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의 천민 출신 지도자들
초기 교회의 양상에서 지역별로 성격 차이가 발견되는 것은 흥미롭다. 여주나 양근, 충주 및 청주 교회는 양반 계층이 전면에 섰고, 충청도 내포 일대만은 유난히 신분 낮은 일반 백성과 노비 계층이 신자의 주축을 이루었다.
내포 지역의 지도자는 이존창이었다. 「송담유록」에 따르면 그는 홍낙민 집안의 속량 노비의 아들이었다. 같은 책에서 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존창이 상민이었기 때문에 비록 무식하고 어리석은 백성에게 가르침을 행하였지만, 충청도의 사족(士族) 중에는 한 사람도 물든 자가 없었다는 점이다(所幸者, 存昌以常漢之故, 雖行敎於無識愚氓, 而湖中士族, 無一人浸染者矣)”라고 적고 있을 정도다. 내포 지역 교회의 특성은 상한(常漢), 즉 상놈들이라 불리는 신분 낮은 계층을 중심으로 신도층이 형성되었다는 데 있었다.
1791년 진산 사건 이후 박종악이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와 내포 지역 교회에 대한 검거가 본격화되었을 때, 붙잡혀 간 이존창은 자신의 제자 10인의 이름을 댔다. 천안의 최두고금(崔斗古金), 한봉이(韓奉伊), 최완복(崔完卜), 이개봉(李介奉), 황유복(黃有卜), 김명복(金明卜), 유복철(柳卜哲), 이복돌(李卜乭), 이치한(李就汗), 예산(禮山) 김삼득(金三得) 등이었다. 대부분 상한(常漢)으로, 이름으로 보아 노비 출신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리더인 이존창이 배교를 다짐하며 타이르자, 그를 따라 대부분 다짐장을 쓰고 풀려났다.
이들 중 존장(尊長)으로 불리며 가장 존경을 받던 이는 최두고금이었다. 박종악은 「수기」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천안 호동의 사학하는 무식한 부류 중에서는 최두고금이 가장 오래 익히고 깊이 통달한 자입니다. 그래서 근처의 어리석은 백성 중 사학을 하는 자들이 대부분 두고금을 추존하여 존장이라고 합니다. 이자는 비록 이미 다짐을 받고 놓아 주었지만, 따로 징벌하여 혼낸 뒤라야 어리석은 백성들이 더욱 두려워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천안 호동, 즉 여사울의 천주교 신자 중 최두고금은 지도자급 인물이었다. 이존창이 내포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지도자였다면, 그는 여사울 지역 교회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최두고금(崔斗古金)과 최구두쇠(崔去斗金)
그런데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사학징의」 기록 속에 최두고금과 이름이 비슷한 최거두금(崔去斗金)란 인물이 다시 나온다. 거두금(去斗金)은 ‘구두쇠’의 한자 표기다. 실제로 그는 최구두쇠로 불렸을 것이다. 현재 「수기」 번역본은 최두고금을 ‘최뚝쇠’로 읽었는데, 두고(斗古)는 ‘뚝’으로 읽을 수 없다. 뚝은 뚝섬(纛島)의 표기에서 보듯, ‘뚝(纛)’이란 글자가 따로 있다. 「수기」의 최두고금은 최고두금(崔古斗金)의 오기일 것이다. 두고(斗古)의 두 글자 순서를 바꾸면 고두금(古斗金) 즉 ‘고두쇠’로, 역시 ‘구두쇠’로 읽힌다.
1791년 박종악의 「수기」에 이존창의 제자로 나온 ‘최두고금’과, 1801년 「사학징의」에 보이는 최구두쇠는 동일 인물이다. 충청감영에서 1801년 3월 29일 자로 의금부로 보낸 공문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최천명(崔千明)의 아비 최구두쇠(崔去斗金)는 이존창과 이웃에 있으면서, 오래 사학에 물들었다. 지금은 비록 하지 않는다 하면서도 삿되게 묵주를 숨겨두고 있었다. 이미 체포된 막내아들 최억명(崔億明)도 일찍이 이존창을 따라 금산(錦山)으로 들어갔는데, 지금 또한 달아나서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그 부자(父子)의 자취는 실로 의심할만한 것이 많다.”
최구두쇠는 1791년 배교를 다짐하고 풀려났지만, 배교는 커녕 그의 두 아들 최천명과 최억명까지 이존창의 심복으로 열심히 활동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모두 검거되었다. 이때 최구두쇠의 집에서 묵주가 나왔고, 최천명은 안성교(安聖敎)와의 관련으로 서울까지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다. 막내 최억명은 이존창을 수행하여 금산까지 갔다가 달아나 숨은 상태였다.
최구두쇠는 여사울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고, 두 아들 최천명과 최억명도 이존창을 곁에서 보좌하며 직분에 충실했던 인물들이다. 아들 최천명이 「사학징의」에 남긴 공초에는 이존창은 한마을에 살았지만 상종도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이들 부자는 다행히 뚜렷한 행적이 없고, 증거물과 증인이 나오지 않아 당장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