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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이곳을 노비가 살던 가림집이라 불렀다 한다. 온전히 남아 있는 살림집으로는 가장 오래된 월성 손 씨의 서백당과 여강(양동) 이 씨의 종갓집인 무첨당이 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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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손소(1433~84년)가 입향자이고 그의 둘째아들인 우재 손중돈 그리고 외손인 회재 이언적에 의해 다져져 오늘까지 내려왔다. 현재 남아 있는 한옥이 1백58채인데 이 중에 2백 년 이상 된 고택만 54호나 된다고 하니, 역사도 오래됐지만 그만큼 잘 보존해 왔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마을은 마치 숲과 숲 사이에 마을이 들어선 듯 독특한 형세다. 배산인 설창산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지맥이 네 군데, 그 지맥 이쪽저쪽으로 집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마치 각각의 동네처럼 느껴지는 것. 재밌는 것은 잘 관찰해보면 마을 위쪽으로는 규모가 큰 기와집들이 몰려 있는데, 올라갈수록 전망도 좋고 품위가 산다는 이유에서다. 의사들이 많이 나왔어요.” 양동마을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 선생이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동방 5현에 드는 대단한 분이다. 그러니 이런 보물 같은 마을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귀중한 물건들이 많을 수밖에. 족보, 옛 문서, 고서, 편지 등 기록 문서들도 풍부했으나 상당량 도난당했다. 한 어르신은 1톤 트럭 2대 분량의 고서를 하룻밤 사이에 도둑맞기도 했다며, 같은 동네에 살아도 집에 어떤 문화재가 있는지 ‘쉬쉬’할 정도란다. 개방된지 얼마되 지 않아 곧 마당 구경도 못 한 채 쫓겨나는 날이 올까 걱정이 앞선다. 그보다 양동마을 사람들은 ‘충효’와 같은, 우리가 끝까지 이어나가야 할 가치를 배우기를 원했다.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모습, 자신의 품위를 지키며 행동하는 모습과 같은. 방 안에 앉으면 가슴 아래를 볼 수 없도록 설계한 한옥은 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배려의 ‘품위’이고, 한옥 생활이 주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과 조상이 지키고자 한 가치를 받들려는 것은 ‘충효’이다. 문득 이날 반바지를 입고 오지 않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걸어놓은 집은 식당과 민박을 겸하는 곳. 숙박은 양동마을 홈페이지에서도 예약 가능하다. 민박 명패를 달고 있지 않더라도 특별히 소일거리가 없는 마을사람들이 2만~3만원에 자신의 집 방 한 칸을 내어주는 경우도 있다. 주인아주머니와 옛날 마을 이야기를 나누며 뜨뜻한 숭늉 한 사발 얻어 먹을 수 있는 인심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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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들은 비교적 개방적이다. 물론 문 앞까지 갔다가 개 짖는 소리에 놀라서 뛰쳐나오기 일쑤지만, 조용히 보고 나온다는 마음으로 한번 둘러본다. 어떤 집은 관대하고 어떤 집은 팍팍하다. 집집마다 심장을 두근거리며 그렇게 세간을 훔쳐보는 경험도 색다르다. 문틈으로 오래된 자전거 하나, 고무신 2개, 늘어난 하얀 러닝셔츠, 귀여운 진돗개 한 마리.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나름의 숨은 그림 찾기를 해보는 것도 마을을 재밌게 둘러보는 방법이다. 출퇴근하며 거처를 두고 있다 한다. 빈집으로 남은 고택들은 쉽게 퇴락하기 때문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 관리만 해준다면 세를 내지 않고 살 수 있었단다. 그래서 한옥 안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 신식으로 꾸며두고 사는 집들이 있어 재밌는 풍경을 연출한다. 손주가 자주 놀러 오는지 초가집 마당이 꽉 차도록 커다란 플라스틱 장난감 미끄럼틀을 가져다 놓은 집, 젊은 감각의 주인장이 살고 있는 집인지 오토바이 헬멧을 2개씩이나 걸어놓은 집, 대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캠핑 의자. 새집 보다 헌집에 살면서 하나씩 채워나가는 재미도 양동마을 한옥에 사는 즐거움이지 않을까. 원래의 자리는 마을에서 조금 더 안쪽에 있었으나 입구까지 쫓겨나게 되었는데, 의외로 마을 안에는 집 안에 십자가를 건 집들이 몇 호 있는 것으로 보아 일요일마다 방문하는 신도들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우연히 읽었던 수필 중 양동마을 종가 집의 며느리로 살고 있는 여인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기에도 이곳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종부의 첫째 의우는 아들을 출산하는 일. 여인은 아이가 생기지 않자, 열심히 교회를 다니며 기도를 정성껏 올린 뒤 아들을 얻었다. 그 뒤로도 종부는 일요일마다 교회를 간다 한다. 이외의 시간에는 전통을 계승하며 선대 며느리들이 했던 것처럼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종부로 돌아간다. 교회와 수필 속 종부를 함께 떠올리니, 양동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뼛속 깊이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을 짊어지고 살 것이라는 편견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런 나름의 변화들이 세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형될 것인가 하는 고민은 우리 모두의 몫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보았는지 주인아주머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괜찮다며 들어오라신다. “밥 지으시는 거예요?” “아니, 지금 떡 한다아니가.” “왜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 “이거 갖다 팔라고. 요새 사람들이 윽수로 많이 온다아니가. 어제도 요 마을 앞에 차가 꽉 찼다. 내 요 시집온 지 40년 됐는데 이래 사람 많이 온 건 첨 본다. 그래서 내 이거 갖다 팔라고. 내 팔자에도 없는 떡장사 할라카이 힘드네.” 웃으며 자신의 집을 대나무 밭 아래 집이라고 소개했다. 경제활동이 별로 활발하지 않은 마을에 낯선 방문객이 조금이 나마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지만, ‘그 팔자에도 없는 떡 팔기’라는 말에 어쩐지 가슴이 아린다. 싫지만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그 변화가 반가운 사람도 있을 테지만, 여유와 평화가 넘치던 마을에 괜한 일거리를 던져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복잡한 마음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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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귀한 우리재산 잘 보존 해야겠네
옛 선조들의 건축물 조화가 안채와 사랑 채로 구분 되어 있어
현 시대의 아파트와는 큰 대조가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