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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의 덧칠
비유는 일상적 언어 규범에서 일탈해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언어 용법이다. 은유 · 직유 · 제유 · 환유의 뒷글자인 ‘유喩’는 “말하다”는 뜻의 ‘구口’와 “옮기다”는 뜻을 가진 '유兪'의 결합이다. 즉 비유란 말의 원래 뜻을 옮겨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개나리꽃은 노랗다’는 일상 언어를 ‘개나리꽃은 병아리 부리다’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바꿔보자. 이 ‘병아리 부리’속에는 노란 색깔 이외에도 개나리꽃의 모양, 꽃잎의 연약함, 봄의 이미지 등이 첨가된다. ‘노랗다’는 일상 언어의 평이함이 전면 확장되어 의미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산비탈 가시덤불 속에 찔레 열매가 빨갛게 익어 있다
잡풀 우거진 가시덤불 속에 맺혀 있어서일까?
빛깔은 더 붉고 핏방울 돋듯 선명해 보인다
겨울 아침, 허공의 가지 끝에 매달린 까치밥처럼 눈에 선연해
눈이라도 내리면, 그 빛깔은 더욱 고혹적일 것이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담장의 철조망처럼 얽혀 있는 찔레 덤불 속
손가락 하나 파고들 틈이 없을 것 같은 가시들 속에서
추위에 젖은 손들이 얹히는 대합실의 무쇠난로처럼 익고 있는 것은
아마 날개를 가진 새들을 위한 단장일 터
마치磨齒의 입이 아닌, 부드러운 혀의 부리를 가진 새들을 기다리는 화장일 터
공중을 나는, 그 새들의 눈에 가장 잘 띄일 수 있도록
그 날개를 가진 새들만 다가올 수 있도록
열매의 채색彩色을 운영해왔을 열매
영실營實이라는 이름의 열매
새의 날개가 유목의 천막인 열매
새의 깃털 속이 꿈의 들것인 열매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했을까, 그 유목의 천막에 드는 일
새의 복부腹部 속에 드는 일
남의 눈에는 영어囹圄 같겠지만, 전락 같겠지만
누구의 배고픔 속에 깃들었다가 새롭게 싹을 얻는 일, 뿌리를 얻는 일
그렇게 새의 먹이가 되어, 뱃속에서 살은 다 내어주고 오직 단단한 씨 하나만 남겨
다시 한 생을 얻는 일, 그 천로역정을 위해
산비탈의 가시덤불 속에서 찔레 열매가 빨갛게 타고 있다
대합실의 무쇠난로처럼 뜨겁게, 뜨겁게 익고 있다
-김신용, 「영실」 전문¹⁰¹
이 시는 가시덤불 속 찔레 열매를 직유와 은유 등의 비유를 활용해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먼저 찔레 덤불 속의 붉은 열매를 대합실의 무쇠난로처럼 익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 붉은 빛깔은 새들의 눈에 잘 띄기 위한 단장이요 화장이다. 보통 사람들은 열매가 새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감옥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생의 전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인은 ‘새의 날개가 유목의 천막인 열매/새의 깃털 속이 꿈의 들것인 열매’라고 비유함으로써 찔레 열매를 일거에 새로운 의미의 주체로 전환시킨다.
여러 가지 비유 중에 은유는 차별성 속에서 동일성을 찾는 수사법 중의 하나다. 옥타비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시는 대립적인 것들의 역동적이고 필연적인 공존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최종적인 동일성을 선언한다”고 말했다.¹⁰² 누가 뭐래도 시는 은유의 덩어리다. 은유적 표현을 한정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시라는 양식이 은유에 기대어 태어났고 성장하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때로 은유의 폐해를 지적하는 연구도 우리의 흥미를 끌어당긴다. 구모룡의 『제유의 시학』에 따르면 근대적 개념인 세계의 자아화나 동일성으로만 시를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서정이라는 것이 근대의 산물인 자아중심주의의 발현이라는 생각에 회의를 품는다. 은유는 다른 대상을 자기화하는 수사학이어서 대상과 대상을 강제적으로 연결한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하는 논리이다. 이러한 은유적 욕망이 근대에 와서 주체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를 낳았다는 진단이다. 이처럼 타자에게 폭력적인 은유에 대한 대안으로 유기론을 바탕으로 하는 제유 시학의 가능성을 제시하기에 이른다.¹⁰³
나도 땅을 가지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민병하 선생님도
수원 근처에 오천 평이나 가졌는데……
싼 땅이라도 좋으니
한 평이라도 땅을 가지고 싶다.
땅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좋으랴……
땅을 가지고 싶지만,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땅을 가지고 있으면,
초목을 가꾸고,
꽃을 심겠다.
-천상병, 「땅」 전문¹⁰⁴
시인은 가진 땅이 한 평도 없어 ‘나도 땅을 가지고 싶다’고 직설적으로 욕망을 드러낸다. 땅을 가지기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소유욕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라 할 만하다. 어떤 이들은 도대체 이런 게 무슨 시인가, 되묻고 싶을 것이다. 이 시에는 시적인 비유도 없고 시적인 발견도 없다고, 이런 시라면 하룻밤에도 수십 편을 쓰겠다고 투덜댈지도 모르겠다. 천상병이라는 유명한 시인이 쓴 것이니까 좋은 시라고 추켜세우는 게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땅을 소유하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은 초목을 가꾸고 꽃을 심겠다는 아주 작지만 근원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땅을 가진 뒤에 땅값이 오르기를 기다리거나 거기에 부동산을 짓겠다는 투기 욕망 따위는 일절 없다. 오히려 그런 심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시인은 그저 초목과 꽃을 심겠다고 한다(그러다 보면 땅값이 오르겠지, 하고 의심한다면 당신은 정말 속물이다). 이러한 단순성의 미학이 천상병이라는 시인을 만들었다.
이 시에서 무욕의 욕망을 읽고 은유 아닌 은유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은유의 성채 입구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러니 시를 쓰기 위해 책을 뒤져 억지로 은유를 배우지 마라. 은유를 잘못 배우면 말을 요리조리 비틀고 무슨 문장이든 꾸미려 하고 교묘하게 꼬는 일이 시의 전부인 줄 알게 된다. 말을 비틀고 교묘한 표현을 일삼는 이들에 대한 비판에 일찍이 허균도 가세했다. 그는 문장과 도리가 둘로 쪼개져 어렵고 교묘한 말로 글을 꾸미는 일을 개탄하면서 그것이야말로 ‘문장의 재앙’이라고 했다.¹⁰⁵ 나는 그것을 ‘비유의 덧칠’ 이라고 부른다. 비유를 덧칠하지 않고 단순한 상상력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저녁에 술 마시러 나갈 때 천상병의 이런 시 구절을 흥얼거릴지도 모른다.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주막에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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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김신용, 『도장골 시편』 천년의 시작, 2007, 72~73쪽.
102 옥타비오 파스, 앞의 책, 133쪽.
103 구모룡, 『제유의 시학』, 좋은날, 2000, 35~42쪽.
104 천상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미래사, 1991, 61쪽.
105 고전연구회 사암 엮음,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 포럼, 2007, 123쪽,
-안도현의 시작법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중에서
2025. 2. 28
맹태영 옮겨 적음