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태선 칼럼
나는 내 형과 가까웠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한 말이 아니다. 나는 형과 유달리 친했다. 돈이 우리를 갈라 놓기 전까지 우리는 그야말로 형제 이상의 관계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의 alter ego였다. 그래서 형의 친구는 내 친구와 같았고, 내 친구도 형의 친구처럼 되었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같이 했다. 내가 너무 어려서 야구방망이를 휘두르지 못했을 때도 우리는 야구를 함께 했다. 힘이 약한 나를 위해 형은 바짝 마른 플라타너스 가지로 야구방망이를 만들어서 그것으로 공을 칠 수 있게 해주었다.
형은 공부를 잘했다. 형 때는 전국에서 동시에 치르는 일종의 학력테스트가 있었는데 형은 그 시험에서 전국 1등을 맡아 놓았다. 우리가 살고 있었던 영등포에서 최초로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그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13년 전에 큰누나가 경기여중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는 늘 공부 잘하는 자녀를 둔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우리 형제들이 다니는 학교의 육성회장이 되셨다. 형의 친구는 모두 내 친구였기에 경기중학교를 다니는 형 친구들도 내 친구처럼 되었다. 대학을 들어간 이후는 형 친구들과 더욱 가까이 지냈다. 나는 형 친구들의 모임의 명예회원이었다. 그렇게 나는 경기 출신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고, 내가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는 내가 경기 출신이 아님에도 어디에나 있었던 경기 라인이 내 뒷배가 되었다.
경기를 나오지 않고 경기 출신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나는 경기 출신 사람들의 일생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기업의 간부나 임원, 대학의 교수나 학장 혹은 의사나 병원장과 같은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되었다. 형 친구가 병원장으로 있는 곳을 가면 우리는 초특급 대우를 받는 환자가 되었고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대기업에서도 그런 특별대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경기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더 객관적으로 그들을 관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과 함께 했고, 엘리트들이 가지는 한계를 충분히 보고 경험할 수 있었다.
엘리트들에게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병우가 자신보다 늦게 사시에 합격한 선배들에게 반말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 그것은 엘리트들의 전형적인 행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경기를 나오고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거나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부분 그런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대학(거의 대부분 서울대)에 진학한 사람들보다 더 우수하거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과 달리 세상을 비뚜러지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었다. 한 마디로 자신 외에 모든 것이 못마땅한 사람이 되었다.
엘리트들에게 길이 두 개 있는 셈이다. 경기는 아니지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사시를 패스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내가 입사했던 대기업의 총무부장이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사고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서울대 법대 출신이었다. 그는 비뚤어진 사고를 지닌 엘리트였던 것이다.
세상을 유지하는 두 기둥이 있다. 하나는 엘리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주의이다. 이 둘은 자유와 평등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지지하지 못한다. 두 기둥으로는 설 수 없다. 쓰러지는 세상을 떠받치는 것은 희생양이다. 그래서 인류 모든 문명은 희생의 체제가 된다. 엘리트주의와 개인주의가 강화될수록 세상은 더 많은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작금의 우리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경기 출신 가운데 정말 유일하게 엘리트의 길을 걷지 않은 사람이 꼭 한 사람 있다. 이런 내 생각이 단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충분히 많은 실험 집단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 한 사람이 반갑다. 아니 반가운 것이 아니라 경이롭다. 내가 발견한 그 단 한 사람이 바로 김민기 형이다. 나는 그분이 경기고 미술반장이었을 때 그분을 처음 알았다(들었다). 이후로도 그분의 소식을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접할 수 있었고 그분의 노래들이 모두 내 레퍼토리가 되었지만 그 노래들에 담긴 의미들이나 그분의 삶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었다. 내가 그분의 삶의 의미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목사로서 패가망신이라는 재기할 수 없는 실패를 경험하고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것은 내가 복음을 알게 된 이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서소문에 범진사라고 있었어. 보안사 취조실. 들어가니까 하사관들이 딱 들고 오는 게 사각형 각목이었는데 걔네는 베테랑들이지. (패는 시늉) 다다다닥.... 그때 아, 내가 죽는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어. 한참 맞다 보니까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패는 놈들 모습이 슬로우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나 죽는 거, 아픈 거는 감각이 멀어지고. 근데 걔네들한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구.”
“미안했다고?”
“한없이 미안해지는 게,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
“그게, 몇 살 때인가?”
“스물서너 살? 그러고 풀려났는데 그때 한참 해방신학이 뜰 때였지. 누가 그러대.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는 총으로 쏴서 죽여야 된다’고 했다고. 근데 나는, 죽어 가면서 나를 고문한 놈들한테 미안하고 죄송했다고 했어. 그래서 본회퍼 식의 해방신학은 아닌 것 같다 그랬지. 나중에 운동권 애들한테도 그랬어.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아 간다.’ 나중에 보니까 박정희 무지하게 미워하던 놈들이 박정희 비슷하게 되더라고. 내 참, 별 얘기까지 다 하네.(웃음)”('한겨레와의 대담'에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재인용)
그분의 이야기다. 이 내용을 기사에서 읽으면서 지금의 내 신앙의 수준이 그분이 스물서너 살 때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그분의 삶의 의미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큰 은혜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엘리트들이 갈 수 있는 또 다른 세 번째 길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분이 말하는 ‘뒷것’의 길이다. 이 발견은 다시 한 번 내게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이며, 그 하느님 나라의 완전함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그분이 신앙을 언급한 적은 없지만 그분은 자기 삶으로 이 말씀을 보여주었다. 목사로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사신 그분이 고맙다. 정말 고맙다. 새삼 그분이 다시 존경스러워진다. 그분이 전문적인 종교인(신부와 목사와 같은)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고맙다.
하느님 나라는 엘리트들도 들어갈 수 있는 나라다. 그러나 김민기 형처럼 ‘뒷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가 처절한 실패와 오랜 가난 속에서 깨달은 그리스도교 지도자가 가야할 길과 정확히 일치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 나라가 실종된 이유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엘리트를 추구하는 ‘앞것’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뒷것’이 되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앞것’으로 세울 때 이 땅 위에도 하느님 나라가 임하고 하느님의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구원이 임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실감나게 상상할 수 있게 해주신 김민기 형의 영전에 감사한 내 마음 한 조각을 올려본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저작권자 © 가톨릭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