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칙 덕산협복(德山挾複) - 덕산스님이 바랑을 멘 채로
“거친 집 지어놓고 부처 꾸짖고 조사 욕하며 지낼게야”
송강스님
➲ 본칙원문
擧 德山到潙山挾複子於法堂上
從東過西從西過東 顧視云無無 便出 (雪竇着語云勘破了也)
➲ 본칙
덕산스님이 위산스님 계신 곳에 이르러 바랑을 멘 채로 법당에 올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갔다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더니 둘러보고는
“없다 없어”라 말하고는 곧바로 나가버렸다. (설두스님이 “점검이 끝났다”고 촌평하였다.)
➲ 강설
덕산스님은 용담선사를 만나 깨달은 선사다.
이미 율장의 도덕성이나 경전의 체계적인 이론이라는 것도
절대의 세계에서는 부질없음을 처절하게 체험한 뒤인지라,
덕산스님은 그런 것들을 완전 무시하고 칼을 뽑아들었다.
훗날 설두스님이 이 대목에 촌평을 붙이기를 “간파해 버렸다”고 하였다.
누가 누구를 간파했으며, 무엇을 간파했다는 말인가?
설두스님은 친절을 베풀었다지만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다.
➲ 본칙원문
德山至門首 却云也不得草草 便具威儀再入相見 潙山坐次
德山提起坐具云和尙 潙山擬取拂子 德山便喝 拂袖而出
(雪竇着語云勘破了也) 德山背却法堂着草鞋便行
➲ 본칙
덕산스님이 산문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는 “이렇게 대충 끝낼 일은 아니지” 하고는,
곧바로 예법에 맞게 몸가짐을 갖추어 다시 법당에 들어가 위산스님을 만났다.
위산선사께서 자리에 앉아 계셨는데
덕산스님이 좌구(坐具)를 들고는 “스님!” 하고 부르니
위산선사께서 불자(拂子)를 들려고 하였다.
덕산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고는 소매를 떨치고는 나가 버렸다.
(설두스님이 “점검이 끝났다”고 촌평하였다.)
덕산스님이 법당을 뒤로하고 짚신을 신고는 휑하니 가버렸다.
➲ 강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문까지 나온 덕산스님이 스스로도 명쾌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고도 그냥 가버렸다면 어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나?
스스로 되짚어보고는 “이렇게 대충 끝낼 일은 아니지”라고 할 줄도 알았다.
그리고는 예법을 갖춰 다시 위산선사 앞에 섰다.
덕산스님이 절할 때 사용하는 좌구를 손에 들고는 “스님!” 하고 불렀다.
그러자 위산선사께서 바로 불자를 집어 들려고 했다.
그 순간 덕산스님이 꽥 고함을 지르고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 소매를 떨치고는 일어나 나가 버렸다.
참 번갯불 같다. 천하의 위산선사가 아니었다면 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위산선사이니, 덕산스님이 멈칫거릴 여유가 없었으리라.
훗날 설두스님이 이 대목에 또 촌평을 붙이기를 “간파해 버렸다”고 하였다.
이 노인네가 다시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이게 설두스님께서 친절을 베푸는 방법이니 어쩌랴.
자! 이번엔 누가 누구를 간파한 것일까?
의심 많은 사람들은 친절하게 대해줘도 혼란스러워 한다.
위산선사 앞에서 이럴 수 있었다니, 참 대단한 덕산스님이다.
그러나 조금 늦출 줄을 알았다면, 좀 다른 노랫가락이 있었지 않았겠는가.
뉘라서 이 폭풍을 멈추게 할까?
뉘라서 이 폭풍을 멈추게 할까?
➲ 본칙원문
潙山至晩問首座 適來新到在什麽處
首座云當時背却法堂着草鞋出去也 潙山云此子已後向孤峰頂上
盤結草庵呵佛罵祖去在 (雪竇着語云雪上加霜)
➲ 본칙
위산선사께서 밤이 되자 수좌(首座)에게 물었다.
“아까 새로 온 친구 어느 곳에 있는가?” 수좌 스님이 말씀드렸다.
“그때 법당을 나와 짚신을 신고는 떠났습니다.”
위산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훗날 외로운 봉우리 꼭대기에 가서 초암을 짓고는,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며 지낼 걸세.” (설두스님이 “눈 위에 서리를 더하는군!” 하고 촌평하였다.)
➲ 강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순식간에 지나친 만남이었으나,
위산선사는 덕산스님의 모든 것을 다 보셨다.
그래서 밤이 되자 슬며시 그 문제를 다시 제시하셨다.
선사께서 선원의 책임자인 수좌 스님에게 물었다.
“아까 왔던 그 친구 어디 있는가?”
“낮에 법당에서 나갔을 때 짚신 꿰차고 떠났습니다.”
떠나버렸다고? 먼지가 나지 않을 때까지 짚신으로 맞아야 할 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위산선사는 이 수좌를 그냥 두었다. 그릇이 아니었던가?
그리고는 수좌가 떠나버렸다고 했던 덕산스님을 다시 앞에 세워 제자들에게 보여준다.
“이 친구는 어느 누구 앞에서도 낮출 친구가 아니지.
그래서 외롭고 외롭게 저 상상봉 꼭대기로 갈 걸세.
제가 좋아하는 거친 집을 지어놓고 지내면서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며 지낼게야.”
그러니 덕산방(德山捧)이라는 가풍(家風)이 나올 수밖에.
그의 앞에서는 경전도 조사어록도 들이대지 말 것. 바로 몽둥이찜질을 당하게 될 터이니.
그런데 이 위산 노장님이 왜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 것인가?
훗날 설두스님이 이 대목에 또 촌평을 붙이기를 “눈 위에 서리를 더하였다”고 하였다.
알았다면 코가 비뚤어지게 자도 좋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눈 쌓인 밤중에 서리 내리길 지켜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 송 원문
一勘破二勘破 雪上加霜曾嶮墮 飛騎將軍入虜庭
再得完全能幾箇 急走過不放過 孤峰頂上草裏坐 咄
➲ 송
한 번 간파하고 두 번 간파한 일이여!
➲ 강설
덕산스님이 휩쓸고 위산선사 묵연함을 두고 설두스님은 ‘간파했다’고 말씀하셨지.
덕산스님이 “스님!” 부르니 위산선사께서 불자를 들려 하시매
다시 덕산스님 꽥 고함치고는 나가버리자, 또 설두스님은 ‘간파했다’고 말씀하셨네.
이 노장님이 그만하면 되었으련만 아직도 노파심으로 게송에까지 끌고 와 버렸다.
마치 코브라를 자유자재 다루는 이와 같으니, 과연 설두 영감님이시다.
자칫 흉내 내다가는 코브라에 물려 죽는다.
➲ 송
눈 위에 서리를 더함이라, 위험할 뻔 했다.
➲ 강설
시퍼런 칼날 앞에 엎드려도 보았고 누워도 보았다.
그러고도 목이 멀쩡하다니. 두 늙은이 칼 다루는 솜씨가 어지간하지 않은가.
➲ 송
비기장군이 포로로 적진에 떨어졌듯,
➲ 강설
흉노족이 철천지원수처럼 여기는 비기장군이리니,
적진 깊이 죽음의 문턱에 저승사자와 함께 있던 그 모습을 보았는가?
스스로 적진 깊이 들어가는 덕산스님의 저 용기는
그 누구도 따라 하기 쉽지가 않고말고. 위태롭기 그지없다.
➲ 송
다시 완전하게 탈출하는 것이 몇 사람이나 가능하랴.
➲ 강설
그러나 뉘 알았으랴, 적의 말을 뺏어 타고 적의 활로 적을 물리치는 저 빛나는 솜씨여!
그렇기는 하지만, 설두스님이 비기장군을 끌고 온 것은 참 부질없는 일이었다.
덕산스님은 처음부터 포로가 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으니.
➲ 송
급히 달아나 버리고, 놓아 보내지 않음이여!
➲ 강설
솜씨 좋은 덕산스님, 빈틈을 보이지 않고 위산선사의 그물을 벗어나는구나. 좋아하시네.
그렇게 만만하게 볼 늙은이가 절대 아니지. 위산선사의 모양 없는 그물은 그 끝을 알 수 없다네.
➲ 송
외로운 봉우리 꼭대기 풀 속에 앉았도다.
➲ 강설
참 설상가상이지. 암, 설상가상이고말고.
위산 노인네가 어쩌자고 고봉정상 어쩌고저쩌고 한다는 말인가.
기어코 당신마저 풀 속으로 들어갈 것까지야.
➲ 송
쯧쯧!
➲ 강설
설두스님은 지금 누구를 보고 혀를 차는가?
덕산스님인가, 위산선사인가, 설두 자신인가,
검은 소리 흰소리 하고 있는 송강인가?
아니면 누런 이빨 드러내고 웃는 놈인가?
[불교신문3673호/2021년7월6일자]
송강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