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게도 유교 사회에서는 죽는것도 말이 다릅니다, 천자가 죽으면 붕(崩), 제후가 죽으면 훙(薨), 대부가 죽으면 졸(卒), 선비가
죽으면 불록(不祿), 보통 사람이 죽으면 사(死) 라 했습니다. 보통은 제가 한자어에 한자를 안 붙이는데 이번에는 붙인 이유는 요 한자를 보시면
저런 말이 왜 붙었을까 대충 짐작이 되기 때문이지요. 죽는것도 차별 받는가 싶어 조금 열받지만 때가 때이므로... 넘어가죠. 아참! 조금 핀트를
벗어나서 2013년 부터인가? 화장 이후 재를 자기집 등에 안치하는 것도 가능해 진다고 하더군요. 공동주택이나 상가 등에는 불가능 하지만 그냥
동네 집이라면 가능해 진답니다. 제가 죽으면 집에 가족묘? 그런걸 만드는걸 고려해 봐야겠어요.
자, 각설하고... 조선은 제후국이기 때문에 죽었을 때 훙 이라는 말을 써야 하는데 실록에는 승하라고만 표현하죠. 거기다 공식 기록에는
안쓰지만 붕어 하셨다는 말도 쓰곤 하니, 넘들 말대로 조선이 중국의 꼬붕이라고 말하는건 그 시대를 모른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죠. 아무튼 유교에서는
장례에 대한 용어도 다 다릅니다. 황제는 어장, 왕과 왕비는 국장, 세자와 세자빈은 예장
왕이 사망하면 일단 내시가 먼저 활동합니다, 사실 왕의 옆에 붙어 있는게 내시니 어쩔 수 없죠. 내시가 평소 왕이 잘 입던 옷(속옷
등)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 세 번 '상위복' 이라는 말을 외칩니다. 상위복이라는 말은 왕의 혼에게 돌아오라는 말인데, 당시 사람이 죽는 것은
몸에서 혼이 빠져나가 죽은 혼들이 모인 북쪽으로 간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왕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왕의 혼이 북쪽으로 가는 것인지라, 평소
잘 입던 옷을 높은 자리에서 흔들어 그 냄새가 혼에게까지 닿아 그 냄새를 느끼고 정신을 차려서 다시 몸으로 돌아오라는 의미로 그런 행동을
하는거죠. 왕이 죽으면 상위복이라 외치고, 왕비가 죽으면 중궁복이라고 외칩니다.
<지붕에 올라가서 '상위복' , '상위복' , '상위복' 삼 창>
이렇게 혼을 부른 다음에 그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겠죠? 이 기간은 천자는 7일, 제후는 5일, 일반인은 3일 이었고,
조선에서는 역시 3일 동안 기다리다 살아나지 않으면 입관을 하고, 세자의 즉위식을 거행합니다. 사실 뭐, 명분은 그렇게 하지만 실상 이 5일의
기간은 장례를 준비하는 기간이지요. 죽기전에 다 해 놓을 수는 없는거니까요. 요 기간동안 시신을 씻고 의복을 갈아입히는 습과, 옷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는 소렴과 대렴이 진행되고, 왕의 경우는 그냥 빈소에 관을 두는게 아니라 따로 찬궁이라는 상자집을 만들어 그곳에 모십니다.
<요렇게 생긴놈이 찬궁 입니다>
아참! 빼먹었는데 일단 왕이 사망하면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이 설치되고, 시신을 안치하고 염을 하는 등의 업무를 하는 빈전도감,
무덤을 조성하는 산릉도감 등이 만들어져 활동합니다. 그리고 요때 새로운 임금은 상복을 입고 즉위하게 되죠. 왕의 자리는 하루도 비워둘 수
없는거니까요, 외국처럼 상과 즉위를 따로 봐서 화려하게 즉위하거나 하지도 않지요.
자... 임금이 죽고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아 본격적으로 상을 치르게 되면서 상복을 입고, 국장도감등이 설치되고, 새 왕이 즉위하고
등등의 일이 진행되는데 장례 자체는 사후 5개월 뒤에나 치르게 됩니다. 그 사이에 봉분도 조성해야 하고, 여러가지 준비도 해야 하니 왕쯤되면
5개월이나 필요한가 봅니다. 이 기간동안 시신을 모시는 곳을 빈전이라고 하는데 일반인도 이런곳을 빈소라고 하지요. 사실 5개월쯤 되면 부패가
시작되어도 한 참 전에 시작된 기간이라 시신의 보존을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조금 더 알아봐야 하겠어요. 설마 소금치거나 하지는
않을테고...
왕이 죽고 산릉도감에서 왕릉 공사를 끝마치면 이제 빈전에서 발인이 시작되고, 관이 궁을 떠납니다. 이 과정은
<국장도감의궤>같은 책에 잘 나오는데 왕의 죽음 또한 국가적 행사이므로 그 규모가 상당합니다. 정조 국장 행렬을 그린 빈차도는
40면에 총 1440명의 인원이 나와있고, 명성황후때는 78면에 2035명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건 전부 다 나온것도 아닙니다, 군대나 실료들
등등을 모두 합해 총 일만 정도의 대 인원이 참여했다고 하는군요.
<국장도감의궤>
정조 때 기준으로 행렬을 보면 가장 앞은 경기감사가 (장지가 화성이라서) 그 다음은 국장을 관장하는 책임자들이 상복을 입고 따라가고 그
뒤로 총기를 든 군인 400명이 시위하고 그 뒤로는 4인의 악귀를 쫒는 방상시 및 악대, 깃발대, 그리고 임금의 사용물등을 담은 가마 등이
따릅니다. 그 다음 행렬의 중심부에는 명정이 앞에 있고 국왕의 시신이 있는 대여가 지나가는데 이 대여가 메인이므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합니다.
그리고 행렬의 후반부에는 일반 관리나, 궁인, 후위를 호위하는 군대가 또 따라가게 되죠.
<대여의 행차>
이제 왕릉에 도착하면 관을 다시 정자각에 모시고, 찬궁에서 관을 꺼내 하관합니다. 일반인들이야 그냥 집어넣고 다지면 되겠지만 왕이므로
관을 석실에 안치할 때는 윤여라는 수레바퀴같은 기구를 이용해 아래가 아니라 옆으로 들여 넣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절차가 끝나면 이제 혼을
위로하는 우제를 지낸다음 자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혼전에 둡니다. 이 혼전에서 삼년상을 지내는 거죠. (왕이 궁궐 비우고 무덤 옆에서
삼년상을 지낼 수는 없잖아요?) 삼년상이 끝나면 가신주를 꺼내 종묘 터에 묻은 다음 새로 신주를 만들어 종묘에 들이는데 이를 부묘라고 합니다.
여기까지 끝나야 이제 국장이 끝난거죠.
<왕의 죽음도 결국 정치입니다,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단 한시도 정치에서 못
벗어나죠.>
요즘에야 장례가 간소(?) 합니다만 예전에는 민간에서도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정도 비슷한 것도 있어 그렇게 특이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만 용어가 다르고, 임금쯤 되면 기간과 규모가 월등하다는 것이 다르달까요? 하지만 임금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도 정치적인 만큼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