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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50) 동작나루 노량나루 ①] 드론 띄우듯 삼남대로 서울길 그리다
(CNB저널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한강변을 그린 겸재의 또 다른 그림에 동작진(銅雀津)과 서빙고망도성(西氷庫望都城)도가 있다. 동작진도는 경교명승첩 속 그림인데 영조 20년경(1744년) 그린 그림이라 한다. 최근 살펴본 몇 편의 그림들이 양천에서 한강을 타고 오르면서 배 위에서 바라본 시각인 것과는 달리, 이 그림은 동작진 건너 육지, 즉 지금의 이촌동 앞 강변 모랫벌쯤 되는 곳에서 강 건너 동작동 현충원 방향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또 다른 한 편의 그림은 반대로 동작나루쯤에서 드론을 띄우듯 한양도성(漢陽都城)을 비스듬히 내려다본 이른바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린 그림이다.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다는데 필자는 사진만 보았을 뿐 어느 전시회에서도 실물을 접하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다.
이 두 그림을 이어보면 한양도성에서 남대문을 나와 청파동을 지나고 삼각지께를 돌아 이촌동으로 접어들어 동재기나루(동작나루)를 건너 과천 지나 전라도로 빠져 나가던 삼남대로(三南大路) 길이 그대로 연결되는 길이다. 지도 1과 2는 고산자 김정호의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인데, 지도 1은 한문으로 작성한 경조오부도를 누군가 한글화하여 다시 그린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지도가 미국 위스콘신(Wisconsin) 대학교 밀워키(Milwaukee)도서관에서 최근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누가 그린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미국 대리공사로 1884년 조선에 파견되었던 포오크(Foulk) 중위의 작품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그는 한글을 해득할 수 있었다는데 그가 그린 다른 지도들도 남아 있어 신빙성이 있다. 이 지도와 경조오부도 부분도(지도 2)를 비교해 보면 그 당시 지명의 발음을 알 수가 있다. 주교(舟橋)는 배다리, 석우(石隅)는 돌모루, 동작진(銅雀津)은 동죅이나루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길은 한양에서 호남 지방으로 가는 직통로였는데 정조의 원행(園行) 길도 새로운 시흥별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이 길이 이용되었다. 이 도령도 이 길로 남원으로 넘어갔고, 흥부네 집 찾아가는 제비도 이 길로 갔다. 춘향가에는 이 도령이 장원급제 하여 남원으로 내닫는 데에서 휘몰이 장단으로 몰아친다. ‘남대문밖 썩 내달아 칠패, 팔패, 청파, 배다리 지나 애오개를 넘었구나.’ 보은의 박씨를 잎에 문 제비도 마찬가지였다. ‘저 제비 거동 보소, 보은표 박씨를 잎에다 가로 물고 남대문 밖 칠패거리 팔패 배다리 청패 애오개 넘어~~.’
이렇게 동재기나루를 넘어다니던 길이 겸재의 두 그림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제 동작진(銅雀津)도(圖)부터 살펴보자. 앞으로는 한강이 시원하게 흐르고 뒤로는 우람한 산들이 고산준령으로 이어지고 있다. 가장 뒤 원경으로 자리 잡은 산들은 좌로부터 청계산, 중앙에 관악산, 우측에는 삼성산으로 보인다. 좌측 청계산 앞쪽으로 낮은 산은 아마도 우면산(牛眠山)일 것이다. 그 우측으로 필자가 초록색으로 연결해 놓은 산이 동작동 현충원을 둘러싸고 있는, 요즈음 이름으로 서달산이다. 물론 현충원을 찾아가 보면 이 그림 같이 우뚝한 산은 없다. 다른 겸재 그림에서 보아왔듯이 그림 자체의 완성도를 위해 과감히 산을 우뚝 세워 그린 것이다.
강에는 선객을 건너 주는 나룻배가 있고 군사용 진선과 어선으로 보이는 배들이 정박해 있다. 강에 떠 있는 배에서는 사공이 삿대로 배를 움직이고 있는데 노 대신 삿대를 쓰는 것을 보면 이곳도 하상(河床)이 깊지 않아 노(櫓) 대신 삿대로도 도강에 불편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이지만, 행주산성 하류에 만들어 놓은 신곡수중보가 없다면 서울을 흐르는 한강의 수면은 많이 내려가 갈수기에는 맨몸으로 건널 수 있는 구간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강북 서빙고 쪽은 지금의 이촌동 지역인데 그림에서처럼 한강 철교 지역까지 백사장이었다 한다.
동작나루 자료사진(사진 1)에서 보듯 넓은 백사장 지역이었다. 그림에는 도강하려고 온 양반 내외처럼 보이는 이들이 말을 타고 있고, 앞뒤로는 아랫것이 경마를 잡고, 또 다른 아랫것은 배를 향해 팔을 흔드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사공을 부르는가 보다. 이들은 이 도령이 그랬듯이 남대문을 나와 남지(南池)를 보며 칠패시장 지나고, 배다리(舟橋)로 만초천을 건너 청파역을 지나 돌모루(石隅), 당고개(堂峴)을 넘어 동재기나루에 왔을 것이다.
필자가 오렌지색으로 그어 놓았듯이 지금은 동작대교가 놓였고 그 위로는 4호선 전철이 쌩쌩 달리고 있다. 강을 건넌 지점(그림 속 3)에는 동작역이 있어 4호선, 9호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4호선 전철은 바로 우뚝하게 그려진 산등성이를 뚫고 터널로 이어져 이수역, 사당역으로 달린다.
번호 2로 표시한 길에는 나귀로 보이는 가축을 탄 이가 보인다. 이 길이 바로 호남으로 이어지는 삼남(호남)대로 길이다. 우리가 기록으로만 이 길을 기억할 때 일본의 젊은 지리학도 도도로키 히로시(轟博志)는 영남대로에 이어 이 길을 걸었다. 이 길은 이수역 앞을 지나 지금 사당동쯤 되는 승방평(僧房坪)을 거쳐 남태령을 넘어간다. 이어 과천과 인덕원을 지나 수원별로로 이어지는 길이다.
승방평이란 지명은 근처에 지금도 번성한 관음사(觀音寺)의 많은 승려들로 인해 생긴 지명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관음사가 소개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변계량이 관음사를 읊은 시가 실려 있다.
관악산 남쪽에 청계산 뒤쪽에 冠岳之南淸溪陰
우뚝 솟은 사찰이 수풀을 짓눌렀네 梵宮突兀壓長林
밤비 오자 호랑이 으르렁 울어 대고 夜雨咆哮吼飢虎
해 뜨자 새들은 재잘재잘 노래하지 旭日啁哳鳴幽禽
창 밑에 나는 샘에 여라 덩굴 뒤덮였고 泉生窓底薛蘿合
돌비탈 감돈 길에 소나무 들어찼네 路轉石稜松檜深
멀리서 혜상인이 잘 있는지 궁금하여 遙念惠師應好在
밤마다 꿈 속에서 산중을 찾아갔소 山中夜夜夢相尋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변한 사연
승방평을 지나면 넘어야 하는 큰 고개, 남태령(南太嶺)도 전설이 남아 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융릉(隆陵)으로 가는 길에 이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면서 고개 이름을 물었다 한다. 이때 과천현 이방이 지체 없이 “남태령입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미 고개 이름을 알고 있던 한 신하가 “이 고개 이름은 예로부터 여우고개라 하거늘 어찌 상감께 거짓으로 아뢰느냐”며 힐책하자, 이에 이방은 “본디 여우고개라고 하나 그런 요망스런 말을 감히 아뢸 수 없어 남으로 통하는 큰 고개이므로 삼가 남태령이라 한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정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상을 내렸는데 그 뒤로부터 남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길 번호 2의 좌측으로는 예로부터 개울이 흘러내렸다. 지금도 이 개울은 흐르는데 반포천(盤浦川)이라 한다. 그러나 과천현 옛 지도를 보면 각각 다른 두 개의 물줄기가 흘러 내렸다. 우면산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는 반포천(盤浦川, 蟠浦川)이라 했는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국일천(菊逸川), 일성록(日省錄)에서는 우면천(牛眠川)이라 썼다.
반포를 서릴 반(蟠: 서리다, 똬리 틀듯 하는 것)으로 써서 반포(蟠浦)라 쓴 것은 서초구의 유래가 ‘서리풀’에서 왔다 하듯이 ‘서리다: 蟠’을 살려 쓴 것이니 타당성도 있다.
한편 또 한 물줄기가 관악산과 남태령에서 발원하니 사당천이라 불렀다. 그러나 옛 지도에는 승방천(僧房川)이다. 지금은 사당천은 복개되고 물은 땅속에서 줄어 존재도 미미해져 두 물줄기가 합해진 물은 반포천이라 부른다. 지금도 이 반포천은 물도 흐르고 산책로로도 살아 있다. 이 개천 옆으로 이수역이 있는데 두 물줄기를 살려 그 이름을 이수로 했나 했더니 배나무골이 있어 이수(梨水)로 쓴다고 한다.
또한 겸재의 그림에는 미처 그려지지 않았으나 이 개천 앞의 한강에는 기도(碁島)라는 섬이 옛 지도에 그려져 있다. 동작나루의 옛 사진(사진 1)에도 기도(碁島)가 보이니(사진 속 번호 2) 60년대까지도 기도는 살아 있었다. 과천현 읍지에는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적에 죄인을 이 섬에 정배했다 하더라(世傳麗朝置罪人定配于此島云)’라고 했다. 아름답지만은 않았던 섬 같다. 이 섬을 살리려 했는지 공교롭게도 근래에 이 수역에 서래섬이라는 인공섬을 만들었다. 한편 섬이 물길을 가르다 보니 여울이 졌는데 그 여울은 모노리탄(毛老里灘)이라 불렸다.
언제나 모르겠는 것은 동재기나루 즉 동작진의 지명 유래다. 흔히 ‘흑석동에서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넘어오는 강변 일대에 구릿빛 색깔을 띤 돌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납득이 되지 않는 설명이다. 유래는 모르더라도 동재기를 읊은 시(詩) 한두 수(首)는 읽고 가련다.
계곡 장유의 시다. 제목은 동작 나루(銅雀渡). 마치 겸재의 그림을 해설한 시 같다.
동작강 사공 불러 배 타고 건너는 길 銅雀江邊喚渡舟
맑은 물결에 삿대 하나 저 언덕이 가깝고 一篙淸漲浸沙洲
남풍은 흰 물결을 불어 일으키는데 南風吹起白頭浪
지는 해 창망해라 절로 시름에 젖게 하네 落日蒼茫人自愁
다산은 느낌이 다른 동재기 시를 썼다. 감시(監試)에 낙방한 후 아내와 함께 아버지가 현감으로 계시는 화순으로 가면서 쓴 시이다.
가을바람 이는 동재기에서 銅雀秋風起
화순을 생각하니 아련하기만 烏城憶杳然
청죽 밭 안에 관아 있고요 官齋箐竹裏
국화 핀 곳 앞에 서실 있다네 書室菊花前
힘찬 기러기 멀리 뒤쫓아 遠逐隨陽雁
서서히 돌려 배를 띄우고 徐回汎壑船
여행길이 즐거움 없지 않지만 旅游非不樂
늙으시는 부모님 염려스럽네 行邁念親年
또 후에 다산은 ‘흑산도로 귀양 가는 승지 이익운을 보내며(送李承旨 益運 謫黑山島)’ 동작동 강가에서 시를 짓기도 했다.
승지를 지냈던 몸 옥지에서 내려갈 제 匼帀銀靑下玉墀
흑산도 가을빛이 눈썹 위에 서리었네 黑山秋色汎雙眉
차가운 못물 연잎엔 궁중 서리 쌓였는데 芙蓉水冷宮霜重
머나먼 땅 유자나무 바다 안개 몰아치리 橘柚天荒海霧吹
오경 밤 헌부에는 까마귀 소리 고요하고 憲府五更烏寂寞
해 저물녘 이별 자리 나는 제비 어지럽네 祖筵斜日燕差池
동작강 강가에서 바라볼 것 없나니 且休銅雀江頭望
자운도라 항구까지 어느 때나 당도할지 須到慈雲港口遲
(기존 번역 전재함)
예나 지금이나 공항과 역과 포구는 이별의 장소다. 후에 그의 형님이 그랬듯이 흑산도로 귀양 가는 이들은 동재기 나루를 건너 남도로 갔다. 더구나 신안의 섬으로 귀양 가는 이들이야 그 황량함이 오죽했을까? 아마도 자은도(慈恩島) 지나 소흑산도(우이도)나 대흑산도로 가는 길이 일반적 뱃길이었나 보다.
이 나루가 시심(詩心)만 일으키는 장소만은 아니었던 것인데 임진란 때 명나라 구원병들은 이곳 백사장에서 훈련을 하고 출전하였다고 한다. 앞서 소개한 계곡 장유는 얼음이 언 겨울 썰매(雪馬)를 타고 노량진까지 가기도 했다.
이제 전철을 타고 동작역에서 내린다. 서빙고와 반포를 잇던 동재기나루 물길 대신 전철이다. 2번 출구 앞에는 ‘동재기나루터’였음을 알리는 서초구청의 표석이 서 있다. 본래 반포한강공원에 세운 동재기나루터 표석이 있는데 그곳에 공사를 하다보니 찾기가 쉽지 않다.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았는데 풀밭에 있던 표석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다. 3번 출구 나와서 육교를 건너면 동작동 국립현충원 바깥담을 끼고 걷는 산책길이다. 겸재의 그림에 녹색으로 한 바퀴 돌도록 표시한 길로 걷는다. 길은 해가 갈수록 시민들이 이용하기에 편리하게 되어 간다. 이 산책길은 높낮이가 완만하여 걷기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쉽게 산책할 수 있는 길이다.
북묘도, 남묘도 다 사라지고 없으니
대략 30분쯤 돌다 보면 남묘(南廟)를 알리는 표지판을 만난다. 잠시 산책길에서 아랫마을로 내려가면 그곳에 남묘가 있다. 아니 있었다. 남묘는 졸고 남산 지역을 소개할 때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1598년 임진란 때 구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동묘보다도 3년 앞서 세운 관운장 사당이다. 지금의 힐튼호텔 주차장(또는 남산 트라펠리스) 자리라고도 하는데 1979년 국립현충원 아래 사당동으로 이전하였다. 규모는 동묘에 비해 아주 작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사진처럼 남묘를 알리는 편액이 붙어 있었다. 이번에 가 보니 편액은 사라지고 문도 닫혀 있었다.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도 없다. 연전(年前) 강화도에 갔을 때 북묘(北廟)가 사라진 것을 보고 황량했고, 또 북한산 내시묘역길에 갔다가 하루아침에 40여 기의 내시 묘가 흔적도 없이 파헤쳐진 것을 알았을 때 그 참담함처럼 황량하다. 400여 년 내력을 지닌 남묘는 없어진 것일까? 우리 시대에 관운장 사당이 새삼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이것도 우리가 살아온 흔적인데 한 번 없어지면 돌이킬 수 없으니 지켜주기를 바랄 뿐이다.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산책길로 돌아온다. 잠시 걸으면 이 산책길에 최고봉 서달산(瑞達山)에 닿는다. 고도 179m라 하니 동네 뒷산 언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창빈 안씨(昌嬪 安氏)의 묘역과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국군장병들의 영혼을 지키는 국립묘지를 감싸는 최고봉으로 의미는 크다. 옛 지도나 기록에는 동작산(銅雀山), 화장산(華藏山), 공작봉(孔雀峰)으로 알려진 산이다.
현충원 담을 끼고 흑석동 방향으로 오던 길을 계속 가다 보면 잠시 후 달마사를 만난다. 사력(寺歷)은 오래지 않으나 근세에 만공스님(滿空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 스님이 창건했다 한다. 절 뒤 가파른 언덕 위에는 마을을 지켜 준다는 거북바위가 있고, 벽면에는 근세에 자그맣게 새겨 놓은 관세음보살 마애불이 계신다. 이 절에서 마음을 끄는 것은 극락전 한글 주련이다.
한 소리 기러기가 하늘 가르네
어이라 바람은 숲을 가르나
본래로 모든 것 적적하였네
고요한 밤 말없이 앉았으니
야부 도천(冶父 道川)의 선시(禪詩)라 하는데,
山堂靜夜坐無言
寂寂寥寥本自然
西風何事動林野
一聲寒雁唳長天
이렇게 한글로 옮기니 참으로 맛깔지다.
달마사를 나와 현충원 울타리를 끼고 다시 걸으면 현충원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다. 이 문으로 들어가 호국 지장사로 향한다. 옛 사명(寺名)은 화장암(花藏菴, 華藏菴)이었다. 이곳에 모셔진 창빈 안씨(昌嬪 安氏)의 원찰이었다. 창빈의 재를 지낼 두부 등 음식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근래에 화장사가 되었다가 다시 현충원 내임을 감안하여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사명을 바꾸었다. 탱화, 철불 등 몇몇 문화재가 있는데 그 중에는 능인보전(能仁寶殿)에 안치된 서울시 유형문화제 철불에 관심이 쏠린다. 절 앞에서 조금 올라간 곳 자연석 암반에는 이 절에서 공부하다가 입적한 스님들의 사리공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제670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3.02 09:24:53
[겸재 그림 길 (50) 동작나루 노량나루 ①] 드론 띄우듯 삼남대로 서울길 그리다 (cn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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