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렌 키르케고르의 <두려움과 떨림>(지만지)을 두 번 읽었다.
어제까지 쇠렌 키르케고르의 <두려움과 떨림>을 두 번 읽었다. 키르케고르의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이지만 가장 어려운 책 중의 하나이다. 십여 년 전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을 때는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었다. 신학을 전공한 탓인지 큰 어려움은 느끼지 못했다. <그리스도학교의 훈련>과 <사랑의 역사>, 강해집인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와 <들의 백합화 공중의 새> 역시도 어렵지 않았다. 재미는 없었지만 견뎌 낼만 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읽은 <두려움과 떨림>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번역상의 문제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번역자인 임규정은 고려대 철학과과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고 1992년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학위는 <키에르케고어의 자기의 변증법>으로 케고르의 실존철학의 핵심인 3단계 변증법적 구조를 다루었다. 그는 키르케고르의 전문가다. 문학서적이 아니니 철학자가 케고르의 책을 번역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는 이 책 외에는 키르케고르의 책을 다수 번역한 번역 전문가다. 그러니 번역이 오류는 없을 것이다.
첫 번째 읽었을 때는 단순한 성경강해집인 줄 알았다. 키르케고르의 문장 자체가 워낙 복잡하고 장문이기 때문에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읽어 가다보면 감이 오는 경우가 많다. 이번 경우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문장과 문장들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은 간파해 낼 수 없었다. 마치 여행을 가다 잠깐 잠깐 쉬어가는 휴게실의 여유는 누릴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여행의 목적과 방향 등은 감 잡을 수 없었다. 결국에는 번역자의 해석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이처럼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을 넘어선 종교적 실존,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적 역설의 단계를 다루고 있는 <두려움과 떨림>의 부제는 “변증법적 서정시”다. 절대적 역설 앞에서 아브라함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지만, 이 책은 그처럼 침묵할 수밖에 없는 주제에 관해서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놓고 있다. 이 또한 역설이 아니겠는가? 13쪽
만약 번역자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 책은 키르케고르의 가장 핵심적인 책이 될 것이다. 실존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키르케고르가 가장 키르케고르다운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는 모순과 부조리를 버리지 않고 안고 가는 것이 아닌가. 키르케고르는 모순과 부조리를 실존 안에 가두고 있는데, 믿음은 실존을 뛰어 넘어 순종에 자리에 이르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치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갈등 한다. 윤리적 측면에서 본다면 살인자가 될 것이고, 정신적 측면에서 본다면 정신병자가 된다. 일반 이성으로는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만약 이 시대에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광신자라는 비판과 살인자와 정신병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브라함은 기독교 신앙의 영웅이 되었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하는 헤겔과 등을 돌린다. 헤겔은 개인을 역사적 필연 속에 함몰 시켜 버렸다. 헤겔에게는 개인은 없다.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무모함을 단호히 거부하고 단독자로 개인을 세운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윤리적 의무를 무한히 체념하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관계 속으로 들어갔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제약하는 윤리적 의무와 그 윤리적 의무를 지지하는 보편적 세계를 넘어서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선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영웅적 비약은 너무나 높은 경지여서 이 기막힌 비약 앞에서 뭇사람은 한없는 두려움으로 전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아브라함을 익명의 저자 요하네스(키르케고르)는 신앙의 기사라고 부른다. 11쪽
헤겔은 필연성으로 역사를 운명에 종속 시켰다면, 키르케고르는 필연의 역사가 지배하는 운명을 믿음으로 돌파했다. 목회자로서 키르케고르의 주장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헤겔의 철학은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아담의 역사이고, 키르케고르의 단독자(憺者, der Einzelne) 개념은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역사를 변혁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 지배하는 보편적 세계, 필연의 역사에서 온 인류를 대표하여 죽고, 부활을 통해 생명의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믿음은 예수의 그 길을 따르는 것이며, 함께 사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은 위대하고 탁월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믿음의 위대한 알아채지 못하고 당대의 신학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한다.
신학은 얼굴에 연지를 찍고 분을 바른 채 창가에 앉아서 철학을 향해 사랑을 구걸하며 아양을 떨고 있다. 헤겔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만, 아브라함을 이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들 생각한다. 헤겔을 뛰어넘는 것은 놀랄만한 업적이지만, 아브라함을 넘어서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라고들 한다. 70쪽
키르케고르가 볼 때 철학(헤겔)은 보편적 세계에 머무는 것이며, 아브라함의 신앙은 보편적 세계를 뛰어 넘은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을 하나의 도약으로 설정하고, 합리적 논증을 넘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으로 본다. 그의 단독자 개념이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의한 것이듯, 구원 역시 보편이 아닌 개체로서 가능하다고 본 것이 분명하다. 절대타자인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이성적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은 곧 체념이며,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오직 부조리의 힘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또 이 사실을 신앙의 도움으로 파악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불가능성으로 인정하며, 또 바로 그 순간에 그는 부조리한 것을 믿는데, 왜냐하면 만일 그가 자신의 전 마음과 영혼을 다해 불가능성을 열정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상상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고 또 그의 증언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기 때문이니, 그것은 곧 그가 심지어 무한한 체념에도달한 적이 없는 까닭이다. 103쪽
키르케고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신앙은 보편적 세계를 벗어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그 과정은 믿음으로 가능한데, 보편적 세계를 벗어나려면 먼저 자기 체념이 있어야 하고, 두려움과 떨림이 동반된다. 이후 믿음을 통해 보편적 세계에서 부조리 안으로 ‘도약’하게 된다.
키르케고르가 <두려움과 떨림>을 닫으면서 정리한 문장을 들여다보면 신앙은 역설이며, 사유 불가능한 역설로 풀어낸다.
신앙이라는 놀라운 역설, 살인 행위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성스러운 행위로 변화시키는 역설,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다시 돌려주는 역설, 신앙은 정확히 사유가 멈추는 곳에서 시작하는 까닭에 그 어떤 사유도 이해할 수 없는 역설, 이런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담겨있는 변증법적 측면을 문제의 형태로 끌어내고자 한다. 117쪽
합리주의와 근대주의 사상의 영향을 주고받은 개혁주의 학자들과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키르케고르를 부정적으로 보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설명 가능한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로 상정하고, 신앙을 부조리와 역설로 불투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의 후예들은 결국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은 인식할 수도 없고, 신앙할 수도 없다는 극단까지 나아간다. 파스칼이 데카르트를 비판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나는 결코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모든 철학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신을 제외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질서를 움직이게 하려고 신을 하여금 손가락 한 개를 움직이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는 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팡세 77)
데카르트와 키르케고르는 양극단이다. 데카르트는 합리적 사고를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키르케고르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데카르트가 이성을 배제한 합리성을 추구한 나머지 신을 배제한 것처럼 키르케고르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에 신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그 두 사람의 후예들은 결국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 없는 합리주의와 실존주의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참으로 기이하게도 합리주의의 치료책은 실존주의고, 실존주의의 치료책은 합리주의라는 것이다. 이것 또한 역설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어거스틴과 안셀름의 탁월성은 말로 못하리라.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지.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이에 비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
그럼 나는 뭘까? 아직도 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 저자
-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 출판사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06-10 출간
- 카테고리
- 인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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