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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주영(李柱英)
등단; 2003 아동문학세상
저서; 동시집,<우리 교실>
수상; 2008 제 27회 강원아동문학상
경력; 강원아동문학회 이사
백두산 여행기
□ 기간; 2009. 6.26 - 6. 29(3박 4일)
□ 일정; 춘천 - 인천공항 - 연길시 - 백두산 - 용정시
□ 6/26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이다. 펜문학강원도지회 박유석 회장, 이갑창 사무국장과 함께 백두산 여행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펜문학강원도지회에서는 매년 중국의 지린성 연변 조선족자치주내 용정(龍井)시에 있는 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와 교환방문을 해왔다고 한다. 이 행사는 서로 간에 문학작품을 교류하고 민족의 우의를 다지며 일제침략기에 간도지방을 개척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봄으로써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선조들의 개척정신과 애국정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또한 우리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천지를 답사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의지를 고취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사진으로만 보아도 그 위용에 압도되는 데 실제로 가서 본다면 그 감격이 어떠할까? 설레는 마음에 잠을 설치며 알람시계소리에 잠을 깨니 04:00 어제 저녁에 꾸려놓은 배낭을 지고 집에서 걸어서 15분 걸리는 춘천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이갑창 사무국장은 벌써 도착해 있었고 곧이어 박유석 회장을 만나 04:30에 출발하는 공항버스에 올랐다. 예전에는 버스의 좌석이 45인승이라서 원거리 여행할 때 불편했었지만 요즘은 버스도 고급화가 되어 좌석수를 28인승으로 줄이고 개인공간을 넓혀서 좀 더 안락하게 바뀌었다.
모자란 잠을 안락한 버스에서 한잠 달게 자고나니 김포공항에 06:00,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06:40이다. 우선 지하1층 식당가에 내려가 우거지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뜨끈하고 구수한 해장국물로 출출한 속을 채우니 부러울 것이 없다.
08:30 우리의 여행을 주선한 여행사를 찾아갔다. 비행기탑승권을 인수하고 이어서 짐을 부치는 수속을 하였다. 환전을 미리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전소에 갔다. 미화 50불과 위안 화 200위안을 환전했다. 09:25 50번 게이트를 통과하여 아시아나 여객기에 탑승하였다. 09:50 여객기는 엔진을 가속하더니 굉음을 내면서 활주로를 박차고 창공으로 이륙한다.
여객기 모니터는 우리가 내릴 옌지공항의 현지시차가 1시간 늦다는 것과 고도 9200m 시속 822km 외계온도 -43도라는 수치를 보여준다.
11:00 기내식이 나왔다. 밥과 생선튀김에 오렌지 주스와 커피를 준다. 12:00 인천공항을 이륙한 지 약 2시간 만에 아시아나 여객기는 옌지(延吉)공항에 사뿐히 착륙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일행은 마침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신종플루 감염여부검사를 위해 일일이 체온검사를 하고 입국심사대를 통과했다. 여행사에서 안내를 맡은 일행은 모두 9명, 현지안내는 울산이 고향이라는 교포3세 여성 민계영씨가 마중 나와 22인승 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대주주점(大洲酒店)이란 간판이 보인다. 중국에서는 호텔을 주점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도 옛날 에 ‘주막(酒幕)’이란 용어가 있었는데 아마도 현대적인 주막이라고나 할까?
대주호텔 8637호실에 여장을 풀고 일행은 시내에 있는 ‘청와대’라는 식당으로 안내되었는데 이름이 우리나라 대통령이 집무하는 곳과 같은 이름이다. 한식백반으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동하는 차안에서 가이드는 간단한 중국말과 아울러 중국의 단면을 소개해 준다. 안녕 하세요; 니하오 마, 고맙습니다.; 셰 셰, 식사하셨나요?; 쯔발로 마, 수고하셨습니다.; 쉰 쿨라, 다시 만납시다.; 짜이 젠,
중국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일생동안 다음의 세 가지를 다 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 세 가지란 첫째, 중국은 국토가 워낙 넓어서 명승지를 모두 여행하기 어렵고, 둘째, 중국 각 지방의 다양한 음식을 다 맛보기가 어렵고 셋째, 중국의 글자인 한자가 5만 여자로서 이를 모두 익히기 어렵다고 한다.
중국 내 조선족의 분포를 보면 지린, 랴오닝, 헤이룽 등 동북지구가 가장 많은 81만 명, 산둥성이 18만 명, 베이징·텐진지구가 17만 명, 상하이·난징·항저우의 화동지역이 8만 5천명, 선전·광저우 등 화남지역이 6만 명 도합 130만 5천명이라고 한다. 중국내 55개의 소수민족 중에서 인구 숫자로는 12위를 차지하나 교육열은 단연 으뜸이라고 한다.
우리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도문톨게이트를 통과하다가 “너도 나도 인구문제 해결에 나서자”라는 색다른 구호판을 발견하였다. 한족은 자녀 1명만 허용하고 소수민족은 2명까지 낳을 수 있다고 한다. 이를 위반할 때는 벌금 3천원(한화 약 60만원)을 내야하는데 벌금보다도 호적등록권을 박탈함으로써 국민으로서 권리 행사를 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병역의무를 면제받기 위해서 미국원정출산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국에서도 부잣집에서는 미국으로 출산이민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13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의 입장이 마치 우리나라의 70년대 가족계획을 홍보하던 시절과 흡사한 모습이다. 오후 일정으로 일행은 두만강 대나무뗏목관광에 나섰다. 두만강(豆滿江)은 그 길이가 521km로서 압록강, 낙동강에 이어 한국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인데 중국에서는 도문강(圖們江)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관광객이 많아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북어포를 안주로 하여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이는 맛도 괜찮았다.
우리의 위치는 두만강 중류에 해당되는 것 같은데 강폭이 대략 100m내외에 수심은 2~3m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 식량 해결이 어려운 북한 주민들이 여름에는 수영으로 겨울에는 어름 위를 걸어서 중국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광경이 상상되는 곳이다.
저녁식사는 역시 강동회관에서 한식백반으로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시간을 어떻게 보낼까하다가 커피숍 마담의 안내로 인근에 있는 노래방을 찾아 애창곡을 부르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 6/27
06:00에 기상하여 07:00에 아침식사를 한중뷔페식으로 하고 08:00에 백두산 관광길에 올랐다. 고속도로 주변에는 사과, 배 등 과수원이 많았는데 중국정부에서는 80년대 이후 의례간소화와 토지의 효율적 이용을 목적으로 종래의 매장문화에서 화장문화로 바꾸고 주민들에게 30년 한도로 토지를 대여해주고 있다고 한다.
고속도로는 소득수준이 낮고 기술수준이 아직 일천하여 제한 속도는 보통 60~80km이었으며 마을 앞을 지날 때는 도로를 격리하는 울타리가 없기 때문에 제한속도가 40km인 곳도 있었다. 간이휴게소에서는 참외, 옥수수 등 한국 돈 1,000원 단위로 팔고 있었다.
점심식사는 백두산 등정에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고려반점에서 토종닭 백숙과 인절미로 배불리 먹어두었다. 백두산 천지주위에는 16개 봉우리가 있는데 우리는 장군봉(2,750m)쪽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관광버스에서 내려 비교적 평탄한 길을 현지 대형버스로 25분을 올라간 후 다시 급경사인 정상 가까운 곳은 지프로 15분 올라간다.
정상이 가까워 갈수록 급경사에 굽은 도로여서 차가 탄력을 받아야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두꺼운 철판으로 펜스를 만들어 놓았지만 몸이 이리저리 쏠리고 아찔한 낭떠러지가 보일 때는 간이 콩 알만 해지는 느낌이다.
백두산은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 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長白山]이라고 한다.
정상부근 주차장에 하차하여 약 3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노라니 과연 한 여름인데도 정상부근의 봉우리 곳곳에 흰 눈이 쌓여있고 세찬 바람이 불어 한 겨울의 모습이다.
드디어 장군봉 정상이다. 아! 백두산, 그리고 천지! 사진으로만 보고 말로만 듣던 백두산과 천지가 아닌가?. 검은색 현무암 바위너머로 아득히 그리고 선명하게 쪽빛 자태를 드리우는 호수의 신성하고 신비하고 장엄한 모습에 압도된다.
"백두(白頭)산 천지는 백(百) 번 올라가야 두[二] 번 정도 볼 수 있다."
"백두산에 올라가서 천지(天池)를 본 사람은 몇 안 되고, 못 본 사람이 도리어 천지(天地, 매우 많다는 뜻)이다."
"백두산에 한 번 올라가서 대뜸 천지를 보겠다는 사람은 천치(天痴)이다.
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는데 우리 일행은 단 번에 맑게 갠 천지를 감상할 수 있었으니 큰 행운이 아닌가?
하산 도중 장백폭포를 만나게 되었다. 주차장에서 도보로 10분을 걸어가니 또 하나의 탄성을 자아내는 폭포가 눈앞에 전개된다.
장백(비룡)폭포는 양강도 삼지연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백두산에 있는 폭포로 16개의 산봉우리가 천지 기슭을 따라 병풍 모양으로 천지의 삼면을 둘러 싸고 있는데 북쪽으로 트여진 곳으로 물이 흐르며 물은 1250m 까지 흘러내리나, 물의 양은 그다지 많지 않아도 가파른 지형의 영향으로 물살이 빨라서 먼 곳에서 보면 하늘을 오르는 다리를 연상케 하여 사람들은 이를 "슴하사" 라고 부른다. 슴하사는 개활지를 통해 흐르다가 68m의 장대한 폭포를 이루며 90도 수직으로 암벽을 때리며 떨어진다.
꼭대기에서 36m 까지는 곧게 쏟아져 내리며, 그 아래 에서는 비탈진 바랑에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킨다. 떨어진 물은 쑹화강으로 유입된다.
200m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폭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폭포 옆에는 천지를 향하는 계단이 있는데, 낙석이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장백폭포를 관람하고 우리 일행은 숙박을 하기위해 산 속에 자리 잡은 백산대주점(白山大酒店)에 도착했다.
백두산 관광의 감격을 간직하며 눕자마자 피로가 엄습하면서 꿈나라로 향한다.
□ 6/28
06:30 기상하여 07:00 아침식사를 마치고 08:00 다음 여정을 위해 출발했다. 가이드는 이동하는 시간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특이한 북한용어를 소개한다. 에어콘; 공기조절기, 컴퓨터; 전자뇌, 장갑; 손싸개, 스킨; 살결물, 라면; 꼬부랑국수, 쏘시지; 고기순대, 도넛; 가락지빵, 딸기쨈; 딸기단조림, 카스테라; 설기과자, 쥬스; 과일단물, 키스; 주둥이박치기라고 일러준다.
처음 들으면 우스꽝스러운 것도 있지만 외국어를 남용하는 우리나라에 비하여 순수한 우리말을 지키려는 북한의 노력은 인정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된다.
지나는 길에 사슴목장에 들렀다. 사슴을 구경하고 나서 기념품점을 돌아보았는데 꽃무늬를 장식한 중국 화병이 눈에 들어온다. 값을 물었더니 중형이 4,000원 소형이 3,000원 이라 하여 장식용으로 두 개를 샀다.
다음은 묘향산전시관에 들렀다. 이곳은 북한당국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운영하는 상점인데 우황청심환을 파는 곳이다. 미모의 여성홍보원이 말쑥한 자세로 청산유수처럼 한약을 소개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용정 한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다음 코스는 대성중학교이다.
윤동주 시인, 재야 운동가 문익환 목사,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졸업한 학교이다. 민족시인 윤동주는 용정(龍井) 광명중학교(光明中學校) 출신이나, 해방 후인 1946년 광명 중학교가 주변 6개교와 더불어 대성 중학교로 편입되어 대성 중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용정제일중학교(龍井 第一 中學校)로 개명되어 있다. 교문 오른쪽에 옛 대성 중학교 본관 교사를 옛 건물양식 그대로 신축하여 윤동주 시인 기념관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대성중학교에서 우리는 마중 나온 용정시 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이준일 회장과 만났는데 그 분이 용정시내 조선족 역사탐방 길을 안내하였다.
먼저 용정시 중심부에 우뚝서있는 일송정을 찾았다. 일송정에서는 용정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해란강은 역사를 고증하듯 오늘도 말없이 용정시를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일송정은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 정자란 뜻인데 선구자들의 얼을 기리기 위한 소나무는 오래전 베어지고 작은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가곡 ‘선구자’는 조두남 님이 21세 되던 해인 1933년 만주 무단 강[牧丹江]에서 작곡했다고 한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로 시작되며 다장조, 6/8박자,
3절의 가사를 가지고 있는 웅장하고 씩씩한 노래이다. 조두남이 만주에서
유랑하고 있을 때 윤해영이 준 시 〈용정(龍井)의 노래〉에 독립군의
기상을 표현하는 곡을 지어 〈선구자〉라고 제목을 붙였다 한다. 그 뒤
윤해영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이 곡은 민족의 노래로 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었다. 가사 중에 있는 일송정 용정고개와 해란강은 독립투사들이
쉬어가던 곳이다. 일송정(一松亭)은 나라가 일제에 의해서 빼앗겼을 때 수많은 뜻있는 독립운동가 들이 이곳으로 건너와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배를 곯아가면서 무술을 연마하고 의지를 가꾸며 때를 기다리던 곳이다.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조국광복의 그날을 위해 나를 희생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같은 분들이 바로 그들이다. 우리도 이웃과 국가에 대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겠다.
다음 여정은 용정 합성리 공동묘지에 세워진 <<3. 13 반일지사릉>>이라고 씌여진 비석을 찾아 묵념을 올렸다. 1990년 5월 19일에 세워진 비석 뒷면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새겨져있었다.
“1919년 3월 13일 반일 대시위는 연변지구 조선족인민군중이 분발하여 일떠나서 일본제국주의 침조침화(侵朝侵華)정책에 저항하고 민족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한차례 군중성적 혁명투쟁이였다. 같은 달 17일 룡정 합성리 공동묘지에서는 순난자들에 대한 안장의식을 성대히 거행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지방 당국의 잔폭한 폭행에 항의했다. 19명 순난의사 명단은 채창헌(蔡昌憲),외 18명이다.”
다음 여정은 김약연, 윤동주 등의 얼이 서린 명동촌
명동촌은 1899년 142명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그들을 중심으로 마을을 건설하고 민족인재를 배양하기 위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명동촌(明東村) 입구에는 문익환, 윤동주 생가 터를 기념하는 바위 표지석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김약연기념비, 명동학교터, 명동교회, 윤동주생가, 송몽규 생가 등을 답사하였다.
김약연기념비는 1942년 건립되어 문화혁명 때 일부 파손되었다가 최근 복원되었다. 명동학교는 1908년 4월 27일 명동촌에 설립된 민족교육기관으로 서전서숙의 민족교육정신을 계승하여 김약연 등의 애국지사들이 화룡현 명동촌에 설립하였다. 명동학교는 교육이념을 ‘독립정신’에 두고 신교육 체제를 세워 이를 구현하기 위하여 역사에 황의돈(黃義敦), 윤리에 박태항(朴兌恒), 한글에 장지영(張志暎), 체육 군사에 김홍일(金弘一)등을 비롯하여 여준, 최기학, 송창의, 박태식, 김철, 박경철, 김성환, 김근승 등이 국내외 여러 곳에서 차례로 초빙되어 교단에 섰다. 학제도 2년 만에 여학교까지 병설하는 명동중학으로 개편, 민족주의 이념이 철저한 항일구국 인재의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 명동학교는 그 터만 밭으로 변해 남아 있다. 1995년에 건립한 명동학교기념비(明東學校紀念碑)가 서있는데, 그 비에는 “1908년 4월 27일 김약연을 비롯한 반일지사들이 창기한 근대교육학교로 이곳에 설립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명동학교는 폐교 이후 ‘명동소학’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명동촌에서 400미터 정도 떨어진 연길로 가는 길가에 신식 건물로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 이 학교는 학생들이 줄어들어 폐교되었고, 학생들은 지신에 있는 지신명동학교(智新明東學校)에 다니고 있다.
1909년 5․6월경 명동교회가 설립되었다. 교회의 설립에는 국내에서 온 정재면(鄭載冕)의 공헌이 컸다.
복원된 윤동주 생가는 윤동주가 태어나 15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별헤는 밤」등의 시를 통해 그리워 한 북간도의 집이다. 대지 300여 평에 외양간 등이 실내에 있는 함경도 전통가옥의 본채와 별채가 그대로 복원되었다. 사각모양의 나무로 된 우물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다음 여정은 화룡현 수성촌에 세워진 탈취십오만원사건 유지 기념비이다
1919년 겨울 임규정, 최봉설 등은 철혈광복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마련에 헌신하던 중 회령에서 용정으로 조선은행권 15만원이 호송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920. 1. 4. 동랑어구 숲속에 매복해 있다가 현금수송마차를 습격, 현금 15만원을 확보하였다. 이들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으로 가 이곳에서 무기구입을 위해 활동하다가 최봉설을 제외하고는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불철주야 조국광복을 위한 일념으로 목숨을 바치거나 이 땅을 살다 가신 선인들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희생 앞에 숙연한 마음을 금할길 없다.
이준일 회장은 용정시내 한식당에서 우리 일행에게 환영만찬을 대접하였다. 이 자리에는 용정시내의 문학인들이 여러분 참석하여 친목을 도모하였는데 이태수 부회장님, 전광하 교수님, 김충국 님, 전현길 님, 송명희 님, 한영숙 님, 리미옥 님 등 8명이나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박유석 펜문학강원도지회장은 용정시 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매년 발행하는 ‘일송정’제작비 협찬금으로 금일봉을 전달했다.
□ 6/29
06:30 기상하여 07:00 호텔에서 한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09:40 대주호텔을 출발하여 연길공항에 도착하였다.10:30에 수하물 탁송을 하고 11:00에 검색대를 통과하여 12:10에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12:35 아시아나 여객기는 옌지공항을 이륙하여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천지를 바라보는 감격과 아울러 민족통일에 대한 사명감 고취, 연변일대와 용정시내에 산재한 조상들의 나라사랑의 숨결, 용정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원 여러분의 따뜻한 환영 등이 오래도록 내 기억과 가슴 속에 남을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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