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해방촌성당
 
 
 
카페 게시글
성가대 게시판 스크랩 음악으로 다가가는 묵주기도의 신비 /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하는 묵주기도
한 임마누엘 수녀 추천 0 조회 169 18.09.28 22: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음악으로 다가가는 묵주기도의 신비


은은한 촛불 아래 묵주알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엮어 바치는 기도…. 우리의 마음에 언제나 고요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묵주기도입니다. 탄생부터 성령강림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일생에 대한 신비를 성모님과 더불어 묵상하며 바치는 이 기도는 긴 역사를 갖고 있고, 그 긴 역사 속에서 특히 어려운 일과 맞닥뜨린 이들의 영혼을 위로해 왔습니다. 17세기를 살았던 하인리히 비버(Heinrich Biber, 1644~1704)라는 작곡가에게도 묵주기도는 의미가 있는 기도였는데요. 그가 남긴 일명 <미스터리 소나타>가 바로 그 기도의 산물입니다. 


비버의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집 <미스터리 소나타>은 <묵주 소나타>라고도 부릅니다. 그 이유는 이 작품집이 묵주기도에서 묵상하는 신비(미스터리), 즉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그리고 영광의 신비에 따라 총 15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필사본은 단 한 개만 살아남아, 현재는 독일 뮌헨의 바이에른 주립 도서관에 보관돼 있는데요. 그 악보를 살펴보면, 15개 소나타 서두에는 각각의 신비를 묘사하는 정교한 동판화가 삽화로 들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나타 10번을 보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과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성모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새긴 동판화가 악보 가장 앞쪽에 장식처럼 들어가 있습니다. 이 곡이 고통의 신비 제5단‘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하는 음악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스터리 소나타>의 필사본을 연구한 학자들은 이 작품 안에 ‘포위된 빈’, ‘터키군의 전진’같은 표제가 붙은 악장들을 발견했고, 이 작품이 만들어진 배경의 하나로 1683년 터키군의 빈 침공을 꼽습니다. 한편 필사본 맨 앞에는 비버의 고용주였던 잘츠부르크 대주교 막시밀리안 간돌프에게 바치는 헌정문이 있습니다. 간돌프 대주교는 묵주기도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어서 잘츠부르크의 로사리오회를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한 학자는 이 로사리오회가 열리던 곳에서 비버의 <미스터리 소나타>가 처음 연주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이 작품집의 사본엔 정식 표지가 없고 따라서 제목도 없습니다. <미스터리 소나타>란 제목은 이 작품이 묵주기도와 구성을 같이하고, 각각의 신비를 묵상하고 있기 때문에 후대인들이 붙인 것입니다. 작곡가 비버가 붙였을 이 작품의 정식 제목은 말 그래도 ‘미스터리’로 남은 셈인데요.


음악적인 면에서 이 작품을 신비롭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스코르다투라(scordatura)라고 하는 조율방법입니다. 일반적으로 바이올린의 조율은 5도 간격으로 g-d-a-e음으로 정렬하게 되는데, 비버는 여기에서 벗어나는 변칙적인 조율로 각각의 소나타가 저마다 색다른 음색과 분위기를 드러내도록 만들었죠. 예를 들어, 소나타 10번의 악보를 보면, 동판화 옆쪽으로 이 곡은 g-d’-a’-d”로 조율하도록 표시가 돼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조율해서 활을 그으면, 연주자의 입장에선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음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긴장감으로 연주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고 하네요.


H.I.F. von Biber - Passacaglia


한편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에 해당하는 15곡의 소나타가 모두 끝나고 나면, 피날레 음악으로 <파사칼리아>라고 하는 변주곡이 등장합니다. 필사본 악보를 보면 파사칼리아 첫머리에는 천사를 그린 동판화가 들어있는데요. 이 삽화를 통해 학자들은 이 파사칼리아가 10월 2일 수호천사 기념일을 위한 음악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곡이 15개의 묵주 소나타와 함께 묶여져 있는 것이 종교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은데요. 음악적인 면에서 이 곡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음악성과 기교의 극치를 감상할 수 있는 작품 전체의 백미로 꼽히죠.


전체를 연주하는 데 두 시간이 넘는 대곡이어서, 연주하기도, 듣기에도 결코 만만하지 않은 음악입니다. 하지만 묵주를 좀 더 가까이 하게 되는 10월, 음악과 함께 묵주기도의 신비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성모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영성이 더욱 풍요로워지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죠.

글: 양인용 아가다(KBS 1FM <새아침의 클래식> 작가)




The Joyful Mysteries (환희의 신비)
-->


Sonata 1 in D minor, The Annunciation, 0:00 

Sonata 2 in A major, Mary's Visit to Elizabeth, 4:40

Sonata 3 in B minor, The Nativity, 10:32

Sonata 4 in D minor, The Presentation, 16:08 

Sonata 5 in A major, Child Jesus in the Temple, 23:49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하는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월요일, 토요일)


1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0-33. 38)


하느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시도록 맡깁시다


천사의 인사를 받으면서 마리아께서는 경이로움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기 위하여 나자렛의 단순한 동정녀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을 보는 경이로움입니다. 마리아는 권력과 부유함의 궁전에서 살고 있지 않았으며 특별한 사업을 이룩하지 않았었습니다. 마리아는 단지 하느님께 열려져 있었으며 모든 것을 잘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맡길 줄 알았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것이 마리아의 대답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항상 놀라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획한 것을 부수시며 우리 계획을 흩으십니다. 그러시면서 그분은 우리에게 ‘나에게 맡겨라,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운 일을 볼 수 있게 내어 맡기거라, 네 자신에서 나와서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실 수 있거나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 우리는 두려워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이 놀라운 일을 하시도록 내맡기고 있는가 아니면 물질적, 지적, 이념적으로 쌓아 놓은 내 계획 속에 안주하며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는가? 정말 나는 하느님의 내 인생 속으로 들어오시도록 맡겨드리는가? 나는 어떻게 하느님께 응답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아무런 저항 없이 우리의 힘이신 하느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리고 매일 하느님께  충실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도록 마리아의 전구와 도움을 청하기로 합시다. 아멘(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10월 13일 강론).



2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39-47).


모든 것이 선물


천사의 인사를 받은 다음 마리아가 이룬 첫 번째 행동은 나이 많은 친척 엘리사벳에 대한 애덕 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선포한 첫 단어들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합니다”였습니다. 성모 찬송은 찬미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하느님이 마리아 안에서 행하신 것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전체 구원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감사와 찬미의 노래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만일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힘이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10월 13일 강론).



3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 6-12)


인간이 되신 사랑이신 하느님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참된 인간이시며 참된 하느님으로서 우리 역사에 들어오시어 우리의 여정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하시고 빛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육을 취하신 예수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그분 안에 은총과 자비, 하느님 아버지의 자애로움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지혜로운 스승이시거나 우리가 따라가야 하면서도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신 어떤 이상형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당신 처소를 정하신 역사와 생명의 의미이십니다. 목동들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이 ‘처소’를 목격한 첫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뒤처진 사람들이었고 사회 주변에 머물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첫 목격자들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한 밤중에 양떼 들을 깨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첫 목격자들이 되었습니다. 깨어 있는 것은 순례자의 원칙입니다. 그들은 깨어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 목동들과 함께 아기 예수님 앞에서 조용히 멈추어 서서 예수님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충실하신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흘러나오도록 합시다. 지극히 높으신 분,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낮추신 당신을 우리는 찬미합니다. 당신은 무한하시지만 작아지셨습니다. 당신은 부유하시지만 가난한 자 되셨습니다. 당신은 전능하시지만 약해지셨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12월 24일 강론).



4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서 바치심을 묵상합시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22-23.25-28.33-34).


고통받는 사람들의 희망이신 마리아


마리아는 칼에 찔린 마음을 소유하신 분으로서 모든 고통을 이해하십니다. 모든 이들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정의가 싹틀 때까지 그 해산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표징이십니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우리 인생 여정을 동반하시면서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신앙을 향해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는 선교사이십니다. 마리아는 어머니로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우리와 함께 싸우시고 가까이 현존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마리아는 후안 디에고 성인에게 하신 것처럼 그 모성적 사랑의 위안을 우리에게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안해하지 말아라…  네 어머니인 내가 여기에 있지 않느냐?” (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286항).



5단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2,43.46.48-50).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신심 어린 마음속에 항상 계십니다. 특히 그분은 그리스도교 백성이 걷는 길에 항상 계십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마리아의 여정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우리 곁에 특별히 가까이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스도교 생활의 주요 덕행인 신덕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어머니는 우리와 같은 조건에서 생활하셨고 우리가 항상 걷고 있는 길, 많은 경우 어렵고 어두운 길을 걸었어야 하셨습니다. 그분은 “신앙의 순례길”(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58항)을 걸었어야 하셨습니다. 구세주의 어머니는 우리를 앞서가시며 신앙과 성소, 그리고 선교에 있어서 우리를 지속적으로 굳건하게 해 주십니다. 마리아는 겸손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모범을 통해 우리가 복음의 기쁨을 모든 경계선을 넘어서서 선포하도록 우리 신앙을 도와주십니다. 이렇게 우리 선교는 풍요롭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리아의 모성으로 보호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마리아께 신앙의 길과 우리 마음의 갈증들, 전 세계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특별히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허기짐과 갈증을 맡겨드립시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어머니”하면서 마리아의 전구를 구합시다. 교황 프란치스코, 2014년 1월 1일 강론).



  The Luminous Mysteries (빛의 신비) 


No. 6 in C minor, (The Agony in the Garden) 0:00 No. 7 in F major, (The Scourging of Jesus) 7:05 No. 8 in B flat major, (The Crowning of Jesus with Thorns) 15:45 No. 9 in A minor, (The Carrying of the Cross) 21:49 No. 10 in G minor, (The Crucifixion) 27:38



프란치스코 교황 과 함께 하는 묵주기도, 빛의 신비 (목요일)


1단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 9-11).


새로운 생명을 사는 것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인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에 잠겼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역사 전체에 있어서 가장 큰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 사랑에 힘입어 우리는 새 생명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악과 죄와 죽음의 힘 속에서 살지 않고 하느님과 형제들과의 친교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물로 다시 태어났고 그리도를 옷 입듯이 입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한계와 나약함과 죄들이 있음에도 예수님을 따르면서 교회에 머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세례성사의 덕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께 우리가 세례성사를 통해서 받은 이 은총을 날마다 보다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청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참된 자녀들이고  예수님의 참된 형제자매들이며 교회의 참된 일원들을 만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4년 1월 8일 일반 알현).



2단 예수님께서 카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심을 묵상합시다.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요한 2,1-5).


가정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


가정 안에서 맛보게 되는 참된 기쁨은 표상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사물들이나 유리한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기쁨은 사람들 사이에 깊은 화목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깊은 화목은 마음속에서 모든 이가 느끼는 것이며 그것은 함께 생활하는 아름다움과 인생에 있어서 서로 도와주며 지탱해 주는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기쁨의 깊은 곳에는 하느님의 현존, 가정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이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며 자비로운 그 하느님의 사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특히 인내하는 사랑이 존재합니다.  인내는 신성한 덕행이며 가정에서 우리가 서로 서로에게 사랑속에서 인내하도록 가르쳐 줍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사이에서 인내심을 가지도록 말입니다. 이것은 인내하는 사랑이라고 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상이함 속에서 조화를 창조하실 줄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결핍될 때 가정은 화목을 잃게 되고 이기주의가 판을 쳐서 기쁨을 삭혀버리고 맙니다. 이와 반대로 신앙의 기쁨을 사는 가정은 신앙을 기꺼이 전파하면서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누룩이 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10월 27일 강론).



3단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그 누구도 구원에서 배제하지 않는 하느님


예수님은 당신이 가져다주신 기쁜 소식이 인류의 특정 부류에게 유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전달되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복음은 그것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 주어진 기쁜 소식이지만  또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것을 추구해서 믿고자 하는 힘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진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도 하느님의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과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다가가시기 위해 주변에 머물며 가장 낮은 사람들에서부터 출발하신 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러 가도록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신선과 목소리가 우리에게 도달해서 맡기면서 그분을 따라나섭시다!  “복음의 기쁨이 세상 끝까지 도달하고 그 어느 곳도 하느님의 빛이 결핍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2014년 1월 26일 삼종 기도).



4단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루카 9,28-29.34-35).


살아계신 예수님


우리는 부활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그 부활에 이르는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변모, 우리 육신의 변모는  이 지상에서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사 속에서 특별히 성체성사 속에서 준비됩니다. 이 세상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양육된 우리는 그분과 같이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해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육신과 함께  부활하셨지만 그것은 이 지상의 생명으로 되돌아온 것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영광스럽게 된 육신으로 변모된 육신의 부활을 맞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이 순간에 살아계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의 힘은 우리 모두를 부활하도록 하실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12월 4일 일반 알현).



5단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 19-20).


우리를 그리스도와 일치시켜주는 ‘성찬의 식탁’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행동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무한한 감사의 행위였습니다.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그 정점을 이룹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쪼개진 빵이 되시면서 우리 위에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부어주시며 우리 마음과 존재, 형제들과 당신과의 관계를 맺는 방법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성체성사에 다가갈 때 보통 우리는 ‘영성체하러 간다’, ‘성체를 모시러 간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찬례에 참여하는 것은 유일하게  깊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우리를 일치시켜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것은 천상 잔치에서 모든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보는 그 충만한 일치를 지금부터 맛보도록 하는 것을 뜻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4년 2월 5일 일반 알현).



 The Sorrowful Mysteries (고통의 신비 )


1st sorrowful mystery- The Agony of Jesus in the garden

2nd sorrowful mystery -The scourging of Jesus at the pillar

3rd sorrowful mystery - The Crowning with Thorns

4th sorrowful mystery - The Carrying of the Cross

5th sorrowful mystery - The crucifixion and death of Jesus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하는 묵주기도, 고통의 신비 (화요일, 금요일)


1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그들은 겟세마니라는 곳으로 갔다.  [...]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 32-36).


함께하고 있는 현존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배제할 수 없지만 그 의미를 간직할 수 있고 사랑의 행위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손에 맡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고통은 사랑과 신앙의 길 가운데 자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관상하며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그 눈길에 참여하는 것을 배웁니다. 하느님은 고통받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시지만 역사 속에 빛나는 광채를 열어주시기 위하여 고통의 역사에 결합된 현존하는 선의 역사가 가져다주는 대답을 주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신앙의 빛,  56-57항).



2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 맞으심을 묵상합시다.


“빌라도가 다시 그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거듭 소리 질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마르 15, 12-15).


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고 우리 가운데 사시고자 우리 손에 당신의 몸과 피를 건네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빌라도 앞에서 진행되는 재판과 같이 올리브 동산에서 이사야가 선언한 고난받는 종으로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십니다(이사 53,12 참조).  예수님은 이 지극한 사랑을 수동적인 방법으로나 불행한 운명으로 여기며 살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분은 그 폭력적인 죽음 앞에서 인간적으로 힘겨운 초조함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에 당신을 온전히 맡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시고자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죽음에 자신을 자유롭게 내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나를 위하여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분”(갈라 2, 20)이십니다. 우리 각자는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셨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나’를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3월 27일 일반 알현).



3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마르 15, 16-19).


사랑하는 임금


예수님은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왕들에게 유보된 명예를 얻기 위하여 성도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채찍을 받고 능욕을 당하며 모독 받기 위하여 거기에 들어가십니다. 가시관과 몽둥이질, 다해진 자주색 옷을 걸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왕, 그분의 임금으로서 품위는 바로 조롱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에 관점에서 그 왕다움을 찬란하게 빛내십니다. 예수님의 왕좌는 십자가 나무입니다! 우리가 따라가고 있고 우리를 동반하시는 임금님은 매우 특별한 분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사랑하고 봉사하라고 우리를 가르치시는 임금님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3월 24일 강론).



4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마태 27, 31-32).


십자가의 논리에 들어서는 것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하여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들, 특별히 더 멀어져 있고 망각하고 있는, 이해와 위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가 먼저 다가가는 것을 배우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논리에, 십자가의 논리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통과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과 생명을 가져다주는 자기 봉헌을 의미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3월 27일 일반알현).



5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해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카 23,44-46).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의 말씀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게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은 악에 대해서 대답을 주지 않으시고 침묵 가운데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은 실제로 말씀하셨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분의 대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란 말씀은 사랑이고 자비이며 용서입니다. 또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것을 거부한다면 단죄 받는 것입니다. 그분이 단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단죄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리고 이 사랑과 용서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며 걸어갑시다. 모든 것이 사랑이신 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걸어가기로 합시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3월 29일 콜로세움에서 가진 십자가의 길).



The Glorious Mysteries (영광의 신비)

Sonata 11 in G major, The Resurrection

 Sonata 12 in C major, The Ascension

 Sonata 13 in D minor, The Holy Ghost, scordatura 

 Sonata 14 in D major, The Assumption of Mary

 Sonata 15 in C major, Crowning of the Virgin Mary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하는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 (주일, 수요일)


1단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마태 28, 1-2. 5-7).


인생을 바꾸는 사건


여인들은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덤에 다가간 일은 그저 단순한 행동, 그러나 사랑으로 이룬 작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일은 인생을 정말 바꾸는 사건, 일로 변화됩니다. 여인들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 역사의 삶에서도 이제 그 전과 같은 상태가 아닌 무엇인가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죽은 자가 아니라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냥 이 지상 생명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생명 자체이시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민수 14,21-28 참조).  


예수님은 그저 과거의 인물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현재 살아계시고 미래를 주관하시며 하느님의 영원한 ‘오늘’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새로움이 여인들과 제자들, 그리고 우리의 눈앞에 펼쳐집니다. 이것은 죄와 죽음과 악, 그리고 생명을 반대하고 비인간적인 모든 것에 대한 승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의 삶 속에 들어가시도록 그분을 친구처럼 신뢰를 갖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분은 생명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께 자신을 맡기십시오. 그분이 당신과 가까이하시고 함께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찾고 있는 평화와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3월 30일 부활성야 미사 강론).



2단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루카 24, 50-52).


성부 곁으로 오르신 예수님의 인성


예수님의 지상 생활은 그 승천으로 정점을 이룹니다. 승천하심으로써 그분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올라가시어 그 오른 편에 앉으십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 인생길에서 위로로 가득한 실재를 우리가 이해하도록 합니다. 참된 인간이시며 참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성은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마치 등산할 때 맨 앞서 산에 오르면서 정상에 도달하는  용감한 인도자처럼 우리를 당신 자신에게 이끄시고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그분께 맡겨드린다면,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내어 맡긴다면 우리 구세주이시며 우리 변호자신 분의 손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그분의 부재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변호해 주시는 변호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4월 17일 일반알현).



3단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을 묵상합시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 1-4).


선교의 영혼이신 성령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이루어주신 성령의 강림을 관상합시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다락방(최후 만찬 장)을 가득채운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온 세계로 퍼져나가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성령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신비에 우리가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일종의 인지적 교회의 위험과 틀 속에 갖혀 있으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교회의 위험에서 우리를 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문을 열고 나가서 복음의 새로운 생명을 전하고 증거하며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앙의 기쁨을 전달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선교의 영혼이십니다. 성령은 세상의 길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달리도록 용기를 주시는 ‘위로자’이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선포하기 위한 머나먼 경계선을 넘어서는 지평을 열어주시고 거기에 도달하도록 촉구하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5월 19일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 강론).



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올리심을 묵상합시다.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묵시 12, 1).


우리와 함께 걷고 있는 마리아


묵시록의 이야기는 여인과 용과의 싸움에 대한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를 표상하는 여인은 영광스럽게 승리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 아직 고통에 차 있습니다. 사실 교회도 이렇습니다. 교회는 이미 승천하신 주님의 영광에 결합되어 있지만 역사 속에서 아직도 하느님과 영원한 원수인 악마와의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을 가져오는 고통과 도전을 계속해서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직면해야 하는 이 투쟁에서 마리아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고 교회의 어머니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길을 걸어가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우리와 함께 길을 걸으시며 우리와 함께 싸워주시고 악의 권력에 맞서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십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8월 15일 강론).



5단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 1, 3-4).


하느님의 아름다움으로 변화되는 것


하느님의 마음속에 있는 나자렛의 동정녀의 신비는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 있고 그분은 저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있지 않고 우리는 그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정말 모든 남녀 인간 한 사람에 대해서 사랑스러운 당신의 시선을 건네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스러운 시선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은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라고 확고하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또한 항상 죄로부터 해방되어 거룩한 삶을 살도록 선택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계획은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갈 때마다, 특히 성사 안에서 새롭게 되는 사랑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시어 참으로 아름다우신  우리 성모님을 관상하면서 우리의 보다 참된 인생의 도착점과 보다 심오한 우리의 소명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으로 사랑받고 변화되어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도록 해 드립시다. 왜냐하면 우리 어머니는 우리를 아주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데 있어서 보다 더 용기 있는 자들이 되고 보다 겸손한 사람들이 되는 것을 배우기 위해 그분의 시선에 우리를 맡겨드립시다. 또한 그 아들 예수님의 사랑스런 두 팔과 생명과 희망과 평화를 주는 품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를 그분의 시선에 맡겨드립시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12월 8일 삼종기도).



Amen, Alleluia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