원구기를 세운 근거는 35년전 승정원일기 에 그 정황이 전한다. 영조 12년(1736) 8월 29일의 기록26)인데 이 날은 영조가 정순왕후 송씨의 능인 사릉에 나아가 예를 마치고 올라가 봉심을 한 날이었다. 왕과 정운희27)의 대화에서 정순왕후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운희는 이때 “정순왕후가 동대문 밖 영빈정동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수시로 집 뒤에 있는 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아 예부터 그 봉우리를 동망봉이라 불렀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왕후가 스스로를 정업원 주지라고 칭했다”라고 전했다. 이로 인해 훗날 그 위치에 정업원구기라는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24) 이현진, 「조선후기 단종 복위와 충신 현창」, 사학연구 98, 한국사학회, 2010,60-61면.
25) 영조실록 권 117, 영조 47년 8월 28일.
26) 승정원일기 832책, 영조 12년 8월 29일 : 運熙曰 ; “王后當初隨往, 旣無古傳, 小臣未能詳知, 而其時自朝家, 欲造家舍以給, 則王后願得望寧越之地居焉. 故構屋於東大門外英嬪貞洞, 而時登屋後石峯, 以望寧越, 故號其峯曰東望峯. 王后自稱號曰淨業院住持, 而中廟朝寧越致祭後, 始稱魯山君夫人矣.”
27) 그 당시 사릉참봉, 해주 정씨가의 봉사손(奉祀孫)
영조는 정업원구기를 세우고 얼마 되지 않아 왕세손과 창덕궁에 나아갔다가, 이어 정업원28)으로 향했다. 영조 47년(1771) 9월 6일의 일이다.
이때 임금이 사릉(思陵)의 능역(陵役)으로 인하여 사릉의 옛일에 대해 물 었는데, (…중략…)임금이 정운유에게 명하여 정업원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 가 입시토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후(聖后)께서 언제 이곳에 와서 거주하셨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어느 해인지 징험할 만한 문자가 없습니 다. 그 당시 광묘(光廟)께서 정순 왕후(定順王后)가 외롭게 의지할 곳이 없 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경중(京中)에 집을 내려 주고자 하였으나, 왕후께 서 동문(東門) 밖의 동쪽 땅이 바라보이는 곳에 살기를 원하니, 재목을 내 려 주어 짓도록 명하였는데, 이것이 곧 정업원 기지(基址)입니다. (…중략…) 문서(文書) 가운데 사당(祠堂) 3간, 숙설청(熟設廳) 2간이라는 글이 있었으 니, 성후(聖后)께서 친히 이곳에서 단묘(端廟)의 제사를 행하신 것이 분명합 니다. 신의 선조 정미수(鄭眉壽)로 하여금 시양(侍養)하도록 정한 후 신의 선조 집으로 이어(移御)하셨는데, 대개 시양을 정하기 전에 정업원 주지 노 산군 부인(魯山君夫人)이라고 일컬었으나, 이것은 불씨(佛氏)를 숭신(崇信) 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중략…)인하여 임금이 정운유에게 가자(加資)하 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정업원의 유지(遺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비석을 세워 표지(表識)하게 하였다. 비석이 완성되자 임금이 먼저 창덕궁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비석 세운 일을 직접 아뢰고, 이어서 정업원 유지에 거둥하여 비각(碑閣)을 봉심(奉審)하고, 비각 앞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다음 말하기를, “오르내리시는 성후의 영령(英靈)께 서 오늘반드시 이곳에 임어하셨을 것이다.”하였다. 그리고 친히 ‘동망봉(東 望峰)’세 글자를 쓰고 원(院)과 마주 대하고 있는 봉우리 바위에 새기도록 명하였는데, 곧 정순 왕후가 올라가서 영월(寧越) 쪽을 바라다보던 곳이 다.29)
28) 정업원은 조선 초부터 왕실과 비빈들이 이용하거나 출가한 비구니 사찰이었다. 실록에 있는 정업원은 창덕궁 뒤편의 비구니사찰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영조가 세운 정업원구기는 숭인동 청룡사 바로 옆에 세워져있다. 정업원에 대한 사료의 전언과 별개로 정순왕후의 정업원구기가 존재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정업원의 위치를 둘러싸고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일부 학자들은 영조가 고증을 잘못한 탓이라고 했다. 정업원이 공식적으로 철폐된 시기인 중종대에도 정업원의 주지와 비구니들은 계속 존재하고 있었고, 여전히 왕실 비구니원이었다. 이 같은 사실들은 조선중기 이후 정업원이 어느 한 군데 지정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았을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복수의 정업원 존재 가능성) 더불어 정순왕후 송씨가 머물렀던 청룡사 내의 정업원 위치를 두고 설왕설래 하는 것은 이 기억들이 오랜 세월 멈춰졌다가 다시 소생한 것에서도 한 몫을 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정업원에 대한 더 자세한 검토는 이기운, 「조선시대 왕실의 비구니원 설치와 신행」, 역사학보 178, 역사학회, 2003 ; 황인규, 「경순공주와 경혜공주의 생애와 비구니 출가」, 역사와 교육 11, 역사와 교육학회, 2010 ; 탁효정, 「조선전기 정업원의 성격과 역대 주지 –조선시대 정업원의 운영실태(1)-」, 여성과 역사 22, 한국여성사학회, 2015를 참조.
29) 영조실록 권 117, 영조 47년 9월 6일.
정리하자면, 영조는 정업원구기를 세우면서30) 정미수의 후손에게 고증을 요청했다. 정운유31)가 말한 내용은 35년전 정운희가 전한 바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정순왕후 송씨는 사당 2칸, 숙설청 3칸이 있던 집에 거처했고 그곳에서 단종의 제사를 친히 지냈다. 생전에 정순왕후는 스스로를 정업원 주지로 불렀다. 말년에는 정미수와 함께 살았다. 정미수와의 관계를 제외하고 정업원과 동망봉의 일화는 이때의 기록을 말미암아 새로이 알게 된 그녀의 생활상들이다.
정조대에 이르러서도 단종 관련 사적정비는 계속 되었다. 이 역시 숙종-영조대에 걸쳐 진행된 단종 추복과 제신 포증(褒贈)이 ‘군신의 분의를 확증하고 체제 정비의 이념적 근거를 제시하려는’ 의도의 연장선이었다.32) 정조 또한 사릉에 행차하여 참배(1791)하였다.
사릉(思陵) 참배에 앞서 전교하기를, “선대왕께서 병진년에 사릉을 참배하신 이후 거의 60년이 지나 또 이 능을 참배하니, 어찌 감히 선대왕때 이미 실시한 고사를 계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 여흥 부부인(驪興府夫人) 경혜 공주(敬惠公主), 반성위(班城尉) 강자순(姜子順),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의 묘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여량 부원군의 묘에는 작은 표석을 세우고 묘지기 두 가구를 두었다. 또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묘에도 치제하도록 명하였다.33)
사적정비와 치제는 정순왕후의 친정가족들에까지 확대되었다. 정조는 정순왕후 송씨의 어머니인 부부인의 묘에 치제를 하고 비석을 세우며 직접 제문34)까지 지었다.
이상과 같이 단종사적 정비와 과거의 재정립은 국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단종에 대한 담론의 시발점은 분명 왕권 정통성에 대한 부인이자, 과거의 단죄이며, 금기의 무엇이었다. 어떠한 담론이 처음에는 아무리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있고 파괴적일지라도, 일단 관습화되고 국가 기구의 한 부분이 되어버리면, 제한되고 정의되며, 순응하게 되고 국가를 위해 봉사하게 된다.35) 이는 시간이 흘러 거리감이 확보되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숙종은 단종과 그 충절신들을 복권시켰고, 영조와 정조는 그들의 행적과 관련 있는 유적을 정비하여 기록을 남겼다. 후대 국왕들의 조치는 세조의 발언을 근거로 진행되었다. 세조는 단종을 죽게 한 장본인이었지만 단종을 복권시키려다 사망한 사육신들이 후일에 충신이 될 것임을 인정36)했다. 그리하여 후대의 국왕들이 단종과 그 충절신을 복권시키고 이들과 관련된 유적들을 정비한 것은 세조의 뜻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세조의 성덕을 드러내는 조치가 되었다.37) 이 과거사건의 재정립 조처의 중심에는 단종과 사육신이 있었고, 부차적으로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 송씨도 역사의 표면에 공식적으로 등장할 수 있게되었다.
30) 영조는 사릉에 비석을 먼저 세우고 일년 후에 정업원구기를 세웠다. 영조실록 권 114, 영조 46년 윤 5월 9일.
31) 정운유는 문종부마 영양위 정종의 9대손이다.
32) 정조대의 더 자세한 정치적 상황은 윤정, 「정조대 단종 사적 정비와 ‘군신분의’의 확립」, 한국문화 35,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5를 참조.
33) 정조실록 권 33, 정조 15년 9월 24일.
34) 九月丁酉 구월 정유일에 / 祇拜仙陵 경건히 선릉을 참배했는데 / 聖后之思 정순왕후(定順王后)에 대한 생각이 / 迤及驪興 부부인에게까지 미쳤네 / 不須提起 굳이 이야기를 끌어낼 것 없으니, / 萬事滄桑 만사가 덧없는 변화를 거듭했네. / 聖祖敷恩 성조께서 은혜를 베푸시니, / 厚土回光 후토에 광채가 돌아왔네. / 翩繽處彼 영령이 한가로이 노닌 곳 / 牛巒之原 저 우만의 언덕일세 / 爲竪短碑 이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 且訪孱孫 또한 잔손을 찾았네 / 礪良躋享 부원군을 받들어 제사드리니 / 一抔何許 한 잔을 받으심이 어떠리오 / 其來同歆 이르러 함께 흠향하소서 / 旣墠而醑 이미 제단을 이루고 술을 드리네, 홍재전서 권 22.
35) 루샤오펑 저, 조미원 외 역, 역사에서 허구로 , 도서출판 길, 2001, 40면.
36) 당세에는 난신(亂臣)이나 후세에는 충신(忠臣)이라는 세조의 발언을 근거로 과거를 재정립하고자 하였다.
37) 김문식, 「18세기 단종 유적의 정비와 <월중도>」, 장서각 29,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73면.
2) 세조를 비판하기 위한 우회적 매개자
금계필담 38)에는 정순왕후 송씨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금계필담 은 조선후기(1873) 서유영39)이 편찬한 야담집이다. 이 야담집은 첫머리에서 단종 폐위 및 사육신 사건을 연속적으로 다루었다.
<매죽헌송공삼문梅竹軒成公三問~>, <단묘손우영월端廟遜于寧越~>,<현덕왕비권씨顯德王妃權氏~>, <정순왕비송씨正順王妃宋氏~>, <광묘유일공주光廟有一公主~> 등이 해당된다. 이 이야기들에는 사육신과 생육신의 행적, 단종의 어머니 현덕 왕비의 세조 응징,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충절, 정실 왕후 딸의 은둔 등을 통해 세조의 왕위 찬탈의 부당함과 그에 저항한 충직한 사람들의 정당함이 부각되어 있다. 서유영은 60세 때인 1860년에 사릉참봉 벼슬을 하였다.40) 그 당시 단종 관련 설화를 많이 접했던 것으로 보이며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다룬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종은 어린 나이로 상왕의 자리에 올랐다. 세조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 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다. 결국에는 영월에 가서 승하하시자, 왕비는 이 에 동문 밖 정업원에서 불문에 의지해 주지가 되었다. 정업원 뒤에 작은 석봉이 있었는데, 그 위에 매일 올라가 영월을 바라보았다. 당시 사람들 이 안타깝게 여겨 그 봉우리를 “동망”이라 불렀다. 숙종조에, 전(前)현감인 신규가 노산군을 왕으로 추복시키자고 상소했다.41) (중략) 숙종이 이 상 소를 보고 마음에 통하는 것이 있어 조정 관료들에게 물어보니 여의(輿 議)가 모두 같았다. 드디어 노산군을 추상하였다. 임금의 시호를 단종이라 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또한 부인 송씨는 휘호를 정순, 능호를 사릉 이라 했다.42)
이 부분은 앞서 살핀 내용과 일치하고, 역사의 기록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서유영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정사의 기록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았던 감정의 결이 드러난다.
아! 왕비는 어린 나이에 불문에 몸을 의탁하여 한을 품고 고통을 인내하 며 여생을 마쳤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슬픔과 한이 끝없다. 지금에도 동망봉을 지나는 사람들은 마음 아파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일찍이 사릉침랑으로, 능침을 배알할 때 마다 목이 메임을 어쩔 수 없었는데, 하 물며 당시의 충신열사의 마음이야 어떠하였으랴?43)
38) 금계필담 은 여러 이본이 전해온다. 본고에서는 국립중앙도서관본을 기본 텍스트로 삼았다. 크게 세 종의 이본군으로 나누어진다. ‘1873년 10월 26’일에 완성된 상백문고본 계통과 ‘1873년 10월 28일’에 완성된 국립중앙도서관본 그리고 ‘1873년 3월 23일’에 완성된 고려대 도서관본 등이 그것이다. 이본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임완혁, 「 錦溪筆談 異本考」, 한국한문학연구 , 23, 1999를 참조.
39) 서유영 (1801(순조 1)∼1874(?)(고종 11(?)))의 子는 子直, 號는 雲皐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6대손으로, 부친은 서옥수(徐沃修)이고, 생부 서격수(徐格修)와 생모 안씨(安氏) 사이에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유영에 대해서는 장효현, 서유영 문학의 연구 , 아세아문화사, 1988, 9-30면을 참조.
40) 이강옥, 한국야담연구 , 돌베개, 2006, 487면.
41) 실제 숙종실록 권 32, 숙종 24년 9월 30일에 신규가 상소문을 올린 기록이 있고, 내용도 유사하다.
42) 본고의 번역은 송정민 외 역, 금계필담 , 명문당, 2001을 참고하여 수정하였다.
端廟冲年, 在上王位, 光廟御極降封魯山君. 末幾昇遐于寧越, 后乃於東門外淨業院,
依佛門爲主持. 院後有小石峰, 日登其上, 望寧越. 時人傷之, 號其峰曰 : “東望” 肅宗朝前縣監申奎, 疏請魯山君追復王位. (중략) 肅宗覽疏感焉, 下詢廷僚 輿議僉同. 遂追上魯山君, 廟號曰 : “端宗” 陵號曰 : “莊陵” 夫人宋氏徽號曰 : “正順” 陵號曰 : “思陵”
43) 噫! 后以幼冲之齡, 托身佛門, 含寃忍通, 以終餘年, 天荒地老, 哀恨無窮. 至今行過東望峯者, 莫不愴然增感. 余嘗以思陵寢郞, 只謁陵寢, 鳴咽不勝, 況當日忠信烈士之心哉.
서유영은 정순왕후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함에 주저함이 없다. 정순왕후를 통해 그 당시의 충신열사의 심정까지 언급한다. 궁극적으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의식은 단종에 대한 충절이다. 정순왕후를 통해서 단종을 만나는 것이다. 그가 일컫는 충신열사는 사육신과 생육신이다. 앞서 본 국왕들이 충신들을 포용해 복권한 것은 이 일을 통해 국왕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세조의 입장을 거듭 고려하면서 정통성에 훼손되지 않는 당위성을 만들어 단종과 관련된 사람들을 추복했다. 그러나 서유영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세조정권에 대한 반감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思陵花木護仙封 사릉의 꽃과 나무, 선봉(仙封)을 지켜주고
杜宇聲聲恨萬重 소쩍새 소리마다 원망이 서려있네.
淨業院東三丈石 정업원 동편에 있는 세 길 넘은 바위는
至今猶望越中峰 지금도 영월의 봉우리를 바라보네.44)
세조의 정통성을 직접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드러난다. 정순왕후가 묻혀있는 사릉은 신선들이 지켜준다고 한다. 정순왕후가 초기에 거처했다고 알려진 정업원에 있는 돌들은 여전히 단종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한다. 바위는 충절의 상징에 다름없다. 서유영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지녔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흐르고 단종의 이야기가 공론화 되었다고 하지만 세조정권을 대놓고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조정권을 바라보는 사대부의 불편한 시선과 공식 역사의 차이점은 다른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세조 집권이후 송현수와 정순왕후 송씨의 가족들을 처리하는 과정을 기록할 때에도 이러한 생각들이 드러난다. 사대부의 기억이라고 볼 수 있는 장릉지 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노산 왕비 송씨가 관비로 몰수되자, 신숙주가 공신의 집종으로 자기가
받아내려고 하였으나, 세조가 그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얼마 뒤에
정미수에게 궁중에서 봉양하도록 명하였다.45)
우선 정순왕후가 관비로 몰수되었다는 점부터 사실과 다르다. 거기다가 신숙주가 그녀를 자신의 집종으로 데려가겠다고 한 기록은 사료에서 찾기 어렵다. 심지어 신숙주는 그녀에게 의식을 해결해주겠다는 정희대비의 하교에 옳다고 응대하는 기록이 있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전지하기를, “노산군(魯山君)의 처 송씨(宋氏)에게 그 친속(親屬)들로 하여금 의식(衣食)을 공급하여 살 바를 잃지 말게 하고, 또 고신(告身)을 거둔 사람과 난신(亂臣)에 연좌(緣坐)된 사람으로 정상이 가벼운 자를 기록하여 아뢰라.” 하니 신숙주가 아뢰기를, “송씨를 존휼(存 恤)하는 것은 상교(上敎)가 윤당(允當)합니다.”46)
이는 후대의 사대부가 세조와 세조정권을 구성한 신하들에 대한 반발의 결과이다. 실제 세조때 윤사로라는 사람이 송현수의 딸들을 공신비를 청한 내용이 있긴 하다.47) 그러나 정순왕후 송씨가 아니라 송씨의 자매들에 관한 것이고, 실제로 그 당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순왕후를 관비로 요청한 신숙주에 관한 일화는 이러한 사실, 신숙주에 대한 반감, 정순왕후 송씨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합쳐져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인다. 신숙주는 왕조실록에서 본 바와 같이 오히려 그녀의 삶을 돌보는 데 찬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종에 얽힌 사건에 여성 캐릭터를 끌어들인 사대부들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사대부 혹은 신하를 통한 왕의 비판은 반정권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경쟁적 역학 구조에서 한발 비켜서 있는 여성인 정순왕후 송씨는 도전의 직접성을 완화하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그녀를 통한 발언은 정치 비판을 조심히 가능하게 하면서 수위를 조절하여 세조정권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우회적 매개자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44) 余有詩曰 : “思陵花木護仙封, 杜宇聲聲恨萬重, 淨業院東三丈石, 至今猶望越中峰.”
45) 국역 장릉지 , 세종대왕기념사업편찬회, 1979, 70면.
46) 성종실록 권 18, 성종 3년 같은 날.
47) 세조실록 권 9, 세조 3년 10월 24일.
3) 남편 잃은 여성, 애달픈 사연
이번에는 정순왕후 송씨와 관련하여 구전되는 이야기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구전은 고정되지 않고 역동적이며 실제 사실보다는 사람들의 소망이나 생각이 더 깊이 투영되어 나타난다. 그렇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들이 어쩌면 또 다른 진실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일반 백성들은 정순왕후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백성들은 앞서 살핀 두 시선과는 달리 ‘충’이나 ‘신의’에는 관심이 적었다. 인간적 감정이 앞섰다. 백성들에게 세조는 조카를 죽인 비정한 사람이었으며, 남편을 잃고 어린 나이에 밖에 나와 살게 된 정순왕후는 애달픈 존재였다. 백성에겐 국왕이나 사대부와는 달리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훨씬 덜 개입된다. 여기서는 역사적 사실 여부는 잠시 미루어 두고 사람들이 남겨둔 혹은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종로구 창신동과 숭인동 일대에는 정순왕후 송씨와 단종의 비애를 보전하는 유적과 이야기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정순왕후가 궁밖에 나와서 살았던 모습들을 더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48)
송씨는 부인으로 강봉된 직후 동대문 밖에 나가 살았다. 정순왕후는 지금의 창신동에 거처를 삼고 정업원으로 갔다. 정업원에 귀의한 것은 불교에 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녀가 몰락한 왕실여성으로서 그나마 품위를 지키며 갈 수 있는 마지막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영조에 세워둔 정업원구기가 아직도 남아 있고 바로 옆에 청룡사가 위치한다.
지금도 비구니 절이다. 청룡사와 정업원의 관계에 대해 풀리지 않는 부분들이 있지만, 그들은 정순왕후 송씨를 허경스님으로 부르며 모시고 있었고, 실제로 9월에 정순왕후 송씨를 위한 제를 올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된 송씨는 아침저녁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르면 온 마을 여인네들이 땅을 한번 치고 가슴을 한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한다. 그 동쪽 산봉우리가 동망봉49)이다. 정순왕후 송씨가 아침저녁으로 매일 올라가 영월 쪽을 보며 남편을 그리워하고 명복을 빌었다. 올라가는 길에는 정순왕후 송씨를 위한 굿을 한다는 안내가 심심찮게 적혀 있다. 그녀는 여전히 음지에서 살아 있었다. 지금도 무속에서는 송씨 부인으로 모신다고 한다.(단종은 영월에서 태백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정상에는 동망봉이었다는 표석만 남아있는데 영조 임금이 썼다는 ‘東望峯’이라는 글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제 때부터 광복후까지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산이 깨어져 나가 글씨는 없어졌고 쪼개진 절벽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48) 서울 종로구에 위치해있는 ‘여성문화유산연구회’로부터 창신동 소개와 구전되고 있는 자료를 받았다. 이 연구회는 정업원구기를 중심으로 매달 특정일에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49) 이 동망봉과 짝을 이루는 곳은 영월의 망향탑이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이다. 단종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며 부부가 서로를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서울과 영월에 각각 증거물이 함께 남아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 하다.
궁궐에서 나온 정순왕후 일행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줏빛을 띠는 풀 지치(자초, 지초, 아어초, 자단)를 이용하여 비단에 자색물을 들여서 댕기, 저고리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화강암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비단을 빨아 자주색물을 들였다. 이 샘물을 ‘자주우물’, ‘자지동천’이라 하였으며, 마을이름도 자줏골, 자주동이라 불렀다. 송씨 왕후는 이곳 자지동천 우물물로 염색을 하며, 남편 단종의 삼년상을 인근 사찰(원각사)에서 마칠 수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70년대까지만 해도 단종의 삼년상을 모신 원각사 산신각에 정순왕후 송씨의 영정과 유품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어갈 수 있었다. 이곳 역시 표지석만 서 있다.
마지막으로 여인시장 바로 앞에 있는 영도교로 가본다. 1457년 6월, 18세의 정순왕후는 영월로 유배를 떠나는 단종과 이 다리에서 헤어진다. 당시에는 영미교라 불리었고 나무다리였다. 그 둘이 영영 이별했다고 해서 ‘영 이별 다리’리고 불렀다. 그 말이 후세에 와서 “영원히 건너가 버린 다리” 라는 의미로 ‘영도교(永渡橋)’가 되었다고 한다. 바뀐 돌다리는 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리를 부수어 석재로 사용하면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의 영도교는 청계천 사업 후 복원된 형태이다. 사연만 있을 뿐 다리는 전혀 새로운 모습이다. 이런 지명설화와는 달리 조선중기 기록에서 이런 내용이 남아있다.
어떤 중이 전관교(箭串橋)를 구축할 때 많은 돌을 채벌하여 대천을 건너 는 다리를 만들었는데, 다리가 3백여 보를 넘고 안전하기가 집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행인이 평지를 밟는 것과 같았었다. 그리하여 성종(成宗)이 그 중을 유능하다고 여겨 구축하도록 명하였다. (중략) 그 뒤에 전교(箭郊)에 큰 다리를 만들어 제반교(濟盤橋)라 하고, 또 동대문 밖 왕심평(往尋坪)에 큰 다 리를 구축하여 영도교(永渡橋)라 하였는데, 어필(御筆)로 정하였다.50)
이는 성현의 용재총화 에 전한다. 살펴보면 “영도교”라는 이름은 왕의 명령으로 붙였다. 성종이 단종과 송씨의 이별에 감화되어 이런 명칭을 허하진 않았을 것이다. 거듭 언급했듯이 조선중기까지 단종과 관련된 모든 것은 굉장히 민감한 정치적 문제였다. 이 기록의 시기는 1525년 중종때 이므로 송씨가 죽은(1521)지 4년 정도가 지난 후이다.
단종과 송씨가 살았던 시점의 기록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를 통해 영도교의 지명은 정순왕후 송씨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으며 우연의 일치로 보인다. 지금 전해오는 이야기보다 이 내용이 영도교의 유래에 가깝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도교의 이름마저도 송씨와 단종의 이별과 결부시켰고 지금은 오히려 “영원히 이별한 다리”라는 이야기가 더 진짜처럼 여겨진다.
근대시기의 신문기사를 통해 사람들이 정순왕후의 삶을 보는 관점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여기는 단종대왕비(端宗大王妃)의 뼈에매친 눈물의 八十평생이 엇고 최 후까지 모시든시녀(侍女)三명의 단성(丹誠)어린 생애가 있다. 정업원(淨業 院)이 바로 거기다.
대왕비 송씨(宋氏)는 나종 노산군(魯山君)이 되신 대왕이 영월(寧越)에서 죽엄을 당한후에영빈(英嬪)으로 봉함을 바다하고중이되어 이 정업원에 머 믈르며八十평생을 부처님앞에서 지냇다.
국모(國母)의 지극한 영와로부터 이제는 한낫 비명에 죽엄을당한 남편을 위하여 수절하는 승이되어 베웃입은 송씨를시녀三명이평생을 모시고 거 리에 나가 받아오는 시미(施米)로 입에 풀칠을 하며 늙었다,
살음이 워낙 이러케구차한지라채소나마 제때 입맛대로 드릴길이없어 시 녀三명의 눈물이 마를날없으매 동리여인들이 왕비께진공(進貢)하랴고 일 부러 동묘옆에 나물장을 버리고 철찾아 채소를 진공하더니 이로연유하야 여기 채소시장이 생겨서 오십년전까지도 여기는 여인의 나물장으로 유명 하였다.51)
이 기사에서 몇 가지 표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뼈에 매친”, “지극한 영와”, “한낫 비명”, “수절”, “입에 풀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발화는 민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는지 여실히 드러내준다.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여성이 남편과 지위를 잃고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자연스럽게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감정을 일으켰다. 기실 영빈으로 봉하였다는 부분은 조선왕조실록 어떤 곳에서도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희석되었다고 해서 이들의 기억을 거짓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그녀의 삶이 얼마나 아팠는지, 또 사람들이 어떻게 수용했는가를 입체감 있게 형상화해준다.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구전에서는 정순왕후를 한 많은 삶, 사랑 잃은 여성의 모습으로 고정시켰다. 조선 후기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사라지고, 애달픈 사연의 주인공으로 재현된다. 이렇듯 그녀는 오랜 기간 역사적 사실 사이를 배회하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정순왕후를 사연 많은 여인의 일생으로 인식한 자들은 어떻게든 송씨를 위로하고 서사화했다.52)
50) 성현(1439-1504), 용재총화 , 有僧曾搆箭串橋, 伐萬石越大川作橋, 橋跨三百餘步, 安如屋宇, 行人如履平地. 而成宗以爲能, 命其僧搆之, 欲不煩官力, 而多給米布, 僧費用而數歲無功, 纔立棟宇, 而成宗竟未登御, 百寮悲痛. 其後天使王獻臣來, 朝廷畢修而加丹雘焉. 其後箭郊作大橋, 名濟盤橋, 又搆東大門外往尋坪大橋, 名曰永渡橋, 皆御筆所定也.
51) 「京城洞名點考(경성동명점고) 3」, 『동아일보』, 1936,3,21, 사회 2면.
52) 이 절에 있는 전체 내용은 현지답사, 여성문화연구회의 자료, 강홍빈, 공간과 일상 창신동 , 서울역사박물관, 2011년, 29-30면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
4. 정순왕후 송씨를 기억하는 방식과 의미
주지하다시피 정순왕후 송씨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설화와 역사가 혼재되어 있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내용들은 숙종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 초기의 사건이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서야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기억이 얼마나 굴절되고 윤색되었는지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을 오롯이 재현해내기가 어렵다고 해서 그녀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흔적을 국가 주도의 기억, 사대부의 기억, 구비로 전해오는 민간의 기억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 층위의 기억 중에서 변별점이 큰 부분들을 다시 조명해 보아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사람들이 믿고자 했던 것과 그 의미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정미수’의 존재이다. 정사와, 야담에는 기록되어 있는 시양자인 정미수가 구전에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까닭을 구전에 남아있는 자지동천과 여인시장의 소재와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다. 정순왕후는 죽으면서 자신의 재산을 정미수의 처에게 남겼다. 이는 중종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노산군 부인(魯山君夫人) 송씨(宋氏)가 상언(上言)하여 자기의 노비와 재 산과 집을 정미수(鄭眉壽)의 아내에게 주기를 청하였다. 정원이 이어서 아 뢰기를, “노산군 부인이 정미수를 시양자(侍養子)로 삼았는데, 정미수는 이 미 죽고 또 후사(後嗣)가 없습니다. 정미수의 아내가 죽게 되면 노산군에 게 제사지내 줄 사람이 없어져서 제사가 끊어질 것이니 매우 참담합니다. 다시 대신으로 하여금 후사 세우는 일을 의논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하 니, 전교하기를,“송씨의 소원은 정미수의 아내에게 뜻이 있었으니 후사 세 우는 일을 다시 의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하였다.53)
위의 내용으로 보아 정순왕후 송씨가 예상과는 달리 끼니를 잇기 어려울 만큼의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글에 따르면 노산군 부인 송씨에게는 노비, 재산, 가사 등의 사장(私莊)이 있었다. 그 규모가 얼마이며 어떤 경로로 형성되었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노산군 부인이 자신의 사장을 시양자 정미수의 처에게 전여하기 위해 상언했다는 사실에서 추론해 본다면, 친정에서 받았거나 왕실에서 별사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54) 그러므로 염색업이라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는 창신동의 이야기(자지동천)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보태진 것으로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정순왕후를 안타깝게 여기고 그녀에 대한 처사에 부당함을 느낀 사람들이 그녀의 ‘한 많은 삶’에 초점을 맞추어 지어낸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실제로 왕조실록을 살펴보면 간간히 그 당시 노산부인에게 의식을 공급하여 살 바를 잃지 않게 하라는 전교55)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해 정순왕후 송씨가 직접 남긴 글이 전해진다.
정순왕후의 후사를 부탁하는 글을 이러하였다.
“1518년(중종13년) 9월 초2일에 죽은 해평 부원군 정미수의 아내 이씨에게 문서를 만들어 주는 것은, 내 몸이 또한 후사가 없는 과부로서 몸이 죽은 후의 여러 가지 일을 의탁할 데가 없어서 밤낮으로 슬퍼하여 울고 있던 차에, 지난 1516년(중종11년) 11월 경에 노산군께 제사를 내려주었사오나, 또한 <그 혼령이> 의지하여 부탁할 데가 없어서 정리(情理)가 가련한 바이므로, 전에 나의 가옹(정미수를 가리킴)에게 허락해 주었다는 인창방에 있는 집 담장 안에다가 사당의 전퇴(前退) 3칸과 숙설청 3칸을 각각 따로 지었는데, 내 생전에는 전(奠)을 베풀겠거니와, 사당과제사를 전하여 지키고 봉행할 사람을 내 먼 족친으로서 전하여 잇게 할 수가 없는 일인 바에야, 내 가옹은 문종 상전의 유일한 외손이요. 노산군의 절친한 족친일 뿐더라 제딴에도 내몸하고 잠시도 마음이 어그러지지않도록 항상 정성껏 돌봐온 바였습니다. 전에 저의 가옹에게 허락하여주신 노비 가운데, 계집종 보로미의 첫째 소생인 종 나이 31세 매읍동,계집종 우질덕의 셋째 소생인 종 31세 김산 등은 내 몸이 죽은 후에 돌보아 줄 사람으로 정하고, 계집종 녹덕․종 사동․계집종 학비․종 석금․종 막동 등 5구(口) 등은 묘지기로 정하며, 동 노비 등이 후에 낳는 소생도 모두 길이 길이 전하여 잇게 하고자 하여 상언하니, 재주의 원하는 뜻을 좇아 사급하도록 계하하시어 문서를 만들어 주소서……. 재주 노산군 부인 송씨” (증인은 사촌 오라버니 병충분의정국공신(병춘분의정국공신) 가선대부 여흥군 민회창이고, 집필은 사촌 오라버니 병춘 분의정국 공신 가선 대부 여성군 민회발입니다.)56)
53) 중종실록 권 34, 중종 13년 7월 5일.54) 신명호 외,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여성 , 국립고궁박물관, 2014, 265면.
55) 성종실록 권 18, 성종 3년 5월 23일, 중종실록 권 22, 중종 12년 8월 25일 등
56) 박경여·권화 저, 박엽 역, 국역 장릉지 , 세종대왕기념사업편찬회, 1979, 67-68면.
이 기록을 통해서도 정순왕후 송씨가 심리적으로 힘들게 살았던 것은 분명하나, 실제 삶이 곤궁하거나 가난하여 노동을 할 정도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유일하게 정순왕후 송씨가 남긴 스스로의 발언이다.
“밤낮으로 슬퍼하고 울고 있던 차”라는 부분을 통해 단종의 죽음이 그녀에게 어떤 고통을 끼쳤는지를 짐작할 수는 있다.
다음은 세조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이다. 숙종은 민절서원을 두고 손수 이런 어제시(御製詩)를 남겼다. 민절서원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었던 서원으로 1681년(숙종7)에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설립되었다.
우리 단종대왕과 정순왕후의 복위, 부묘하는 예는 실로 국가의 막대한 경사이다. 아아! 내가 추복할 뜻을 가지고도 성취하지 못한 지가 여러 해 가 되었더니, 특별히 육신의 관작을 회복하고 영월에 관원을 보내 어제 사를 드리던 날을 당하여 지나간 일을 생각하니, 감창한 마음이 배나 간 절하였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중략)
그 시에는 이르기를,
興言疇昔事 옛일을 말하다보니,
感淚幾沾裳 감화된 눈물이 옷을 적시누나.
授受同堯舜 주고받음은 요순과 같고,
聖神邁禹湯 성스럽고 신령함은 우탕을 지나간다.
縟禮追擧日 욕례(縟禮)를 올리던 그 날에,
世廟德彌光 세조의 덕이 널리 빛나네.
獲遂平生願 평생의 바람을 얻었으니,
歡欣我獨長 나의 기쁨이 홀로 길도다.57)
숙종은 세조의 성덕에 어떤 흠집도 내지 않으면서 단종과 정순왕후, 사육신등을 추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본 중종이나 성종시기의 왕조실록 기록에서도 정순왕후의 삶을 돌봐준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또한 그들의 행위에 대한 방어적 기록이다. 비록 조카를 죽였지만 이후의 조처나 세조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공식역사에서는 강조한다. 그러나 민중 혹은 일부 사대부의 기억 속에서는 세조의 정당성을 굳이 인정하거나 찬양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이런 공적 기록에 반하는 이야기들을 만들거나, 세조의 긍정적인 면모는 누락되어 있고 정순왕후를 통해서 도리어 반감을 드러낸다. 알게 모르게 기억들이 다른 목표점을 가지고 섞여있다.
이렇듯 숙종과 영조는 조선후기 ‘의리’담론과 그들의 왕권강화책의 접점에서 그녀를 복원하고 기억해 주었다. 이들 임금은 ‘계유정난’과 사육신에 의한 ‘단종 복위 운동’을 통해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충과 신의는 유교사회의 필수 덕목이다. 그러한 필요에 의해 세조의 정당성을 잃지 않게 하면서(당대의 신하들 탓으로 문제를 돌림) 후대에 와서 단종을 복위시키고 사육신과 생육신을 숭앙하였다. 사실 그녀의 실제 생애에 ‘충’ 이데올로기를 결부시키기엔 부족한 면이 많다.
정순왕후가 남편을 향해 평생을 그리워하거나 수절했다고 보는 것은 결과론적인 판단이다. 절개나 부군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보는 것은 사람들의 관점이다. 그런 모습을 통해 ‘충’이나 ‘신의’가 교묘히 덧씌워진다. 사실 그녀에게 재가를 하거나, 다른 삶을 살아갈 어떤 선택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순왕후가 섣부른 행보를 보였다간 목숨을 보전키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세조가 단종은 죽였어도 그녀를 살려둔 것은 남성 정권에 위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조를 포함 이후의 왕들이 그녀를 죽였다면 세간의 비난은 더 거세졌을 것이다. 그녀는 정치적 계산에 따라 살아남았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에 기록된 서유영의 글에서도 ‘충’의 잣대가 살아 있다. 그는 조선후기 왕들이 원했던 군신관계와는 조금 다르게 단종 자체에 대한 절개를 말하고자 했다. 그가 정순왕후를 택한 이유는, 숙종와 영조가 단행했던 왕권강화의 일환이 아니라 신하로서 세조에 대한 반감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남성 주도적 사회에서 여성주인공의 등장은 정치적 발언의 수위를 조절해준다.
또한 남아 있는 흔적을 보면 민중들은 그녀에게 절절한 사랑이야기나 한 많은 여인의 삶을 투영하여, 단종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냈다. 특히 문헌과 다르게 구전에 남은 이야기들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는 것들이 꽤 있었다. 그녀는 대체로 ‘노동하는 여성’, ‘가난한 과부’로 사람들에게 그려진다. 이는 감정이입의 현상이다. 베일에 가려진 고귀한 왕실여성이 비극적 사건을 당한 이후 백성들은 자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라고 느낀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진실로 믿기를 은연중에 요청한다. 그런 동감의 확장이 사실과 다소 떨어진 사연마저 진짜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정순왕후를 단순히 한 많은 삶을 살았다고 여기거나 혹은 기억조차 제대로 못하는 이유는, 그녀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 비춰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녀의 내면에 거의 접근할 수 없다. 그녀가 직접 발화한 텍스트가 극히 드물고 대부분의 서술에서 그녀는 자기 나름의 권리가 있는 인물이 아니라 각자의 발화주체가 말하고자 하는 함수로 존재한다. 그녀가 불투명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그녀가 서술자의 욕구와 욕망, 망상을 통해 여과된 탓이다. 그녀는 자기 나름의 주체가 아니라 비극의 도구로 존재되어 전해졌다.58)
정리하면 정순왕후 송씨에 대한 기억은 여러 군데 흩어져 있었다. 또 그녀를 바라보는 관점(point of view)이 겹치고 갈라지면서 기억들이 파생되어 왔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기록이나 말은 적히거나 말해지는 것이어서 발화자나 기록자의 목적이나 이데올로기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야기를 기록하고 다루는 사람은 누구나 그 과정 속에서 일정하게 ‘자신’의 위치를 차지한다.59) 의도적이든 아니든 무의식적으로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해 확대나 축소가 일어난다. 정순왕후 송씨에 대한 기억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57) 국역 장릉지 , 세종대왕기념사업편찬회, 1979, 175-176면.
58) 테리 이글턴 저, 이미애 역,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책읽는수요일, 2016, 143면.
59) 가야트리 스피박 저, 태혜숙 역, 다른 세상에서 , 여이연, 2008, 489면.
5. 결론
이상과 같이 정순왕후만 다루었지만 정순왕후 송씨는 여전히 드러나는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삶을 살았다는 점만은 누구나 동의해 왔으며 암암리에 구전으로, 기록으로 전해져 왔다. 정순왕후는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지 못했다. 정순왕후가 송현수의 딸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왕비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단종의 부인이 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일생과, 강등과 복위 모두 자신의 뜻과 무관했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파편적으로만 전해져 올 뿐이다. 그녀는 단종과 세조, 생육신과 사육신사이에 끼어 들어가 있기에 제대로 조명을 받기는 어렵다고 본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 영도교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정순왕후 송씨만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60)도 발표되었고, 이 소설을 기반으로 연극까지 무대에 올랐다. 소설과 연극에서는 정순왕후 송씨의 인간적 고통과 생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사랑 잃은 여인으로 그려진다.
1999년에는 사릉의 소나무를 장릉에 옮겨 심어주는 행사도 있었다.61) 이 소나무를 정령송(精靈松)이라 칭했다. 그녀의 출생지로 알려진 정읍에서는 최근(2016) 정순왕후의 일대기로 ‘하늘연인’이라는 서사무용극을 만들었다. 지금의 이런 작업의 일환들은 과거(조선후기)와 달리 왕을 위한 충절, 절의 등은 당연히 거세되어 있다. 오히려 정순왕후 삶에 대한 애처로운 시선과 지방자치 활성화와 관련이 있으며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역시나 크게 인지되거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은 계속 되고 있다는 점만 확인가능하다.
어떤 큰 역사적 사건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정순왕후 송씨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의미화할 수 있었다. 정순왕후 송씨가 겪었던 사건과 그 인물의 존재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과거이자 역사이다. 그러나 그녀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방식은 단선적이지 않다. 국가권력이 ‘위로부터’ 만든 정제되고 만들어진 공식기억과 그와 반대로 ‘아래로부터’ 저항과 ‘대항기억’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충돌하고 겹치면서 같은 것들이 다르게 읽혀지고 전해진다.62) 정순왕후 송씨에 대한 기억도 이런 맥락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녀는 기억의 대상으로만 존재했고, 그 대상의 변화와 기록의 지점은 그 시대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었다. 한 인물에 대한 기억이 여러 층위에서 변주되는 양상을 통해 역사를 기록하는 주체에 따라 기억이 달라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의 소득이라 하겠다. 본고를 통해 남성 정치 역사에 가려진 한 여성의 고달프고 어려웠던 삶이 미약하게나마 다시 기억되고(history in action) 그 기억너머에 얽혀있는 시선이 조금 더 드러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60) 김별아, 영영이별 영이별 , 창해, 2005.
61) 배연호, 「<화제>단종-정순왕후 5백여년 생이별 소나무로 해후」, 연합뉴스, 1999,04,19.
62) 육영수, 「역사, 기억과 망각의 투쟁」, 한국사학사학보 27, 한국사학사학회, 2013, 264면.
논문투고일 : 2015.10.29 심사완료일 : 2015.12.9. 게재확정일 : 2016.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