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기11:1-9
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어느 날 평탄하던 욥의 삶에 무시무시한 재앙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는 한순간에 가축과 자녀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건강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부재 속에 자신에게 발생한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또한 이 고통이 도대체 언제 끝날 것인지... 끝이 있기는 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 그를 깊은 절망의 늪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이런 욥의 소식을 들은 그의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욥을 마주하게 되자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욥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의 친구들은 저마다 자신이 지닌 경험과 신념, 신앙 체계를 바탕으로 욥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죄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죄 없이 이런 결과가 발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의 말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고통을 당할만한 일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과 친구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고, 결국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정죄하고, 비난하고, 협박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고통 가운데 있던 욥은 자신의 고통을 마주하고 하나님께 호소했을 뿐입니다. “하나님! 왜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인 인간을 지켜 주지 않으시고 이렇듯 갑작스럽게 원인을 알 수 없는 까닭 없는 고통 가운데로 몰아 넣으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라고 항변한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인간이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에게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욥의 항변조차 불경건으로 취급합니다. 그리고 까닭 없는 재앙은 없다는 인과응보 사상으로 욥을 평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욥의 세 번째 친구 소발이 등장합니다. 소발도 앞선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욥의 변론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1절에서 3절입니다.
욥의 결백에 대한 소발의 질책(1-6)
(1-3)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소발은 욥에게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욥의 말에 대해 평가 절하하며 그의 말을 막아 버립니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 왔으나 위로라는 명목하에 논쟁과 비난, 모욕을 일삼고 있는 상황입니다.
소발은 욥을 말 많은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수다스럽다”라는 의미입니다. 수다스러운 사람은 의롭지 못하며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소발은 흥분한 상태로 지금 욥을 앞에 세워 두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소발이 흥분한 것은 욥기 10장에 기록된 욥의 말들 때문이었습니다. 욥기 10장에서 욥은 까닭 없는 고통 가운데 자신이 무슨 이유로 고통받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고난의 성격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설명을 요청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은 이런 무서운 고통을 당할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발은 욥의 이 호소가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 앞에 토해 내는 말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믿고 있는 경험과 신념, 인과응보라는 종교적 교리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욥을 비난합니다. 그리고 그의 비난은 점점 더 거세집니다. 3절의 ‘네 자랑하는 말’에서의 ‘자랑’이라는 말 안에는 ‘거짓말’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거짓말하는 점쟁이나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를 묘사할 때 주로 사용한 말입니다. 지금 소발이 욥에게 “너는 거짓말쟁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발이 지닌 경험과 신념, 인과응보라는 종교적 교리의 틀 안에서 보면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분명 그의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욥은 이런 고난당 할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며 결백을 주장합니다.
소발의 인식 체계 안에서 욥의 주장은 수용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논리 안에 갇혀 계신 분으로 인식했기에 그저 욥이 거짓말하고 있다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발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인과응보의 원리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그리고 편협한 이해를 가지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4절에서 6절입니다.
(4-6)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그릇된 인식에 갇힌 소발의 비난은 점점 강해집니다. 비난을 넘어 분노하고 있습니다. 처참한 고통 중에 있는데 욥의 모습이 소발의 눈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오직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욥을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욥을 몰아붙이다 못해 이제 하나님께서 욥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직접 말씀해 주시기까지 바랍니다. 하나님 지혜의 오묘함과 지식의 광대하심을 통해 욥의 숨겨진 죄가 드러나게 되길 바란 것입니다.
소발은 욥이 광대하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얕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기때문에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결백만을 주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해서는 안 될 무서운 말까지 내뱉게 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하여 주셨음을 알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욥의 죄에 대해 모두 징계하신 것이 아니라 죄의 일부만 징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욥기 11장 6절 새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너는, 하나님이 네게 내리시는 벌이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욥! 너는 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지은 죄보다 적은 고난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회개해라”라는 말입니다. 소발은 욥에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결백만 주장한다면 더 큰 고난도 당할 수 있다는 식의 협박까지 일삼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나 고통 중에 있는 친구 욥을 향한 소발의 말이 참으로 잔인하기만 합니다. 7절에서 9절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 인식에 대한 한계(7-9)
(7-9)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욥을 강하게 질타하던 소발은 이제 전능자 하나님에 대한 능력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지닌 욥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 안에는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욥! 너의 고난을 통해 너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동시에 “지금이라도 너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회개하면 평안으로 이끌어 주실 거야!”라는 의미입니다.
죄 없이 억울한 일 당한다고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능자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징계로 고난을 주신 것이니 어리석은 자와 같이 말 많이 하면서 항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짧은 인간의 생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이러니저러니 하지 말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서 짧은 인간의 생각으로 이러니저러니 하지 말라는 소발의 말도 영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욥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이 짧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욥의 항변과 탄식은 견딜 수 없는 고난 중에 터져 나온 절박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종교적 경건이라는 내용으로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도 욥의 절박한 부르짖음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소발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과 신념, 인과응보의 틀 안에 갇혀 있는 분으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말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틀 안에 갇혀 계신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틀 안에 갇힌 분으로 전락시키고, 고통 중에 있는 친구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게 된 것입니다. 소발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했더라면, 또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의 심정을 헤아렸더라면, 그는 고통 가운데 있는 친구에게 비난과 협박을 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상한 마음과 육체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성경에 소발의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소발의 이러한 모습이 비단 그의 모습만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역시 주변인들의 고통과 고난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편견, 우리의 제한적인 신앙적 경험을 들이대며 고통의 문제에 접근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인식과 경험 안에서 모든 원인과 결과를 찾아낼 수 없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기 위해 하나님을 향한 창문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혹시 지금 까닭 없는 고통의 시기를 보내는 교우님들이 계신다면 우리를 향해 창문을 열어 두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고통스러운 마음 하나님께 토로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또한 힘겹게 고통의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이웃들이 있다면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현장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 회복이 있기를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알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있는 이웃에게 진심 어린 공감과 위로를 나누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소발이 고통 가운데 있는 그의 친구 욥을 위로하기 위해 왔다가 위로는커녕 비난과 협박을 통해 욥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의 경험과 인과응보라는 틀 안에 가두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는 일에 힘쓰게 하시고 이 땅에 오신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보게 하옵소서.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하여 비난과 협박을 일삼는 행위를 멈추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잇대어 절망과 고통의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소발이 욥을 비난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편협한 자기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경험 또는 신앙 체계에서 하나님을 가둬 두고 있는 지점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생각해 봅시다.
3. 자신의 신앙과 경험을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한 적은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4. 예수님께서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생각해 보고, 우리의 생활 속에 적용해 봅시다.
(작성: 정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