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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한 人神이 아니라 본연에 物神 또는 宇宙神
―심경호 지음 『김시습평전』 651p 제4부 현실 참여의 의지와 좌절,
미주 304. 南孝溫의 『秋江集』券五 論 中 「鬼神論」을 읽고
舞鶴山人 朴 喜 鎔
[原文]
人生理氣相合 寓於形質之中者爲心 人死而形骸旣滅 則理自理 氣自氣 而質乃爲土 顅安所有其心有其形乎 佛氏欺人之說 不攻自破矣
인생리기상합 우어형질지중자위심 인사이형해기멸 즉리자리 기자기 이질내위토 간안소유기심유기형호 불씨기인지설 불공자파의
[字解]
寓 우/ 부칠, 붙여 살, 부탁할, 잠시 머물러 살 顅 간/ 머라 털 적을, 목 길
欺 기/ 속일, 업신여길, 망녕될
[國譯]
사람은 리와 기가 서로 합하여 생긴다. 형질의 중심에 붙어 있는 것이 마음이다. 사람이 죽으면 형해가 멸하면서 리는 본래의 리로, 기는 본래의 기로 환원하고 형질은 곧 흙이 된다. 그 마음과 그 형질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곳이 있겠는가. (윤회설은) 불씨가 사람들을 속이는 말이므로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서진다.
[臆解]
이 미주를 근거로 하여 심경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효온은 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윤회설에 대하여, “사람이 죽어 형체가 없어지면 이(理)와 기(氣)가 나뉘어 형질은 흙으로 변하는 법이거늘, 어찌 마음이니 형체니 하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반박하였다.’
심 교수는 남효온의 이 말을 윤회론을 비판하는 근거로 제시하지만, 남효온은 「鬼神論」이란 제목 아래, 15세기 후반기에 정통 유학적 관점인 리와 기의 聚散운동을 들어 귀신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윤회설의 근가를 제거하고 있다. 남효온은 오랜 시간 동안 유학을 연구한 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불의에 비분강개한 詩文家답게 전통적 학습법에 의해 습득한 유학 논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기존의 理氣聚散論을 인용하여 불교의 死後觀을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이 理氣聚散論은 많은 논리적 모순과 실천적 파행을 거듭했다. 원시 유교는 현실적 실천성을 중시했기에 리와 기에 대한 개념이 미약했다. 송대 주희가 성리학 체계를 수립하면서 리와 기가 유학에 주요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유학 자체가 인간중심 학문이기 때문에 리와 기는 인간과 사회에만 적용 될 뿐, 여타의 만물은 부수적이었고 자연은 생활에 이용하거나 감상하는 객관적 대상이었다.
주희가 불교의 理事論을 借意 했든지 안했든지 간에 새롭게 정비한 理氣論을 주창하여 기존에 전통 유학 이론의 틀을 벗어난 것은 학문적으로 상당한 업적이다. 하지만 理氣論의 先後가 어긋나는 점을 간과했다. 인간의 시작은 분명 리와 기의 취합이요 끝은 해산이라고 하고서도 주자가례를 세운 것, 즉 제사를 받아먹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이론과 실제의 괴리를 보여주는 논리상에 모순이다. 그러한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4대 봉사론, 즉 인간이 죽으면 형질은 소거하지만 혼백은 120년 동안 존재하다가 마침내 산산이 흩어져 없어지기 때문에 4대 동안 귀신을 섬겨야 하고 지나면 신주를 파묻어 없애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상의 변명일 뿐이다. 사자를 대번에 잊기보다는 오랫동안 추모하는 것이 후손의 도리이자 인정이기 때문에 추모의 의미에서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말은 정신적 논리라도 가지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혼백, 인류 역사상 귀신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보편적 합리성을 가진 증거가 전혀 없는 귀신에 대하여 주자가례라는 전범을 세워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게 한 것은 학문적 명분으로 장식된 주희 개인적 아집이라고 할 수 있다. 실체를 증명하지 못하는 이론은 가설일 뿐이다. 산천과 조상에 제사하는 원시 유교는 그래도 나름대로 정신적 논리와 만족을 갖지만, 주자가례는 가설을 근거로 지나치게 실제를 옥죄어 인간과 사회에 심대한 부작용을 끼쳐 시대와 역사를 왜곡시키기도 했다,
주희가 리와 기를 생각한 이유는 인간과 사회에 대하여 나름대로 오래고 깊은 관찰을 한 결과다. 과학과 의학 수준이 매우 낮은 당시로선 감각적 관찰과 정신적 사유가 인간의 발생과 소멸에 대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또한 어린이가 아니라 성숙한 지식인으로서 정신과 육체라는 두 개념에 대한 사색이 깊어지면서 정신의 출처는 리로, 육체의 출처는 기로 보는 고정 관념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인간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사회 현상까지도 리와 기의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생각의 근본 자체가 이러하니 출생과 사망을 리와 기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하지만 출생은 리와 기의 취합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지만 사망은 해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난처한 지경이 남게 되었다. 사망하면 리와 기가 해산하여 없어진다는 단순 논리는 개인적 차원에선 수긍할 수 있지만 가문과 사회적 차원에서는 허탈감 내지 휴유증이 너무나 컸다. 또한 천신과 조상신을 제사하는 전통 유교적 차원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해산이면 해산으로 끝이지 무어 보탤 것이 있겠는가. 추모의 뜻으로 제사한다면 간단히 1, 2대 정도로 마쳐야지 4대 봉사에다 불천위, 산야에 화려한 분묘를 꾸며놓을 게 있는가. 그 유명한 퇴계 이황도 관향과 호와 이름 몇 자 박힌 돌비 하나 뿐이다. 큰 봉분과 웅장한 석물은 자손들이 자기 집안을 자랑하고 하는 허영이자 허세일 따름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원이 갈마들면서 理氣聚散論은 기형이 되고 말았다. 출발은 리기로 정확했으나 중간에 여러 가지 현실적 고려를 삽입하다보니 도착지가 엉뚱하게 되어버렸다.
주희가 시작한 이 ‘리와 기의 취산운동론’은 수백 년 뒤인 15세기 경부터 조선에서 서서히 뿌리내리기 시작해 남효온의 시대엔 보편적 담론이 되고, 한 세대 뒤에 화담 서경덕에 의해 「鬼神死生論」으로 심화 발전한다. 하지만 서경덕 역시 논리적 결함과 한계를 초극하진 못하였다.
봉건조선에서 理와 氣는 인간과 사회를 보는 정통 유학적 인식의 두 관점이었다. 이 두 관점의 합치와 해산에 의해 인간과 사회가 생성, 변화, 소멸한다고 기본적으로 인식했다. 조선 후기에 ‘人物性同異論’이 제기되었지만, 그것은 소수 유학자들의 논쟁 수준에 머물렀을 뿐 유학 사상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론은 아니었으며, 서양 문명에서 인간과 생물을 보는 발전 속도에 비해 매우 느렸다. 남효온이 살던 16세기 후반엔 이미 서양 사회에선 과학이 발달하였고, ‘人物性同異論’이 제기되던 18세기엔 과학뿐만 아니라 의학, 지리 등 다양한 영역에서 고도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양의 지식인 사회, 특히 조선의 지식인 사회는 과학적 인식을 근거로 하지 않은 관념적 인식이 자가수분을 계속함으로써 결국 지적 몰락을 초래하고 말았다.
오늘날엔 발전한 과학 업적에 따라 ‘人生理氣相合’이란 말은 ‘生物生理氣相合’이란 말로 확대된다. 그러므로 이제는 전습된 성리학적 관점을 벗어나 과학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현대 과학의 업적을 성리학의 관념론을 뒷받침하는 증명으로, 한 차원 더 발전할 수 있는 논거로서 활용해야 한다. 리와 기를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생물 전체로 확대할 뿐만 아니라 지구를 넘어 우주 전체로 확장하면 그 개념이 더욱 뚜렷해진다.
주희가 리를 기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세우면서 리의 주요성을 강조한 까닭은 인간의 정신적 작용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금수의 가장 큰 차이가 정신의 유무이고, 인간에게서도 정신의 강도와 품질에 따라 인간의 등급이 구별되기 때문에 정신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정신을 心이라 총칭하면서 그 심의 주축으로서 리를 장치했다.
하지만 이 리는 어른 시절엔 유효하지만 유아기와 성장기, 노쇠기엔 효력이 미약하다. 많은 유학자들이 리는 순전하다고 했지만 리는 한 시절에만 강장할 뿐 인생의 시종에 걸쳐서 강건한 게 아니다. 갓난아이와 금수에게 무슨 리가 있는가. 아이가 성장하면서 일상과 교육을 통해 리가 서서히 성숙한다.
그러므로 리의 근본은 물론 순전하지만, 이 리도 시절에 따라 정도가 다르므로 한 개념으로 통칭할 게 아니라 개념의 분화가 필요하고, 그에 따른 개념어 설정이 필요하다. 소아나 우치에겐 리가 혼탁하고 지혜로운 인간에겐 리가 청명하다는 말은 관념상의 장식일 뿐이다. 그 혼탁이 정신적 육체적 욕망에서 생긴다는 말도 일방적이다. 물론 사회적 악은 리의 혼탁이지만, 인간의 삶 자체가 욕망의 연속이고, 보통의 인간은 수시로 욕망을 느껴 갖는데, 욕망을 혼탁으로 본다면 인간의 삶 자체가 혼탁하므로 스스로 부끄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성교 역시 치열한 욕망의 노출이므로 혼탁이 아닐 수 없다. 불의한 성교는 마땅히 혼탁하고 부부 간에 성교를 차마 혼탁하다고 할 순 없지만, 굉장히 도덕적인 인간에겐 공인된 성교조차 혼탁으로 여겨질 수 있어서 번식이 단절될 수 있다.
개념의 분화는 리에서 뿐만 아니라 기에서도 필요하다. 조선 성리학이 외곬에 빠져 외통수에 걸려 쇠잔한 까닭은, 주류 유학자들이 유일순전의 원칙에 따라 리면 리, 기면 기일 뿐이지 가감이 불필요하다며 리와 기란 개념어 이외엔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는 주사위처럼 다양한 면모를 갖는다. 몸체는 같지만 각기 다른 얼굴로 사물과 현상을 대한다. 어느 사물과 현상의 기미를 만나면 각기 다른 작용을 하며, 즉 다양하게 기를 타서 사물을 완성하고 현상을 형성한다. 격물치지의 원리대로, 사물과 현상 속에 들어있는 이치를 파악함으로서 리의 다른 모습들을 인식할 수 있다. 사물과 현상의 모습이 각기 다른 까닭은 리의 본질과 작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꽃과 새는 각기 다른 리가 작용한 결과이다. 꽃 중에서도 국화와 장미, 새 중에서도 백로와 까마귀는 각기 다른 리가 작용한 결과이다. 난자의 기다림과 정자의 돌진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루어지는 생로병사의 전 과정에서 모든 인간들, 확대하여 동물들, 더 확대하여 생물들이 갖는 공통점은 리가 같다는 것이다. 이 리는 꽃, 새, 인간의 발생과 성장. 소멸엔 공통성을 갖지만 그들의 형질엔 차이성을 갖게 한다. 공통성을 全理라고 한다면 차이성은 따로 정의해 分理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리란 말이 사물과 현상에 작용하는 법칙성과 인간의 정신에 작용하는 도덕성이란 두 개념에 공용됨으로서 리의 개념 자체가 정체성이 모호해졌다. 법칙성은 모든 사물에 들어있는 자연성 이치로 객관적이고 도덕성은 인간 개인과 사회에 적용되는 인간성 이치로 주관적이다. 인간은 자연이므로 법칙성이 내재해 있다. 또한 고등 정신이 있으므로 도덕성도 내재해있다. 그래서 흔히들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공유하는 존재라고 이른다. 그러나 그 둘은 작용의 원점과 결과가 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에서는 리란 통칭으로 인간을 정의하는 경향이 우세했다. 그러다보니 기보다는 리가, 리에서도 자연성보다는 도덕성이 더 중요시 되었다.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의지에 상관없이 항존 하는 데, 인간은 정신적 의지를 강조하여 도덕성의 순결을 보호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연에까지 투사하여 자연을 유리하게 조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리하면, 리에는 자연의 법칙성을 대표하는 全理로서의 物質理와 인간의 도덕성을 대표하는 分理로서의 精神理의 두 가지가 있다. 물질리는 만물과 시공에 내재된 물리법칙으로, 정신리는 인간 사회에 내재된 도덕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리는 공통성을 갖지만 정신리는 개별성을 갖는다. 물질리가 밭이라면 농작물은 정신리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밭에서 자라는 작물도 각기 다르게 자라듯 인간과 생물은 물질리는 같지만 정신리가 다르다. 특히 인간들끼리의 정신리의 차이가 다른 생물들보다 훨씬 더 크다. 금수와 인간의 정신리 차이가 현격하듯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정신리도 천차만별이다. 인간과 금수의 한살이 과정과 모습은 대동소이 하다. 하지만 정신리에 차이가 천지만큼 나는 까닭은 문명의 발전과 문화적 자극에 따른 두뇌 진화 때문이다. 성리학자들이 정신리, 즉 도덕성을 강조한 까닭도 두뇌 학습을 통한 문화적 발전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역사 발전에 좋은 방향이었지만 봉건 사회를 유지하려는 책략으로 이용되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기 역시 리처럼 다양한 면모를 갖진 않지만 物質氣와 精神氣의 둘로 구분할 수 있다. 본래엔 초극미의 독립 존재인 단순 물질기는 원자, 분자, 무기물, 유기물, 생물체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확대발전하여 복잡 물질기, 즉 정신기가 된다. 그리하여 단순물질기는 만물에 공통이지만 정신기는 개별성을 갖는다. 같은 나무이지만 취향에 따라 다양한 조각상을 만들 수 있듯이 물질기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하되 정신기의 표현이 다른 다양한 사물이 만들어진다. 이 정신기는 사물을 사물이도록 하는 하나의 법칙으로서 리에서의 물질리와 상통한다.
그러므로 리와 기를 통틀어 보면 리의 물질리와 기의 정신기가 같다. 기의 정신기 역시 물질기의 확대이므로 결국 리와 기는 같다. 단지 리의 정신리만 도덕적 관념으로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리와 기가 상대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종합적 개념, 즉 리보다는 기 쪽으로 비중이 쏠린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서경덕의 주기론에서 보듯 음이, 즉 기가 양, 즉 리를 품고 있는 기 근본 개념이 된다. 주기론적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人生은 理氣相合이 아니다. 人形은 기의 합이고, 다양한 기의 혼합 작용과 혼효 작용을 통해 물질기가 정신기로, 즉 물질리로 변화한다.
그러나 주기론이라 하더라도 정신리의 특수성이 인류가 문명을 일으키고 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다. 역사 발전에 대체적인 방향에선 이 정신리의 특수성이 작용하고 있으나 , 과거 봉건시대엔 정신리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물질리, 물질기, 정신기를 억압한 탓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과거 시대의 다양한 가설과 오류를 비판적으로 수정, 수용함으로서 정신리의 근본이 어디이며 어떤 적용 원리를 갖는지를 알 수 있다. 기, 즉 물질에 근본을 가진 인간과 사회가 어떤 법칙을 갖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문명을 건설하는 골조가 된다. 21세기부터는 인류문명이 본격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리와 기의 네 가지 개념을 유효적절하게 사용함으로서 인류 진화가 한 차원 더 높아질 것이다.
현대과학은 생성과 소멸을 원자와 분자의 작용으로 본다. 인간의 탄생은 유전자 둘의 조합이고 성장은 조합된 유전자의 분열확장이고 죽음은 유전자가 쇠퇴하여 다시 분자와 원자로 환원하는 과정이다. 그 조합과 분열확장, 쇠퇴와 환원을 지배하는 일련의 과정이 필연이 되도록 하는 절대적인 힘을 리와 기, 범위를 좁혀서 물질리와 정신기라고 한다. 그러한 절대적인 힘을 흔히들 법칙, 섭리라고 하며, 종교인들은 이름 붙여 야훼든 부처든 알라 등으로 부르지만 어떤 초월적 존재를 가정하여 ‘神性’을 부여한다.
이 ‘神性’은 정신적 한계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의 두뇌가 발견한 것으로, 과거와 현대엔 인격적 존재를 인정하지만 두뇌가 더 진화된 미래엔 리기의 개념을 종합한 物神 또는 宇宙神으로 불리며 탈 인격화 할 것이다.
物神 또는 宇宙神이 엄연한데 무슨 윤회가 있을 수 있는가. 과학적 인식이 미흡한 봉건시대엔 성리학자나 고승들의 깊은 사유력으로도 理氣聚散論에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엔 과학의 도움으로 사유가 한층 더 깊어지면서 리와 기의 취산의 전후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생물의 한살이를 마치고 소멸함은 당연한 것이다. 무슨 미련이 남아 형질도 없이 귀신으로 남아 후손들의 제사를 받을 것인가. 무슨 여력이 있어 귀신의 힘을 발휘하게 산자들에게 길흉화복을 내릴 것인가.
유기물에서 무기물로, 무기물에서 염기로, 염기에서 분자로, 분자에서 원소로, 원소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전자와 양자로 흩어져 있다가 시절 인연이 닿으면 또 모여 반대 과정을 거쳐 한 생명체를 이루는 것이 바로 윤회다. 그러므로 남효온이 비록 미숙하지만 理氣聚散論을 들어 불교의 윤회설을 비판한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남효온은 불교의 표면만 보았지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진 못했다. 윤회설과 극락지옥설은 어디까지나 중생교화와 포교를 위한 하나의 방편일 따름이다. 일상을 관찰하여 허무를 통찰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불교의 궁극임을 간과하고 표면적인 방편의 가불가에 매달려 불교를 비판하였다. 타락한 불교는 언급할 가치가 없고, 정진하는 청정승려들이 추구하는 궁극의 경지는 物神 또는 宇宙神에 이른다. 거기에 무슨 가불가 호불호가 있겠는가. 남효온은 자기가 위치하고 있는 유교적 관점만 보았지 불교를 위시한 타 종교나 사상, 학문과 철학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아직 얕았다. 석가모니가 말한 윤회가 초기 불교에서 틀을 갖춘 이후 수천 년 불교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유는 신도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매우 유용했기 때문이다. 윤회론 앞에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다. 존재의 불안과 죽음의 공포를 항상 느끼는 인간에게 사후 세계의 유무는 최대의 관심사였다. 특히 티벳 불교는 포교 차원에 방편의 범주를 초월해 달라이 라마는 죽으면 어느 나라 누구로 태어난다는 것까지 예언할 정도로 윤회를 가장 중요한 교리로 삼는다. 티벳인들은 다음 생에 호사스런 윤회를 꿈꾸며 현세의 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가 이 윤회설을 무기로 하여 절대 권력을 누린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천당과 지옥을 사후에 갈 곳으로 설정하여 대중을 교화하며 신앙의 영역을 넓히는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다. 더하여 산자의 모습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론으로 볼 수 있듯이 현재반복형 윤회론을 주장한다. 이에 부활의 주관자로서 천주교에 교황은 수천 년 동안 절대 권위를 누리고 있다.
인간에 정신리의 질과 양은 각기 다르므로 교화의 방편이 필요한 경우가 있고 없는 경우가 있다. 上智에겐 윤회가 방편으로 보이지만 中智에겐 반신반의로, 下智에겐 절대로 보인다. 상지에겐 물질의 순환을 통한 절대적 윤회가 보이지만 중지 이하의 정신리에겐 상대적 윤회만 보일 뿐이다. 하지는 수동적 인식을 하기 때문에 교화에 방편을 이용할 수 있지만 중지는 수동적 인식과 함께 능동적 인식력이 있으므로 방편을 이용하되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나면 상지 버금가는 수준에까지 상승할 수 있다. 등용문 아래 운집한 물고기처럼 중지가 무르익어 상지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中之上에 단계가 지혜 수련에 가장 환희로울 때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때이다. 정곡을 똑바로 단숨에 뚫어야지 회의에 머뭇대다간 낙상하여 세찬 물살에 쓸려 떠내려가 자갈 틈에 뼈가 끼일 뿐이다. 인간 세상에서 상지는 극히 드물고, 중지는 많되 등용문을 뚫고 오르는 出中登上智 역시 드물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 90% 이상인 보통사람들과 지식인들을 위해선 극락 또는 천당과 지옥, 윤회와 부활 같은 종교적 방편이 필요하다.
한편, 방편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만든 상지들은 정신적 오만에 빠지기 쉽다. 그 오만이 넘치면 대중들에 대한 정신적 지배를 획책한다. 그러한 현상이 종교나 학문에서 개산조나 종장에 대한 우상 숭배로 나타난다. 물론 당사자가 생전에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사후에 결과적으로 정신적 지배자로 된 것은, 개산조나 종장이 상지는 상지이되 덜 익은 상지란 증좌이다. 우상 숭배를 기도하는 자들은 中智上 급에 있다. 자력으로 상지로 등룡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스승이나 선배의 힘을 이용하여 호가호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윤회가 방편이면 불교도 방편이다. 불교가 방편이면 기독교나 여타 종교도 방편이다. 일정한 경지에 오른 상지는 자족자만과 이타행의 두 가지 경향을 나타낸다. 자족자만형 상지는 일체오불관언, 자기만의 세계에 정좌하여 스스로 만든 생생지리의 희락에 깊이 젖는다. 이타형 상지는 타인에 대한 설득과 세인들의 반향을 듣고 보며 자기의 깨달음을 검증한다.
불교 개념으로 전자는 소승이고 후자는 대승이다. 소승의 자각은 좁으나 깊으며 대승의 자각은 넓으나 얕다. 이 둘이 병행한다면 맞춤이지만, 석가모니와 같은 최상급의 상지가 아니면 병행이 어렵다. 그래서 더 높은 등급의 상지가 되려면 종교적 깊이를 계속 추구하는 소승이 되어야 한다. 대승이 듣기 좋은 말인 중생구제와 청정불국토를 강조하다보면 결국 귀족불교를 거쳐 호국불교에 귀착한다. 자각 후 보리행이라는 좋은 목표를 내세우지만 대승 개념 자체가 비만으로 중심을 잃어버리는 논리적 편협성을 갖는다. 살생유택과 같은 타협이 나오고 외침을 당하면 승병 동원령이 나온다. 어떤 형태로든 세상 밖에 사람들이 세상 안을 염려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깊이 침잠할수록 상지상에 이를 수 있고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나설수록 중지상에서 중지중으로 자꾸 내려간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종교인의 타락과 종교의 세속화는 중지중에서 하지상으로 급격히 하강하는 현상이다.
상지에겐 종교가 불필요하다. 그 자신이 종교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속성은 믿음, 즉 정신적 의지인데, 우주신 개념에 익숙한 상지는 기존에 종교의 본질을 통찰하고 정신적 독립을 뚜렷하게 이룬다. 그러면서도 중생을 위한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홀로 헤엄을 치지 못하는 중생들이 피안에 상지로 가기 위해선 배를 이용하는 방편밖에 없다.
종교에서 이용되는 대표적인 방편은 창조설과 윤회설, 천당지옥설과 부활설이다. 이러한 것들은 봉건시대엔 통용될 수 있는 수준의 논리였지만 현대엔 맞지 않다. 즉 유통기한이 지난 방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종교들이 기존에 방편설을 답습함으로서 날이 갈수록 종교가 외형은 거대해지고 내실은 초라해지고 있다. 종교 지도자들은 설법이나 설교를 할 때만 승려나 목사, 신부가 되고 마치면 기업주가 되며, 신자들은 사찰이나 교회에 있을 때만 경건한 신자가 되었다가 대문을 벗어나면 속인이 된다.
그래도 방편은 필요하다. 만인이 상지가 될 수 없으므로 상지 가까이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방편은, 선행에 대한 인과응보로서의 윤회나 천당지옥 같은 사후 심판설을 제시할 게 아니라 현대인의 논리적 사고력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선과 악의 개념 구분과 그것들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면밀한 검토, 물질구조와 정신구조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그 둘이 만나 이루는 현상에 대한 입체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생명의 한살이에 대한 통찰력을 향상하는 것이 바로 현대적 방편이다. 과거의 방편이 배로 실어 나르는 형태였다면 현대의 방편은 인간 개체 하나하나가 사유의 강을 헤엄쳐 건너갈 수 있는 의지와 힘을 스스로 기르는 형태여야 한다. 그것은 종교나 학문, 사상과 철학 같은 좁은 영역에서 소수에 의한 전습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대중에 의해 개방된 지식과 정보의 바다에서 자기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허무를 통찰하려는 정신의 한 극을 순수하게 보존하면서도 정신의 다른 극들은 사회를 향해 활짝 열려있는 인간은 언젠가 상지가 될 수 있다. 그러면 가공한 人神이 아니라 본연에 物神 또는 宇宙神이 보인다.
2014년 10월 14일 안동 說樂然齋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